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순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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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응순은 후한 시대의 관리로, 청렴하고 공정한 행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 상서우승을 거쳐 기주 자사, 동평국 상을 역임했으며, 하남윤과 장작대장을 지냈다. 특히 장작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잉여 경비를 절감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응순의 아내는 재혼 전 등원이라는 사람의 아내였으나, 시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친정으로 돌아갔고, 이후 응순과 재혼했다. 응순은 10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자손 중 응봉이 알려져 있다.
젊어서 군현에서 벼슬하며 관리로서 청렴하고 공정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에서 상서우승으로 전임되었다.[1] 기주자사로 나가 청렴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으로 알려졌다.[1] 동평국 상으로 전임되어, 상벌을 철저히 적용했기에 관료들도 법을 범하려 하지 않았다.[1] 응순의 집무실 위에 가래나무가 솟아나자, 응순이 계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에 감응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렸다.[1] 이때 두헌이 북흉노를 정벌하러 출병하자, 자사나 태수들은 모두 자제들을 파견하여 두헌에게 뇌물을 보냈지만, 오직 응순만이 보내지 않았다.[1] 화제 때 하남윤·장작대장이 되었다.[1] 장작대장을 5년 동안 역임하며, 많은 잉여 경비를 절감했다.[1]
2. 생애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응순은 젊어서 군현에서 벼슬하며 관리로서 청렴하고 공정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에서 상서우승으로 전임되었다.[1] 기주자사로 나가 청렴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으로 알려졌다.[1] 동평국 상으로 전임되어, 상벌을 철저히 적용했기에 관료들도 법을 범하려 하지 않았다.[1] 응순의 집무실 위에 가래나무가 솟아나자, 응순이 계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에 감응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렸다.[1]
이때 두헌이 북흉노를 정벌하러 출병하자, 자사나 태수들은 모두 자제들을 파견하여 두헌에게 뇌물을 보냈지만, 오직 응순만이 보내지 않았다.[1] 화제 때 하남윤·장작대장이 되었다.[1] 장작대장을 5년 동안 역임하며, 많은 잉여 경비를 절감했다.[1]
2. 2. 하남윤 및 장작대장 시절
젊어서 군현에서 벼슬하며 관리로서 청렴하고 공정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에서 상서우승으로 전임되었다. 기주자사로 나가 청렴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으로 알려졌다.[1] 동평국 상으로 전임되어, 상벌을 철저히 적용했기에 관료들도 법을 범하려 하지 않았다. 응순의 집무실 위에 가래나무가 솟아나자, 응순이 계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에 감응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렸다.[1] 이때 두헌이 북흉노를 정벌하러 출병하자, 자사나 태수들은 모두 자제들을 파견하여 두헌에게 뇌물을 보냈지만, 오직 응순만이 보내지 않았다.[1] 화제 때 하남윤·장작대장이 되었다. 장작대장을 5년 동안 역임하며, 많은 잉여 경비를 절감했다.[1]
3. 가족
응순의 아내는 본래 여남군(汝南郡)의 등원의(鄧元義)의 전처였다. 등원의의 부친 등백고(鄧伯考)가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자, 등원의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내는 낙양에 남아 시어머니를 섬겼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미워하여 빈방에 가두고 음식을 거의 주지 않았다. 아내는 날마다 쇠약해졌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등백고가 이 사실을 알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2]
이후 그녀는 응순과 재혼하였다. 응순이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을 때, 등원이는 길에서 그녀를 보고는 "저 사람은 나의 전처인데, 그녀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집의 부인이 그녀를 심하게 대했기에 나가버렸지만, 원래 귀하게 될 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등랑(鄧朗)은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지 않고 태워버렸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친척 이씨의 집에 가서 등랑을 불렀다. 등랑은 어머니를 만나 재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갔고, 어머니는 "나는 여러 번 죽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집에 버려진 이후로,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고통을 겪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며 모자 간의 연이 끊어졌다.[2]
응순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고, 모두 재주와 학문으로 알려졌다. 둘째 아들 응첩(應疊)은 강하군 태수가 되었다. 응첩의 아들 응침(應郴)은 무릉군 태수가 되었다. 응침의 아들 응봉이 있었다.[2]
3. 1. 아내와의 재혼
응순의 아내는 본래 여남군(汝南郡)의 등원의(鄧元義)의 전처였다. 등원의의 부친 등백고(鄧伯考)가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자, 등원의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내는 낙양에 남아 시어머니를 섬겼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미워하여 빈방에 가두고 음식을 거의 주지 않았다. 아내는 날마다 쇠약해졌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등백고가 이 사실을 알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2]
이후 그녀는 응순과 재혼하였다. 응순이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을 때, 등원이는 길에서 그녀를 보고는 "저 사람은 나의 전처인데, 그녀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집의 부인이 그녀를 심하게 대했기에 나가버렸지만, 원래 귀하게 될 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등랑(鄧朗)은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지 않고 태워버렸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친척 이씨의 집에 가서 등랑을 불렀다. 등랑은 어머니를 만나 재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갔고, 어머니는 "나는 여러 번 죽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집에 버려진 이후로,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고통을 겪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며 모자 간의 연이 끊어졌다.[2]
3. 2. 자녀
응순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고, 모두 재주와 학문으로 알려졌다.[2] 둘째 아들 응첩(應疊)은 강하군 태수가 되었다.[2] 응첩의 아들 응침(應郴)은 무릉군 태수가 되었다.[2] 응침의 아들 응봉이 있었다.[2]
4. 평가
5. 친족
응순의 아내는 본래 여남군(汝南郡) 등원의(鄧元義)의 전처였다. 등원의의 아버지 등백고(鄧伯考)가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고 등원의가 고향에 돌아가자 아내는 낙양에 남아 시어머니를 섬겼으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미워하여 빈방에 가두고 음식을 거의 주지 않았다. 등백고는 이 사실을 알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고, 이후 그녀는 응순과 재혼했다. 응순이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자, 등원이는 그녀를 보고 "원래 귀하게 될 상"이라고 말했다. 등랑(鄧朗)은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지 않고 태워버렸지만, 어머니를 만나자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나는 여러 번 죽어버린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모자 간의 연이 끊어졌다.[2] 응순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고, 모두 재주와 학문으로 알려졌다.[2]
참조
[1]
서적
後漢書 李賢注所引華嶠後漢書
[2]
서적
後漢書 李賢注所引汝南記
[3]
서적
후한서 곽진열전 제36 중 진총
[4]
서적
후한서 양이적응원서열전 제38 중 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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