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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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하부는 몽골 중부와 내몽골 북부에 거주하던 몽골인들의 집단으로, 다얀 칸에 의해 할하 투멘으로 조직되었다. 어원은 불분명하나, "방패"를 의미하는 단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얀 칸은 할하를 좌익의 세 투멘 중 하나로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내할하와 외할하를 각각 다스리게 했다. 할하는 몽골 독립 운동을 주도하여 몽골국을 건국하는 데 기여했으며, 현재 몽골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할하 몽골족은 몽골국 외에도 중국 내몽골, 칭하이 등지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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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하부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언어 | 할하 몽골어 |
| 종교 | 주로 불교 (92.7%), 소수 몽골 샤머니즘 (4.0%), 동방 정교회, 개신교 (2.3%) |
| 관련 민족 | 다른 몽골족 (부랴트족, 호트고이드족, 오이라트족) |
| 인구 통계 | |
| 몽골 | 2,659,985명 (2020년) |
2. 어원
"할하(Халх, Halh, Khalkha)"라는 용어는 언어학자와 역사가들에게 항상 어려운 문제였다.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이 단어가 xалхавч "방패"와 халхлах "보호하다, 덮다, 가리다, 숨기다, 가로막다"와 같은 어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비록 민족 집단의 이름 외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명사나 동사 ''xалх''는 없지만 말이다. 이와 유사하게, 할하 단위 내의 하위 민족 집단은 역사적으로 "사르툴 할하", "탕구트 할하" 등으로 서적, 저널 및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남부 5개 할하와 북부 13개 할하라는 구문의 어순은 단어 Халх가 남부 및 북부 부족 연맹 내의 단위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지만, 전체 집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몽골인들은 항상 할하(Халх)라는 용어를 할힌 골의 이름과 연결해 왔다.
다얀 칸 시대에 할하는 좌익의 3개 투멘 중 하나로 조직되었다. 다얀 칸은 다섯째 아들 알추 볼라드와 열한째 아들 게레센제를 할하에 임명했는데, 전자는 내몽골의 다섯 할하의 창시자가 되었고, 후자는 북몽골의 일곱 할하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들은 각각 만주족에 의해 내 할하와 외 할하라고 불렸다.
할하의 기원은 원나라의 좌익 오투그[10]인 자라이르 무칼리 왕가의 소관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명칭은 할하 강에서 유래한다.
3. 역사
1547년, 알주보라트의 휘하 부족은 다라이순 고덴 칸에게 이끌려 대흥안령 산맥 동쪽으로 이주했으며, 그 다섯 손자의 이름을 따서 후에 오부 할하(타브 오토크 할하) 또는 내 할하라고 불린다. 게렌젠제의 휘하 부족은 알탄 칸에게 붙어, 그의 일곱 아들의 이름을 따서 후에 칠기 할하(도로 호슌 할하) 또는 외 할하라고 불린다(단, "칠기"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칭일 뿐, 실제로는 13개 부로 나뉘어 있었다). 외 할하는 후에 외몽골이 된다.
다얀 칸 사후, 1538년 그의 외가 부족[14]인 우량카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량카이 외 좌우익 투멘은 우량카이를 토벌하고 부족을 해체했다. 동쪽에 인접해 있던 칠기 할하는 우량카이의 일부를 흡수하여 목초지를 할하 강에서 서쪽으로 넓혀, 현재의 몽골국 중부 헨티 산맥에서 항가이 산맥까지 이르렀다.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 칠기 할하는 크게 두 개로 나뉘게 되었고, 게르센제의 장자 아시하이의 계통은 우익, 게르센제의 셋째 아들 노노호의 계통과 다섯째 아들 아민드랄의 계통은 좌익이 되었다.[15]
1580년대 초, 노노호의 아들인 아바다이는 알타이 산맥 북쪽에서 오이라트를 격파하여 유명해졌고, 1585년에는 구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불교 사원 에르데네조를 건립했다. 1586년에는 내몽골로 가서 순례 중이던 3대 달라이 라마를 알현하고, "법의 대금강왕(노문 예케 오치르 칸)"이라는 칭호를 받아 할하부의 첫 번째 칸이 되었다. 그의 자손은 후에 할하 좌익의 맹주 '''토셰트 칸''' 가문이 된다. 아바다이 칸 사후 오이라트 토벌을 계승한 것은 아시하의 손자 라이푸 칸이며, 그의 자손은 후에 할하 우익의 '''자사크트 칸''' 가문이 된다. 여기에 아민드랄의 자손인 '''체첸 칸''' 가문을 더하여 "3칸"이라고 불렀다.[16]
1635년, 하르하 좌익 중 가장 동쪽에 있던 체첸 칸이 청에 처음으로 우호 사절을 파견했다. 이에 이어 좌익 종주인 토셰트 칸도 1637년부터 통교를 시작했다. 할하 영주들은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청과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1655년에는 좌우익 4명씩 총 8명의 영주가 청조로부터 자사크(기장)에 임명되었다. 하르하 영주들은 청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조공 부족(동맹국)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청 측에서는 "외 자사크"라고 불렀다.
17세기,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동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여러 부족으로부터 모피 등을 징수하기 위해 강가에 요새를 건설했다. 한때 청에 의해 흑룡강 일대에서 축출되었던 러시아인이었지만 (청-러시아 국경 분쟁), 바이칼 호 동쪽 지역(자바이칼 지방)에서 몽골로 침입하여 다시 흑룡강 지역으로 와서 넬친스크 요새(1654년), 다우리야 행정구역(1656년), 셀렌긴스크(1665년), 우다 겨울 야영지(후의 베르흐네우진스크)(1666년)를 건설했다. 할하의 공납민인 부랴트인과 에벤키인이 러시아 측의 공납민이 되자 할하의 영주들은 여러 차례 러시아에 항의했다.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할하 좌익의 토셰트 칸 등은 1681년부터 1682년에 걸쳐 자바이칼 지방을 공격하여 넬친스크에 접근했다. 1685년, 청이 알바진 공격을 시작하자 몽골 부대가 셀렌긴스크와 우진스크를 포위했다. 할하의 대군은 1688년에 다시 셀렌긴스크와 우진스크를 포위했지만 몽골군의 완패로 끝났다.
1686년, 청의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 5세의 대리인 간덴 대승원 주석의 입회하에 토셰트 칸과 자사크트 칸을 소집하여 회맹을 열었다. 그러나 토셰트 칸이 속민의 절반만 반환했기 때문에 다음 해 (1687년), 자사크트 칸의 체공(成袞)은 오이라트의 준가르 부장 갈단에게 원조를 구하려고 준가르부로 향했다. 이를 안 토셰트 칸은 체공을 추격하여 살해하고, 이어서 준가르와 교전하여 갈단의 동생도 살해했다.
1688년 봄, 준가르의 갈단 칸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가이 산맥을 넘어 토셰트 칸의 군대를 격파했다. 갈단은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불교 사원 에르데네 조를 공격하고, 한 부대는 헬렌 강으로 진격하여 할하 좌익의 체첸 칸의 유목지를 약탈했다. 이로 인해 할하부는 대패하여 수십만 명의 속민이 고비 사막 남쪽 (내몽골)으로 도망쳐 청의 보호를 요청했다.
1691년, 토셰트 칸의 차군도르지와 그의 동생 제브춘담바는 원나라의 여름 수도였던 상도의 유적지에서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신종을 맹세했다. 이때 할하 좌우익의 영주들도 참석했기 때문에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제외한 몽골 민족은 모두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696년, 강희제는 현재 울란바토르시 동쪽 30킬로미터에 있는 조온 모드에서 준가르 군과 격전을 벌여 괴멸시켰다. 이듬해 (1697년), 아들에게 배신당한 갈단 칸은 유랑 끝에 병사한다.
1731년에 다시 준가르의 침공을 받았다. 이듬해 (1732년)에도 준가르가 침공했기 때문에, 토셰트 칸부의 단진돌지 친왕과 에프 체린[25]이 이끄는 2만은 준가르 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에프 체린은 청조로부터 화석친왕(호쇼이친왕)에 봉해지고, 대찰사극(자사크)에 올라 옹정제로부터 "초용"의 칭호를 받았다. 에프 체린은 1733년에 정변좌부장군에 임명되어 보브드에 주재하며, 준가르와의 국경 획정 협상에 임했다. 1739년에 확정된 경계는, 현재 몽골국 서부의 자브한현 동단을 흐르는 부얀트 강을 경계로 하였다.
청조 지배하의 몽골인은 만주족의 팔기 제도에 준하여 기(호슌)를 기본 단위로 하여, 기마다 목지를 지정했다. 기장(자사크)은 세습제로, 원래 몽골 제부족장이 임명되었다. 『몽골 유목기』에서, 할하 제부는 "외몽골 할하 4부 86기"로 나뉘며, 과거의 3칸부에 더하여 사인노얀 부가 할하 4부의 일부가 되었다. 청조는 사인노얀 부와 자사크트 칸 부를 관할하기 위해 정변좌부장군을 두고, 체첸 칸 부와 토셰트 칸 부를 관할하기 위해 쿨룬 판사 대신(kuren de tefi baita icihiyara amban)을 두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청나라는 몽골에 대한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불교 승려에 대한 우대 정책을 폐지하고 몽지 보호 정책과 한인 입몽 금지령을 폐지하여 몽골로의 한인 이주를 장려했다. 이로 인해 내몽골의 목초지가 감소하여 외몽골의 할하에서는 이 대몽 신정책에 반발하여 반청, 반한 감정이 높아졌다.
1911년 12월 29일, 할하의 왕공들은 티베트 출신의 제브춘담바 8세를 황제(칸)로 추대하여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 전까지 보그드 게겐(성인)으로 불리던 제브춘담바 8세는 이 이후 "보그드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이 정권을 보그드 칸 정권이라고 부르지만, 국호는 "몽골국"이었다.
할하는 20세기에 몽골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그들은 북몽골에 독립 국가 몽골을 세웠다. 보그드 칸 정권은 1924년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대체되었고, 1992년에 현재의 몽골국이 되었다.



몽골 고원 험윤 훈육 산융 융적 월지 흉노 동호 남흉노 정령 선비 고차 유연 철륵 돌궐 동돌궐 회흘 할가사 달단 거란 나이만 케레이트 대요 (내만) (객열역) 몽골 몽골 제국 대원(영북행성) 북원 (할하・오이라트) 대청(외번・외몽골) 대몽골국 중국인의 점령 대몽골국 몽골 인민 공화국 몽골국
3. 1. 형성
다얀 칸은 현재의 몽골 중부와 내몽골 북부에 거주하는 몽골인들로 할하 투멘을 만들었다. 몽골 역사 자료인 "에르데닌 에리흐"(보석 구슬)에는 할하 투멘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들이 창설 당시 어디에 거주했는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12]
:''항가이 칸드 누트글란 수우지''
:''하리 다이신드 치누 할하 볼손''
:''할루운 아민드 치누 투셰 볼손''
:''이레힌 우주르, 하라힌 하루울 볼손''
:''할하 투멘 치누 테르 부키 베르 아자아무''
:항가이 한드 누타글란 수지
:하리 다이산드 치누 할흐 볼손
:할룬 아민드 치누 투셰 볼손
:이레힌 우주르, 하라힌 하루울 볼손
:할흐 투멘 치누 테르 부키 베르 아자무
:"항가이 산에 거주" (고대 수도 카라코룸이 세워진 근처의 몽골 중부 산맥인 항가이 산맥)
:"외적에 대한 방패 (몽골어로 ''할하''는 "방패" 또는 "보호"를 의미함)"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위한 지지대"
:"오는 자에 대한 칼날, 보는 자에 대한 경계"
:"당신의 할하 투멘은 진정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몽골에 거주하는 남부 할하는 원래 영토인 항가이 산맥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그들의 기원을 기념하고 나타내기 위해, 모든 새로운 음력 새해에 모든 남부 할하는 특별한 항가이 산 숭배 의식을 수행하며, 그들은 북서쪽을 향해 기도한다. 이 특별한 의식은 남부 할하만 유지하며, 다른 남부 몽골인들은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얀 칸 아래에서 할하는 좌익의 세 개의 투멘 중 하나로 조직되었다. 다얀 칸은 다섯째 아들 알추 볼라드와 열한째 아들 게레센제를 할하에 임명했다. 전자는 내몽골의 다섯 할하의 창시자가 되었고, 후자는 북몽골의 일곱 할하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들은 각각 만주족에 의해 내 할하와 외 할하라고 불렸다.
일부 학자들은 할하가 과거 원나라의 좌익의 다섯 울루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는 자라이르, 옹기라트, 이키레스, 우루드, 망구드의 다섯 강력한 부족이 이끌었다.
다섯 할하는 자루드, 바아린, 옹기라트, 바야우드, 외지예드라는 다섯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시라 머렌 계곡 주변, 대싱안링 산맥 동쪽에 살았다. 그들은 충돌했지만 결국 세력을 키워가던 만주족에게 정복당했다. 자루드와 바아린을 제외한 다섯 할하는 팔기로 조직되었다. 주 우다 맹의 할하 좌기 및 울란차브 맹의 할하 우기는 일곱 할하의 분파였다.
일곱 할하는 서쪽의 오이라트와 정기적으로 싸웠다. 게레센제의 후손들은 투셰트 칸, 자사그트 칸 및 세첸 칸 가문을 형성했다. 그들은 1688년 준가르 지도자 갈단에 맞서 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의 강희제의 도움을 구해야 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1725년 옹정제는 투셰트 칸 가문으로부터 체렝의 독립을 부여하여 사인 노욘 칸 가문을 형성했다.
할하의 기원은 원나라의 좌익 오투그[10]인 자라이르 무칼리 왕가의 소관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명칭은 할하 강에서 유래한다.[11] 1487년 몽골의 바트뭉크(Batu Möngke)가 칸의 자리에 올라 다얀 칸(Dayan Qaγan)이라고 칭하자 몽골을 좌익과 우익으로 크게 나누고, 좌익을 차하르, '''할하''', 우량하이, 우익을 오르도스, 투메드, 영셰부로 나누었다. 이 6개의 대부족을 투멘 (만인대)이라고 하며, 할하부는 '''할하 투멘'''이라고도 부른다.
할하 투먼에는 다얀 칸의 다섯째 아들 알주보라트와 열한째 아들 게렌젠제가 사위로 들어가 수장이 되었다.
몽골 종가인 좌익의 차하르 부장 다라이순 고덴 칸과 우익의 투메트 부장 알탄 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할하부는 둘로 나뉘어 각각에 속하게 되었다. 1547년, 알주보라트의 휘하 부족은 다라이순 칸에게 이끌려 대흥안령 산맥 동쪽으로 이주했으며, 그 다섯 손자의 이름을 따서 후에 오부 할하(타브 오토크 할하) 또는 내 할하라고 불린다. 게렌젠제의 휘하 부족은 알탄 칸에게 붙어, 그의 일곱 아들의 이름을 따서 후에 칠기 할하(도로 호슌 할하) 또는 외 할하라고 불린다(단, "칠기"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칭일 뿐, 실제로는 13개 부로 나뉘어 있었다). 외 할하는 후에 외몽골이 된다.
3. 2. 다얀 칸 이후
바투몽케 다얀 카안이 영지를 나눌 때, 여섯째 아들 아르수볼라트에게 내(內) 할하 6부를, 11남 게르센제 잘라이르에게는 북서쪽 외할하부 13개 부족을 주었다. 이때부터 할하부는 몽골 제국 대칸의 직할 영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었다. 보디 알락 카안 때부터는 차하르부가 직할령이 되었다.[14]
보디 알락 카안 때부터 외할하부는 아바타이 사인 칸 등이 스스로 칸을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키웠다. 17세기에는 외할하부가 투시예트칸부, 세첸칸부, 알탄칸부, 자사그투칸부 등 독자 세력을 형성해 대칸의 종주권을 거부했다. 이들은 차하르부의 에제이 칸이 만주족에게 항복한 뒤에도 반독립 상태였다. 1691년부터 중가르의 압박과 청나라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1697년 강희제에게 항복했다. 이후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20세기까지 반독립 국가 상태였다.[15]
다얀 칸은 현재 몽골 중부와 내몽골 북부에 사는 몽골인들로 할하 투멘을 만들었다. 몽골 역사 자료 "에르데닌 에리흐"(보석 구슬)에는 할하 투멘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창설 당시 어디에 살았는지 명확히 나와 있다.
:''항가이 칸드 누트글란 수우지''
:''하리 다이신드 치누 할하 볼손''
:''할루운 아민드 치누 투셰 볼손''
:''이레힌 우주르, 하라힌 하루울 볼손''
:''할하 투멘 치누 테르 부키 베르 아자아무''
:Хангай ханд нутаглан сууж
:Харь дайсанд чинь халх болсон
:Халуун аминд чинь түшээ болсон
:Ирэхийн үзүүр, харахын харуул болсон
:Халх түмэн чинь тэр бүхий бээр ажаамуу
:"항가이 산에 거주" (고대 수도 카라코룸 근처 몽골 중부 산맥인 항가이 산맥)
:"외적에 대한 방패 (몽골어로 ''할하''는 "방패" 또는 "보호")"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위한 지지대"
:"오는 자에 대한 칼날, 보는 자에 대한 경계"
:"당신의 할하 투멘은 진정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다얀 칸 아래에서 할하는 좌익 3개 투멘 중 하나였다. 다얀 칸은 다섯째 아들 알추 볼라드와 열한째 아들 게레센제를 할하에 임명했다. 전자는 내몽골 다섯 할하의 창시자, 후자는 북몽골 일곱 할하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들은 각각 만주족에 의해 내 할하와 외 할하라고 불렸다.
다얀 칸 사후, 그의 외가 부족[16]인 우량카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량카이 외 좌우익 투멘은 1538년 우량카이를 토벌하고 부족을 해체했다. 동쪽에 있던 칠기 할하는 우량카이 일부를 흡수하여 목초지를 할하강에서 서쪽으로 넓혀, 현재 몽골국 중부 헨티 산맥에서 항가이 산맥까지 이르렀다.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 칠기 할하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게르센제의 장자 아시하이 계통은 우익, 게르센제의 셋째 아들 노노호 계통과 다섯째 아들 아민드랄 계통은 좌익이 되었다.[17]
1580년대 초, 노노호의 아들 아바다이는 알타이 산맥 북쪽에서 오이라트를 격파하여 유명해졌다. 1585년에는 구 몽골 제국 수도 카라코룸에 불교 사원 에르데네조를 건립했다. 이듬해(1586년) 내몽골로 가서 순례 중이던 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 "법의 대금강왕(노문 예케 오치르 칸)" 칭호를 받아 할하부 첫 번째 칸이 되었다. 그의 자손은 후에 할하 좌익 맹주 '''토셰트 칸''' 가문이 된다. 아바다이 칸 사후 오이라트 토벌을 계승한 것은 아시하의 손자 라이푸 칸이며, 그의 자손은 후에 할하 우익 '''자사크트 칸''' 가문이 된다. 여기에 아민드랄 자손인 '''체첸 칸''' 가문을 더하여 "3칸"이라 불렀다.[21]
라이플 칸의 오이라트 토벌에서 선봉을 맡은 것은 사촌 우바시 훙타이지였으며, 그는 알탄 칸(황금 칸, 16세기 후반 몽골을 재통일한 튀메트 부장 알탄 칸과는 다른 인물)이라 칭하며 러시아 제국과 관계를 맺어 러시아로부터 "몽골 왕"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1623년 4 오이라트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살해당했다. 이 일은 후에 오이라트 영웅 서사시 『우바시 훙타이지 전』으로 전해진다.
바토마 에르데니 혼타이지(옴부 에르데니)는 부친 뒤를 이어 2대 알탄 칸으로서 러시아와 외교를 했다. 1639년 러시아에 처음 차를 가져다주었다[11].1652년 바토마는 노쇠하여 아들 로잔(에린친 로브잔 타이치)에게 양위하고 1659년 사망했다.
1662년 3대 알탄 칸을 자칭한 에린친 로브잔 타이치는 종주인 자사크트 칸 왕슈크를 습격해 살해했다. 이로 인해 에린친은 할하 좌익 토셰트 칸과 오이라트 준가르 부장 센게로부터 쫓겼고, 1667년 붙잡혔다. 그러나 이 혼란으로 생긴 속민 반환 문제로 우익 자사크트 칸과 좌익 토셰트 칸 사이에 내분이 발생, 갈단의 침입을 불렀다.[17]
3. 3. 청나라와의 관계
바투몽케 다얀 카안은 영지를 나눌 때, 여섯째 아들 아르수볼라트에게 내(內) 할하의 6부를 주었고, 11남 게르센제 잘라이르에게는 북서쪽 외할하부의 13개 부족을 주었다. 이때부터 할하부는 몽골 제국 대칸의 직할 영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었다. 보디 알락 카안부터는 차하르부가 직할령이 되었다.
보디 알락 카안 때부터 특히 외할하부는 아바타이 사인 칸 등이 스스로 칸을 자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17세기에 와서는 투시예트칸부, 세첸칸부, 알탄칸부, 자사그투칸부 등의 독자 세력을 형성해 대칸의 종주권을 거부했다. 이들은 차하르부의 에제이 칸이 만주족에게 항복한 뒤에도 반독립 상태에 있었다. 1691년부터 중가르의 압박과 청나라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1697년 강희제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나, 20세기까지 이들은 반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26]
1635년, 북원의 에제이가 후금에 항복하여 황제의 옥새인 "제고지보"[18][19]를 태종(홍타이지)에게 바쳤다. 이로 인해 할하부를 제외한 몽골 부족 연합은 모두 후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후금의 태종은 1636년에 국호를 '''대청'''(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z=daicing gurun|다이칭 구룬mnc)으로 고쳤다. 이에 대항하여 청의 위협에 노출된 외몽골의 할하와 오이라트 각 부는 동맹을 맺고 1640년에 "할하・오이라드 법전"[20]("오이라트・몽골 법전")을 제정하여 부족 간의 관계를 조정, 할하와 오이라트의 항쟁은 멈추었다.
1662년, 3대 알탄 칸을 자칭한 에린친 로브잔 타이치는 종주인 자사크트 칸 왕슈크를 습격하여 살해했다. 이로 인해 에린친은 할하 좌익의 토셰트 칸과 오이라트의 준가르 부장 센게로부터 쫓기게 되었고, 1667년에 붙잡혔다. 그러나 이 혼란으로 생긴 속민 반환 문제로 우익의 자사크트 칸과 좌익의 토셰트 칸 사이에 내분이 발발, 결과적으로 준가르 부장 갈단의 침입을 초래했다.[21]
1635년, 하르하 좌익 중 가장 동쪽에 있던 체첸 칸이 청에 처음으로 우호 사절을 파견했다. 이어 좌익 종주인 토셰트 칸도 1637년부터 교류를 시작했다. 이처럼 하르하 영주들은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청과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1655년에는 좌우익 4명씩 총 8명의 영주가 청조로부터 자사크(기장)에 임명되었다. 하르하 영주들은 청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조공 부족(동맹국)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청 측에서는 "외 자사크"라고 불렀다.
17세기,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동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여러 부족으로부터 모피 등의 공납품을 징수하기 위해 강가에 요새 혹은 성채(오스트로그)라 불리는 겨울 야영지를 건설해 나갔다. 한때 청에 의해 흑룡강 일대에서 축출되었던 러시아인이었지만 (청-러시아 국경 분쟁), 바이칼 호 동쪽 지역(자바이칼 지방)에서 몽골로 침입하여 다시 흑룡강 지역으로 와서 넬친스크 요새(1654년), 다우리야 행정구역(1656년), 셀렌긴스크(1665년), 우다 겨울 야영지(후의 베르흐네우진스크)(1666년)를 건설했다. 자바이칼 지방에는 할하의 공납민인 부랴트인과 에벤키인이 살고 있었는데, 러시아인의 진출로 인해 그들이 러시아 측의 공납민이 되자 할하의 영주들은 여러 차례 러시아에 항의했다.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할하 좌익의 토셰트 칸 등은 1681년부터 1682년에 걸쳐 자바이칼 지방을 공격하여 넬친스크에 접근했다. 1685년, 청이 알바진 공격을 시작하자 몽골 부대가 셀렌긴스크와 우진스크를 포위했다. 할하의 대군은 1688년에 다시 셀렌긴스크와 우진스크를 포위했지만 몽골군의 완패로 끝났다.
속민의 반환을 둘러싸고 할하의 좌우익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1686년, 청의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 5세의 대리인 간덴 대승원 주석의 입회하에 토셰트 칸과 자사크트 칸을 소집하여 회맹을 열었다. 그러나 토셰트 칸이 속민의 절반만 반환했기 때문에 다음 해 (1687년), 자사크트 칸의 체공(成袞)은 오이라트의 준가르 부장 갈단에게 원조를 구하려고 준가르부로 향했다. 이를 안 토셰트 칸은 체공을 추격하여 살해하고, 이어서 준가르와 교전하여 갈단의 동생도 살해했다.
1688년 봄, 준가르의 갈단 칸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가이 산맥을 넘어 토셰트 칸의 군대를 격파했다. 갈단은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불교 사원 에르데네 조를 공격하고, 한 부대는 헬렌 강으로 진격하여 할하 좌익의 체첸 칸의 유목지를 약탈했다. 이로 인해 할하부는 대패하여 수십만 명의 속민이 고비 사막 남쪽 (내몽골)으로 도망쳐 청의 보호를 요청했다. 후에 할하 전토가 할하 왕가의 통치 하에 놓였을 때, 청조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는 형태로 할하 통치를 하게 된다.
1691년, 토셰트 칸의 차군도르지와 그의 동생 제브춘담바는 원나라의 여름 수도였던 상도의 유적지에서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신종을 맹세했다. 이때 할하 좌우익의 영주들도 참석했기 때문에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제외한 몽골 민족은 모두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할하의 유목지인 막북은 갈단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그들의 유목지 확보를 위해 준가르 토벌에 나섰다. 1696년, 강희제는 현재 울란바토르시 동쪽 30킬로미터에 있는 조온 모드에서 준가르 군과 격전을 벌여 괴멸시켰다. 이듬해 (1697년), 아들에게 배신당한 갈단 칸은 유랑 끝에 병사한다.
이렇게 막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할하 부였지만, 1731년에 다시 준가르의 침공을 받았다. 이듬해 (1732년)에도 준가르가 침공했기 때문에, 토셰트 칸부의 단진돌지 친왕과 에프 체린[25]이 이끄는 2만은 준가르 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에프 체린은 청조로부터 화석친왕(호쇼이친왕)에 봉해지고, 대찰사극(자사크)에 올라 옹정제로부터 "초용"의 칭호를 받았다. 에프 체린은 1733년에 정변좌부장군에 임명되어 보브드에 주재하며, 준가르와의 국경 획정 협상에 임했다. 1739년에 확정된 할하 제부와 오이라트 제부의 경계는, 현재 몽골국 서부의 자브한현 동단을 흐르는 부얀트 강을 경계로 하여, 오이라트의 유목은 알타이 산맥을 넘지 않고, 할하의 유목도 알타이 산맥의 북쪽까지로 결정되었다.
청조 지배하의 몽골인은 만주족의 팔기 제도에 준하여 기(호슌)를 기본 단위로 하여, 기마다 목지를 지정했다. 기장(자사크)은 세습제로, 원래 몽골 제부족장이 임명되었다. 『몽골 유목기』에서, 할하 제부는 "외몽골 할하 4부 86기"로 나뉘며, 과거의 3칸부에 더하여 사인노얀 부가 할하 4부의 일부가 되었다. 청조는 사인노얀 부와 자사크트 칸 부를 관할하기 위해 정변좌부장군을 두고, 체첸 칸 부와 토셰트 칸 부를 관할하기 위해 쿨룬 판사 대신(kuren de tefi baita icihiyara amban)을 두었다.
3. 4. 몽골 독립 운동과 현대 몽골
1691년부터 중가르의 압박과 청나라 사이에서 시달리던 할하는 1697년 강희제에게 투항하였다. 이후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나, 20세기까지 이들은 반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
1911년 12월 29일, 할하의 왕공들은 티베트 출신의 제브춘담바 8세를 황제(칸)로 추대하여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 전까지 보그드 게겐(성인)으로 불리던 제브춘담바 8세는 이 이후 "보그드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이 정권을 보그드 칸 정권이라고 부르지만, 국호는 "몽골국"이었다.
할하는 20세기에 몽골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그들은 북몽골에 독립 국가 몽골을 세웠다. 보그드 칸 정권은 1924년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대체되었고, 1992년에 현재의 몽골국이 되었다.
현재 몽골국의 영역은 과거 외몽골이며, 그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체첸 하안부, 토셰트 하안부, 사인 노얀부, 자사크트 하안부와 같은 할하계 부족이었다. 따라서 현대 몽골을 구성하는 국민의 대부분은 할하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4. 할하 디아스포라
할하 몽골족의 압도적인 다수는 현재 몽골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4개의 작은 기가 있는데, 내몽골에 2개, 칭하이에 1개, 러허에 1개가 있다. 러시아의 부랴트족에도 여러 집단이 있지만, 더 이상 할하의 정체성, 문화, 언어를 유지하지 않는다. 중국 칭하이의 할하 몽골족과 러시아의 부랴트족은 할하의 초그투 칸과 그의 아들들의 지배를 받았다.[8]
'''초그투 콩 타이지의 할하족 (1개 기):''' 시인이자 리그단 칸의 지지자이며, 달라이 라마의 "황모" 종단에 반대했던 초그투 콩 타이지는 1624년 이후 그의 백성과 함께 칭하이로 이동했다. 리그단 칸과 초그투 콩 타이지는 칭하이에서 만나 만주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몽골 기지를 건설할 예정이었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만주 황제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두 몽골 칸은 티베트 달라이 라마가 몽골 문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래서 둘은 "홍모" 종단을 지지함으로써 달라이 라마와 "황모" 종단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리그단 칸의 백성과 병사 대부분은 칭하이로 가는 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리그단 칸의 죽음 이후, 초그투 콩 타이지는 dGe-lugs-pa 수도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초그투가 아들 아르슬랑을 지휘하여 1만 명을 라싸의 달라이 라마에게 보냈을 때, 아르슬랑은 입장을 바꿔 달라이 라마를 지지했다. dGe-lugs-pa의 계승자, 제5대 달라이 라마(1617–82)는 오이라트 구시 칸 토로-바이쿠를 소환했는데, 그는 1637년 초에 1만 명의 병력으로 울란-코슈에서 초그투의 3만 명을 격파했다. 초그투 콩 타이지는 살해되었다.[8] 오늘날 구시 칸의 오이라트는 "상부 몽골" 또는 "ДЭЭД МОНГОЛ"로도 알려져 있으며, 여전히 칭하이에 거주하며 21개의 기를 형성하고 있다. 초그투 콩 타이지의 할하족의 잔존 세력은 단 하나의 기를 형성하며 "하부 몽골" 또는 "ДООД МОНГОЛ"로 알려져 있다. 초그투 콩 타이지는 칭하이의 할하 몽골족 사이에서 초그투 칸으로 알려져 있다.[8]
'''할하 우익 기:''' 이 기는 다르칸 베일리 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 기의 지배자는 게르젠즈 잘라이르 칸의 손자 부니다리의 후손이었다. 1653년에 외몽골의 투세트 칸 아이막에서 내몽골로 이주했다.
'''할하 좌익 기:''' 이 기는 "초호르 할하"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 기의 지배자는 게르젠즈 잘라이르 칸의 5대손 곰보-일덴의 후손이었다. 1664년에 외몽골의 자사크토 칸 아이막에서 내몽골로 도망쳤다. 몽골 초원에 따르면 그 경계는 약 41by이다.
'''탕고트 할하 기:''' 이 기는 행정 목적상 동익 투메트(몽골진) 기에 종속되었으며, 탕고트 할하로 널리 알려져 있다. 12by를 넘지 않는 이 작은 영토는 약 500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변 지역이 몽골족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은 거의 없다. 자체 왕자를 가진 이 부족은 외몽골의 자사크토 칸 부에서 이주하여 내몽골로 도망쳐 1662년 북부(할하)와 서부(울롯) 몽골족 간의 전쟁 중에 만주족에게 항복한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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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タン・トプチ]]』、『[[蒙古世系譜]]』、『[[アサラグチ・ネレトイン・テウケ]]』、『[[アルタン・クルドウン・ミンガン・ケゲスト・ビチク]]』、『[[ボロル・エリケ]]』などはダヤン・ハーンの母を「ウリヤンハンのフトグト・シグシの娘」としているが、『[[蒙古源流]]』、『ジャラグスン・フリム』、『[[シラ・トージ]]』は「ウルグートのオロジュ・シグシの娘」としている。《『東洋学報』第55巻「ハルハ・トゥメンとその成立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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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3) 갈단은 어떤 제국을 꿈꾸었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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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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