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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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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궁은 전한 시대의 제후왕으로, 강도역왕 유건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원시 2년(2년)에 왕망에 의해 강도역왕의 후사로 광세나라에 봉해졌으나, 신나라 건국 후 작위가 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 작위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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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궁

2. 생애

유궁의 가계에 대해서는 《한서》 내 기록이 상이하여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1][2][3] 평제 치세인 원시 2년(2년), 왕망이 단절된 제후왕의 후사를 잇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강도역왕의 후손인 유궁이 광세왕(廣世王)으로 봉해졌다.[1][2][3][4] 이는 강도역왕의 후사가 끊긴 지 121년 만의 일이었다.

광세왕이 된 지 5년째인 6년, 왕망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 제후왕들의 작위를 일괄적으로 공(公)으로 낮추었다. 이에 따라 유궁도 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그 작위마저 박탈당했다.[2][5]

2. 1. 전한 시기

평제 치세인 원시 2년(2년), 왕망이 단절된 제후왕의 후사를 잇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강도역왕의 후손인 유궁이 광세왕(廣世王)으로 봉해졌다.[1][2][3][4] 이는 강도역왕의 후사가 끊긴 지 121년 만의 일이었다. 유궁의 가계에 대해서는 《한서》 내 기록이 달라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1][2][3]

광세왕이 된 지 5년째인 6년, 왕망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 제후왕들의 작위를 일괄적으로 공(公)으로 낮추었다. 이에 따라 유궁도 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그 작위마저 박탈당했다.[2][5]

2. 1. 1. 가계와 혈통

한서》의 기록에 따라 유궁의 가계는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다. 평제기에는 유궁이 광세왕이 될 무렵 우이후(雩貽侯)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1] 제후왕표에는 우이후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2] 또한 왕자후표에서는 강도역왕의 아들인 우이후 유몽지(劉蒙之)가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박탈당했다고 하여[3] 정확한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평제 통치 시기인 서기 2년(원시 2년), 왕망은 기존에 후사가 끊긴 제후왕의 후손들을 다시 봉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강도역왕의 후사가 단절된 지 121년 만에 유궁이 강도역왕의 후사를 잇는 자격으로 광세나라 왕에 봉해졌다.[1][2][3][4]

광세왕이 된 지 5년째인 서기 6년, 왕망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의 제후왕들은 일괄적으로 공(公)으로 작위가 강등되었다. 유궁 역시 공으로 폄작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그 작위마저 잃게 되었다.[2][5]

2. 1. 2. 광세왕 즉위

유궁이 광세왕이 될 당시의 신분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한서》 평제기에는 우이후(盱眙侯)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제후왕표에는 우이후의 아들이라고 하며, 왕자후표에서는 강도역왕(江都易王)의 아들인 우이후 유몽지(劉蒙之)는 작위를 잇지 못하고 박탈당했다고 하여 정황이 모호하다.[1][2][3][4]

평제 재위 시기인 원시 2년(2년), 왕망은 기존에 단절되었던 제후왕의 후손들을 다시 세우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강도역왕의 후사가 끊어진 지 121년 만에 유궁이 그 후사를 잇게 되어 광세나라(廣世-) 왕으로 봉해졌다.[1][2][3][4]

2. 2. 신나라 시기

서기 6년, 왕망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2][5] 이로 인해 전한의 제후왕이었던 유궁의 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2][5]

2. 2. 1. 작위 박탈

광세왕으로 지낸 지 5년째인 서기 6년, 왕망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황제에 올랐다.[2][5] 왕망은 전한 제후왕들의 작위를 일괄적으로 공으로 낮추었고, 이에 따라 유궁 역시 광세왕에서 광세공으로 폄작되었다.[2][5]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7년에는 작위를 완전히 잃었다.[2][5]

참조

[1] 서적 한서 권12 평제기제12
[2] 서적 한서 권14 제후왕표제2
[3] 서적 한서 권53 경십삼왕전제23
[4] 문서 광릉왕 봉해 (경십삼왕전)
[5] 문서 왕망의 전한 제후왕 작위 박탈 (시건국 원년)
[6] 문서 여나라 -> 제천나라 개명
[7] 문서 작위 추증, 봉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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