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타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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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타이왕은 1848년 4세의 나이로 류큐 국왕에 즉위했다. 초기에는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 무역 개방과 관계 수립, 서구인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해야 했다. 1853년 매슈 페리의 류큐 내항 이후 류미수호조약 체결 등 서구 열강과의 관계가 이어졌고, 1864년에는 청나라 황실로부터 책봉을 요청받았다. 1872년 일본은 쇼타이왕을 류큐 번왕으로 봉하고 화족으로 삼았으며, 1879년 류큐 처분으로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퇴위하고 도쿄로 이주했다. 이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0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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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쇼는 1888년 류큐 왕국의 마지막 국왕의 손자로 태어나 가쿠슈인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중국 여행 중 맹장염으로 사망했다. - 제2쇼씨 - 쇼텐 (18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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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타이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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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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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쇼 타이 (尚泰) |
로마자 표기 | Shō Tai |
오키나와어 이름 | 우미지루가니 (思次良金) |
일본식 이름 | 조켄 (朝憲) |
출생일 | 1843년 8월 3일 |
출생지 | 류큐 왕국 슈리 |
사망일 | 1901년 8월 19일 |
사망지 | 일본 제국 도쿄 |
매장지 | 타마우둔 |
묻힌 날짜 | 1901년 8월 29일 |
재위 | |
류큐 국왕 | 1848년 6월 8일 – 1872년 10월 16일 |
류큐 번왕 | 1872년 10월 16일 – 1879년 4월 4일 |
정치 | |
선대 국왕 | 쇼 이쿠 |
후대 국왕 | 없음 (류큐 왕국 병합) |
섭정 | 나키진 조후 (1875–79) |
가문 | |
왕조 | 제2 쇼 왕조 |
아버지 | 쇼 이쿠 |
어머니 | 겐테이, 사시키 아지-가나시 |
배우자 | |
왕비 | 오모마쓰루가네 (우무마치루가니), 사시키 아지-가나시 |
후궁 | 마쓰루가네, 마쓰카와 아지 마쓰루가네, 히라라 아지 야마모토 테우 카타야 테이 마쓰모토 코 다나카 코 간다 나쓰 다나카 하나 |
자녀 | |
왕자 | 쇼 텐, 류큐 왕세자 쇼 인, 기노완 초코 왕자 쇼 코 왕자 쇼 준, 마쓰야마 왕자 쇼 슈, 타마구스쿠 쇼 슈 왕자 |
공주 | 마쓰루가네, 쓰키야마 공주 마나베타루, 아무로 공주 마키시 공주 가데카루 공주 |
기타 자녀 | 쇼 히가리 쇼 토키 마사코 (칸나 겐와의 아내) 야에코 (토 잇센의 아내) 치요코 키미코 사요코 스즈코 사다코 |
일본 귀족원 | |
재임 기간 | 1890년 11월 29일 – 1901년 8월 19일 |
후임 | 쇼 텐 |
시대 | |
중국 | 다오광 (道光) 셴펑 (咸豐) 퉁즈 (同治) |
2. 생애
1848년 6월 8일, 불과 4세의 어린 나이로 류큐 국왕에 즉위하였다.[1] 재위 초기에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 내항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의 압력에 직면하여, 1854년 미국과의 류미수호조약을 시작으로 1855년 프랑스와의 류불수호조약, 1859년 네덜란드와의 류란수호조약을 잇달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3]
원래 류큐 왕국은 사쓰마번의 속국이자 청나라의 조공국으로서 독자성을 유지했으나, 1871년 일본의 폐번치현 이후 1872년 메이지 정부는 일방적으로 쇼타이왕을 류큐번 왕으로 봉하고 화족으로 편입시켰다.[9] 이는 류큐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려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결국 1879년 메이지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류큐 처분을 단행,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11] 이로써 류큐 왕국은 멸망하였고, 쇼타이왕은 왕위를 잃고 거처하던 슈리성에서 쫓겨나야 했다.[12] 이후 메이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도쿄로 강제 이주당했다.[13]
도쿄로 이주한 뒤 화족령에 따라 1885년 5월 2일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14][18] 1890년 제국의회 개설 후에는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19] 1901년 급성 장염으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27][20] 유해는 오키나와현 나하시의 왕가 능묘인 다마우둔(:ja:玉陵)에 안장되었다. 쇼 가문은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
흔히 쇼타이왕의 말로 알려진 命どぅ宝|이노치두타카라일본어("생명이야말로 보물")는 실제로는 후대에 창작된 연극 대사이다.
2. 1. 즉위와 류큐 개방
1848년 6월 8일(덴포 28년 5월 8일)에 4세(세는나이 6세)의 어린 나이로 류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1] 쇼타이왕은 약 31년간 통치하였는데, 재위 초기 10년에서 20년 동안은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 인해 류큐 제도를 개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는 서구와의 무역 개방, 공식적인 관계 수립, 서구인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정착 허용 요구로 나타났다.쇼타이왕 즉위 수십 년 전부터 서구인들이 류큐 제도에 방문했지만, 공식적인 관계 수립과 무역 개방 정책은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853년(가에이 3년) 미국의 매슈 C. 페리 제독이 일본으로 가는 길에 나하에 여러 차례 입항하였다. 페리는 슈리성으로 행진하여 국왕 접견을 요구했으나, 어린 국왕을 만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왕실 섭정 및 다른 고위 관리들과 만나 1854년 류미수호조약(琉米修好条約, Lew Chew Compact)을 체결하였다.[3] 이 조약은 같은 해 에도 막부가 체결한 가나가와 조약과 유사하게, 류큐가 미국과의 무역 및 관계를 개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 체결 이후, 다른 서구 열강과의 관계도 이어졌다. 1855년에는 프랑스와 류불수호조약(琉仏修好条約)을, 1859년에는 네덜란드와 류란수호조약(琉蘭修好条約)을 맺었다. 이러한 개방 과정은 당시 류큐를 속국으로 삼고 있던 사쓰마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지원을 받았다. 나리아키라는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했으며,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는 강력하여 1857년 나하에 프랑스 사절단이 설치되고 쇼타이왕에게 야포를 공식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4]
그러나 1858년 나리아키라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쓰가 번주 자리를 계승하면서 사쓰마 번의 정책은 바뀌었다. 히사미쓰는 나리아키라의 개방 정책을 뒤집고, 당시 일본 내에서 힘을 얻고 있던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즉 외세 배척론을 지지했다.[5][6] 이에 따라 쇼타이왕은 1611년 이래 조상들이 맹세해 온 시마즈씨에 대한 충성을 다시 공식적으로 맹세해야 했다.
한편,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관계도 유지되었다. 1864년, 쇼타이왕은 청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국왕으로서의 책봉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7] 2년 뒤인 1866년, 청나라 대표단이 류큐에 와서 동치제를 대신하여 쇼타이왕의 국왕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2. 2. 일본의 압력과 류큐 번 설치
쇼타이왕의 치세 초기에는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 류큐 왕국이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853년 미국 해군의 페리 제독이 나하에 내항하여 슈리성까지 행차하는 등 압력을 가했고, 결국 1854년 미국과 류미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3] 이는 당시 일본이 미국과 가나가와 조약을 맺은 것과 같이, 류큐가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1855년에는 프랑스와 류불수호조약을, 1859년에는 네덜란드와 류란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개방 정책은 당시 류큐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으나,[4] 1858년 나리아키라가 사망하고 시마즈 히사미쓰가 뒤를 이으면서 사쓰마 번의 정책은 존왕양이 운동의 영향으로 외세 배척론으로 돌아서게 되었다.[5][6]
한편, 류큐는 전통적으로 청나라와의 책봉 관계도 유지하고 있었다. 1864년 쇼타이왕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국왕 책봉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고,[7] 1866년 청나라 동치제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쇼타이왕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868년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류큐의 지위는 불확실해졌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871년 류큐 선박이 타이완에 표류했다가 선원들이 현지 원주민에게 살해당하는 무단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빌미로 1874년 대만 원정을 단행하며 류큐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8]
1872년, 일본 정부는 일방적으로 쇼타이왕을 '류큐 번왕'으로 봉하고 화족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류큐 왕국을 일본의 봉건 영지, 즉 '번'으로 격하하고 일본의 통치 체제 아래 두려는 의도였다. 쇼타이왕은 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가서 경의를 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대신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도쿄에서 류큐가 일본의 '번'이 되었음을 통보받았다.[9] 이로써 류큐는 사쓰마 번의 영향력에서는 벗어났지만, 일본 중앙 정부에 직접 종속되는 결과를 맞았다.
일본 정부는 류큐의 행정 구조를 일본식으로 재편하기 위해 1875년과 1879년 두 차례에 걸쳐 내무성 관리 마쓰다 미치유키를 파견했다. 쇼타이왕은 번왕으로서 일본 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도쿄 출두 명령을 거부하며 저항했다.[10] 또한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정부의 우려를 샀다. 결국 1878년 내무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류큐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일본 영토로 완전히 편입할 계획을 세웠다.
1879년,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류큐 처분'을 단행했다.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함으로써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쇼타이왕은 번왕의 지위를 잃고 슈리성에서 쫓겨나 나카구스쿠 저택으로 옮겨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지 정부는 쇼타이왕에게 도쿄 이주를 명령했고, 그는 화족으로서 도쿄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류큐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3. 류큐 처분과 멸망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872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류큐 왕국과 옛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그리고 도쿄의 새로운 일본 중앙 정부와의 관계는 불명확한 상태에 놓였다. 일본 중앙 정부는 류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했다.1872년(메이지 5년), 일본 정부는 류큐 국왕 쇼타이왕을 류큐번 왕으로 봉하여 화족으로 삼고, 도쿄에 번저(藩邸)를 제공했다. 이는 류큐를 일본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시도였으나, 류큐는 여전히 청나라에 조공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871년, 류큐 선박이 타이완 해안에 표류하여 선원들이 현지 원주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고시마현(옛 사쓰마번)은 이를 빌미로 쇼타이왕에게 도쿄에 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보내도록 압력을 가했다.[8] 이 사건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결국 1874년 일본은 타이완 침공을 감행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류큐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명분으로 활용했다.
일본 정부는 류큐의 지위를 명확히 하고 일본에 완전히 종속시키기 위해 쇼타이왕에게 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경의를 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쇼타이왕은 질병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대신 삼촌인 이에 왕자와 기노완 우에카타를 사절로 보냈다. 도쿄에서 사절단은 류큐 왕국이 일본 천황의 봉건 영지인 '류큐 한(琉球藩)'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문서를 받았다. 이는 사쓰마번에 대한 종속에서는 벗어났지만, 일본 제국에 직접 편입됨을 의미했다.[9]
1875년과 1879년, 내무성 서기관 마쓰다 미치유키가 이끄는 사절단이 파견되어 류큐의 행정 구조 개편을 시도했다. 쇼타이왕에게는 일본 황실의 공식 품계가 주어졌고 다시 도쿄 출두 명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또다시 질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나키진 친왕이 소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했다.[10] 쇼타이왕의 계속된 도쿄행 거부와 청나라와의 독자 외교 유지는 메이지 정부의 불만을 샀고, 내무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1878년 류큐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할 계획을 세웠다.
1879년 3월 27일, 일본 정부는 류큐 처분을 단행했다. 쇼타이왕은 강제로 퇴위당했고, 류큐번은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었다.[11] 쇼타이왕은 3월 30일 슈리성을 떠나[12] 왕가의 저택 중 하나인 나카구스쿠우둔(中城御殿)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곧 도쿄 이주 명령을 받았고, 건강 문제를 이유로 지연시키려 했으나 결국 5월 27일 오키나와를 떠나 6월 8일 요코하마에 도착, 96명의 수행원과 함께 도쿄로 향했다.[13]
1879년 6월 17일 메이지 천황을 만난 쇼타이왕은 새로 만들어진 화족 제도에 편입되었고, 1885년 5월 2일에는 화족령에 따라 후작(侯爵) 작위를 받았다.[14][18] 1890년 2월, 제국의회 개설과 함께 귀족원 후작 의원이 되었다.[19]
류큐 병합에 대해 청나라의 직례 총독 리홍장은 공식적으로 항의했으며, 전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도 일본 방문 시 이 문제를 제기하며 중재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75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쇼타이왕을 오키나와의 세습 지사로 임명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항도회(航道會)'라는 오키나와 단체도 비슷한 제안을 했지만, 일본 정부는 현 통치의 실패로 비칠 수 있고 주권 문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15]
후작이 된 후에도 쇼타이왕은 도쿄의 상류 사회에서 활동하며 사업에도 관여했다. 그의 사업 관리자들은 오사카에 '마루이치 쇼텐(丸一商店)'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오키나와 특산물을 판매했다.[16] 그는 1884년 단 한 차례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슈리의 왕가 무덤인 타마우둔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다.[1]
1901년 쇼타이왕은 급성 장염으로 59세(만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27][20], 유해는 타마우둔에 안장되었다. 그의 가족은 2년간 류큐 전통 방식의 애도 기간을 거친 후, 전통 복식과 궁정 언어 등을 버리고 일본 화족의 생활 방식을 따랐다.[17]
흔히 쇼타이왕의 말로 알려진 命どぅ宝|이노치두타카라일본어("생명이야말로 보물")는 실제로는 후대에 창작된 연극 대사이다.
2. 4. 도쿄 생활과 죽음
1879년(광서 5년, 메이지 12년) 류큐처분에 의해 류큐번이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쇼타이왕은 번왕의 지위를 잃고 거주하던 슈리성에서도 나와야 했다. 쇼타이 일가는 류큐 왕가의 저택 중 하나인 나카구스쿠우둔(中城御殿)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나, 메이지 정부로부터 도쿄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1][12] 쇼타이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출발을 잠시 미루었으나, 결국 1879년 5월 27일 오키나와를 떠나 6월 8일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96명의 수행원과 함께 도쿄로 향했다.[13] 이후 그의 둘째 아들인 쇼인(尚寅)과 넷째 아들인 쇼준(尚順)은 나중에 오키나와로 돌아갔다.도쿄에 도착한 쇼타이는 1879년 6월 17일 메이지 천황을 만났으며, 새롭게 만들어진 화족 신분에 편입되었다. 1885년 5월 2일에는 후작(侯爵) 작위를 받았다.[14][18] 1890년(메이지 23년) 2월 제국의회가 개설되자 귀족원 후작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9]
후작이 된 쇼타이는 도쿄의 상류 사회에서 활동하며 사업에도 관여했다. 그의 사업 관리자들이 오사카에 설립한 '마루이치 쇼텐'이라는 회사는 오키나와의 특산물을 일본 본토에 유통하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16] 도쿄로 이주한 이후 쇼타이가 오키나와현을 다시 찾은 것은 1884년 단 한 번뿐이었는데, 이때 슈리에 있는 왕가의 무덤인 타마우둔을 찾아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다.[1]
1901년(메이지 34년) 급성 장카타르(장염)로 인해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7][20] 그의 묘소는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있는 류큐 왕가의 능묘인 타마우둔(玉陵)에 마련되었다. 쇼타이의 가족들은 그의 사후 2년 동안 류큐 전통 방식의 애도 기간을 가졌으나, 이후에는 전통 복장이나 궁중 언어 등 고유한 생활 양식을 버리고 일본 화족 귀족의 생활 방식을 따랐다.[17]
흔히 쇼타이왕의 말이라고 알려진 '생명의 보물'(命どぅ宝|이노치두타카라일본어)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그가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창작된 연극 대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3.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쇼이쿠왕 | |
어머니 | 사시키아지카나시 쇼씨 겐테이(佐敷按司加那志 向氏元貞) | 아명은 오모마쯔루가네(思真鶴金) |
왕비 | 사시키아지카나시 쇼씨 켄시쯔(佐敷按司加那志 章氏賢室) | 아명은 오모마쯔루가네(思真鶴金) |
부인 | 마쓰카와아지 모씨 마쯔루가네(松川按司 毛氏真鶴金) | 아버지는 모키쇼(毛其昌)·미사토 친방 안쓰나(美里親方安綱) |
히라라아지 쇼씨 마쯔루가네(平良按司 向氏真鶴金) | 아버지는 타카기조 친방 조공(沢岻親方朝功) | |
처 | 야마모토 테우(山本テウ) | |
가타야마 테이(片山テイ) | ||
마쓰모토 코우(松本コウ) | ||
다나카 코우(田中コウ) | ||
간다 나쯔(神田ナツ) | ||
다나카 하나(田中ハナ) | ||
아들 | 쇼텐(尚典) | 왕세자, 일본 이름: 나카구스쿠 왕자 쵸쿠(中城王子朝弘) |
쇼인(尚寅) | 일본 이름: 기노완 왕자 쵸코오(宜野湾王子朝広), 기노완어전 초대 당주 | |
쇼코(尚興) | 향년 2세, 어머니는 부인 마쓰카와(松川) | |
쇼준(尚順) | 마쓰카와 왕자(松川王子), 마쓰야마어전 초대 당주 | |
쇼슈(尚秀) | 처음에는 미하토 어전(みはとうどぅん)의 경칭이 있었으나[26], 후에 타마구스쿠 어전(玉城御殿)의 양자가 되어 타마구스쿠 쇼슈(玉城尚秀)를 자칭함. | |
쇼코(尚光) | ||
쇼시(尚時) | ||
딸 | 츠카야마옹주 마쯔루가네(津嘉山翁主 真鶴金) | 고득구조유(顧得舊朝維)에게 시집감 |
아무로옹주 마나베타루(安室翁主 真鍋樽) | ||
마키시옹주(牧志翁主) | ||
가데가루옹주(嘉手苅翁主) | ||
마사코(政子) | 한나헌화(漢那憲和)에게 시집감 | |
야에코(八重子) | 동일천(東逸泉)에게 시집감 | |
지요코(千代子) | ||
기미코(君子) | ||
사요코(小夜子) | ||
스즈코(鈴子) | ||
사다코(貞子) |
4. 영전
1872년(메이지 5년) 일본 제국은 류큐국의 쇼타이왕을 류큐번왕(琉球藩王)으로 봉하여 화족으로 삼았다. 그러나 1879년(메이지 12년) 류큐 처분으로 류큐번이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번왕의 지위는 사라졌다. 이후 화족령이 공포되면서 쇼타이왕은 1885년 후작 작위를 받았다.[29]
쇼타이왕이 받은 서훈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서훈 내용 |
---|---|
1879년 6월 17일 | 종3위[28] |
1885년 5월 2일 | 후작[29] |
1887년 12월 26일 | 정3위[30] |
1892년 7월 5일 | 종2위[23] |
1897년 7월 2일 | 정2위[31] |
1901년 8월 19일 | 종1위[32] |
5. 기타
1848년 6월 8일에 4세의 나이로 즉위했다.[27]
1853년에는 페리가 류큐에 내항했으며, 다음 해인 1854년 미국과 류미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1855년에는 프랑스와 류불수호조약, 1859년에는 네덜란드와 류란수호조약을 맺었다.[27]
본래 류큐는 사쓰마번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서도 청나라에 조공하는 독자적인 왕국이었으나, 1872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을 단행하며 쇼타이왕을 류큐번 왕으로 봉하고 화족으로 삼아 도쿄에 저택을 주었다. 그러나 1879년 류큐 처분을 통해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면서 번왕 지위는 사라졌고, 쇼타이왕은 거처하던 슈리성에서 나와야 했다. 쇼타이 일가는 나카구스쿠우둔(中城御殿)으로 잠시 옮겼으나, 메이지 정부의 명령으로 도쿄로 이주해야 했다. 그의 둘째 아들 쇼인(尚寅)과 넷째 아들 쇼준(尚順)은 나중에 오키나와로 돌아왔다.[27]
이후 화족령에 따라 쇼타이왕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1901년 급성 장염으로 59세에 사망했으며[27], 묘소는 오키나와현 나하시의 류큐 왕가 능묘인 다마우둔(玉陵)에 있다. 쇼타이왕의 생가는 현재도 남아있다.[27]
흔히 쇼타이왕의 말이라고 알려진 '命どぅ宝|이노치두타카라일본어'(생명이야말로 보물)라는 구절은 실제로는 후대에 창작된 연극 대사인 것으로 밝혀졌다.[27]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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