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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죠 사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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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죠 사네마사는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로, 사이온지 킨츠네의 유자였으며, 가마쿠라 막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암살을 목격했다. 그는 호조 요시토키의 딸과 결혼하여 막부 내에서 세력을 구축했으나, 장모 이가노카타가 호조 마사무라를 옹립하려 한 이가씨 사건에 연루되어 쇼군으로 추대될 뻔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에치젠으로 유배되었으며, 4년 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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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죠 사네마사
기본 정보
이치죠 사네마사
이치죠 사네마사 초상화
이름이치죠 사네마사
로마자 표기Ichijō Sanemasa
생몰년도1842년 ~ 1918년
작위공작
신분공가
가계
아버지이치죠 타다요시
어머니이에사다의 생모 혼죠 나루코의 여동생
부인히로하시 야스코 (히로하시 무네미쓰의 딸)
자녀이치죠 사네테루
야마모토 요시마사 (야마모토 요시쓰구의 양자)
딸: 구조 미치자네의 부인
딸: 다카쓰카사 히로타다의 부인
딸: 고노에 아쓰마로의 부인
딸: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의 부인
관위
1854년종5위하
1863년종3위
1868년정2위
1869년종2위
1871년정2위
1884년공작
1915년종1위

2. 약력

이치죠 사네마사는 매형인 사이온지 킨츠네의 유자가 되었다. 겐포 6년(1218년) 가마쿠라 막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사다이쇼 임명을 계기로 가마쿠라로 내려갔고, 이듬해 사네토모 암살 사건을 목격했다. 이후 차기 쇼군 미토라를 보좌하며 가마쿠라에 머물렀고, 조큐 원년(1219년)에는 싯켄 호조 요시토키의 딸과 혼인하여 막부 내에서 입지를 다졌다[1][4]. 그러나 겐닌 원년(1224년) 호조 요시토키 사후 발생한 이가씨의 변에 연루되어 에치젠으로 유배되었고, 안테이 2년(1228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6].

2. 1. 가마쿠라 막부에서의 활동

매형인 사이온지 킨츠네의 유자가 되었다. 겐포 5년(1217년)에는 이요노카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겐포 6년(1218년)에는 사쇼쇼를 겸하게 되어 이요노쇼쇼라고 불렸다. 같은 해,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사다이쇼 직위를 받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내려갔다. 이후 가마쿠라에 머물던 중, 겐포 7년(1219년) 1월, 사네토모가 우다이진 취임을 위해 쓰루오카 하치만구에 참배하는 행렬을 따랐다가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사네토모 사후, 그의 누나의 손자인 미토라(후의 쿠조 요리츠네)가 다음 쇼군으로 결정되자, 사네마사는 미토라가 가마쿠라로 내려오는 것을 교토에서부터 수행했다. 조큐 원년(1219년) 10월 20일에는 당시 막부의 싯켄이었던 호조 요시토키의 딸과 결혼하였고[1], 조큐 2년(1220년) 8월 6일에는 아들을[2], 조큐 4년(1222년) 2월 12일에는 딸을 낳았다[3]. 또한 조큐 3년(1221년)에는 사누키노카미로 임명되었고, 조큐 4년(1222년)에는 가마쿠라에 머무는 상태로 산기에 임명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이처럼 사네마사는 쇼군 미토라의 측근이자 싯켄 요시토키의 사위라는 위치를 바탕으로 막부 정치에 관여하였으며, 고케닌들을 모아 독자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막부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4].

그러나 겐닌 원년(1224년), 장인이었던 호조 요시토키가 사망하자, 장모인 이가노 카타와 그녀의 오빠 이가 미츠무네가 요시토키의 후계자로 이가노 카타 소생의 아들인 호조 마사무라를 옹립하려 했다는 이가씨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 씨 측이 사네마사를 기존의 쇼군 미토라 대신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네마사는 아내와 강제로 이혼당하고 교토로 보내졌다가, 결국 에치젠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이가씨가 실제로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호조 야스토키(요시토키의 아들이자 후계자)는 이가씨의 모반설을 부인했으며,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서도 이가씨가 모반을 기도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고, 호조 마사코(요시토키의 누나이자 막부의 실력자)에 의해 이가씨 일족이 처벌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가씨 사건은, 요시토키 사후 쇼군이나 호조 가문의 권력 변동으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호조 마사코가, 요시토키 후처의 친정인 이가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5].

사네마사는 유배된 지 4년 후인 안테이 2년(1228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6]. 한편, 사네마사와 이혼한 요시토키의 딸은 카로쿠 원년(1225년) 11월 이후 교토의 공가인 카라스마 토키토키와 재혼했다[7].

2. 2. 이가씨의 변과 몰락

이치죠 사네마사는 매형인 사이온지 킨츠네의 유자가 되었다. 겐포 5년(1217년)에 이요노카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겐포 6년(1218년)에는 사쇼쇼를 겸하여 이요노쇼쇼(伊予少将)라 불렸다. 같은 해,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사다이쇼에 임명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내려갔다. 그대로 가마쿠라에 머물던 중, 겐포 7년(1219년) 1월, 사네토모가 우다이진 취임을 위해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 참배할 때 동행했다가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는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

사네토모 사후, 사네마사의 누나 손자인 미토라(훗날의 쿠조 요리츠네)가 다음 쇼군으로 결정되자, 사네마사는 미토라가 가마쿠라로 내려오는 것을 교토에서부터 수행하며 가마쿠라에 남아 그의 보좌역을 맡았다. 조큐 원년(1219년) 10월 20일에는 당시 싯켄이었던 호죠 요시토키의 딸과 혼인하였고[1], 이듬해인 조큐 2년(1220년) 8월 6일에는 아들을[2], 조큐 4년(1222년) 2월 12일에는 딸을 얻었다[3]. 또한 조큐 3년(1221년)에는 사누키노카미로 옮겼으며, 조큐 4년(1222년)에는 가마쿠라에 머무는 상태로 참의에 임명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미토라의 측근이자 싯켄 요시토키의 사위라는 위치를 통해 막부 내부 정치에도 관여하였고, 고케닌들을 모아 독자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막부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4].

그러나 겐닌 원년(1224년), 장인이었던 호죠 요시토키가 사망하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장모인 이가노카타와 그녀의 오빠 이가 미츠무네가 요시토키의 후계자로 이가노카타 소생의 아들인 호죠 마사무라를 내세우려 하고, 동시에 사네마사를 쇼군 미토라 대신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이가씨의 변이 발생했다.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사네마사는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결국 그는 아내와 강제로 이혼당하고 교토로 송환된 뒤, 에치젠국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이가씨가 실제로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호죠 야스토키 스스로가 모반의 풍문을 부인했으며, 막부의 공식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에서도 이가씨가 모반을 기도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고, 호죠 마사코에 의해 이가씨 일족이 처벌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었다. 이 때문에 이가씨의 변은 호죠 요시토키 사후 권력 구도 변화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호죠 마사코가, 요시토키의 후처 집안인 이가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도 유력하게 제기된다[5].

유배된 지 4년 후인 안테이 2년(1228년), 사네마사는 유배지인 에치젠에서 사망하였다[6]. 한편, 사네마사와 이혼한 요시토키의 딸은 카로쿠 원년(1225년) 11월 이후, 공가인 카라스마 토키토키와 재혼하였다[7].

3. 계보


  • 아버지: 이치조 요시야스
  • 어머니: 이에뇨보 또는 가녀방 (후지와라노 아리쓰네의 딸)
  • 아내: 호조 요시토키의 딸
  • 생모 불명의 자녀
  • * 아들: 이치조 사네아키
  • * 아들
  • * 딸

참조

[1] 서적 吾妻鏡 1219-11-26 #承久元年10月20日-> 1219
[2] 서적 吾妻鏡 1220-09-13 #承久2年8月6日-> 1220
[3] 서적 吾妻鏡 1222-03-15 #承久4年2月12日-> 1222
[4] 서적 鎌倉幕府連署制の研究 岩田書院
[5] 서적 鎌倉幕府の転換点 「吾妻鏡」を読みなおす 日本放送出版協会
[6] 서적 尊卑分脈
[7] 서적 明月記 1225-01-01 #嘉禄元年11月19日->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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