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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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납은 758년 당나라 숙종 재위 기간에 태어났으며, 평로절도사 이정기의 아들로, 아버지 휘하에서 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이정기 사후 당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켜 제기공을 칭하며 독립하려 했으나, 이후 당나라에 항복하여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792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이사고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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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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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이납 |
한자 표기 | 李納 |
생몰년도 | 알 수 없음 |
시대 | 당나라 |
직업 | 군벌, 정치인 |
관직 정보 | |
관직 | 기주 자사 |
임기 시작 | 781년 |
임기 종료 | 792년 |
전임자 | 이정기 |
후임자 | 이사고 |
기타 | |
기타 정보 | 제나라 국왕 (제2대) |
2. 배경
이납은 758년 숙종 재위 기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회옥은 고구려 출신으로, 당시 이회옥의 사촌인 후희일(侯希逸) 휘하의 평로절도(당시 수도는 현대 랴오닝성 차오양)에서 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후희일은 당시 절도사 대행이었다. 그러나 761년까지 평로군은 당시 반란군인 연나라에 의해 당나라와 단절되었고, 연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거란과 계 부족의 군대까지 막아내야 했기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고, 평로절도사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762년, 숙종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대종은 후희일을 자청 절도사(淄青, 수도는 현대 산둥성 웨이팡)로 임명했고, 자청과 평로의 명칭이 합쳐졌다. 765년, 군인들은 후희일이 과도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그를 축출했고, 이회옥을 그의 후계자로 옹립했다. 대종은 이에 동의하여 이회옥을 절도사로 임명하고 이름을 이정기로 바꾸었다. 이정기는 명목상 황제의 권위에 복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로를 사실상 반독립적인 영토로 통치했다.
이납은 젊은 시절 아버지 이정기에 의해 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토번과의 국경 방어를 담당했다. 그는 장안에서 대종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여러 명예를 하사받았다.[5] 이후 자주(淄州) 지사로 임명되었다. 775년, 이정기가 위보 절도사 전승사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이납은 절도사 대행을 맡았다.[5] 이정기는 반역적인 절도사 이령요를 진압한 후, 변송 절도(汴宋)의 다섯 개 주를 평로 절도에 병합하고 본부를 운주(鄆州)로 옮겼다. 이납은 이전 본부였던 청주(靑州) 지사로 임명되었다.[6]
3. 이정기 휘하에서의 복무
781년, 정덕 절도사 이보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위열이 지위를 계승하려 하자, 덕종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이위열은 황실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했고, 이정기, 전열, 산남동도 절도사 양충의 또한 전쟁을 준비하며 동맹을 맺었다.[7] 781년 말, 이정기가 사망하자 이납은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숨겼지만, 동맹에 따라 전열과 이위열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발표하고 이정기의 지위를 계승하고자 했으나, 덕종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8]
3. 1. 이정기 휘하에서 복무 및 당나라 조정에 대한 초기 충성
이납은 758년 숙종 재위 기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회옥은 고구려 출신으로, 당시 이회옥의 사촌인 후희일(侯希逸) 휘하의 평로절도(당시 수도는 현대 랴오닝성 차오양)에서 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후희일은 당시 절도사 대행이었다. 761년 평로군은 반란군인 연나라에 의해 당나라와 단절되었고, 연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거란과 계 부족의 군대까지 막아내야 했기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평로절도사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762년, 숙종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대종은 후희일을 자청 절도사(淄青, 수도는 현대 산둥성 웨이팡)로 임명했고, 자청과 평로의 명칭이 합쳐졌다. 765년, 군인들은 후희일이 과도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그를 축출했고, 이회옥을 그의 후계자로 옹립했다. 대종은 이에 동의하여 이회옥을 절도사로 임명하고 이름을 이정기로 바꾸었다. 이정기는 명목상 황제의 권위에 복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로를 사실상 반독립적인 영토로 통치했다.[5]
이정기는 젊은 이납을 군대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토번과의 당나라 서부 국경 방어를 돕게 했다. 이납은 장안에 머물며 대종 황제에게 경의를 표했고, 대종은 그에게 여러 명예를 하사했다. 이후 이정기는 이납을 자주(淄州, 현재의 쯔보, 산둥성)의 지사로 임명했다. 775년, 이정기가 위보 절도사 전승사(魏博, 본부는 현재 한단, 허베이성)에 대한 황제의 칙령을 받은 군사 작전 동안, 이납은 이정기가 평로(Pinglu)를 비운 동안 절도사 대행을 맡았다.[5] 이후 반역적인 또 다른 절도사 이령요(李靈曜)에 대한 작전 이후, 이정기는 이령요의 변송 절도(汴宋, 본부는 현재 카이펑, 허난성)에서 다섯 개의 주를 빼앗아 평로 절도에 병합했다. 그는 평로의 본부를 청주(青州)에서 운주(鄆州, 현재 타이안, 산둥성)로 옮기고 이납을 청주의 지사로 임명하여 이전 본부를 관리하게 했다.[6]
4. 당나라에 대한 반역
781년 말, 이납은 당나라의 통제를 받는 선무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정기의 사촌 이위가 당나라 조정에 항복을 제안하자, 이나는 웨이보 군대와 함께 쉬저우를 공격했으나 류차 등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나는 쉬저우 포위를 풀고 푸저우로 물러났고, 류차는 푸저우를 포위했다.[8]
782년 봄, 류차는 푸저우 외곽 도시를 점령했고, 이나는 성벽에서 눈물로 항복을 간청했다. 이몐도 항복을 설득하여 이나는 형제와 아들을 장안에 보내 항복하게 했다. 그러나 환관 송펑차오의 반대로 당 덕종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나는 윈저우로 돌아가 톈위에와 동맹을 계속했다. 더저우와 디저우는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주타오에게 점령당했다. 한편, 덕종은 이계렬을 핑루군 절도사로 임명하고 이나를 공격하게 했지만, 이계렬은 이나와 비밀 협상 중이었기에 실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8]
782년 겨울, 주타오와 왕우준은 당나라에 반역하고 남쪽으로 진격해 톈위에를 지원했다. 리화이광 등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교전하여 웨이저우 포위를 풀게 했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왕공 칭호를 주장했는데, 주는 제기공, 톈은 위공, 왕은 자오공이었고, 이나는 제기공 칭호를 받았다.[8]
4. 1. 이정기의 죽음과 당나라 중앙 정부와의 갈등
781년, 정덕 절도사 이보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위열이 그 지위를 계승하려 했으나, 당 덕종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이위열은 이정기, 전열(전승사의 조카이자 후임), 산남동도 절도사 양충의(본부는 현재 샹양)와 동맹을 맺고 당나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했다.[7] 781년 말, 이정기가 사망하자 이납은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비밀로 했으나, 동맹에 따라 전열과 이위열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같은 해 가을, 이납은 아버지의 죽음을 발표하고 이정기의 뒤를 잇기를 요청했으나, 덕종은 이 역시 거부했다.[8]4. 2. 당나라에 대한 반란과 군사 활동
781년 말, 이납은 당나라의 통제를 받는 선무군(宣武)을 공격했다. 이정기의 사촌 이위(李洧)는 당나라에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분노한 이납은 쉬저우를 공격했으나 류차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납은 푸저우로 물러났고, 류차가 그를 포위했다.[8]782년 봄, 류차는 이납의 항복을 받을 뻔했으나, 환관 송봉조(宋鳳朝)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납은 윈저우로 돌아가 전열과 동맹을 계속했다. 주타오와 왕무준이 당나라에 반역하고, 이납은 제(齊)나라의 공작(齊公) 칭호를 받았다.[8]
5. 독립적인 제나라 왕으로서
782년 가을, 간쑤 핑량을 거점으로 하는 경원(涇原) 군인들이 자신들이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덕종 황제는 산시성 셴양에 있는 풍천(奉天)으로 피신해야 했다.[9] 반란군은 주도의 형제 주사를 지도자로 추대했고, 주사는 진(秦)나라 황제를 칭하며 풍천을 포위했다. 그러나 이회광이 덕종을 구원하러 오자 포위를 풀었다.[9][10]
덕종은 풍천에서 이납, 전열, 왕무준에게 사면을 제안하며 복종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납은 왕, 전과 함께 비밀리에 동의했다. 784년 봄, 덕종이 대사면을 발표하자 이납, 전, 왕은 번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당나라에 복종했다. 덕종은 이납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로 임명하고, 그해 말 명예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하사했으며, 롱시왕(隴西王)으로 봉했다.[10][11]
6. 다시 당나라 신하로서
786년, 당시 의성군(義成, 현재의 안양) 절도사였던 이성이 사망하고 가단이 뒤를 이었다. 평로군과 이웃한 가단은 이납에게 화해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납도 이에 호응하여 평로군과 황실 직할 군 간의 긴장을 완화시켰다.[13]
790년, 이납이 부하인 전승사의 아들이자 당시 위박 절도사 전욱 (784년에 전열을 죽이고 그 뒤를 이었다)의 형인 전조(田朝)를 위박으로 호송하여 위박군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욱은 이를 두려워했고, 그의 참모인 손광좌(孫光佐)의 제안에 따라 이납에게 선물을 보내 그를 기쁘게 하고 전조를 장안으로 보내도록 설득했으며, 이전에 평로군의 지배를 받던 제주(棣州)의 자사 조호(趙鎬)의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조호는 이전에 왕무준의 성덕군에 복종했지만, 나중에 왕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이에 이납은 왕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의 항복을 받아들여 제주를 점령했다. 전욱은 손광좌를 운주(鄆州)에 있는 평로군의 본부로 보내, 제주를 평로군의 일부로 선포하는 칙령(전욱이 위조한)을 발표함으로써 이납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에 분노한 왕무준은 아들 왕사청(王士清)을 보내 위박의 폐주(貝州, 현재의 싱타이)를 공격하여 폐주의 4개 현을 점령했다. 790년 겨울, 덕종은 이러한 군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기를 원하여 이납에게 제주를 성덕군에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이납은 왕무준에게 먼저 위박의 4개 현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왕무준이 그렇게 하자 이납은 제주를 성덕군에 반환했다.[14]
6. 1. 당나라 조정에 복종 및 복귀
덕종 황제가 풍천(奉天, 현대 셴양, 산시)에 있는 동안, 이납, 전열, 왕무준에게 사면을 제안하며 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납은 왕, 전과 함께 은밀히 동의했다. 784년 봄, 덕종 황제가 대사면을 발표한 후, 이납, 전, 왕은 모두 번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형식적으로 당나라 황실 권위에 복종했다. 덕종 황제는 이납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로 임명했고, 그해 말에는 그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하사하고 농서왕(隴西王)으로 봉했다.[10][11]6. 2. 당나라 신하로서의 활동과 주변 군벌과의 관계
784년 겨울, 이납은 군대를 보내 진주 포위를 풀고, 이희열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덕종은 이납에게 삼공 중 하나인 사공(司空) 임시직을 수여했다.[5][12]790년, 이납은 전욱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폐주 4개 현을 돌려받은 후, 왕무준의 성덕군에 제주를 반환했다.[14]
792년, 이납은 사망했고, 그의 아들 이사고가 뒤를 이었다.[15]
참조
[1]
서적
According to Tang Dezong's biography (vol.13) in ''Old Book of Tang''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웹사이트
Old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08-06-21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웹사이트
New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09-02-02
[1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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