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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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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도는 당나라 말기 평로치청 번진을 다스린 절도사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뒤를 이어 절도사직을 계승했다. 당나라 조정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오원제를 돕고, 낙양을 공격하는 등 반란을 시도했다. 결국 부하 유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으며, 그의 반란은 신라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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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
이사도
기본 정보
이(李)
사도(師道)
시호문간(文簡)
생몰년? ~ 원화 14년 2월 9일 (819년 3월 8일)
출생지평로(平盧)
사망지평로
사인참수
관직
절도사평로절도사
최종 관직검교사공(檢校司空)
가족 관계
아버지이사고
이사열

2. 생애

이정기의 손자이자 이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보신의 딸 장충지이다. 이복형 이사고806년 병으로 눕자, 참모 고목(高沐)과 이공도(李公度) 등의 지지를 받아 이사고의 뒤를 이었다. 이사고는 이사도의 능력이 부족하고 그림과 비리 연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만류했지만, 결국 이사도가 평로(平盧)의 수도 운주에서 이사고의 뒤를 잇게 되었다.[4]

이사도는 이사고가 통치하던 시절 본부 밖으로 보내져 지방을 다스렸으며, 때로는 가난하게 생활하기도 했다. 이는 이사고가 이사도에게 삶의 경험을 쌓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후 미주의 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림과 비리 연주를 즐겼다고 한다.[4]

이사고가 사망한 후, 한동안 헌종은 이사도의 절도사직 승계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사도는 참모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일부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여 당나라 조정에 압력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목은 이에 반대하며, 이사도가 조정에 세금을 납부하고, 부하들에게 임명 권한을 부여하며, 조정의 소금 전매 제도에 참여하여 재정을 조정에 납부함으로써 황제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상 두황상은 이사도의 세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틈을 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헌종은 다른 군벌인 유비를 상대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전선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4] 결국 헌종은 이사도를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하고,[3] 그 해 말에는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4]

815년부터 헌종은 오원제를 토벌하는 등 독립번진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다. 이사도는 왕승종과 함께 여러 번 표문을 올려 오원제를 구할 것을 청했지만 헌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도는 대장(大將)을 시켜 2천 명을 거느리고 수춘(壽春)으로 보냈는데, 입으로는 관군을 도와 오원제를 토벌한다고 하면서 실은 오원제를 도우려 한 것이었다.[6]

815년 3월 16일, 낙양의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공격하여 수십여 명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이 공격으로 30여만 꿰미의 돈과 30여만 필의 비단, 3만 곡 가량의 곡식이 잿더미로 변했다.[6] 낙양의 대궐을 점령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소장(小將) 양진(楊進)과 이재흥(李再興)이 당시 낙양유수(洛陽留守) 여원응(呂元膺)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815년 6월 3일 새벽, 이사도가 양성한 자객들이 재상 무원형을 살해하고, 배도를 습격했다. 숭산으로 달아난 병사들은 8월에 붙잡혔다.

816년 12월, 장안의 미앙궁(未央宮)과 비룡초장에 불을 지르고, 운주에는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무원형의 암살로 당 조정은 수도와 문까지의 모든 길목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오가작통법과 같은 제도를 시행했다.

817년 10월, 오원제가 이소에게 평정되자, 자신이 관할하던 3개 주의 땅을 당조에 할양하고 장남을 인질로 보내려 했지만 곧 철회하였다. 818년 가을, 헌종은 이사도의 죄상을 열거하며 여러 절도사들에게 이사도를 칠 것을 명령했다. 이후 이사도의 군대는 계속 패배했다.

819년 정월, 서주 무령군과 위박군이 이사도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유오에게 5만 군사로 맞서게 했지만 패배했다. 유오는 이사도가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2월 6일 밤중에 운주성을 공격하여 이사도와 그의 아들을 사로잡아 살해하고 그 목을 장안으로 보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이정기의 손자이자 이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 이보신의 딸 장충지이다. 이복형 이사고가 806년에 병이 들자, 참모 고목(高沐)과 이공도(李公度)는 이사고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이사도를 지지했다. 이사고는 이사도의 능력이 부족하고 그림과 비리 연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만류했지만, 결국 이사도가 평로(平盧)의 수도 운주(鄆州)에서 이사고의 뒤를 잇게 되었다.[4]

이사도는 이사고가 통치하던 시절 본부 밖으로 보내져 지방을 다스렸으며, 때로는 가난하게 생활하기도 했다. 이는 이사고가 이사도에게 삶의 경험을 쌓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후 이사도는 미주의 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림과 비리 연주를 즐겼다고 한다.[4]

2. 2. 절도사 계승과 당나라와의 관계

이사고가 사망한 후, 한동안 헌종은 이사도의 절도사직 승계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사도는 참모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일부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여 당나라 조정에 압력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목은 이에 반대하며, 이사도가 조정에 세금을 납부하고, 부하들에게 임명 권한을 부여하며, 조정의 소금 전매 제도에 참여하여 재정을 조정에 납부함으로써 황제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재상 두황상은 이사도의 세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틈을 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헌종은 다른 군벌인 유비를 상대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전선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4] 결국 헌종은 이사도를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하고,[3] 그 해 말에는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4]

809년, 위징의 증손자 위추(魏稠)가 가난으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을 저당 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사도는 자신의 돈으로 위추의 저당을 갚아주겠다고 제안했고, 헌종은 처음에는 동의했다. 헌종은 백거이에게 이사도의 제안을 승인하는 조서를 작성하게 했지만, 백거이는 이것이 조정에서 해야 할 일이며 헌종이 이사도에게 공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헌종은 이에 동의하여 조정의 재정 자금으로 위추의 저당을 갚았다.[4]

같은 해, 왕사진 성덕 절도사가 사망했다. 헌종은 처음에는 왕승종이 성덕의 6개 주 중 2개를 조정에 귀속시키겠다는 제안을 받고 왕승종을 새 절도사로 임명하려 했지만, 왕승종이 제안을 철회하자 왕승종을 상대로 토벌령을 선포했다.[4] 그러나 조정의 토벌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사도는 여러 차례 왕승종을 위해 중재하려 했다. 810년, 헌종은 토벌을 중단하고 왕승종을 성덕 절도사로 임명했다.[5]

812년, 이사도의 또 다른 동맹인 전계안 위박 절도사(魏博, 본부는 현대의 한단, 허베이)가 그의 친척 전흥(훗날 전홍정으로 알려짐)에게 넘어갔고, 전흥은 조정에 귀순했다. 이사도는 이후 왕승종과 함께 전홍정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조정에 충성하는 한홍 선무 절도사(宣武, 본부는 현대의 카이펑, 허난)는 그가 위박을 공격하면 자신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고, 이사도는 공격을 실행하지 않았다.[6]

2. 3. 오원제와의 동맹과 반란

이사고가 죽은 뒤에도 당 헌종은 이사도가 이사고의 직위를 세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사도는 휘하 장리들과 이를 의논하였는데, 군사적인 강경대응보다 온건하게 좀 더 기다려 보자는 고목의 주장에 따라 양세(兩稅)와 염법(鹽法)을 준수하며 당 조정에서 파견도 받아들일 것을 판관 최승총(崔承寵)과 공목관(孔目官) 임영(林英)을 보내 계속해 요청했다. 당 조정에서도 재상 두황상(杜黃裳)을 중심으로 이사도의 세력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것을 이용해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촉천(蜀川)에서 유비가 발호하는 바람에 이 일은 무산되었다. 헌종은 원화 원년(806년) 7월에 마침내 이사도를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겸 어사대부(禦史大夫)ㆍ권지운주사(權知鄆州事)ㆍ기치청절도유후(棄淄靑節度留後)로 임명하였지만, 절도사직은 주지 않았다.[4] 그 해 말에 이사도를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4]

원화 10년(815년)부터 헌종은 채(蔡) 땅의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는 등 독립번진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다. 오원제를 치기 위해 여러 절도사들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임시특별부대인 회서행영도통(淮西行營都統)을 조직하면서도, 이사도에게는 끝내 병사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오원제의 요청을 받은 이사도는 왕승종(王承宗)과 함께 여러 번 표문을 올려 오원제를 구할 것을 청했지만 헌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도는 대장(大將)을 시켜 2천 인을 거느리고 수춘(壽春)으로 보냈는데, 입으로는 관군을 도와 오원제를 토벌한다고 하면서 실은 오원제를 도우려 한 것이었다.[6]

원화 10년(815년) 3월 16일, 이사도는 측근의 말을 따라 강(江)ㆍ회(淮)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보관하던 낙양의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쳐서 수십여 명을 죽이고 불을 질렀는데, 이때 30여만 꿰미나 되는 돈과 30여만 필의 비단이 불에 탔고, 3만 곡 가량의 곡식이 잿더미로 변했다. 《구당서》에는 "불타버린 채백이 20만 관필(貫匹)에 쌀은 2만 4천 8백 석, 창실(倉室)은 55칸"이라고 그 구체적인 피해 액수를 명기하고 있다.

《구당서》에는 이사도가 이궐과 육혼(陸渾) 사이에 10여 곳에 많은 농토를 사들여 산붕(山棚, 화전민)들에게 나눠 주면서 그들을 끌어들여 사병을 조직하고, 천만 전의 돈을 내어 숭산의 불광사(佛光寺)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때 낙양의 군사들이 모두 오원제를 막기 위해 이궐(伊闕)에 가있고 하음전운원을 지킬 병사 5백 명도 모두 현의 남쪽에 주둔해 있어 낙양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낙양에 소재해 있던 자신의 진주원(進奏院)에서 얻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은 이사도가 하음전운원을 공격한 것은 당나라가 채주를 치는 사이에 낙양을 차지, 혹은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때 군신들이 이사도를 쳐야 한다고 했지만 헌종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사도는 자신의 진주원 안에 병사를 숨겨놓고 낙양의 대궐을 점령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소장(小將) 양진(楊進)과 이재흥(李再興)이 당시 낙양유수(洛陽留守) 여원응(呂元膺)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구당서》에는 여원응이 이궐에 주둔한 병사들을 데려와 진주원을 포위했으나 병사들 중 아무도 함부로 나서서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적이 대로에서 대열을 정비해 처자들까지 데리고 나가는데도 방어하는 병사들은 추격하지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은 낙양의 건릉교로 건너간 뒤 건릉교를 파괴하고, 장하문(長夏門)을 빠져나가 낙양 교외의 창고를 약탈하고는 동쪽으로 이수(伊水)를 건너 숭산(嵩山)으로 들어갔다.

원화 10년(815년) 6월 3일 새벽에는 이사도가 양성한 숭산의 산붕 출신 자가진과 원찰 두 자객이 정안방(靖安坊) 동문으로 나오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살해하였고,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가 습격당했다(배도는 이때 도랑으로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숭산으로 달아난 병사들은 다섯 달만인 8월에 붙잡혔는데, 《구당서》에는 사슴을 잡아 시장에 내다팔던 산붕이 자신이 잡은 사슴을 병사들에게 뺏긴 것에 앙심을 품고 달려와서 고발하여, 여원응이 그들을 계곡 안에 포위해 모두 붙잡았다고 한다. 이들 병사를 이끌던 수괴 중에는 여든 살 남짓의 중악사(中嶽寺)의 승려로 일찍이 사사명(史思明)의 휘하에 있었던 원정(圓靜)이라는 자도 있었다. 원정은 처형당하면서 "내가 일을 그르쳤으니 낙성(洛城)에서 피를 흘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때 이사도와 내통한 죄가 밝혀져 여원응에게 처벌된 자들 중에는 낙양유수의 어장(禦將)과 낙양의 도정역(都亭驛)과 감수역(甘水驛)의 역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원화 11년(816년) 12월에 이사도는 장안의 미앙궁(未央宮)과 비룡초장에 불을 지르고, 운주에는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무원형의 살해로 당 조정은 수도와 문까지의 모든 길목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재상의 호위가 금오위사(황궁 친위대)에게 위임되고, 원화 12년(817년) 2월에는 오가작통법과 같은 장안 내의 다섯 사람끼리 서로 보증시키게 하는 명이 내려졌다. 《구당서》는 이 제도를 만든 것에 대해 "이때 왕승종과 이사도가 용병의 세력을 믿고 사람을 시켜 능묘의 창을 꺾고 쌓여있는 문적을 불태우며 화살에 편지를 묶어 날려보내니 온 나라가 공포에 떨었다. 미리 교란을 막기 위해 수색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사도가 토벌되고 나서 당군이 얻은 운주의 문서에서 이사도가 포(蒲)ㆍ동(潼)의 관리들에게 (이사도의 밀정이 마음대로 관문을 드나들도록 안배해준 것에 대한) 상을 준 일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자객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전(錢) 1만 관과 함께 5품관을 내려주겠다는 현상금까지 걸렸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무원형 암살 사건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상소했던 백거이는 "간직(諫職)을 통하지 않고 직접 상소를 올린 월권죄"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당하기도 했다.

원화 12년(817년) 10월에 오원제는 서주(徐州)의 무령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 이소에게 평정되었다. 오원제가 토벌되자 이사도는 자신이 관할하던 3개 주의 땅을 당조에 할양하고 장남 홍방도 인질로 보내려 했지만 곧 철회하였다. 기록에는 이사도의 첩이었던 포대저(蒲大姐)와 원칠랑(袁七娘)이라는 두 여자가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이사도가 그 말을 듣게 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헌종은 곧장 군을 내어 토벌하는 대신 사신을 보내 말을 번복한 이유만 물었을 뿐이었다.

원화 13년(818년) 가을, 헌종은 제(制)를 내려서 이사도의 죄상을 열거하며 선무(宣武), 위박(魏博), 무령(武寧), 횡해(横海) 등의 절도사들에게 이사도를 칠 것을 명령한다. 7월에 창주절도사(滄州節度使) 정권(鄭權)이 제주(齊州) 복성현(福城縣)에서 이사도의 군을 깨뜨리고 5백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9월에는 선무절도사 한홍(韓弘)이 병사를 이끌고 제나라의 서쪽 조주(曹州, 지금의 산동 반도 菏泽)를 공격해 빼앗았고, 회남절도사 이이간(李夷簡)과 그 휘하의 초주자사 이청(李聽)이 해주를 공격했다. 정권(鄭權)이 치청의 병사를 제주(齊州)에서, 전홍정(田弘正)은 동하(東河)에서 쳐부수었다. 10월에는 서주절도사 이소와 병마사(兵馬使) 이우(李祐)가 연주(兗州)의 어대현(魚臺縣)에서 다시 이사도의 병사 3천여 인을 죽였다. 12월에 이사도의 장수 하후징(夏侯澄) 등 47인이 붙잡혔을 때, 헌종은 조를 내려 용서하고 모두 위박(魏博) 및 의성군(義成軍)에 맡겨 부리게 하면서, 돌아가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곧 노자를 주고 풀어주었다. 이때 내린 조서에서 헌종은 이사도 세력을 가리켜 「고구려의 흉악한 무리(麗兇黨)」라고 부르고 있다.

원화 14년(819년) 정월 8일, 서주 무령군이 금향(金鄕)에서 이사도의 군사 2만 명을 쳐부수었다. 17일에는 전홍정이 이끄는 위박군이 이사도의 군사 5만을 동아(東阿)에서 쳐부수었는데, 이사도는 양곡(陽谷)에 주둔하고 있던 치청도지병마사 유오(劉悟)를 시켜 5만 군사로 전홍정에 맞서게 했지만 패하였으며 27일에는 양곡에서도 패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헌종이 운주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헌덕왕 11년(819년) 7월에 신라에 원군 파견을 명령하였고 신라에서는 순천군의 장군 김웅원에게 갑병 3만을 주어 가서 돕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도의 대장으로 있던 유오는 전홍정의 공격에 패하고 이사도가 자신을 불러들여 처벌할 것이라고 생각해 두려워하다가, 2월 6일 밤중에 이사도에게 바칠 추첩(追牒)을 가지고 왔다는 핑계로 운주성의 서쪽 문으로 들어가 사방에 불을 질렀다. 이사도는 자신의 형수에게 유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상의 사당을 지켜야 한다고 고한 뒤 아들 홍방과 함께 사당으로 갔다가 붙잡혔다. 《당서》에는 붙잡힌 이사도가 유오를 만나려 했지만 병사들은 "죄인의 몸으로 누굴 만난단 말인가" 라며 허락하지 않았고, 아들 홍방이 "그럼 빨리 죽여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유오의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이사도 부자를 죽이고 그 목을 장안으로 보냈다고 한다.

2. 4. 최후

이사고가 죽은 뒤, 당나라 조정은 이사도의 절도사직 세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도는 군사적 강경 대응보다 온건책을 택하여 당 조정에 계속 요청했다. 그러나 815년부터 당나라가 독립 번진 토벌을 시작하면서 이사도는 강경 노선으로 전환, 낙양의 하음전운원을 공격하고 재상 무원형을 암살했다.[9]

817년 오원제가 토벌된 후, 이사도는 당나라에 항복하려 했으나 측근들의 반대로 철회했다. 818년 당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사도의 군대는 계속 패배했다. 819년 이사도의 부하 유무가 반란을 일으켜 이사도와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로써 이사도의 세력은 멸망했고, 평로치청 번진은 당나라에 의해 분할되었다.[7][2][3]

3. 이사도가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dbo.sinica.ed[...] 2024-04-00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00으로 처리
[2] 서적 Zizhi Tongjian, vol. 241 :zh:s:資治通鑑/卷241
[3]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24 https://web.archive.[...] 2008-06-21
[4] 서적 Zizhi Tongjian, vol. 237 :zh:s:資治通鑑/卷237
[5] 서적 Zizhi Tongjian, vol. 238 :zh:s:資治通鑑/卷238
[6] 서적 Zizhi Tongjian, vol. 239 :zh:s:資治通鑑/卷239
[7] 서적 Zizhi Tongjian, vol. 240 :zh:s:資治通鑑/卷240
[8]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vol. 58
[9] 서적 New Book of Tang, vol. 213 http://www.sidneyluo[...] 200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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