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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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리(劉理)는 촉한의 황족으로, 유비의 아들이자 유선의 이복 동생이다. 221년에 양왕에 봉해졌고, 230년에는 안평왕으로 개봉되었다. 244년에 사망하여 도왕으로 추존되었다. 그의 아들 유집은 촉한 멸망 후 조위에 의해 낙양으로 이주하여 향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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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은 촉한 황족으로 유비의 아들이자 유선의 이복 동생이며, 왕에 봉해졌으나 환관 황호와의 갈등으로 냉대받고 촉한 멸망 후 위나라로 이주하여 관직을 받았다. - 유비의 황자 - 유선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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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촉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유리 |
한자 표기 | 劉理 |
로마자 표기 | Yu Ri |
자 | 봉효 (奉孝, Bonghyo) |
시호 | 도왕 (悼王, Dowang) |
작위 | 양왕 (梁王, Yangwang) (221년 7월 ~ 230년) 안평왕 (安平王, Anpyeongwang) (230년 ~ 244년 5월 또는 6월) |
생몰년도 | 207년 ~ 221년 사이 출생 - 244년 5월 또는 6월 |
출생지 | 유주탁군 탁현 |
사망 년도 | 244년 |
배우자 | 마씨 (馬氏) |
자녀 | 유음 유기 |
가계 | |
아버지 | 유비 |
소속 | 촉한 |
2. 생애
유비는 후한 말기의 군벌로, 삼국 시대에 촉한을 건국한 황제였다. 유리는 유비의 후궁 중 한 명에게서 태어났으며, 촉한의 두 번째 황제인 유선의 이복 동생이었다. 그는 유선의 또 다른 이복 동생인 유영과는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2]
유리의 아버지는 후한 말기의 군벌이자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인 유비이다. 어머니는 유비의 후궁 중 한 명이었다. 유리는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의 이복 동생이며, 유선의 또 다른 이복 동생인 유영과는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2]
유비의 아들 유인(劉胤)은 아버지의 안평왕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256년에 사망했으며, 시호인 "애왕"(哀王)으로 추존되었다.[5] 유인의 아들 유승(劉承)은 다음 안평왕이 되었으나 1년 뒤인 257년에 사망했고, "상왕"(殤王)으로 추존되었다.[6]
[1]
서적
Sanguozhi vol. 33
221년 7월 즈음, 유비가 황제가 된 지 약 3개월 후, 사도 허정을 사신으로 보내 황제의 조서를 읽게 하고 유리에게 "양왕(梁王)"의 작위를 수여했다.[3] 장무 원년(221년) 4월, 아버지 유비가 촉한의 황제로 즉위했고, 6월에 유리는 양왕에 봉해졌다.[10]
유선 시대 건흥 7년(229년), 촉한은 오와 동맹을 맺었다. 이때 유리의 봉지인 양은 오의 영토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건흥 8년(230년)에 유리는 안평왕으로 개봉되었다.[11]
연희 7년(244년) 4월[11]에 사망했고, 시호 "도왕(悼王)"으로 추존되었다.[4]
3. 친족 관계
4. 후손
유비는 또한 "무읍후"(武邑侯)라는 작위를 가진 유기(劉輯)라는 아들을 두었다. 261년, 유선은 조서를 내려 유기가 조카 유승의 뒤를 이어 다음 안평왕이 되도록 명했다. 264년, 경쟁국인 조위에 의해 촉한 정복된 지 1년 후, 유기는 위나라의 황도인 낙양으로 이주했다. 위나라는 그를 봉거도위(奉車都尉)로 임명하고, 향후(鄉侯)로 봉했다.[7]
유리 사후, 아들 애왕(哀王) 유윤이 뒤를 이었으나, 연희 19년(256년)에 사망했다. 또한 그의 아들 상왕(殤王) 유승이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연희 20년(257년)에 사망했다.
경요 4년(261년), 유선은 그 가계가 끊어진 것을 걱정하여, 유리의 아들 유집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촉한 멸망 후 함희 원년(264년), 유집은 조위에 의해 낙양으로 이주되어 봉거도위에 임명되고, 향후에 봉해졌다.
참조
[2]
서적
Sanguozhi vol. 34
[3]
서적
Sanguozhi vol. 34
[4]
서적
Sanguozhi vol. 34
[5]
서적
Sanguozhi vol. 34
[6]
서적
Sanguozhi vol. 34
[7]
서적
Sanguozhi vol. 34
[8]
서적
三国志演義
[9]
서적
三國志/卷36#馬超
s:zh:三國志/卷36#馬超
[10]
서적
三國志/卷32
s:zh:三國志/卷32
[11]
서적
三國志/卷33
s:zh:三國志/卷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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