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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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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는 1814년 독일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물리학자이다. 그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선박의 선의로 동인도 제도로 항해하던 중 혈액의 색깔 변화를 관찰하며 열의 물리 현상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마이어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열의 역학적 등가성에 대한 수치적 가치를 제시하고, 열의 일당량 개념을 정립했다. 그는 또한, 이상 기체의 정압 비열과 정적 비열 사이의 관계를 유도하는 등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마이어는 과학계의 반대와 개인적인 불행으로 인해 정신 질환을 겪었지만, 말년에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878년 하일브론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에너지 보존 법칙 발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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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율리우스 로베르트 마이어
율리우스 로베르트 마이어
본명율리우스 로베르트 마이어
출생1814년 11월 25일
출생지뷔르템베르크 왕국 하일브론
사망1878년 3월 20일
사망지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하일브론
국적독일
학력
모교튀빙겐 대학교
지도교수(정보 없음)
지도 학생(정보 없음)
경력
직업의사, 화학자, 물리학자
소속(정보 없음)
활동 분야물리학
업적
주요 업적열역학 제1법칙
열의 일당량
마이어 시약
마이어 관계식
수상
주요 수상코플리 메달 (1871년)
퐁슬레상 (1869년)

2. 생애

약사 가문 마이어, 1820/25년경 하일브론 출신, 부모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등장: 아마도 카를 구스타프와 율리우스 로베르트일 것이다.


마이어는 1814년 11월 25일, 오늘날의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뷔르템베르크 하일브론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9] 하일브론에서 성장했으며, 김나지움에서 고전어 교육 등을 받았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성적은 좋지 않았다.[10] 1832년 5월 튀빙겐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학생 단체인 ''Corps Guestphalia''의 일원이었다.

대학 시절 의학 외에 화학 강의도 수강하고, 개인적인 실험도 하는 등 과학 실험을 좋아했다.[10] 1837년, 친구 몇 명과 함께 금지된 단체의 색상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 동안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짧은 기간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마이어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후 친구 카를 바우어로부터 개인 교습을 통해 수학과 공학에 대한 추가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38년에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국가고시''에도 합격했다. 1839/40년 파리에 머문 후, 네덜란드 범선의 선의로서 자카르타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군 의무관이 되기로 결심하고, 1838년 대학에 복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10] 1841년 하일브론에 정착하여 결혼했다.

1840년, 네덜란드 선박의 선의(船醫)로서 동인도 제도 항해에 동행 중, 동 자바에서 선원들의 정맥혈이 추운 지역보다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것을 알아차렸다.[11] 마이어는 이를 통해 열대 지역에서는 체온 유지에 필요한 열량이 적게 들어 필요한 산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열과 운동의 관계성을 추론하고, 산소 소비가 체온 유지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동 결과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열과 운동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2]

이후 마이어는 이 생각에 몰두하여, 항해 중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도 배에서 내리지 않고, 혼자서 사고를 거듭했다.[12] 그리고 하일브론으로 돌아온 뒤, 논문 집필에 착수했다.[13] 그는 열의 역학적 등가성에 대한 수치적 가치를 제시하고, 모든 생물의 주요 에너지원인 산화 과정을 최초로 기술했다.

1841년 6월, 마이어는 "힘의 정량적 및 정성적 결정에 관하여"(Ueber die quantitative und qualitative Bestimmung der Kräftede)라는 제목의 첫 과학 논문을 완성했지만, 이 논문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거의 무시되었다.[14] 요한 크리스티안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연보''에 논문을 보냈으나 출판되지 않았다.[14]

그 후 마이어는 열과 그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열의 역학적 등가성에 대한 수치적 가치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현재 모든 생물의 주요 에너지원인 산화 과정을 최초로 기술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요한 크리스티안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연보''에 보낸 논문에서 에너지 보존을 처음 시도했으나, 물리학에 대한 고급 훈련 부족으로 인해 몇 가지 근본적인 실수가 포함되어 출판되지 못했다. 마이어는 이 아이디어를 꾸준히 추구했고 가설을 거부한 튀빙겐 대학교 물리학 교수 요한 고틀리프 뇌렘베르크와 논쟁했다. 그러나 뇌렘베르크는 마이어에게 실험적으로 아이디어를 조사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마이어는 실험을 통해 변환의 정량적 요소를 결정하여 열의 역학적 등가성을 계산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1842년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화학 및 약학 연보'' 5월호에 "무기 자연의 힘에 관한 소견"(Bemerkungen über die Kräfte der unbelebten Naturde)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4][5][6] 1845년, ''Die organische Bewegung im Zusammenhang mit dem Stoffwechsel''(유기체의 운동과 물질대사의 관계)라는 소책자를 자비 출판하여, 열의 역학적 등가성의 수치적 값을 명시했다. 처음에는 365 kgf·m/kcal,[7] 나중에는 425 kgf·m/kcal로 나타냈다. 현대 값은 열화학 칼로리의 경우 4.184 kJ/kcal(426.6 kgf·m/kcal)이고, 국제 증기 표 칼로리의 경우 4.1868 kJ/kcal(426.9 kgf·m/kcal)이다. 이 관계는 일과 열이 서로 다른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서로 변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현재 열역학 제1법칙이라고 불리며, 에너지 보존 법칙의 일반적인 원리를 공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1848년 그는 에너지원이 없으면 태양이 불과 5000년 만에 식을 것이라고 계산했으며, 운석의 충돌이 태양을 뜨겁게 유지한다고 제안했다.[3] 같은 해, 마이어는 두 딸을 백일해로 잃었다.[16] 그뿐만 아니라 3월 혁명에 의용군으로 참가했던 그의 형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16] 같은 시기에 제임스 프레스콧 줄과의 열의 일당량 선취권 논쟁은 그를 더욱 심리적으로 압박했다.[15]

이러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마이어는 1850년 5월 28일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15]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다리를 심하게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고,[15] 이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17] 퇴원 후, 그는 연구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포도 재배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17]

1854년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강연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처음 발표한 것은 마이어라고 언급했다.[15] 1862년 존 틴들이 런던 왕립 연구소 강연에서 마이어의 연구를 언급하면서, 그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5] 1867년 11월 5일,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부터 귀족 작위(폰 마이어)를 받았다.[8] 1871년 왕립 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8] 1878년 3월 20일 하일브론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마이어는 1814년 11월 25일, 오늘날의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속하는 뷔르템베르크하일브론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9] 하일브론에서 성장했으며, 김나지움에서 고전어 교육 등을 받았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성적은 좋지 않았다.[10] 1832년 5월 튀빙겐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학생 단체인 ''Corps Guestphalia''의 일원이었다.

대학 시절 의학 외에 화학 강의도 수강하고, 개인적인 실험도 하는등 과학 실험을 좋아했다.[10] 1837년, 친구 몇 명과 함께 금지된 단체의 색상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 동안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짧은 기간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마이어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후 친구 카를 바우어로부터 개인 교습을 통해 수학과 공학에 대한 추가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38년에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국가고시''에도 합격했다. 1839/40년 파리에 머문 후, 네덜란드 범선의 선의로서 자카르타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군 의무관이 되기로 결심하고, 1838년 대학에 복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10] 1841년 하일브론에 정착하여 결혼했다.

2. 2. 과학적 발견

마이어는 물리학 현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항해 중 폭풍우에 휘말린 파도가 잔잔한 바다보다 더 따뜻하다는 것을 관찰하고 열의 물리 현상과 발생하는 열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4][5] 1841년 귀국 후 이 문제 해결에 힘썼다.

1840년, 네덜란드 선박의 선의(船醫)로서 동인도 제도로 항해에 동행 중, 동 자바에서 선원들의 정맥혈이 추운 지역보다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것을 알아차렸다.[11]

마이어는 이를 통해 열대 지역에서는 체온 유지에 필요한 열량이 적게 들어 필요한 산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열과 운동의 관계성을 추론하고, 산소 소비가 체온 유지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동 결과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열과 운동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2]

이후 마이어는 이 생각에 몰두하여, 항해 중 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도 배에서 내리지 않고, 혼자서 사고를 거듭했다.[12] 그리고 하일브론으로 돌아온 뒤, 논문 집필에 착수했다.[13] 그는 열의 역학적 등가성에 대한 수치적 가치를 제시하고, 모든 생물의 주요 에너지원인 산화 과정을 최초로 기술했다.

2. 3. 연구 활동

1841년 6월, 마이어는 "힘의 정량적 및 정성적 결정에 관하여"(Ueber die quantitative und qualitative Bestimmung der Kräftede)라는 제목의 첫 과학 논문을 완성했지만, 이 논문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거의 무시되었다.[14] 마이어는 요한 크리스티안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연보''에 논문을 보냈으나 출판되지 않았다.[14]

그 후 마이어는 열과 그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열의 역학적 등가성에 대한 수치적 가치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현재 모든 생물의 주요 에너지원인 산화 과정을 최초로 기술했다.

마이어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요한 크리스티안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연보''에 보낸 논문에서 에너지 보존을 처음 시도했으나, 물리학에 대한 고급 훈련 부족으로 인해 몇 가지 근본적인 실수가 포함되어 출판되지 못했다. 마이어는 이 아이디어를 꾸준히 추구했고 가설을 거부한 튀빙겐 대학교 물리학 교수 요한 고틀리프 뇌렘베르크와 논쟁했다. 그러나 뇌렘베르크는 마이어에게 실험적으로 아이디어를 조사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마이어는 실험을 통해 변환의 정량적 요소를 결정하여 열의 역학적 등가성을 계산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1842년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화학 및 약학 연보'' 5월호에 "무기 자연의 힘에 관한 소견"(Bemerkungen über die Kräfte der unbelebten Naturde)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4][5][6]

1845년, 마이어는 ''Die organische Bewegung im Zusammenhang mit dem Stoffwechsel''(유기체의 운동과 물질대사의 관계)라는 소책자를 자비 출판하여, 열의 역학적 등가성의 수치적 값을 명시했다. 처음에는 365 kgf·m/kcal,[7] 나중에는 425 kgf·m/kcal로 나타냈다. 현대 값은 열화학 칼로리의 경우 4.184 kJ/kcal(426.6 kgf·m/kcal)이고, 국제 증기 표 칼로리의 경우 4.1868 kJ/kcal(426.9 kgf·m/kcal)이다.

이 관계는 일과 열이 서로 다른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서로 변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현재 열역학 제1법칙이라고 불리며, 에너지 보존 법칙의 일반적인 원리를 공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1848년 그는 에너지원이 없으면 태양이 불과 5000년 만에 식을 것이라고 계산했으며, 운석의 충돌이 태양을 뜨겁게 유지한다고 제안했다.[3]

2. 4. 정신 질환과 자살 시도

1848년, 마이어는 두 딸을 백일해로 잃었다.[16] 그뿐만 아니라 3월 혁명에 의용군으로 참가했던 그의 형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16] 같은 시기에 제임스 프레스콧 줄과의 열의 일당량 선취권 논쟁은 그를 더욱 심리적으로 압박했다.[15]

이러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마이어는 1850년 5월 28일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15]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다리를 심하게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고,[15] 이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17] 퇴원 후, 그는 연구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포도 재배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17]

2. 5. 말년과 재평가

1854년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강연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처음 발표한 것은 마이어라고 언급했다[15].1862년 존 틴들이 런던 왕립 연구소 강연에서 마이어의 연구를 언급하면서, 그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5]

1867년 11월 5일,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부터 귀족 작위(폰 마이어)를 받았다[8]1871년 왕립 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8]1878년 3월 20일 하일브론에서 사망했다.

3. 연구 내용

마이어는 물체의 운동, 열, 전기와 같은 현상의 원인을 "힘"이라고 정의하고, 그 "힘"의 양은 항상 일정하며 소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19] 여기서 마이어가 언급한 "힘"은 현대의 에너지 개념에 가깝다.[20] 마이어는 힘의 특성으로 불멸성, 전환 가환성(어떤 힘이 다른 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불가측량성(힘이 물질과 달리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했다.

마이어는 "힘"은 보존되지만, 현실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의 힘"이 다른 물체의 운동의 힘으로 전달되지 않고 멈추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성립시키려면, 이 현상에서 운동은 열로 변환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22][23]

마이어는 열과 운동의 관계성에 주목했지만, 열이 (분자의) 운동이라는 생각에는 반대했다.[24] 운동과 열은 모두 "힘"이며 서로 변환 가능하지만, 질적으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26]

1842년 마이어는 일정한 양의 열을 발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운동의 양, 즉 열의 일당량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화학 및 약학 연보'' 5월호에 게재된 논문에서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열의 일당량 값을 계산했다.[4][5]

마이어는 10334kg/m³ 압력, 0℃의 공기 1m³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공기의 정적 비열은 0.2172kcal, 정압 비열은 0.3064kcal이다. 1℃ 온도 상승으로 부피가 1/273 증가할 때 수행되는 일은 비열의 차이와 같다. 이 방법으로 처음 열의 일당량을 구했지만, 당시 실험 데이터의 오차로 인해 실제 값보다 약 10% 작은 값을 얻었다.

마이어는 이상 기체의 정압 비열과 정적 비열 사이의 관계를 유도했다.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C_{P,m} - C_{V,m} = R

여기서 ''CP,m''은 일정 압력에서의 몰 비열, ''CV,m''은 일정 부피에서의 몰 비열이며, ''R''은 기체 상수이다.

마이어는 자신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열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했다. 예를 들어,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화학적 에너지로 변환하고, 동물은 식물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얻어 이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어 생명을 유지한다고 주장했다.[1]

1848년 논문에서는 태양 에너지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열의 양은 계산상 엄청나서, 만약 태양 에너지를 석탄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2000년에서 3000년 안에 태양은 소진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현재에도 존재하는 것은 운석이나 혜성이 태양과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충돌 에너지를 열로 환산하면, 같은 무게의 석탄 수천 배에 달한다고 계산했다.[1]

3. 1. 에너지 보존 법칙

마이어는 물체의 운동, 열, 전기와 같은 현상의 원인을 "힘"이라고 정의하고, 그 "힘"의 양은 항상 일정하며 소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19] 1842년에 발표된 논문에서 마이어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19]

마이어는 힘의 특성으로 불멸성 외에도 전환 가환성과 불가측량성을 제시했다. 전환 가환성은 어떤 힘이 다른 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측량성은 힘이 물질과 달리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이어가 나타낸 "힘"은 현재의 에너지 개념에 가깝다.[20] 마이어는 "힘"의 하나인 운동의 힘으로, 1841년의 논문에서는 mv(현대에서 말하는 운동량), 1842년의 논문에서는 mv2, 1845년의 논문에서는 mv2/2(현대에서 말하는 운동 에너지)를 적용했다. 마이어의 주장(힘의 불멸성)을 운동의 힘에 적용하면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21]

마이어는 "힘"은 보존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현실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의 힘"이 다른 물체의 운동의 힘으로 전달되지 않고 멈춰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보았다. 마이어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성립시키려면, 이 현상에서는 운동은 열로 변환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보았다.[22][23]

이처럼 마이어는 열과 운동의 관계성에 주목했지만, 한편으로는 열이 (분자의) 운동이라는 생각에는 반대했다.[24] 1842년의 논문에서는 "운동이 열이 되려면, 운동은―단순한 운동이든, 빛이나 복사열과 같은 진동 운동이든―운동임을 멈춰야 한다[25]"라고 주장했고, 1850년의 논문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26] 운동과 열은 모두 "힘"이며 서로 변환 가능하지만, 질적으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26]

그리고 일정한 양의 열을 발생시키려면 얼마만큼의 운동이 필요할지를 생각했다. 이것은 현재의 열의 일당량에 해당한다.

3. 2. 열의 일당량

1842년 마이어는 일정한 양의 열을 발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운동의 양, 즉 열의 일당량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화학 및 약학 연보'' 5월호에 게재된 논문에서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열의 일당량 값을 계산했다.[4][5] 이 논문의 번역본 제목은 ''무기 자연의 힘에 관한 소견''이었다.[6]

마이어는 10334kg/m³ 압력, 0℃의 공기 1m³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공기의 정적 비열은 0.2172kcal, 정압 비열은 0.3064kcal이다. 1℃ 온도 상승으로 부피가 1/273 증가할 때 수행되는 일은 비열의 차이와 같다.

역학적 일(37.85kg・m)은 열량, 즉 비열의 차이(0.3064-0.2172=0.0892)와 같다. 따라서 1kcal에 대한 일당량 x는 비례식 0.0892:1=37.85:x로부터 x=424.4kg・m (1kcal의 당량값)이다.

마이어는 이 방법으로 처음 열의 일당량을 구했지만, 당시 실험 데이터의 오차로 인해 실제 값보다 약 10% 작은 값을 얻었다. 1845년 소책자 ''Die organische Bewegung im Zusammenhang mit dem Stoffwechsel''에서 그는 열의 역학적 등가성의 수치적 값을 처음에는 365 kgf·m/kcal,[7] 나중에는 425 kgf·m/kcal로 제시했다. 현대 값은 열화학 칼로리의 경우 4.184 kJ/kcal(426.6 kgf·m/kcal)이고, 국제 증기 표 칼로리의 경우 4.1868 kJ/kcal(426.9 kgf·m/kcal)이다.

이 관계는 일과 열이 서로 다른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서로 변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현재 열역학 제1법칙이라고 불린다.

3. 3. 마이어의 관계식

마이어는 이상 기체의 정압 비열과 정적 비열 사이의 관계를 유도했다.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C_{P,m} - C_{V,m} = R

여기서 ''CP,m''은 일정 압력에서의 몰 비열, ''CV,m''은 일정 부피에서의 몰 비열이며, ''R''은 기체 상수이다.

기체의 정압 몰 비열과 정적 몰 비열의 차이가 기체 상수와 같다는 관계식은 다음과 같다.

:C_P-C_V=R

여기서 C_P는 압력 일정 하에서 측정하는 1몰 기체의 비열, C_V는 부피 일정 하에서 측정하는 비열, R기체 상수이다.

3. 4. 기타 연구

마이어는 자신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열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했다. 예를 들어,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화학적 에너지로 변환하고, 동물은 식물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얻어 이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어 생명을 유지한다고 주장했다.[1]

1848년 논문에서는 태양 에너지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열의 양은 계산상 엄청나서, 만약 태양 에너지를 석탄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2000년에서 3000년 안에 태양은 소진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현재에도 존재하는 것은 운석이나 혜성이 태양과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충돌 에너지를 열로 환산하면, 같은 무게의 석탄 수천 배에 달한다고 계산했다.[1]

4. 평가

마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기계 장치에 큰 관심을 보였고, 다양한 물리 및 화학 실험을 즐겼다. 1841년 "힘의 정량적 및 정성적 결정에 관하여"라는 첫 과학 논문을 발표했지만, 이 논문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열과 운동에 관심을 가진 그는 열의 역학적 등가성에 대한 수치를 제시하고, 생물의 주요 에너지원인 산화 과정을 최초로 설명했다.[3]

그러나 그의 업적은 당시 인정받지 못했고, 제임스 줄에게 그 공로가 돌아갔다. 이로 인해 마이어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의 논문 중 일부는 물리학과 화학의 발달된 특성 덕분에 출판되었고, 1859년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62년 존 틴들이 그의 연구를 재조명했으며, 1867년 "Die Mechanik der Wärme"를 출판하여 열역학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그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3]

마이어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비록 물리학 지식 부족으로 그의 첫 논문은 출판되지 못했지만, 이 아이디어를 꾸준히 추구하여 열역학 제1법칙 정립에 기여했다.[4][5][6] 그는 열의 역학적 등가성을 계산하여 일과 열이 서로 변환될 수 있는 에너지 형태임을 밝혔다.[7]

하지만 그의 발견은 동시대 물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헤르만 폰 헬름홀츠제임스 프레스콧 줄 등은 그의 아이디어를 적대시하며 우선권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마이어는 과학적 업적 외에도 1840년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기사 십자장을 받았고, 1869년 퐁슬레 상을 수상했다.[8] 그의 이름을 딴 학교와 천문대도 있다. 화학 분야에서는 마이어 시약을 발명했다.

4. 1. 19세기 후반의 평가

당시 과학계는 실증주의를 중시했기 때문에, 실험을 거의 하지 않은 마이어의 이론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36] 존 틴들, 헤르만 폰 헬름홀츠, 루돌프 클라우지우스 등은 마이어의 업적을 인정하고 옹호했다. 빌헬름 오스트발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에너지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은 마이어라고 호의적으로 언급했고,[33] 에른스트 마흐도 "그 외의 어떤 자연 탐구자도 이처럼 중요하고 광범위한 식견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34]

4. 2. 현재의 평가

마이어는 에너지 보존 법칙 발견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첫 번째 논문은 물리학 지식이 부족했고[38][39] 오류도 많아 당시 발표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평가도 있다[38]

1842년 논문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방식으로 쓰여 있지 않아 "다른 사람의 선취권을 부정하기 위한 이유가 아니라면, 아무도 다시 읽으려 하지 않을 종류의 논문[41]"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열의 일당량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마이어는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의 1806년 실험[42]의 의미를 처음으로 찾아냈다는 평가도 받는다[43]

1845년 논문은 마이어의 물리학적 이해가 향상되었음을 보여주는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44]

참조

[1] 논문 Remarks on the Forces of Nature https://archive.org/[...] 1841
[2] 웹사이트 30+ Variations of the 1st Law of Thermodynamics IoHT Publications
[3] 서적 The Timetables of Science https://archive.org/[...] Simon and Schuster
[4] 간행물 Annalen der Chemie und Pharmacie 1842
[5] 학술지 Bemerkungen über die Kräfte der unbelebten Natur
[6] 학술지 Remarks on the Forces of Inorganic Nature https://www.biodiver[...]
[7] 문서
[8] 서적 Comptes rendus hebdomadaires des séances de l'Académie des sciences Gauthier-Vil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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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사전 科学・技術人名事典
[37] 서적 山本(2009)
[38] 서적 山本(2009)
[39] 서적 渋谷(2008)
[40] 서적 山本(2009)
[41] 서적 山本(2009)
[42] 서적 山本(2009)
[43] 서적 山本(2009)
[44] 서적 クロッパー(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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