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선 타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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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국선 타격령은 1825년 에도 막부가 발표한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해안에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발견 즉시 포격하여 쫓아내고, 상륙한 외국인을 체포 또는 처벌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페톤호 사건, 오쓰하마 사건, 보물섬 사건 등 외국 선박 관련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영국 등이 개국을 시도하는 가운데, 1825년 유럽에서 발생한 경제 공황이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상선 모리슨 호를 오인하여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서양 군사력의 위협을 인식한 막부는 1842년 이국선 타격령을 폐지하고 조난 선박에 한해 보급을 허용하는 신수급여령을 발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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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선 타격령 | |
---|---|
지도 정보 | |
법령 정보 | |
법령 명칭 | 이국선 타격령 |
일본어 명칭 | 異国船打払令 |
공포 시기 | 1825년 |
시행 국가 | 에도 막부 |
목적 | 외국 선박의 접근을 막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기 위함 |
배경 | |
배경 설명 | 19세기 초, 외국 선박들이 일본 근해에 빈번하게 출몰하면서 막부는 강경한 대응책을 마련하게 되었음. |
이전 정책 | 1806년 문화의 변경에서 외국 선박에 대한 제한적인 대응책이 있었지만, 이국선 타격령은 더 강력한 조치였음. |
내용 | |
주요 내용 | 일본 근해에 접근하는 모든 외국 선박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격퇴하도록 명령함. |
대상 | 국적 불문 모든 외국 선박 (단, 예외 조항 존재 가능성) |
시행 |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명령에 따라 시행되었으며, 지방 다이묘들에게 이 명령을 하달함. |
결과 및 영향 | |
영향 | 외국 선박과의 교류가 더욱 어려워졌으며, 막부의 쇄국 정책을 강화시킴. |
문제점 | 모리슨 호 사건과 같이 무고한 외국 선박에 대한 공격이 발생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함. |
폐지 | 아편 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와 서양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1842년 천보의 개혁 때 폐지됨. |
폐지 이후 | 폐지 이후에도 막부는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며, 개국 이후의 일본의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침. |
같이 보기 |
2. 배경
1806년 에도 막부는 문화의 봉록 지급령을 통해 외국 선박에 땔나무, 물, 식량을 제공하며 온건한 정책을 유지했다.[2][3]
그러나 1808년 페이톤 호 사건, 1824년 오쓰와 사건(大津浜事件)과 보물섬 사건[4] 등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1824년 미토번 어민들이 서양 포경선 선원들과 물물교환을 한 사건은 막부가 서양인과 일본 백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816년 류큐 왕국에 통상을 요구한 영국은 1817년부터 1822년까지 우라가에 여러 번 배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25년 잉글랜드 은행발 유럽 경제 공황(Panic of 1825〈영문〉)이 발생했고, 3년 후에는 시볼트 사건이 일어났다.
2. 1. 페이톤 호 사건 (1808년)
1808년 10월(분카 5년), 영국 군함이 나가사키에 무단 침입하여 네덜란드 상관원을 인질로 잡고 물자를 요구한 페이톤 호 사건이 발생했다.[2] 이 사건은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국선 타격령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 2. 오쓰와 사건과 보물섬 사건 (1824년)
1824년 오쓰와 사건(大津浜事件)과 보물섬 사건[8]은 영국 포경선 선원들이 일본 해안에 상륙하여 현지 주민들과 충돌하고, 보물섬에 상륙하여 소를 약탈한 사건이다. 이 사건들은 일본 내에서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쓰와 사건은 오늘날 이바라키현 기타이바라키시 오쓰 어항 근처에서, 보물섬 사건은 가고시마현 다카라지마에서 발생했다. 같은 해 1824년에 미토번 어민들이 몇 년 전부터 초여름 경 앞바다에서 조업 중인 서양 포경선 선원들과 물물교환을 한 일이 발각되어 300여 명이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서양인과 일본 백성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8]1808년 페이톤 호 사건과 1824년 오쓰와 사건 사이에 영국은 꾸준히 개국을 시도했다. 1816년에는 류큐에 통상을 요구했고, 1817년부터 1822년까지 우라가에 여러 차례 배를 보내기도 했다.
2. 3. 영국 등의 개국 시도
1808년 페이톤 호 사건과 1824년 오쓰와 사건 사이에 영국은 일본의 개국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1816년에는 류큐 왕국에 통상을 요구하였고, 1817년부터 1822년까지 우라가에 여러 번 배를 보내기도 했다.[8]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막부의 강경한 쇄국 정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2. 4. 1825년의 경제 공황
타격령이 내려진 1825년은 잉글랜드 은행 발 유럽 경제 공황(Panic of 1825〈영문〉)이 일어난 해이다.[8] 3년 후에는 시볼트 사건이 일어났다.3. 내용
이국선 타격령은 일본 해안에 접근하는 외국 선박(청나라, 조선, 류큐 선박 제외)을 발견하면 즉시 포격하여 쫓아내도록 명령했다.[3] 또한, 상륙한 외국인에 대해서는 체포 또는 처벌을 명령했다.[5]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 선박은 예외로 허용되었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공격 대상이었다.[2]
그러나 일본인 표류 어민 오토키치, 쇼조, 주사부로 등 7명을 귀환시키려고 온 미국 상선 모리슨 호를 영국 군함으로 오인하고 포격한 모리슨 호 사건은 일본인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6] 또한, 일본에서 강국으로 인식되었던 청나라가 아편 전쟁에서 참패한 사실로 인해 막부는 서양 군사력의 위력을 인식하고, 1842년에는 이국선 타격령을 폐지하고 조난당한 선박에 한하여 보급을 인정한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与令)을 발령하였고, 분카의 신수급여령 수준으로 복원되었다.[6][7]
아베 마사히로 정권 하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이 빈번해짐에 따라 타격령의 부활 여부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연안 경비의 부족을 이유로 타격령의 부활은 철회되었다.
4. 경과
1837년 일본인 표류민을 귀환시키고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미국 상선 모리슨 호가 일본에 왔으나, 막부는 이 배를 영국 군함으로 오인하고 포격했다.( 모리슨 호 사건)[6][7] 1840년~1842년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하자, 막부는 서양 군사력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6] 이는 이국선 타격령을 폐지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7]
4. 1. 모리슨 호 사건 (1837년)
1837년 일본인 표류민 오토키치, 쇼조, 주사부로 등 7명을 귀환시키고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미국 상선 모리슨 호가 일본에 왔다. 그러나 막부는 이 배를 영국 군함으로 오인하고 포격했다.( 모리슨 호 사건) 이 사건은 일본 내외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6][7]4. 2. 아편 전쟁 (1840년 ~ 1842년)
청나라가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면서, 막부는 서양 군사력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6] 이는 이국선 타격령을 폐지하고 신수급여령을 발령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6][7]5. 신수급여령 (1842년)
1842년(텐포 13년),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막부가 서양 군사력의 위력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6] 이에 막부는 이국선 타격령을 폐지하고, 조난당한 외국 선박에 한하여 땔나무, 물, 식량 등을 제공하는 신수급여령(薪水給与令)을 발령하였다.[6][7] 이는 모리슨 호 사건과 같이 일본인 표류 어민 송환을 위해 온 외국 선박을 오인하여 공격하는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수급여령은 쇄국 정책의 완화를 의미하며, 일본이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6. 타격령 부활 논의
아베 마사히로 정권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이 빈번해짐에 따라 타격령의 부활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연안 경비 부족을 이유로 철회되었다.
참조
[1]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2]
서적
詳説日本史 改訂版 日B309
山川出版
2017-04
[3]
웹사이트
漂流ものがたり|国立公文書館"
https://www.archives[...]
2024-10-19
[4]
웹사이트
さつま人国誌「宝島の英国人侵入事件」
http://373news.com/_[...]
[5]
웹사이트
【JH336】異国船打払令(無二念打払令)
https://ee-arts.biz/[...]
2024-10-19
[6]
서적
詳説日本史 改訂版 日B309
山川出版
2017-04
[7]
웹사이트
薪水給与令とは
https://kotobank.jp/[...]
朝日新聞
2021-01-05
[8]
웹인용
사쓰마 인국지, 보물섬의 영국인 침입 사건
http://373news.com/_[...]
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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