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대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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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정대귀비는 몽골 보르지기트 씨족 출신으로, 린단 칸의 후궁이었다가 홍타이지에게 시집갔다. 린단 칸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고, 홍타이지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1636년 서린지궁 귀비로 봉해졌으며, 순치 9년에는 의정대귀비로 존봉되었다. 1674년 베이징에서 사망했으며, 자오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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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대귀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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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박이제길특 나목종 (博爾濟吉特娜木鐘) |
작위 | 의정귀비 (懿靖貴妃) |
출신 가문 | 아바가 보르지긴 씨 |
생애 | |
출생 | 17세기, 몽골 |
사망 | 1674년, 자금성, 베이징, 청나라 |
매장지 | 조릉, 랴오닝성, 중국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바가 제2품 왕자 |
배우자 | 릭단 칸 (결혼: 1634년 이전) |
배우자 | 홍타이지 (결혼: 1635년) |
자녀 | 아부나이 |
자녀 | 슈차이 |
자녀 | 화석단순공주 |
자녀 | 봄보보고르 |
기타 정보 | |
사후 시호 | 의정귀비 (懿靖貴妃) |
소속 가문 | 보르지긴 가문 (출생) |
소속 가문 | 아이신 교로 가문 (결혼) |
2. 생애
의정대귀비는 린단 칸에게 시집가 복진(8명의 대복진 중 하나)이 되었다. 슬하에 딸 1명을 두었다.
1634년, 린단 칸은 티베트 원정을 떠났으나, 칭하이로 가던 중 샤라 타라 초원에서 병사했다. 린단 칸이 없는 동안 후금의 홍타이지 군이 후허하오터를 점령했다. 당시 임신 중이던 남존은 이듬해 봄 아들을 낳았다. 같은 해 3월, 남존은 후금에 항복하고 홍타이지와 정략 결혼하여 측실이 되었다.
숭덕 원년(1636년), 서린지궁 귀비(西麟趾宮貴妃)에 봉해졌다. 순치 9년(1652년) 10월, 황고 의정대귀비에 존봉되었다. 강희 13년(1674년) 11월 20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낭낭복진(囊囊福晉), 낭낭태후 (囊囊太后) () 또는 더러거더러 태후(德勒格德勒太后)라고도 불린 그녀의 본명은 남중(娜木鐘)이었다. 의정대귀비는 내몽골 지역 출신 보르지기트 씨족의 몽골 명문가 출신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바가이 2등 친왕(阿霸垓郡王)이었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한 명은 세렝 에르데니(塞冷額爾德尼)와 결혼했고, 다른 한 명은 아하이(阿海)로 체첸 칸 숄레이(碩壘)와 결혼했다.링단 칸이 북원의 카간이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그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듀오루오 정실(多羅福晉)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낭낭 정실(囊囊福晉)로 변경되었다.
2. 2. 링단 칸 사후
1634년 남편 링단 칸이 티베트 원정 도중 칭하이 샤라 타라 초원에서 병사했다. 당시 남목종은 임신 중이었으며, 이듬해인 1635년 링단 칸의 유복자 아부나이를 낳았다.[1] 링단 칸 사후, 홍타이지는 대패륵 다이샨에게 낭낭태후와 혼인할 것을 권했으나, 다이샨은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 결국 홍타이지가 직접 낭낭태후를 후궁으로 맞이했다.[1] 일설에 따르면 남목종에게는 숙채라는 딸이 있었고, 링단 칸 사후 몽골 여아를 키웠다는 기록이 있어 링단 칸의 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2. 3. 홍타이지의 후궁
천총 10년 (1636년)에 고륜단순장공주를 낳았고, 숭덕 6년(1642년)에는 아들 보무보고르를 낳았다.[3][4]숭덕 원년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서린지궁 귀비(西麟趾宮貴妃, wesihun amba fujin)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서대복진(wargi amba fujin)에 해당하는 지위였다. 칼카 세첸칸부 슈어레이는 "태후는 내 황후의 동생이다"라고 나목종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나목종은 칼카 세첸칸부 슈어레이의 아내 아하이의 동생이자, 이전에 몽골 부족의 주인 린단칸의 다라대복진이었다. 그래서 칼카 몽골과 세첸칸부는 나목종에게 선물을 보내며 여전히 그를 존경했다.
숭덕 2년(1637년) 7월, 《청태종실록》에는 인지궁귀비(나목종)의 양녀가 관저궁신비가 아들을 낳은 후, 홍타이지에게 "불이 있으면 하늘에서 궁으로 내려간다"고 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숭덕 4년(1639년) 12월 15일, 《청태종실록》에는 칼카부의 낙마 하사르요스 칸이 오고토 등을 성경으로 파견하여, 나목종의 동생 아하이 복진을 인지궁 귀비에게 담비 가죽과 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순치 9년 (1652년) 10월, 순치제는 대귀비와 숙비의 존호를 더해 황고 의정대귀비로 칭했다.
강희 2년 (1663년), 의정대귀비는 강혜숙비와 함께 자령궁 궁원 북쪽의 양비궁에 머물렀다. 《강희기거주》에 따르면 강희제는 먼저 태종 귀비 궁성시 나목종을 찾아간 뒤 태황태후, 황태후궁으로 가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강희 13년(1674년),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씨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1]
3. 자녀
린단 칸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 숙채, 린단 칸의 딸로 추정
- 아부나이(1635년 ~ 1675년), 초할 친왕(察哈尔亲王)
홍타이지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참조
[1]
서적
Draft History of Qing
[2]
서적
伟人的困惑:治国者卷
https://books.google[...]
Beijing Book Co. Inc
[3]
서적
孝庄皇太后.血泪清宁宫
https://books.google[...]
Beijing Book Co. Inc.
[4]
서적
壯麗皇宮:三大故宮的建築壯景
https://books.google[...]
崧博出版事業有限公司
[5]
서적
這一朝,興也太后亡也太后
遠流牛牛
[6]
서적
駙馬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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