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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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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흠은 오호십육국 시대 서량의 후주로, 417년 부친 이고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무능하고 신하들에게 가혹하게 대했으며, 과도한 토목 공사와 형벌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420년 북량 정벌에 나섰다가 저거몽손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처형당했고, 그의 죽음으로 서량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이흠의 아들 이중이는 당 고조 이연의 6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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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흠
기본 정보
이름이흠
작위양공
가문이씨
씨족불명
흠 (歆)
시호없음
묘호없음
아버지이굉
사망일420년
즉위서량 군주
통치 기간417년–420년
이전 통치자이굉
다음 통치자이순
왕조서량
연호가흥
연호 기간417년–420년
관직
417–418대도독, 대장군, 양공, 량주목, 호강교위
418–420지절, 도독칠군제군사, 진서대장군, 호강교위, 주천

2. 생애

이고는 417년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후주(後主) 이흠이 뒤를 계승했으나, 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무능하며,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인망이 없었다. 또한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여 420년 북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저거몽손에게 대패하여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그 후 후주의 동생이었던 관군후(冠軍侯) 이순이 곽황으로 도망쳐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그도 421년에 저거몽손의 공격을 받아 죽게되어, 서량은 완전히 멸망했다. 아들 이중이(李重耳)는 당 고조의 6대조였다.

건초 13년(417년), 부친의 훙거로 공위에 올랐다. 부친의 정책을 계승하여 동진에 신종했으며, 가흥 2년(418년)에는 동진으로부터 도독 7군 제군사, 진서대장군, 주천공에 봉해졌다. 그러나 부친과 달리 어리석어 가신들을 함부로 처벌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며, 성의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여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겨 재정난을 초래하는 등 국력 쇠퇴를 불렀다.

가흥 4년(420년)에는 북량으로의 원정을 계획했다. 가신들은 이에 맹렬히 반대했지만, 후주는 이를 듣지 않고 원정을 강행하여, 오히려 북량의 태조 무선왕(거거몽손)에게 대패하여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후주의 죽음으로 서량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여겨진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이흠은 서량 무소왕 이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와 어머니 은부인이 정실 부인이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400년, 아버지가 서량을 건국했을 때 형 이담(李譚)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404년 이담이 사망하자 이흠이 태자가 되었다.

410년, 이흠은 북량의 왕자 저거몽손과 전투를 벌였는데, 저거몽손이 서량을 공격했을 때 패배하여 그의 장군 주원호(朱元虎)가 포로로 잡혔고, 이고는 금과 은을 사용하여 주원호를 몸값을 치르고 데려와야 했다. 411년, 그는 보답으로 저거몽손이 서량을 다시 공격했지만 식량 부족으로 철수하자, 이흠은 북량 군대를 공격하여 저거몽손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저거몽손의 장군 거거백년(沮渠百年)을 사로잡았다.

417년, 이고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흠이 뒤를 이어 서량 공작(公爵)이 되었다. 이때 이고는 이흠을 이복동생 송요(宋繇)에게 맡겼다.

2. 2. 통치 기간

이흠은 417년 아버지 이고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고 신하들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아 인망이 없었다. 즉위 후, 숙부 송요를 재상으로 임명했으나, 가혹한 형벌을 남용하고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418년에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 될 의사를 밝혀 주천공(酒泉公)에 봉해졌다.

419년, 신하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형벌과 건설 사업을 지속하여 민심을 잃었다.

420년, 북량저거몽손의 계략에 빠져 북량 원정을 강행했다가 대패하고 처형당했다. 이흠의 사망으로 서량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2. 3. 서량의 멸망

이고는 417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후주(後主) 이흠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고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아 인망이 없었다.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궁궐 건설 사업을 선호하여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으며, 신하의 간언을 무시했다. 418년에는 동진으로부터 도독 7군 제군사, 진서대장군, 주천공에 봉해졌다.

420년, 저거몽손이흠에게 함정을 설치했다. 서진의 하오문(浩亹, 현대의 해동시, 칭하이성)을 공격하는 척했지만, 하오문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철수하여 군대를 촨옌(川巖, 장액 근처)에 숨겼다. 이흠저거몽손의 방어가 약해졌다고 잘못 믿고, 송요와 장체순의 조언에 반하여 장액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흠북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저거몽손에게 대패하여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그 후 후주의 동생이었던 관군후(冠軍侯) 이순이 곽황으로 도망쳐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그도 421년저거몽손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되어, 서량은 완전히 멸망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5. 기타

이흠의 아들 이중이는 유송과 북위의 관료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 이연당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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