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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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현은 만주족 출신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구매하여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산둥성에서 도적을 소탕하여 명성을 얻고, 의화단 사건 당시 산둥성 순무로 재직하며 의화단을 지원했다. 이후 산서성 순무로 재임하며 외국인 배척 정책을 펼치다 '태원 학살'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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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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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성씨 | 颜扎氏 (Yanja) |
휘 | 毓賢 |
자 | 佐臣 (Zuoch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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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
출생 | 1842년 |
사망 | 1901년 2월 22일 |
사망 장소 | 란저우, 간쑤성 |
관직 | |
임기 시작 | 1899년 2월 |
임기 종료 | 1900년 2월 |
이전 | 张汝梅 (Zhang Rumei) |
이후 | 위안 스카이 |
임기 시작 | 1900년 2월 |
임기 종료 | 1900년 9월 26일 |
이전 | 邓华熙 (Deng Huaxi) |
이후 | 시량 |
소속 | |
충성 | 청나라 |
전투 | |
전투 | 의화단 운동 |
2. 생애
육현은 만주족 출신으로 팔기 중 양황기에 등록된 가문 출신이다. 1889년 산동성 조주의 지부가 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3개월 동안 1,500명의 도적을 처단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1896년 산동 포정사, 1899년 산동 순무로 승진했다. 당시 산동성은 외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고, 1897년 조주교안 사건으로 인해 이병형이 해임되기도 했다. 육현은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이용하는 것"이라며 의화단을 향용에 편입시켜 합법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그는 의화단에게 '육'(毓)자 깃발을 주고, 그들이 교회를 방화하고 기독교인을 살해하는 것을 방치했으며, 기독교인들의 보호 요청을 무시했다. 1898년 6월, 육현은 산둥성 총독 장루메이의 계획을 지지했는데, 이 계획은 중국 기독교인과 현지 자위 단체 사이의 충돌이 더 많았던 구안현의 의화단을 현지 민병대에 통합하여 도적떼를 진압하고 지역 주민과 중국 기독교인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었다.[1]
1899년 10월, 선라사 전투에서 의화단이 청군과 충돌하자, 육현은 의화단 지도자를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 열강은 육현이 의화단의 폭력을 방치한다고 비난했고, 결국 육현은 1899년 12월 해임되어 위안스카이로 교체되었다.[3] 이후 육현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재의 등에게 의화단을 이용하도록 권하고, 서태후를 알현하기도 했다.[4]
1900년, 육현은 산서성 순무로 복귀했다. 그는 외국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강화하여 의화단을 사주해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를 살해하도록 했다. 태원에서 46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유아 11명 포함)이 살해되었고, 산서성 전체에서 191명의 선교사가 살해되었으며, 1만 명의 중국인 신자가 살해되고 교회와 병원 225개소가 파괴되었다.[4]
같은 해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후, 연합군은 육현을 전범으로 지명했다. 육현은 면직되어 신강성으로 유배되었고, 1901년 란저우에서 처형되었다. 육현은 잔인했지만 청렴했기 때문에 산서성 사람들은 사당을 짓고 그를 모시려 했지만, 조정의 명령으로 중단되었다.[4]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육현은 만주족 출신으로 그의 가족은 팔기 중 하나인 양황기에 등록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광둥성에서 하급 관직을 지냈다. 육현은 과거에 합격하는 대신 관리가 될 자격을 갖춘 벼슬을 샀다.[1] 1879년 산둥성에서 지현 직책을 샀지만, 1889년에야 차오저우에서 업무를 시작했는데, 차오저우는 홍수가 잦고 도적떼가 들끓는 산둥성 남서부의 통제 불능 지역이었다.[2]1894년 청일 전쟁의 전선으로 녹영의 현지 군대가 떠나면서 이 지역의 도적떼가 급증했다.[3] 육현은 새로 창설된 대도회와 같은 지역 자위 단체의 도움을 받아 도적떼를 통제했다.[4] 효율적인 행정 능력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1895년 관할 지역에 여러 지현을 둔 도태(道臺)로 승진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대도회는 급격히 성장하여 최근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1896년, 장쑤성 북부의 두 가문 사이에 토지 분쟁이 발생했다. 한 가문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프랑스 예수회 중국 선교가 1890년에 그 지역에 도착했다 다른 가문은 차오저우의 대도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대도회가 폭력적으로 변하자, 최근 산둥성 안찰사(按察使)가 된 육현은 이들을 진압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지도자인 류스두안과 그의 주요 부하를 체포하여 참수했고, 산둥성 남부에서 대도회의 활동을 종식시켰다.
1897년 11월, 무장 세력이 독일 가톨릭 선교사를 공격했다. 공격 이후 독일 정부는 청 정부에 산둥성 관리 다수를 해임하고 (총독 이병형 포함) 해당 지역에 3개의 가톨릭 교회( 지닝, 차오저우, 주예)를 자체 비용으로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육현은 선교사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사건은 주예 사건으로 알려졌으며, 외국 열강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조차와 배타적 세력권을 확보하는 "할양 경쟁"을 촉발시켰다.
1898년 6월, 육현은 산둥성 총독 장루메이의 계획을 지지했는데, 이 계획은 중국 기독교인과 현지 자위 단체 사이의 충돌이 더 많았던 구안현의 의화단을 현지 민병대에 통합하여 도적떼를 진압하고 지역 주민과 중국 기독교인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었다. 1898년, 육현은 산둥성 부통령(布政使)이 되었는데, 이는 이 성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진 관리였다. 후난성과 장쑤성에서 몇 달 동안 근무한 후, 그는 1899년 3월 순무로 산둥성에 돌아왔다.
1889년(광서 15년), 산동성 조주의 지부가 되었고, 3개월 동안 도적 1,500명을 죽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896년(광서 22년), 산동 포정사로 승진했고, 1899년에 산동 순무에 취임했다.
1899년 10월 중순, "의화단"이라고 자칭하는 무장 세력(영어로는 "의화단"으로 알려짐)이 선라사 전투에서 청 정부군과 충돌했다. 12월, 육현은 의화단 지도자를 체포하여 처형했지만, 지도자를 제거하고 추종자를 분산시키는 정책은 육현이 산둥성 남부에서 직면했던 대도회와 의화단의 구조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외국 열강은 육현이 중국 기독교인에 대한 의화단의 지속적인 폭력을 방치한다고 비난했고, 1899년 12월 6일, 항의가 거세지자 조정은 육현을 해임했다. 그는 의화단에 강경하게 반대하며 현대식 군대를 산둥성으로 이끈 위안스카이로 산둥성 총독이 교체되었다. 육현은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가 1월 초에 그곳에 있었던 것은 1900년 1월 11일자 황제의 칙령과 일치했는데, 이 칙령은 의화단이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자위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는 외국 열강이 의화단의 활동을 묵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2. 2. 산둥성에서의 활동과 의화단과의 관계
1889년 산동성 조주의 지부가 되었고, 3개월 동안 도적 1,500명을 죽여 이름이 알려졌다. 1896년 산동 포정사로 승진했고, 1899년에 산동 순무에 취임했다.당시 산동성에서는 외국을 배척하는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1897년 대도회가 독일인 기독교 선교사 2명을 살해하는 조주교안 사건이 발생하여 순무 이병형이 해임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산동 순무로 취임한 육현은 “민심은 이용하는 것”이라며 의화권민을 향용에 편입하면서 합법적 조직인 ‘의화단’이 성립되었다. 또 의화단에게 ‘육’(毓)자 깃발을 주고 의화단이 교회를 방화하고, 기독교인을 살해하는 것을 방치하였고, 기독교인들이 보호를 요청해도 무시했다. 따라서 외국의 압력으로 정부로부터 해임당하고 원세개와 교체되었다. 그러나 해임 후에도 베이징에서 단군왕(端郡王) 재의(載漪), 장친왕 재훈(載勛), 대학사 강의(剛毅) 등에게 의화단을 이용하도록 권했고, 서태후도 알현했다.
1898년 6월, 육현은 산둥성 총독 장루메이의 계획을 지지했는데, 이 계획은 중국 기독교인과 현지 자위 단체 사이의 충돌이 더 많았던 구안현의 의화단을 현지 민병대에 통합하여 도적떼를 진압하고 지역 주민과 중국 기독교인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었다.[1]
같은 해, 육현은 산둥성 부통령(布政使)이 되었는데, 이는 이 성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진 관리였다.[2] 후난성과 장쑤성에서 몇 달 동안 근무한 후, 1899년 3월 순무로 산둥성에 돌아왔다.[2]
같은 해 10월 중순, "의화단"이라고 자칭하는 무장 세력(영어로는 "의화단"으로 알려짐)이 선라사 전투에서 청 정부군과 충돌했다.[3] 12월, 육현은 의화단 지도자를 체포하여 처형했지만, 지도자를 제거하고 추종자를 분산시키는 정책은 육현이 산둥성 남부에서 직면했던 대도회와 의화단의 구조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3] 외국 열강은 육현이 중국 기독교인에 대한 의화단의 지속적인 폭력을 방치한다고 비난했고, 같은 해 12월 6일, 항의가 거세지자 조정은 육현을 해임했다.[3] 그는 의화단에 강경하게 반대하며 현대식 군대를 산둥성으로 이끈 위안스카이로 산둥성 총독이 교체되었다.[3] 육현은 베이징으로 돌아갔다.[3] 그가 1월 초에 그곳에 있었던 것은 1900년 1월 11일자 황제의 칙령과 일치했는데, 이 칙령은 의화단이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자위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는 외국 열강이 의화단의 활동을 묵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3]
2. 3. 산서 순무 시절과 의화단 운동
1899년 산동성 순무에 취임한 육현은 "민심은 이용하는 것"이라며 의화권민을 향용에 편입시켜 합법적인 조직인 의화단을 성립시켰다. 그는 의화단에게 '육'(毓)자 깃발을 주고 교회를 방화하고 기독교인을 살해하는 것을 방치했으며, 기독교인들의 보호 요청도 무시했다. 이 때문에 외국 정부의 압력으로 해임되고 원세개와 교체되었으나, 베이징에서 단군왕 재의 등에게 의화단을 이용하도록 권했고, 서태후도 알현했다.[4]1900년 산서순무로 복귀한 육현은 외국 배척을 더욱 가혹하게 하여 의화단을 사주해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를 살해했다. 태원에서 46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유아 11명 포함)이 살해되었고, 산서성 전체에서 191명의 선교사가 살해되었으며, 1만 명의 중국인 신자가 살해되고 교회와 병원 225개소가 파괴되었다. 이는 산서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많은 외국인이 살해당한 것이다.
같은 해,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후 연합군은 육현을 전범으로 지명했다. 9월 26일, 육현은 면직되고 신강성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1901년 2월 22일, 신강성으로 가는 길에 란저우에서 처형되었다.
육현은 잔인했지만 청렴했기 때문에 산서성 사람들은 사당을 짓고 모시려고 했지만, 조정의 명령으로 중단되었다.
2. 4. 최후
1900년, 육현은 산서순무로 복귀했다. 산서 순무 재임 중에 육현의 외국을 배척하는 주의는 더욱 가혹해졌고, 의화단을 사주하여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를 살해했다. 태원에서 46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11명 유아 포함)들이 살해되었고, 산서성 전체에서 191명의 선교사가 살해되었으며, 1만 명의 중국인 신자가 살해되고 교회와 병원 225개소가 파괴되었다. 산서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많은 외국인이 살해당한 것이다.같은 해,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후 연합군은 육현을 전범으로 지명했다. 9월 26일, 육현은 면직되고, 신강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01년 2월 22일, 신강성으로 가는 길에 란저우에서 처형되었다.
육현은 잔인했지만 청렴했기 때문에 산서성 사람들은 사당을 짓고 모시려고 했지만, 조정의 명령으로 중단되었다. 육현이 태원에서 44명의 선교사 처형을 주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국인들은 육현을 "매우 악마화된 악당"으로 묘사했다.
3. 평가
육현이 태원에서 44명의 선교사 처형을 주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국인들은 육현을 "매우 악마화된 악당"으로 묘사했다.[1] 1902년 초, 일부 외국인들은 육현이 "공식적으로 의화단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
3. 1. 부정적 평가
육현이 태원에서 44명의 선교사 처형을 주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국인들은 육현을 "매우 악마화된 악당"으로 묘사했다.[1] 예를 들어, 1902년 초, 일부 외국인들은 육현이 "공식적으로 의화단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3. 2. 논란
육현이 태원에서 44명의 선교사 처형을 주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국인들은 육현을 "매우 악마화된 악당"으로 묘사했다.[1] 1902년 초, 일부 외국인들은 육현이 "공식적으로 의화단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참조
[1]
웹사이트
Spider Manchu: Duanfang as Networker and Spindoctor of the Late Qing New Policies, 1901-1911
https://escholarship[...]
[2]
서적
A Voluntary Exile: Chinese Christianity and Cultural Confluence since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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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high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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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The Boxers, China, an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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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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