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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정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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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정치 통합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독립한 후, 다양한 번왕국들을 인도 공화국에 통합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국은 병합과 간접 통치 방식을 통해 번왕국을 관리했으며, 인도 독립 이후 영국은 최고 권위를 포기했다.

인도 국민 회의는 번왕국의 독립을 반대하며 통합을 추진했고, 루이 마운트배튼, 발라브바이 파텔, V. P. 메논 등은 외교와 압력을 통해 가입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번왕국은 1950년까지 인도에 통합되었지만, 하이데라바드, 잠무 카슈미르 등 일부 지역은 통합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다.

통합 이후 번왕국 통치자들은 사적 지갑과 공직을 통해 보상을 받았지만, 일부는 불만을 품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령 및 포르투갈령 월경지 통합, 시킴의 합병, 분리주의 운동 등 통합 이후에도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다. 통합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며, 인도 정부의 강압적인 통합 추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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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정치 통합
개요
1909년경의 영국령 인도 지도
1909년경의 영국령 인도 지도
제목인도의 정치 통합
다른 이름인도의 통일
위치인도 아대륙
기간1947년 – 1956년
목표인도 내 모든 공국의 통합
단일 인도 연방 창설
방법외교적 협상
정치적 설득
군사적 행동 (제한적)
결과대부분의 공국이 인도에 가입
몇몇 공국은 파키스탄에 가입
일부 분쟁 발생 (잠무 카슈미르, 주나가드, 하이데라바드)
주요 인물
주도 인물사르다르 발라바이 파텔
자와할랄 네루
V. P. 메논
기타 관련 인물루이스 마운트배튼
각 공국의 통치자
배경
인도 독립1947년 인도 독립법 통과
공국의 지위영국으로부터 자치권 획득, 인도 또는 파키스탄 가입 선택권 부여
통합의 필요성국가 안보 강화
경제 발전 촉진
정치적 안정 확보
통합 과정
협상 및 설득파텔과 메논은 공국 통치자들과 적극적인 협상 진행
가입 조약대부분의 공국이 인도 가입 조약 체결
군사적 개입하이데라바드 등 일부 공국에 대해 군사적 개입 (제한적)
국민투표주나가드 등 일부 지역에서 국민투표 실시, 인도 가입 결정
주요 사건
주나가드 합병국민투표를 통해 인도에 합병
하이데라바드 합병폴로 작전(군사 작전)을 통해 인도에 합병
잠무 카슈미르 분쟁파키스탄과의 분쟁, 현재까지 미해결 상태
결과 및 영향
인도의 통합562개의 공국이 인도에 통합되어 단일 국가 형성
정치적 영향인도 민주주의 강화, 국가 통합의 기반 마련
경제적 영향경제 발전 촉진, 지역 간 불균형 해소 노력
사회적 영향사회 통합 증진, 카스트 및 종교 갈등 완화 노력
평가
긍정적 평가국가 통합의 성공적인 사례
사르다르 파텔의 리더십 부각
비판적 평가일부 공국에 대한 강압적인 합병 방식
카슈미르 분쟁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

2. 인도의 번왕국과 통합 배경

영국은 인도 통치 초기에 번왕국을 인도 제국에 강제로 흡수하려는 병합 정책을 펼쳤으나, 1857년 인도 반란 이후 번왕국과 종속 동맹을 통해 간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5][6][7][8] 1921년 번왕국 회의소를 창설하는 등 번왕국을 영국령 인도와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10][13]

인도 독립 이후 영국은 번왕국과의 조약을 종료하고 최고 권위를 포기했다.[16] 이는 번왕국들이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하나와 자유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17]

인도 국민 회의는 번왕국의 독립을 인도의 "발칸화"로 간주하여 반대했다.[19] 자바할랄 네루는 번왕국이 인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24] 번왕국의 인도 통합을 추진했다. 1946년 7월, 네루는 어떤 번왕국도 독립 인도의 군대에 군사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1]

루이 마운트배튼은 번왕국의 인도 통합이 인도 분할의 상처를 완화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합을 지지했다.[30]

반면, 힌두 마하사바는 번왕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인도 독립 이후에도 독립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V. D. 사바르카르는 특히 힌두교가 지배하는 국가를 '힌두 권력의 초석'으로 칭송하고 그들의 독재 권력을 옹호하며 그들을 '조직화된 힌두 권력의 요새'라고 칭했다.[31][32]

2. 1. 영국의 인도 통치와 번왕국

영국은 인도에서 팽창하던 초기 역사에서 기존의 번왕국에 대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5] 첫 번째는 병합 정책으로, 영국은 인도의 번왕국을 인도 제국을 구성하는 주로 강제로 흡수하려 했다. 두 번째는 간접 통치 정책으로, 영국은 번왕국에 대한 최고 권위를 가정했지만, 그들에게 주권과 다양한 정도의 내부 자치 정부를 인정했다.[6] 19세기 초, 영국의 정책은 병합 쪽으로 기울었지만, 1857년 인도 반란은 병합된 국가를 흡수하고 진압하는 어려움과 번왕국이 지원의 원천으로 유용함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접근 방식의 변화를 강요했다.[7] 1858년, 병합 정책은 공식적으로 포기되었고, 이후 남은 번왕국과의 영국의 관계는 영국이 모든 번왕국에 대해 최고 권위를 행사하고, 영국 군주를 최종적인 종주국으로 삼는 종속 동맹에 기초했지만, 동시에 동맹국으로 존중하고 보호하며 대외 관계를 통제했다.[8] 영국과 각 번왕국 간의 정확한 관계는 개별 조약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일부 국가는 완전한 내부 자치를, 다른 국가는 내부 문제에 대한 상당한 통제를 받았으며, 일부 통치자는 사실상 자율성이 거의 없는 토지 소유주에 불과했다.[9]

20세기 동안, 영국은 번왕국을 영국령 인도와 더욱 긴밀하게 통합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다. 1921년 자문 및 권고 기구인 번왕국 회의소를 창설하고,[10] 1936년에는 소규모 국가에 대한 감독 책임을 주에서 중앙으로 이전하고 인도 정부와 대규모 번왕국 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수립하여 정치적 대리인을 대체했다.[11] 더 야심 찬 목표는 1935년 인도 정부법에 포함된 연방 계획이었으며, 이는 번왕국과 영국령 인도를 연방 정부 아래 통합하는 것을 구상했다.[12] 이 계획은 성공에 근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1939년에 폐기되었다.[13] 그 결과, 1940년대에 번왕국과 군주 간의 관계는 최고 권위의 원칙과 영국 군주와 국가 간의 다양한 조약에 의해 규제되었다.[14]

2. 2. 인도 통합의 이유

영국은 인도 통치 초기에는 번왕국을 인도 제국에 강제로 흡수하려는 병합 정책을 펼쳤으나, 1857년 인도 반란 이후 번왕국과의 종속 동맹을 통해 간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5][6][7][8] 1921년 번왕국 회의소 창설 등을 통해 번왕국을 영국령 인도와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10]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13]

인도 독립 이후, 영국은 번왕국과의 조약을 종료하고 최고 권위를 포기했다.[16] 이는 번왕국들이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하나와 자유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17]

인도 국민 회의는 번왕국의 독립을 인도의 "발칸화"로 간주하여 반대했다.[19] 자바할랄 네루는 번왕국이 인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24] 번왕국의 인도 통합을 추진했다. 1946년 7월, 네루는 어떤 번왕국도 독립 인도의 군대에 군사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1]

루이 마운트배튼은 번왕국의 인도 통합이 인도 분할의 상처를 완화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합을 지지했다.[30]

반면, 힌두 마하사바는 번왕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인도 독립 이후에도 독립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V. D. 사바르카르는 특히 힌두교가 지배하는 국가를 '힌두 권력의 초석'으로 칭송하고 그들의 독재 권력을 옹호하며 그들을 '조직화된 힌두 권력의 요새'라고 칭했다.[31][32]

3. 통합 과정

인도의 번왕국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인도에 통합하는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잠칸디 번왕국이 가장 먼저 통합되었고, 비카네르, 자와르 통치자들처럼 이념적, 애국적 이유로 인도 합류를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34] 그러나 일부 통치자들은 인도나 파키스탄 합류, 또는 독립 유지를 주장했으며, 보팔 번왕국, 트라방코어, 하이데라바드는 어느 쪽에도 합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35][36]

이러한 상황에서 마운트배튼 경,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V. P. 메논은 번왕국들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마운트배튼 경은 영국 왕실과의 관계, 군주들과의 친분을 활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48]

루이 마운트배튼


파텔과 메논은 의회의 정책을 통해 번왕들을 인도에 합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회는 번왕국이 주권 실체가 아니며, 초월권 종료 후 독립을 선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번왕국은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합병되어야 했다.[57]
발라브바이 파텔


마운트배튼은 군주들에게 영국 정부가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며, 영연방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인도나 파키스탄에 가입하지 않는 한 영국 왕실이 모든 관계를 끊을 것임을 의미했다.[50] 또한 인도 아대륙이 하나의 경제적 실체이며, 국가들이 이 연결이 끊어질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51]

자바할랄 네루는 번왕국이 독립 인도의 군대에 군사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하며 압박했다.[1]

이러한 노력의 결과, 가입 문서라는 법적 장치를 통해 번왕국 통치자는 왕국을 독립 인도에 가입하는 데 동의했다.[35] 이 문서는 국방, 외교, 통신 등 세 가지 사항에 대한 통제권을 인도 정부에 부여했다.[63] 1947년 5월부터 8월 15일 권력 이양까지 대다수의 번왕국이 가입 문서에 서명했다.

3. 1. 번왕국의 입장

번왕국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독립 인도에 통합하는 데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잠칸디 번왕국이 가장 먼저 통합되었고, 비카네르, 자와르 통치자들처럼 이념적, 애국적 이유로 인도 합류를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34] 그러나 일부 통치자들은 인도나 파키스탄 합류, 또는 독립 유지, 자신들만의 연합 형성을 주장했다.[35] 보팔 번왕국, 트라방코어, 하이데라바드는 어느 쪽에도 합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36]

하이데라바드는 유럽 국가에 무역 대표를 임명하고, 고아를 임대 또는 구매하여 바다로의 접근을 확보하고자 포르투갈과 협상했다.[37] 트라방코어는 토륨 매장량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정을 요구했다.[38] 일부는 인도와 파키스탄 외 제3의 실체로서 아대륙 전체의 연합을 제안하기도 했다.[39] 보팔은 의회의 압력에 대응하고자 번왕국과 무슬림 연맹 간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40]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비(非)무슬림 다수 번왕국이 인도 가입에 동의한 요인들이 있었다. 군주들 간 단결 부족이 중요했는데, 소규모 주들은 대규모 주들을 불신했고, 많은 힌두교 통치자들은 독립의 주요 지지자인 보팔의 나와브 하미둘라 칸을 파키스탄 대리인으로 여겨 신뢰하지 않았다.[41] 통합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의회와 관계를 맺어 발언권을 얻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통일 전선 부재와 무슬림 연맹의 제헌 의회 불참 결정은 의회와의 협상에서 군주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42][43] 1947년 4월 28일, 바 로다, 비카네르, 코친, 괄리오르, 자이푸르, 조드푸르, 파티알라, 레와가 제헌 의회에 참여하면서 보이콧 시도는 실패했다.[44]

많은 군주들은 인도와의 통합을 선호하는 대중 정서에 압력을 받았다.[45] 트라방코어 마하라자는 C. P. 라마스와미 아이에르 경 암살 시도 후 독립 계획을 포기했다.[46] 일부 주에서는 수상 또는 디완들이 군주 설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마운트배튼 경,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V. P. 메논의 노력도 주효했다. 특히 마운트배튼 경은 번왕국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주부(States Department)의 정치 및 행정 수장으로서, 주저하는 군주들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8]

파텔과 메논은 의회의 정책을 통해 번왕들을 인도에 합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회는 번왕국이 주권 실체가 아니며, 초월권 종료 후 독립을 선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번왕국은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합병되어야 했다.[57]

3. 2. 마운트배튼의 역할

루이 마운트배튼은 주저하는 군주들이 인도 연합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8] 그는 국가들의 인도로의 가입이 권력 이양에 대한 의회와의 협상 타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48]

마운트배튼은 조지 6세의 친척으로서 대부분의 군주들의 신뢰를 받았으며, 특히 보팔의 나바브 하미둘라 칸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군주들은 자바할랄 네루 총리와 파텔이 그에게 초대 총독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독립 인도가 합의된 모든 조건들을 준수하도록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49]

마운트배튼은 군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을 가입하도록 압박했다. 그는 영국 정부가 어떤 군주 국가에도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 연방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인도나 파키스탄에 가입하지 않는 한 영국 왕실이 모든 관계를 끊을 것임을 의미했다.[50] 그는 인도 아대륙이 하나의 경제적 실체이며, 국가들이 이 연결이 끊어질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51] 또한 군주들이 공동체 폭력과 공산주의 운동의 부상과 같은 위협에 직면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지적했다.[46]

마운트배튼은 1948년까지 인도의 국가 원수로 봉사할 것이므로 군주들의 약속에 대한 신탁 통치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보팔의 나바브와 같은 주저하는 군주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눴는데, 비밀 서신을 통해 보팔을 인도의 일부로 만드는 가입 문서를 서명하도록 요청했다. 마운트배튼은 이 문서를 자신의 금고에 보관하고, 나바브가 그 전에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8월 15일에만 국가부에 넘길 것이었다. 나바브는 동의했고, 그 거래를 어기지 않았다.[52]

당시 여러 군주들은 자신들을 동맹으로 여겼던 영국에 의해 배신당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고,[53] 콘래드 코필드 경은 마운트배튼의 정책에 항의하며 정치부장 직에서 사임했다.[46] 마운트배튼의 정책은 야당인 보수당에서도 비판을 받았다.[54] 윈스턴 처칠은 인도 정부가 사용한 언어를 오스트리아 침공 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사용한 언어와 비교했다.[55] 그러나 E. W. R. 럼비와 R. J. 무어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마운트배튼이 군주 국가들이 인도에 가입하는 데 동의하도록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56]

3. 3. 압력과 외교

발라브바이 파텔과 V. P. 메논은 번왕국과의 협상을 담당하며, 번왕국들을 인도에 합병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1] 1946년 7월, 자바할랄 네루는 어떤 번왕국도 독립 인도의 군대에 군사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 인도 정부는 번왕국이 독립 인도의 군대에 대항할 수 없다고 경고하며, 번왕국들을 압박했다.

몇몇 영국 지도자, 특히 마지막 영국 인도 부왕인 루이 마운트배튼은 독립 인도와 번왕국 간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다.[29] 무역, 상업 및 통신의 발전은 복잡한 이해 관계 네트워크를 통해 번왕국을 영국령 인도에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29] 마운트배튼은 번왕국의 독립 인도 통합이 인도 분할의 상처를 어느 정도 완화할 것이라는 인도 관리들의 주장에 설득되었다.[30] 그 결과, 마운트배튼은 번왕국의 인도를 개인적으로 지지하고 합병을 위해 노력했다.[30]

마운트배튼은 군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을 가입하도록 압박했다. 그는 영국 정부가 어떤 군주 국가에도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며, 영연방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그들이 인도나 파키스탄에 가입하지 않는 한 영국 왕실이 모든 관계를 끊을 것임을 의미했다.[50] 그는 인도 아대륙이 하나의 경제적 실체이며, 국가들이 이 연결이 끊어질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51] 그는 또한 군주들이 공동체 폭력과 공산주의 운동의 부상과 같은 위협에 직면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지적했다.[46]

3. 4. 가입 문서

가입 문서는 번왕국 통치자가 왕국을 독립 인도에 가입하는 데 동의하는 법적 장치였다.[35] 이 문서는 국방, 외교, 통신 등 세 가지 사항에 대한 통제권을 인도 정부에 부여했으며, 각 사항은 1935년 인도 정부법 부록 VII의 목록 1에 따라 정의되었다.[63]

가입 문서에는 여러 안전 장치가 포함되었다. 제7항에 따르면 군주들은 인도 헌법 초안에 구속되지 않았고, 제8항은 인도 정부에 양도되지 않은 영역에서 자율성을 보장했다.[64] 또한 가입에 동의한 통치자들은 치외 법권(기소 면제), 관세 면제 등의 권리, 점진적 민주화, 18개 주요 국가의 강제 합병 불가, 영국 훈장과 훈장 수여 자격 유지 등을 보장받았다.[65]

이러한 조건들은 많은 통치자들에게 충분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들은 영국의 지원 부족과 내부의 민중적 압박을 고려할 때 이것이 최선의 거래라고 판단했다.[69] 1947년 5월부터 8월 15일 권력 이양까지 대다수의 번왕국이 가입 문서에 서명했다.

피플로다는 1948년 3월까지 가입을 미루었고,[70] 조드푸르는 파키스탄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인도로 합병되었다.[73] 인도 북동부의 마니푸르와 트리푸라는 각각 1947년 8월 11일과 8월 13일에 인도로 합병되었다.[74][75]

4. 합병 과정

인도는 1947년 인도 독립법에 따라 영국령 인도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565개의 번왕국(藩王國, Princely states)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번왕국은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자치를 누리던 토후국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각 번왕국이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합병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마운트배튼 경은 "지리적 강제"를 이유로 대부분 인도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한 번왕국만이 파키스탄에 합병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70]

구자라트 남서쪽 끝에 위치하여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지 않은 주나가드 번왕국의 나바브는 파키스탄과 바다를 통해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파키스탄 합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주나가드의 종주권을 받던 망롤 자치령과 바바리아와드의 통치자들은 이에 반발,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로 합병되었다. 주나가드의 나바브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점령했고, 주변 번왕국 통치자들은 인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사마다스 간디는 망명 정부인 '아르지 후쿠마트'(임시 정부)를 결성했다.[76]

인도는 주나가드가 파키스탄으로 넘어갈 경우 종교적 긴장이 악화될 것을 우려, 합병을 위한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동시에 주나가드에 대한 연료 및 석탄 공급을 중단하고 항공 및 우편 연결을 끊었으며, 국경에 군대를 보내고 망롤과 바바리아와드를 재점령했다.[77] 파키스탄은 인도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국민투표를 논의하는 데 동의했지만, 인도는 이를 거부했다. 10월 26일, 인도군과의 충돌 이후 나바브와 그의 가족은 파키스탄으로 도망쳤고, 11월 7일 주나가드 법정은 인도 정부에 행정권 인수를 요청, 인도 정부는 이를 수락했다.[78] 1948년 2월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거의 만장일치로 인도 합병을 지지했다.[79]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은 남동부 인도에 걸쳐 있던 넓은 내륙 토후국으로, 인구 대다수는 힌두교인이었지만 통치자는 무슬림이었다. 무슬림 귀족과 친(親) 니잠 성향의 정당은 독립을 주장했고, 1947년 6월 니잠은 독립을 선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89] 인도 정부는 전략적 위치 등을 이유로 칙령을 거부하고 통합을 주장했다.[90] 제한적인 조약을 체결하려 했으나 인도는 거부하고 임시 정지 협정을 체결했다.[91] 그러나 인도는 하이데라바드가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니잠은 인도가 토후국을 봉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2]

한편, 니잠은 텔랑가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93][94] 1948년에는 무슬림 민병대인 라자카르가 힌두교 주민을 위협하고, 인도 국민 회의와 공산주의 그룹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95] 자와할랄 네루는 니잠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98] 1948년 9월 13일, 인도군은 폴로 작전을 통해 하이데라바드를 침공했다.[99][100] 5일 만에 토후국을 장악했지만, 대규모 종교 폭력이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101][102] 니잠은 국가 원수로 남았지만,[103]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에 흡수되었다.[104]

메이저 제너럴 사예드 아흐메드 엘 에드로스(오른쪽)가 하이데라바드 토후국 군대의 항복을 세쿤데라바드에서 조얀토 나트 차우두리에게 제안하고 있다.

4. 1. 국경 지역 번왕국

마니푸르와 트리푸라 (번왕국)는 1947년 8월에 인도로 합병되었다.

4. 2. 주나가드

이론적으로는 각 자치령이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합병될지 여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마운트배튼은 "지리적 강제"로 인해 대부분의 자치령이 인도를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그는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한 자치령만이 파키스탄에 합병될 수 있다고 간주했다.[70]

구자라트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지 않은 자치령인 주나가드의 나바브는 마운트배튼의 견해를 무시하고 파키스탄과 바다를 통해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파키스탄에 합병되기로 결정했다. 주나가드의 종주권을 받던 두 자치령인 망롤과 바바리아와드의 통치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주나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로 합병되었다. 이에 주나가드의 나바브는 이 자치령들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주변 자치령의 통치자들은 분노하며 주나가드 국경에 군대를 보내고 인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사마다스 간디가 이끄는 주나가드 사람들은 망명 정부인 '아르지 후쿠마트'(임시 정부)를 결성했다.[76]

인도는 주나가드가 파키스탄으로 넘어갈 경우 이미 구자라트에서 끓어오르던 종교적 긴장이 악화될 것이라고 믿고 합병을 수용하지 않았다. 인도 정부는 이 자치령의 80%가 힌두교도라고 지적하며 합병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동시에 주나가드에 대한 연료 및 석탄 공급을 중단하고 항공 및 우편 연결을 끊었으며, 국경에 군대를 보내고 인도에 합병된 망롤과 바바리아와드를 재점령했다.[77] 파키스탄은 인도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국민투표를 논의하는 데 동의했지만 인도는 이 조건을 거부했다. 10월 26일, 인도군과의 충돌 이후 나바브와 그의 가족은 파키스탄으로 도망쳤다. 11월 7일, 붕괴 직전에 처한 주나가드의 법정은 인도 정부에 이 자치령의 행정권을 인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인도 정부는 이에 동의했다.[78] 1948년 2월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거의 만장일치로 인도 합병을 지지했다.[79]

오늘날까지 파키스탄은 주나가드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4. 3. 하이데라바드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은 남동부 인도에 걸쳐 있던 넓은 내륙 토후국이었다. 인구의 대다수는 힌두교인이었지만, 통치자는 무슬림이었고 정치 또한 무슬림이 지배했다.[88] 무슬림 귀족과 친(親) 니잠 성향의 정당은 하이데라바드가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6월, 니잠은 독립을 선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89]

인도 정부는 하이데라바드의 전략적 위치와 국민, 역사, 위치 등을 이유로 칙령을 거부하고 통합을 주장했다.[90] 니잠은 인도와 제한적인 조약을 체결하려 했으나, 인도는 이를 거부하고 임시 정지 협정을 체결했다.[91] 그러나 인도는 하이데라바드가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니잠은 인도가 토후국을 봉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2]

한편, 니잠은 텔랑가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93][94] 1948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무슬림 민병대인 라자카르가 힌두교 주민을 위협하고, 인도 국민 회의와 공산주의 그룹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95]

자와할랄 네루는 니잠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98] 1948년 9월 13일, 인도군은 폴로 작전을 통해 하이데라바드를 침공했다.[99][100] 5일 만에 토후국을 장악했지만, 이 과정에서 대규모 종교 폭력이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101][102] 니잠은 국가 원수로 남았지만,[103]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에 흡수되었다.[104]

5. 통합의 완성

가입서는 인도로의 통제를 단 세 가지 사안으로 제한하여, 다양한 주에서 행정 및 통치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다소 느슨한 연방을 자체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정치 통합은 다양한 주의 정치 행위자들이 "자신의 충성심, 기대, 정치 활동을 새로운 중심지", 즉 인도 공화국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105]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이소르와 같은 일부 번왕국에는 광범위한 선거권을 기반으로 하고 영국령 인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통치 입법 시스템이 있었지만,[106] 다른 곳에서는 소규모의 제한된 귀족 계층에서 정치적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통치는 기껏해야 온정주의적이었고 최악의 경우 궁정 음모의 결과였다.[107]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인도 정부는 번왕국의 가입을 확보한 후, 주와 이전 영국령 지방을 단일 공화국 헌법하에 하나의 정치체로 결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108]

5. 1. 빠른 통합

인도 정부는 행정 단위로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소규모 번왕국들을 인접한 주 또는 다른 번왕국과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번왕국 통치자들은 국가의 통치권을 인도 자치령에 양도하고, 사적 지갑 형태의 연간 지급금을 받았다.[114]

이 정책은 인도가 얼마 전에 병합 문서에서 보장했던 국가들의 해산을 수반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110] 파텔과 메논은 통합 없이는 국가 경제가 붕괴되고, 군주들이 민주주의를 제공하고 제대로 통치할 수 없다면 무정부 상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많은 소규모 국가들이 매우 작고 경제를 유지하며 증가하는 인구를 지원할 자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많은 국가들이 자유 무역을 방해하는 세금 규정 및 기타 제한을 부과했는데, 이는 통합된 인도에서 철폐되어야 했다.[110]

1947년 12월, 동인도 기구 및 차티스가르 기구의 군주들은 메논과의 회의를 통해 1948년 1월 1일부터 오리사, 중앙 주, 비하르에 국가를 통합하는 병합 협정에 서명했다.[111] 그해 말, 구자라트와 데칸 고원의 66개 국가가 봄베이 관구에 병합되었으며, 여기에는 콜라푸르와 바도다와 같은 대규모 국가가 포함되었다. 다른 소규모 국가들은 마드라스 관구, 동 펀자브, 서벵골, 아그라 및 아우드 연합 주, 아삼에 병합되었다.[112]

병합 협정은 통치자들이 국가의 "통치와 관련된 모든 관할권 및 권한"을 인도 자치령에 양도하도록 요구했다. 그 대가로 군주들은 사적 지갑 형태의 연간 지급금을 받고, 사유 재산과 개인적 특권, 존엄성 및 칭호는 보호받으며, 상속도 관습에 따라 보장되었다.[114]

5. 2. 4단계 통합

인도 정치 통합의 4단계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단계: 인도 정부는 행정 단위로서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소규모 번왕국들을 인접한 주(Province) 또는 다른 번왕국과 통합하여 "번왕국 연합"을 창설했다.[109] 이 정책은 인도가 얼마 전에 병합 문서에서 보장했던 국가들의 해체를 수반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110] 파텔과 메논은 통합 없이는 국가 경제가 붕괴되고, 군주들이 민주주의를 제공하지 못하면 무정부 상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소규모 번왕국들이 경제를 유지하고 증가하는 인구를 지원할 자원이 부족했고, 자유 무역을 방해하는 세금 규정 및 기타 제한을 철폐해야 했다.[110] 1947년 12월, 동인도 기구 및 차티스가르 기구의 군주들은 메논과의 회의를 통해 1948년 1월 1일부터 오리사, 중앙 주, 비하르에 번왕국을 통합하는 병합 협정에 서명했다.[111] 그해 말, 구자라트와 데칸 고원의 66개 번왕국이 봄베이 관구에 병합되었고, 다른 소규모 번왕국들은 마드라스 관구, 동 펀자브, 서벵골, 아그라 및 아우드 연합 주, 아삼에 병합되었다.[112] 국제 국경 근처의 펀자브 언덕 국가 기구 30개국은 히마찰프라데시에 통합되어 중앙 정부가 직접 관리했다.[113]

  • 2단계: 민감한 국경 지역에 위치한 쿠치 (번왕국), 트리푸라 (번왕국), 마니푸르 (번왕국) 등은 중앙 정부 통제 하에 수석 위원 주(Chief Commissioner's Province)로 유지되었다. 보팔 (번왕국)과 빌라스푸르 (히마찰프라데시)도 직접 관리되는 수석 위원 주가 되었다.[113]

  • 3단계: 인접한 대규모 번왕국과 다수의 인접한 소규모 번왕국이 "번왕국 연합"을 형성했다. 통합 계약에 따라 모든 통치자는 통치 권한을 잃고, 한 명만 새로운 연합의 라지프라무크가 되었다. 다른 통치자들은 예포국 통치자들로 구성된 통치자 협의회와 프레지디움과 연관되었다. 라지프라무크와 부라지프라무크는 프레지디움 구성원 중에서 협의회가 선택했다. 이 계약은 헌법 제정을 담당할 제헌 의회 창설 조항을 마련했다.[115]
  • 사우라슈트라 번왕국 연합: 1948년 1월 카티아와르 반도 222개 주 통합.[116]
  • 마디아 바라트: 1948년 5월 28일 괄리오르, 인도르 및 18개 소규모 주 연합.[117]
  • 파티알라 및 동부 펀자브 주 연합: 1948년 7월 15일 파티알라 등 8개 주 통합.[118]
  • 라자스탄 연합 주: 일련의 합병으로 형성, 1949년 5월 15일 완료.[119]
  • 트라방코르-코친 번왕국 연합: 1949년 중반 트라방코르와 코친 합병.[120]

  • 4단계: 각 번왕국의 행정 기구를 통합하고 하나의 정치적, 행정적 실체로 통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통합된 많은 번왕국들이 경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중앙 인도 관리국의 번왕국들은 빈디야 프라데시라는 번왕국 연합으로 통합되었으나, 경쟁 심화로 인도 정부는 통치자들에게 합병 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득, 치프 커미셔너 주로서 직접 통제했다.[122] 1947년 12월, 메논은 번왕국 통치자들에게 "인민 정부 수립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제안했고, 주 부서는 통합된 번왕국 연합의 라지프라묵들이 서명한 특별 협약을 통해 입헌 군주로 행동하도록 했다.[123]

6. 통합 이후의 문제

인도는 번왕국 통합 이후에도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인도 아대륙에 남겨둔 식민지 월경지 문제, 시킴과의 특수한 관계, 그리고 분리주의 및 지역주의 운동 등이 주요 과제였다.

프랑스령 인도의 경우, 퐁디셰리, 카라이칼, 야남, 마헤, 찬데르나고르 등이 남아 있었다.[133] 프랑스는 인도와의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1954년 11월 1일 4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이 인도에 이전되었고, 1962년 5월에는 법적 통제권도 완전히 넘어왔다.[135]

1947년의 프랑스 월경지


반면, 포르투갈령 인도에 속했던 다만 및 디우, 다드라 및 나가르 하벨리, 고아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136] 포르투갈은 이 지역들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며 반환을 거부했다.[137] 1954년 다드라 및 나가르 하벨리에서 봉기가 일어나 포르투갈의 지배에서 벗어났고,[136] 1961년 인도 헌법 개정을 통해 인도의 연방 직할지로 편입되었다.[139] 고아, 다만 및 디우의 경우, 1961년 12월 인도군의 군사 작전으로 포르투갈군이 항복하면서 인도에 통합되었다.[140] 고아는 처음에 연방 직할지였다가 1987년에 주가 되었다.[144]

1955년 8월 15일, 인도와의 고아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행진하고 있다.


시킴은 다른 번왕국과 유사한 지위를 가졌지만, 독립 후 인도와의 완전한 통합을 거부했다.[147] 인도는 시킴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호령으로 만들고, 국방, 외교, 통신 등을 책임졌다.[147] 이후 시킴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인도 개입, 국민 투표를 거쳐 1975년 인도의 22번째 주로 편입되었다.[151]

인도중국 국경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옛 번왕국 시킴은 1975년 인도의 22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잠무 카슈미르에서는 1989년부터 분리주의 반란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52] 트리푸라와 마니푸르에서도 분리주의 운동이 있었지만, 트리푸라는 진압되었고 마니푸르는 평화로운 상태이다. 텔랑가나 지역은 별도의 주를 요구하는 운동 끝에 2014년 6월 인도의 29번째 주로 분리되었다.[158]

6. 1. 번왕국 통치자

통합 이후 번왕국 통치자들은 사적 지갑을 받으며 은퇴하거나, 공직에 진출하는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대다수는 사적 금고에서 제공되는 넉넉한 연금으로 은퇴하는 것에 만족했지만,[131] 일부는 병합 조약이 영구적이지 않은 것과 자율성을 잃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128]

몇몇 통치자들은 공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바브나가르 번왕국의 마하라자 크리슈나 쿠마라싱 고힐은 마드라스 주의 주지사가 되었고,[132] 다른 여러 명은 해외 외교 직위에 임명되었다.[128]

6. 2. 식민지 월경지

인도의 번왕국 통합 과정에서 인도 아대륙에 남아있던 식민지 월경지 문제는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독립 당시, 퐁디셰리, 카라이칼, 야남, 마헤, 찬데르나고르는 여전히 프랑스령 인도의 일부였고, 다만 및 디우, 다드라 및 나가르 하벨리, 고아포르투갈령 인도의 일부였다.[133]

프랑스는 인도와의 협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948년 협정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 지역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1949년 6월 19일 찬데르나고르에서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 주민 대다수가 인도와의 통합에 찬성하여 1949년 8월 14일 사실상, 1950년 5월 2일 법적으로 인도에 양도되었다.[134] 그러나 다른 프랑스령 월경지에서는 친프랑스 진영이 합병 지지 단체를 탄압했다. 이에 1954년 야남과 마헤에서 친합병 단체가 권력을 잡는 시위가 발생했다. 1954년 10월 퐁디셰리카라이칼에서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 합병 찬성이 우세했고, 1954년 11월 1일 4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이 인도 공화국으로 이전되었다. 1956년 5월 양도 조약이 체결되었고, 1962년 5월 프랑스 국민 의회의 비준을 거쳐 법적 통제권도 이전되었다.[135]

반면 포르투갈은 외교적 해결을 거부하고 인도 내 월경지를 자국 영토로 간주했다.[136] 1951년에는 포르투갈 헌법을 개정하여 인도 내 소유지를 포르투갈 주로 전환했다.[137] 1954년 7월, 다드라 및 나가르 하벨리에서 봉기가 일어나 포르투갈의 지배에서 벗어났다.[136] 포르투갈은 군대를 파견하려 했으나 인도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했지만 패소했다.[138] 1961년, 인도 헌법이 개정되어 다드라 및 나가르 하벨리가 연방 직할지로 인도에 편입되었다.[139]

고아, 다만 및 디우는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었다. 1955년 8월 15일, 비폭력 시위대가 포르투갈에 의해 총격을 받아 2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37] 유엔 총회는 포르투갈의 주장을 거부하고 해당 지역을 "자치하지 않는 영토"로 분류했다.[140] 자와할랄 네루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선호했지만, 1961년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의 반란 진압으로 인해 인도 여론이 악화되면서 군사 행동 압력이 거세졌다.[141] 결국 1961년 12월 18일, 인도군은 포르투갈령 인도에 진입하여 포르투갈군을 격파했다. 포르투갈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지만,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결의안이 부결되었다.[143] 포르투갈은 12월 19일 항복했고,[140] 이로써 인도 아대륙에 있던 마지막 유럽 식민지가 종식되었다. 고아는 연방 직할지로 인도에 편입되었고, 1987년에는 주가 되었다.[144]

6. 3. 시킴



시킴은 역사적으로 다른 번왕국과 유사한 지위를 가진 영국의 종속 영토였으며, 식민지 시대에는 인도의 국경 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시킴의 초걀은 인도와의 완전한 통합을 거부했다. 이 지역이 인도에게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인도 정부는 먼저 현상 유지 협정을 체결한 후 1950년 시킴의 초걀과 완전한 조약을 체결하여 시킴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인도는 국방, 대외 관계 및 통신, 그리고 법과 질서에 대한 최종 책임을 가졌지만, 시킴은 그 외 모든 면에서 완전한 자치를 부여받았다.[147]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부티아와 렙차 상류층의 지지를 받은 초걀 팔덴 톤둡 남걀은 특히 대외 관계에 대한 더 많은 권한을 협상하여 시킴의 국제적 인정을 받도록 시도했다. 이러한 정책은 카지 렌둡 도르지와 시킴의 네팔계 주민 중산층을 대표하고 더 친인도적인 입장을 취한 시킴 주 의회에 의해 반대되었다.[148]

1973년 4월, 반 초걀 시위가 발발하여 시위대는 대중 선거를 요구했다. 시킴 경찰은 시위를 통제할 수 없었고, 도르지는 인도에게 법과 질서에 대한 책임을 행사하고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인도는 초걀과 도르지 사이의 협상을 용이하게 했고, 초걀을 입헌 군주 역할로 축소하고 새로운 민족 권력 분배 방식을 기반으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상정하는 합의를 도출했다.[149] 초걀의 반대 세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시킴이 인도 공화국과 연합하는 것을 규정하는 새로운 헌법이 작성되었다.[150] 1975년 4월 10일, 시킴 의회는 시킴이 인도에 완전히 통합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1975년 4월 14일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97%의 찬성으로 지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도 의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시킴을 인도의 22번째 주로 편입시켰다.[151]

6. 4. 분리주의와 지역주의

잠무 카슈미르에서는 1989년부터 분리주의 반란이 격화되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152] 1980년대 많은 카슈미르 청년들은 인도 정부가 잠무 카슈미르의 정치에 간섭하고 있다고 느꼈고, 1987년 선거를 계기로 정치 과정에 대한 믿음을 잃고 폭력적인 반란을 시작했다.[153]

트리푸라와 마니푸르에도 분리주의 운동이 존재했지만, 트리푸라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마니푸르는 평화로운 상태이다.

텔랑가나 지역은 이전 하이데라바드 주의 텔루구어 사용 지역으로, 영국령 인도의 텔루구어 사용 지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주 재편 위원회는 텔랑가나를 별도의 주로 만들 것을 권고했지만, 인도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안드라프라데시에 병합했다. 그 결과 1960년대에 별도의 텔랑가나 주를 요구하는 운동이 나타났고, 2014년 6월 텔랑가나가 인도의 29번째 주로 분리되었다.[158]

7. 통합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인도와 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번왕국 통합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협상 과정에서 무슬림 연맹을 대표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번왕국이 인도나 파키스탄 어느 쪽에도 합류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할 권리를 강력하게 지지했는데, 이는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 국민 회의가 취한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태도였다.[160]

라지모한 간디는 파텔의 이상적인 거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가 인도에게 주나가드하이데라바드를 넘겨준다면 파텔이 카슈미르가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고 가정한다.[161]

현대 역사가들은 병합 과정에서 국가부와 루이 마운트배튼 경의 역할 또한 재검토했다. 이안 코플랜드는 인도 국민 회의 지도자들이 병합 문서에 서명했을 때조차 이를 영구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항상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일어난 것과 같은 완전한 통합을 은밀하게 고려했다고 주장한다.[123] 그는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발생한 합병과 인도 정부에 대한 권한 할양이 병합 문서의 조건을 위반했으며 마운트배튼이 군주들에게 제공한 내부 자치와 번왕국의 보존에 대한 명시적인 보장과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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