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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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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은 1994년 10월 26일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체결한 조약으로, 양국 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약 체결 이전에는 양국이 적대 관계였으며, 1987년 비밀리에 평화 협정이 추진되었으나 무산된 역사가 있다. 1990년대 초 걸프 전쟁 이후 미국의 중재로 평화 회의가 개최되었고, 1994년 워싱턴 선언을 거쳐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국경 획정, 외교 관계 수립, 안보 협력, 수자원 분배, 예루살렘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등을 담고 있다. 조약 체결 이후 양국 간 경제 관계가 개선되었으나, 이스라엘 총리의 변화, 하마스 지도자 암살 시도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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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예리코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간에 체결되어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일부와 예리코 주변 지역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설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경제 관계에 관한 의정서를 통해 경제 관계를 규정했으나 1995년 제2 오슬로 협정으로 대체되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조약 개요
명칭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원어 명칭히브리어: הסכם השלום בין ישראל לירדן
아랍어: معاهدة السلام الأردنية الإسرائيلية
별칭와디 아라바 평화 조약
유형평화 조약
서명일1994년 10월 26일
서명 장소아라바
발효일1994년 10월 26일
기탁자유엔 사무총장
인용UNTS 35325
사용 언어영어
서명 당사자
이스라엘 라빈 수상과 요르단 후세인 국왕이 악수하는 모습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수상과 요르단 후세인 1세 국왕이 평화 조약 서명 후 악수하는 모습 (중앙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이스라엘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요르단압델살람 마잘리 (요르단 총리)
조약 내용
주요 내용국경 확정
외교 관계 수립
안보 협력
수자원 문제 합의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해결 협력
추가 정보
관련 링크뉴욕 타임스 기사 (1994년 10월 27일)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 기사

2.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요르단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으나, 비공식적인 접촉과 협상 시도는 꾸준히 이어졌다. 1987년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 시몬 페레스요르단후세인 국왕은 서안 지구 문제를 포함한 평화 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페레스-후세인 런던 협정에 서명하기도 했으나, 당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1988년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간의 평화적 해결을 명분으로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다.[4][5][25][26][27]

1991년 걸프 전쟁 이후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중동 평화 프로세스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같은 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중동 평화 회의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92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평화 협상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라빈 정부는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93년에는 PLO와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을 체결했다.

오슬로 협정 체결은 요르단에게 독자적인 평화 협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은 후세인 국왕에게 오슬로 협정 이후 요르단이 중동 평화 구도에서 소외될 수 있음을 설득했다. 또한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 역시 요르단의 부채 탕감을 약속하며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 개시를 강력히 촉구했다.[6] 이러한 국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1994년 7월 25일 라빈 총리, 후세인 국왕, 클린턴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만나 양국 간의 공식적인 적대 관계 종식을 선언하고 항구적인 평화 구축을 위한 협상 시작을 알리는 워싱턴 선언에 서명했다.[6][7] 이는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체결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2. 1. 1990년대 이전의 관계

1987년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 시몬 페레스후세인 국왕은 이스라엘이 요르단에 서안 지구를 양보하는 내용의 평화 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하려 했다. 양측은 중동 평화 회담의 틀을 정의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의 반대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듬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PLO 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서안 지구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4][5]

2. 2. 페레스-후세인 런던 협정과 요르단의 입장 변화

1987년 4월 11일,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영국 런던에서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평화 조약 협상을 추진하기 위한 기본 틀로서 페레스-후세인 런던 협정에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국제 연합 사무총장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 및 중동 전쟁 관련 당사국들을 소집하여,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42호와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338호에 기반한 평화적 해결 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25]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이츠하크 샤미르는 이 합의에 반대했으며, 리쿠드 소속 각료들 역시 각료 회의에서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최종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페레스-후세인 런던 협정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8년,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간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한다는 명분 아래,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고 선언하며 PLO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26][27]

3. 조약 체결 과정

1987년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 시몬 페레스요르단후세인 국왕은 비밀리에 만나 이스라엘서안 지구를 요르단에 양보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평화 협정을 추진하고자 했다. 양측은 중동 평화 회담의 틀을 정의하는 페레스-후세인 런던 협정에 서명했으나,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이츠하크 샤미르의 반대로 인해 이 협정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8년,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PLO 간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하기 위해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4][5]

1993년 이스라엘과 PLO 간의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후, 1994년부터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평화 회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외무 장관 시몬 페레스는 후세인 국왕에게 오슬로 협정 이후의 새로운 국면에서 요르단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 평화 협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달했다. 후세인 국왕은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와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와 상의했는데, 무바라크는 협상을 격려했지만 아사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협정 서명은 피하라고 조언했다. 한편, 미국빌 클린턴 대통령은 후세인 국왕에게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그 대가로 요르단의 부채 탕감을 약속하는 등 중재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94년 7월 25일, 라빈 총리, 후세인 국왕,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만나 워싱턴 선언에 서명했다.[6][28] 이 선언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공식적인 적대 상태를 종료하고, "유혈 사태와 슬픔의 종식"과 함께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천명했다.[7]

워싱턴 선언 이후 협상은 급물살을 타, 같은 해 10월 26일 이스라엘-요르단 국경 지대인 아라바 계곡에서 역사적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29]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압델살람 알-마잘리 요르단 총리가 조약에 서명했으며, 에제르 바이츠만 이스라엘 대통령과 후세인 국왕이 악수를 나누었다. 이로써 요르단은 1979년 이집트에 이어 아랍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되었다.

3. 1. 미국의 중재 노력과 마드리드 회의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후세인 국왕에게 평화 협상을 시작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요르단의 부채를 탕감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하여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 후세인 국왕,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7월 25일 워싱턴 D.C.에서 워싱턴 선언에 서명했다.[6] 이 선언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공식적인 적대 상태를 종료하고, "유혈 사태와 슬픔의 종식"을 추구하며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명시했다.[7]

3. 2. 오슬로 협정과 이스라엘-요르단 협상

1987년 4월 11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요르단후세인 국왕영국 런던에서 비밀리에 만나, 이스라엘요르단 간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의 기본 틀을 마련하는 협정에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국제 연합 사무총장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과 중동 전쟁 관련 모든 당사국을 소집하여,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42호와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338호에 기반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25]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이츠하크 샤미르와 그의 소속 정당인 리쿠드 각료들이 이 합의에 반대하면서 결국 무산되었다. 다음 해인 1988년, 요르단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간의 평화적 해결을 지원하기 위해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PLO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4][5][26][27]

1991년 걸프 전쟁 이후 미국이 중동 평화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정치적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같은 해 10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중동 평화 회의가 열렸고, 이스라엘도 아랍 국가들과 함께 이 회의에 참여했다.

1992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여 이츠하크 라빈이 총리로 취임했다. 라빈 내각은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 관계 수립을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으며, 1993년에는 PLO와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에 관한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스라엘 제11대 총리 이츠하크 라빈


요르단 제3대 국왕 후세인 1세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평화 협상도 본격화되었다. 1994년부터 양국 간 회담이 시작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 장관은 후세인 국왕에게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요르단이 중동 평화 논의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점을 전달하며 협상을 촉구했다. 후세인 국왕은 이집트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에게 자문을 구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평화 협상을 지지했지만, 아사드 대통령은 협상 자체에는 참여하되 최종적인 합의 서명은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한편, 미국빌 클린턴 대통령은 후세인 국왕에게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시작하고 조약을 체결하도록 설득하며, 그 대가로 요르단의 부채를 탕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와 지원에 힘입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불가침 협정을 맺게 되었다. 마침내 1994년 7월 25일, 라빈 총리, 후세인 국왕,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만나 워싱턴 선언에 서명했다.[6] 이 선언을 통해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양국 간의 공식적인 적대 상태를 종식하고, "유혈과 슬픔을 끝내고"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7]

3. 3. 워싱턴 선언 (1994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가운데) 입회하에, 워싱턴 선언에 서명하는 이스라엘 라빈 총리(오른쪽)와 요르단 후세인 국왕(왼쪽)


오슬로 협정 이후 1994년, 이스라엘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은 요르단후세인 국왕에게 요르단이 "빅 게임(국제적인 주요 논의)에서 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후세인 국왕은 이 문제에 대해 이집트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과 상의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으로부터는 격려를 받았지만, 아사드 대통령으로부터는 이스라엘과는 대화만 하고 어떠한 협정에도 서명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한편, 미국클린턴 대통령 행정부는 요르단과의 평화 협상에 착수하여,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요르단의 채무 면제를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94년 7월 25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입회한 가운데 라빈 총리와 후세인 국왕은 양국 간의 전쟁 상태 종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워싱턴 선언"에 서명했다.[28] 이 선언은 이후 체결될 평화 조약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3. 4. 평화 조약 체결 (1994년)

1994년 10월 26일, 요르단이스라엘이스라엘 남부 에일라트 북쪽, 요르단 국경 근처의 아라바 계곡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8][29] 이 자리에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참석했으며,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요르단 총리 압델살람 알-마잘리가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이스라엘 대통령 에제르 바이츠만은 후세인 국왕과 악수를 나누었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워렌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았다.[29] 서명식은 수천 개의 다채로운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마무리되었다.

평화 조약 체결 후, 이스라엘 라빈 총리(우)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요르단 후세인 국왕(좌)


앞서 워싱턴 선언에 대해 요르단의 압델살람 마잘리 총리는 "전쟁 시대의 종말"이라고 발표했고,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은 "평화 시대의 도래"라고 말했다. 라빈 총리와 후세인 국왕은 미국의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이 평화 조약 체결을 이집트는 환영했지만, 시리아는 이를 무시했다. 레바논시아파 무장 단체 헤즈볼라는 조약에 반대하며, 조인식 20분 전에 북부 갈릴리 마을을 향해 박격포로켓탄 공격을 가했다.[9] 이 공격으로 인해 이스라엘 주민들은 대피소로 피해야 했지만, 두 번째 아랍 국가와의 평화 조약 체결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휴대용 TV를 챙겨갔다고 전해진다.

이 조약으로 요르단은 아랍 세계에서 이집트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되었다.

4. 조약의 주요 내용

평화 조약은 서문, 30개의 조항, 5개의 부속서 및 합의 의사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약은 영토, 안보, 물, 그리고 다양한 주제에 대한 협력 문제를 해결한다.[8]


  • '''부속서 I'''은 국경과 주권을 다룬다. 부속서 I (a)항은 1967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요르단과 서안 지구 간의 "행정 경계"를 설정하며, 해당 영토의 지위는 침해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이스라엘은 나하라임/바쿠라 지역(평화의 섬 포함)과 초파르/알 감르 지역에 대한 요르단의 주권을 인정한다.[10]
  • '''부속서 II'''는 물 및 관련 문제를 다룬다. 조약 6조에 따라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공동 물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7조).[11]
  • '''부속서 III'''은 범죄와 불법 약물 문제를 다룬다.[12]
  • '''부속서 IV'''는 환경 문제를 다룬다.[13]
  • '''부속서 V'''는 국경 통과, 여권 및 비자 문제를 다룬다. 6조는 ''"각 당사국은 자국의 규정에 따라 입국을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한다.[14]
  • '''''합의 의사록'''''은 평화 조약의 이행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15]


조약 본문에서는 완전한 외교 관계 수립, 안보 및 방위 협력, 예루살렘이슬람교 성지에 대한 요르단의 특별한 역할 인정,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협력 등 양국 간의 주요 현안에 대한 합의 내용을 담고 있다.

4. 1. 국경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국제 국경선은 요르단강야르무크강, 사해, 아라바 계곡, 아카바만을 따른다.[10] 서안 지구와 요르단을 분리하는 경계선은 "[해당] 영토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었다.[10]

4. 2. 외교 관계 및 협력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완전한 외교 및 영사 관계를 수립하고, 서로 대사관을 설치하여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관광객에게 비자를 발급하고, 항공 여행과 항구를 개방하며, 자유 무역 지대와 아라바 지역에 산업 단지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 협정은 양국 간 적대적인 선전 활동을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한다.

4. 3. 안보 및 방위

각국은 상호 주권영토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허가 없이 상대방 영토에 진입하지 않으며, 테러에 맞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여기에는 국경 공격, 밀수 행위 저지, 상대방에 대한 적대적 공격 방지 및 상대방을 상대로 한 테러 조직과의 비협력이 포함되었다.

4. 4. 예루살렘

평화 조약 제9조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문제를 다룬다. 이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내 이슬람교 성지에 대한 요르단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하였다. 또한, 예루살렘의 영구적인 지위에 대한 향후 협상에서 이러한 성지에 대한 요르단의 역사적 역할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로 약속했다.

4. 5. 수자원

이스라엘은 매년 요르단에 5000만m3의 물을 제공하고, 요르단이 야르무크 강 물의 75%에 대한 수리권을 갖기로 합의했다.[16] 양국은 다른 수자원저수지를 공동으로 개발할 수 있으며, 가뭄 시 서로 돕기로 합의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추가적인 물을 확보하기 위해 담수화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돕기로 합의했다.[16]

4. 6.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요르단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팔레스타인이 참여하는 4자 위원회를 통해 노력하기로 했다.

5. 조약 체결 이후의 영향과 과제

평화 조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요르단은 국경을 개방하고 여러 국경 검문소를 설치하여 관광객, 사업가, 노동자들이 양국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17] 특히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페트라 등 요르단의 명소를 방문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경제적으로도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양국 간 무역량이 약 10배 증가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5년 11월, 평화 협상의 주역이었던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노선에 반대하는 유대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라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직접 라빈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통해 평화 의지를 강조했으나, 이 사건은 평화 프로세스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96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후세인 국왕은 네타냐후 정부의 동예루살렘 정착촌 건설 강행과 성전산 인근에서의 도발적인 행동 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깊은 실망감을 표출했다.[20] 이러한 갈등 속에서 1997년에는 요르단 군인이 이스라엘 여학생들을 살해한 평화의 섬 학살 사건과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이 요르단 내에서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샬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며 양국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특히 모사드 암살 시도 사건 당시 후세인 국왕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를 요청하며 이스라엘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평화 조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요르단 내에서도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에 대한 반대 여론을 키웠고, 후세인 정부는 언론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등 내부 통제를 강화하기도 했다. 1997년 요르단 총선은 주요 야당의 보이콧 속에 치러졌다.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긴장과 협력이 교차하는 양상을 보였다. 2013년에는 홍해-사해 간 수로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해수 담수화 시설 건설에 합의하기도 했으나[23][32], 2018년 요르단은 평화 조약에 따라 이스라엘에 임대했던 국경 지역 영토(נהריים|나하라임heb과 الغامر|알감르ara)의 임대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고[24][33], 2019년 해당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다[34]. 이는 평화 조약 이후에도 양국 간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5. 1. 양국 관계 변화



평화 조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국경을 개방하고 여러 국경 검문소를 설치하여 관광객, 사업가, 노동자들이 양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17] 특히 이스라엘 관광객들의 요르단 방문이 증가했는데, 많은 이들이 나바테아 왕국의 고대 도시 유적인 페트라를 찾았다. 경제 관계도 크게 개선되어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양국 간 무역량이 약 10배 증가했다.

1996년 10월, 빌 클린턴 대통령,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지도자


그러나 긍정적인 관계 변화 속에서도 불안정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1995년 11월 4일, 평화 조약을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노력에 반대하는 유대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평소 라빈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라빈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직접 추도 연설을 했다. 이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후세인 국왕의 첫 예루살렘 방문이었다.

1996년 5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후세인 국왕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이후 네타냐후를 지지했지만, 네타냐후 정부의 동예루살렘 정착촌 건설 결정과 성전산 터널 굴착 사건 등으로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7년 3월 9일, 후세인 국왕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평화라는 가장 가치 있는 목표가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점점 더 멀어지고 신기루처럼 보인다"며 깊은 실망감을 표현했다.[20]

며칠 뒤인 3월 13일, 요르단 군인이 국경 지역 평화의 섬 인근에서 이스라엘 여학생 7명을 살해하는 평화의 섬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 국왕은 즉시 이스라엘로 건너가 희생자 유족들을 직접 만나 애도를 표하며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운 범죄이며, 마치 내 아이를 잃은 것 같다"고 위로했다.[21] 후세인은 유족들에게 총 100만달러를 생명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보냈다. 이 사건의 범인인 요르단 군인은 정신 불안정 판정을 받고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9월 27일에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이 요르단 내에서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샬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원들은 마샬에게 독극물을 주입했으나 경호원에게 체포되었고, 요르단 경찰에 구금되었다. 분노한 후세인 국왕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해독제 제공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하며 이스라엘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평화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해독제를 제공했고,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한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모사드 요원들을 돌려받았다. 이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양국은 협력을 이어가기도 했다. 2013년 12월,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홍해-사해 운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요르단 아카바 인근 홍해에 해수 담수화 시설을 건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23][32]

한편, 2018년 10월,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은 평화 조약 부속서에 따라 25년간 이스라엘에 임대했던 국경 지역 영토인 נהריים|나하라이임heb(바쿠라)과 الغامر|알 감르ara의 임대 계약 연장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이스라엘에 통보했다.[24][33] 이에 따라 2019년 11월 10일 임대 기간이 만료되었고, 요르단은 해당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음을 선언했다.[34]

5. 2. 이츠하크 라빈 암살과 후세인 국왕의 역할

1995년 11월 4일,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라빈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노력을 훼손하려는 유대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라빈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후세인 국왕은 라빈의 예루살렘 장례식에 초청받아 연설을 했다. 이는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후세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첫 사례였다. 후세인은 연설에서 1951년 자신의 할아버지 압둘라 1세가 예루살렘에서 암살당했던 사건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부끄럽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친구가 쓰러졌던 유산을 이어갈 결의를 다질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

라빈 암살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좌파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와 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직을 놓고 경쟁했다. 당시 모사드 국장이었던 에프라임 할레비에 따르면, 후세인 국왕은 페레스를 불신하여 네타냐후를 선호했고,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19] 1996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네타냐후 집권 이후 후세인의 네타냐후 지지는 곧 역효과를 낳았다. 1996년 이스라엘의 남부 레바논 가나 학살, 리쿠드 정부의 동예루살렘 정착촌 건설 결정, 성전산 주변 터널 굴착 이후 발생한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 등은 아랍 세계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강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997년 3월 9일, 후세인은 네타냐후에게 세 쪽짜리 편지를 보내 깊은 실망감을 표현했다. 그는 네타냐후의 행동이 평화 달성을 요원하게 만들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20]

> 제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목표인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점점 더 멀어지고 덧없는 신기루처럼 보이게 하는, 이스라엘 정부 수반으로서 당신이 시작한 축적된 비극적인 행동들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고통을 느낍니다. 피와 재앙의 심연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든 아랍인과 이스라엘인의 삶과 그들의 미래가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 야기되지 않았다면 저는 무관심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 노선은 제가 믿거나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듯합니다.

> -- 후세인 국왕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보낸 1997년 3월 9일자 편지에서[20]

편지를 보낸 지 나흘 뒤인 3월 13일, 요르단 군인이 평화의 섬 근처 국경에서 이스라엘 여학생 7명을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평화의 섬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 국왕은 즉시 귀국하여 이스라엘 마을 베이트 셰메쉬로 가서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직접 만나 애도를 표했다. 그는 유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운 범죄입니다. 저는 마치 제 아이를 잃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라고 말하며 위로했다.[21] 후세인의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 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그는 유족들에게 총 100만달러의 보상금을 전달했다. 해당 요르단 군인은 군사 법원에서 정신 불안정 판정을 받고 2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997년 9월 27일, 8명의 모사드 요원이 위조된 캐나다 여권으로 요르단에 입국하여 하마스의 지도자인 요르단 시민 칼레드 마샬을 암살하려 시도했다. 두 명의 요원이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했으나 경호원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나머지 요원들은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에 격분한 후세인 국왕은 네타냐후가 해독제 제공을 거부하자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하며, 이스라엘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평화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클린턴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은 해독제를 제공하고,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한 요르단인 및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모사드 요원들을 돌려받았다. 이 사건으로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에 대한 요르단 내부의 반대가 거세지자, 후세인 정부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화하는 등 국내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르단의 주요 반대 세력들은 1997년 요르단 총선을 보이콧했다. 1998년, 요르단은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보유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네타냐후 정부의 요르단 영공 사용 요청을 거부했다.

5. 3.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집권과 양국 관계 악화

1996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좌파 노동당시몬 페레스를 누르고 총리로 당선되었다. 후세인 국왕은 선거 과정에서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나중에는 네타냐후 지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페레스 총리에 대한 개인적인 불신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19] 그러나 후세인의 네타냐후 지지는 곧 양국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네타냐후 정부 출범 이후 이스라엘의 남부 레바논 가나 학살(1996년), 동예루살렘에서의 정착촌 건설 강행, 성전산 주변 터널 굴착으로 인한 팔레스타인과의 충돌 등 일련의 사건들은 아랍 세계 전반에 걸쳐 네타냐후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평화 프로세스의 후퇴에 실망한 후세인 국왕은 1997년 3월 9일, 네타냐후 총리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편지에서 "제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목표인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점점 더 멀어지고 덧없는 신기루처럼 보이게 하는, 이스라엘 정부 수반으로서 당신이 시작한 축적된 비극적인 행동들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고통을 느낍니다... 당신의 행동 노선은 제가 믿거나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듯합니다."라고 네타냐후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20]

후세인 국왕의 편지가 전달된 지 불과 나흘 뒤인 1997년 3월 13일, 요르단 북부 국경 평화의 섬 인근에서 요르단 군인이 이스라엘 여학생 7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평화의 섬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해외 순방 중 소식을 접한 후세인 국왕은 즉시 귀국하여 이스라엘 베이트 셰메쉬 마을을 직접 방문, 희생자 유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애도를 표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운 범죄"라며 "마치 내 아이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21] 후세인 국왕의 진심 어린 사과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요르단 정부는 유족들에게 총 100만달러의 보상금을 전달했다. 해당 요르단 군인은 군사 재판에서 정신 불안정 판정을 받고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양국 관계는 1997년 9월 27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 칼레드 마샬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인해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캐나다 위조 여권으로 입국한 모사드 요원 8명 중 2명이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했으나 경호원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나머지 6명은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은 후세인 국왕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휴전을 중재하던 중에 발생했으며, 국왕은 "내 얼굴에 침을 뱉은 것 같은 기분"이라며 격노했다. 요르단 당국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마샬의 해독제 제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스라엘 대사관 강제 진입과 평화 조약 파기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후세인 국왕의 요청으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여 네타냐후 총리를 설득했고, 이스라엘은 해독제를 제공했다. 마샬은 목숨을 건졌고, 이스라엘은 체포된 모사드 요원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수감 중이던 하마스 정신적 지주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한 요르단인 및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수십 명을 석방해야 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요르단 관계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에 대한 요르단의 반대가 거세지자 후세인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화했다. 라이스 슈베일라트를 포함한 여러 반체제 인사들이 투옥되었다. 투옥된 지 몇 달 후, 국왕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인 슈베일라트를 스와카 교도소에서 직접 집으로 태워다 주었다.[22] 그러나 이러한 탄압으로 요르단의 반대 단체들은 1997년 요르단 총선을 보이콧했다. 1998년 요르단은 사담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네타냐후의 이라크 공격에 요르단 영공을 사용하라는 비밀 요청을 거부했다.

5. 4. 최근 상황

2013년 12월, 이스라엘요르단은 Red Sea–Dead Sea Water Conveyance|홍해-사해 운하 프로젝트eng의 일환으로 요르단의 아카바 인근 홍해에 해수 담수화 시설을 건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32].

2018년 10월 21일,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2세는 평화 조약 부속서에 따라 이스라엘에 25년간 임대했던 요르단 영토 두 곳, 즉 Naharayim|나하라임eng(바쿠라)과 Al Ghamr|알 감르eng 지역의 임대 기간 연장을 거부하겠다고 이스라엘 측에 통보했다[33]. 이후 2019년 11월 10일 임대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요르단은 해당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 회복을 선언했다[34].

6. 한국의 입장과 역할 (더불어민주당 관점 반영)

대한민국이스라엘요르단 양국 모두와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정부는 1994년 체결된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을 공식적으로 환영하며, 이 조약이 양국 관계 발전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민국의 주요 정당들은 중동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포함한 국제 정세 안정에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비롯한 역내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지지하며, 관련 당사국 간의 대화와 협력을 통한 해법 모색을 강조해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앞으로도 중동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위해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역내 국가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과 개발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이는 중동 지역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하려는 한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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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웹사이트 Disengagement from the West Bank http://www.kinghusse[...]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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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사이트 В.П. Панкратьев. Иордано-израиль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http://www.vostokove[...] Центр исследования общих проблем современного Востока ИВ РАН 2014-06-14
[30] 웹사이트 В.П. Панкратьев. Иордано-израиль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http://www.vostokove[...] Центр исследования общих проблем современного Востока ИВ РАН 2014-06-14
[31] 웹사이트 Main Points of Israel-Jordan Peace Treaty http://www.mfa.gov.i[...] Министерство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Израиля 2014-06-14
[32] 웹사이트 Can an Unlikely Middle East Pact Give Life to the Dead Sea? http://world.time.co[...] 2017-11-12
[33] 뉴스 平和条約の一部、延長せず ヨルダン、イスラエルに通知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9-11-29
[34] 뉴스 イスラエルの使用権が期限切れ ヨルダン領の土地2カ所 https://web.archive.[...] 共同通信 2019-11-29
[35] 웹인용 Israel and Jordan Sign a Peace Accord https://www.nytimes.[...] 201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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