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돌고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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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리 돌고루키는 12세기 루스 지역의 정치인이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아들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을 다스리며 영토를 확장했고, 트베리,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키예프 대공 자리를 놓고 여러 차례 다퉜으며, 1155년 키예프를 다시 점령했지만 1157년에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현재 모스크바 시의 문장과 기념비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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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돌고루키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유리 돌고루키 |
로마자 표기 | Yury Dolgoruky |
러시아어 표기 |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Yury Vladimirovich) |
고대 동슬라브어 표기 | Гюрги Володи́мирович |
별칭 | '긴 팔' |
통치 정보 | |
직위 | 로스토프와 수즈달의 공 키예프 대공 |
로스토프와 수즈달 공 재위 | 1108년경 또는 1125년 – 1157년 |
이전 통치자 | 첫 번째 통치자 |
다음 통치자 |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
키예프 대공 (첫 번째) 재위 | 1149년 – 1151년 |
이전 통치자 | 이쟈슬라프 2세 |
다음 통치자 | 이쟈슬라프 2세 |
키예프 대공 (두 번째) 재위 | 1155년 – 1157년 |
이전 통치자 | 이쟈슬라프 3세 |
다음 통치자 | 이쟈슬라프 3세 |
개인 정보 | |
본명 |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Yuri Vladimirovich), 로스토프-수즈달의 유리 |
배우자 | 아유브 칸의 딸 헬레나 |
자녀 | 로스티슬라프 유리예비치 안드레이 1세 보골류프스키 글레프 키예프 미하일 블라디미르 다비드 유리예비치 프세볼로트 큰 둥지 |
왕조 | 모노마호비치 유리예비치 (창시자) |
아버지 |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
출생일 | 1099년 |
사망일 | 1157년 5월 15일 (57세) |
매장 장소 | 베레스토베의 구세주 교회 |
기타 | |
가문 | 류리크 가문 |
왕조 | 류리크 왕조 |
2. 생애
1121년, 유리 돌고루키는 자신의 영지를 로스토프에서 수즈달로 옮겨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을 세웠는데, 이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전신이 되었다. 그는 발트족 및 핀족 계열의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며 영토를 넓혔고, 트베리, 모스크바 등 수많은 도시와 크렘린을 건설하였다.[1]
1147년 모스크바에서 체르니히우 공 스뱌토슬라프 올리고비치와 만난 기록은 모스크바에 대한 최초의 언급으로, 이 해는 모스크바 건설 연도로 여겨진다. 1156년에는 모스크바에 목조 성벽과 해자를 쌓아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1]
이후 랴잔 공국을 굴복시킨 유리 돌고루키는 1149년 키예프를 점령하였지만, 1151년 이자슬라프 2세에게 쫓겨났다.[2] 1155년 키예프를 재점령하였으나, 1157년 급사하였다.[2]
2. 1. 출생과 초기 활동
유리 돌고루키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몇몇 연대기에서 그의 형인 뱌체슬라프 1세(1080년대 출생)가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이미 수염이 나 있었다"라고 말한 기록을 바탕으로 1099년에서 1101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108년, 유리 돌고루키는 아버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에 의해 북동 루스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처음에 로스토프를 수도로 삼았으나, 현지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1121년 수즈달로 수도를 옮겼다. 이 지역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유리는 영토 내에 많은 요새를 건설하여 사람들을 거주하게 했다. 1134년에는 크스냐틴, 1152년에는 페레스라블-잘레스키와 유리예프-폴리스키, 1154년에는 드미트로프를 건설했다. 트베리, 코스트로마, 볼로그다도 종종 그가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1147년, 유리 돌고루키는 체르니히우 공 스뱌토슬라프 올리고비치와 모스크바라는 곳에서 만났다. 이는 사료에 나타나는 모스크바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며, 이 해를 일반적으로 모스크바 건설 연도로 본다. 1156년, 유리는 모스크바에 나무로 된 성벽과 해자를 쌓아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2. 2. 영토 확장과 도시 건설
1121년, 유리는 자신의 영지를 로스토프에서 수즈달로 옮겼다. 이로써 그의 영지는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전신이 되었다. 유리 돌고루키는 발트족 및 핀족 계열의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며 영토를 넓혔다.유리 돌고루키는 여러 도시와 크렘린들을 건설하였다.
건설 연도 | 도시 |
---|---|
1134년 | 크스냐틴 |
1152년 | 페레슬라프-잘레스키, 유리예프-폴스키 |
1154년 | 드미트로프 |
트베리, 코스트로마, 볼로그다의 건설도 종종 그의 업적으로 여겨진다.[1]
1147년, 유리 돌고루키는 벨고로드 키예프스키의 군주였던 스뱌토슬라프 올고비치와 모스크바라는 곳에서 만났다. 이는 모스크바에 대한 최초의 사료상 언급이며, 이 해는 일반적으로 모스크바 건설 연도로 간주된다. 1156년, 유리는 모스크바에 목조 성벽과 해자를 쌓아 요새화했다.[1] 비록 그 정착지가 이전이나 이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돌고루키는 종종 "모스크바의 창시자"로 불린다.[1]
2. 3. 키예프 대공위 쟁탈전
1132년, 유리 돌고루키의 형이자 키예프 대공인 므스티슬라프 1세가 사망하자, 연대기는 "루스 땅이 분열되었다"고 전한다. 유리는 즉시 체르니히우 공국의 제후들에게 선전포고하고, 노브고로드에 자신의 아들을 즉위시키고, 남부 페레야슬라우(현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를 점령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주민들이 유리에게서 이탈하자, 그는 노브고로드의 주요 요새 도시인 토르조크를 점령하여 보복했다.1147년, 유리는 키예프를 향한 전투를 시작하여 2년 후인 1149년에 키예프를 점령했다.[2] 그러나 1151년에는 조카인 이자슬라프 2세에 의해 키예프에서 쫓겨났다.[2] 1155년에 유리는 다시 키예프를 손에 넣었지만,[2] 1157년에 급사하자 키예프에서는 반(反) 수즈달 봉기가 일어났다.[2] 키예프 시민들은 이자슬라프 3세를 대공으로 맞이했다. 유리의 무덤은 키예프에 있는 베레스토보의 구세주 성당에 마련되었지만, 그의 유해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2]
3.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출생 순) | 비고 |
---|---|---|
아에파 오세네브나 | 첫 번째 부인. 1108년 1월 12일 결혼.[2] 쿠만인 족장 아이유브 칸의 딸. | |
헬레나 | 두 번째 부인. 니콜라이 카람진은 그녀가 콘스탄티노플 출신이라고 추정. 콤네노스 왕조 출신으로 추정. |
4. 평가 및 기념
유리 돌고루키는 모스크바의 전설적인 창건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수호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문장에 용을 죽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1954년, 조각가 세르게이 오를로프가 디자인한 그의 기념비가 모스크바의 중심가인 트베르스카야 거리의 모스크바 시청 앞에 세워졌다.
드미트로프와 코스트로마에도 유리 돌고루키의 기념비가 있다.
원자력 잠수함 ''RFS 유리 돌고루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Tsardom of Muscovy
Academic International Press
1986
[2]
서적
The Russian Primary Chronicle, Laurentian Text
http://www.mgh-bibli[...]
The Mediaeval Academy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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