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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중국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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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중국 국경 분쟁은 아시아 식민주의와 불분명한 경계 획정으로 인해 발생한 영토 분쟁으로, 1913-1914년 심라 협약에서 맥마흔 라인을 설정하려 했으나 중국이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실질 통제선(LAC)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분쟁이 지속되었으며, 특히 아크사이친과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을 중심으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경계 획정과 인도 독립,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으며, 1962년 중인전쟁, 1967년 나투 라 및 초 라 충돌, 2017년 도클람 대치 등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외교적 노력을 통해 회담과 협정을 진행했지만, 맥마흔 라인, 실질 통제선, 전략적 요충지 문제 등 핵심 쟁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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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중국 국경 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인도-중국 국경 분쟁
관련 분쟁카슈미르 분쟁의 일부
중국과 인도 사이의 실질 통제선 (CIA 지도)
중국과 인도 사이의 실질 통제선 (CIA 지도)
분쟁 기간1962년 10월 20일 – 현재
분쟁 위치실질 통제선
분쟁 상태진행 중
교전 세력
교전국 1인도
교전국 2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인도 측 지휘관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자와할랄 네루
중국 측 지휘관류사오치
류보청
저우언라이
린뱌오
관련 정보
분쟁 원인국경 분쟁, 영토 분쟁
분쟁 결과중국의 결정적 승리
아크사이친에서 인도군 철수
중인 국경 충돌은 지속됨
중국군이 쇠몽둥이에 못을 박아서 인도 군인 20명을 죽인 게 탄로나자 인도 군이 고지 4곳 점령해서 복수전 성공
관련 자료
웹 아카이브가디언, 2020년 7월 3일 기사 아카이브
참고 문헌호프만 (1990), 19쪽
뉴스 기사제임스타운 재단, 2020년 7월 15일, 라마찬드란 기사
뉴욕 타임스, 2020년 6월 17일, 골드만 기사
정부 간 협정인도-중국 국경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매개변수 및 지침 원칙에 관한 협정 (2005년 4월 11일)
뉴스 기사 (국경 관리)더 힌두, 2012년 1월 17일, 인도, 중국, 국경 관리에 관한 작업 메커니즘 설정

2. 역사적 배경

인도-중국 국경 분쟁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역사와 명확하지 않은 경계 획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3-1914년 심라 협약에서 영국은 맥마흔 라인을 경계선으로 설정하려 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거부했다.[6] 인도 독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미해결된 경계 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6] 분쟁 지역은 외딴 곳에 위치하여 행정 관리가 미흡했고, 이는 논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6]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 LAC)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중국과 인도가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자주 이견을 보인 것도 분쟁의 원인 중 하나이다.[6]

1960년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저우언라이의 인도 방문 이후 국경 문제에 대한 중국과 인도의 첫 공식 회담이 열렸다. 이후 1960년 6월 15일부터 7월 6일까지, 1960년 8월 15일부터 9월 24일까지, 1960년 11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세 차례의 "관료 회담"이 열렸으며, 이러한 논의를 통해 '경계 문제에 관한 관료 보고서'가 작성되었다.[64]

국경 협의는 분쟁의 미시적, 거시적 문제를 다루어 왔다. 지역 수준에서는 국지적 분쟁과 그에 따른 철수 및 긴장 완화와 같은 사건이 다루어진다. 보다 광범위한 문제로는 일괄 타결 대 부문별 타결, 실제 통제선(LAC)과 국경의 명확화 및 이에 따른 지도 교환,[65] 그리고 국경 분쟁을 다른 양자 관계와 분리하거나 연결하는 문제 등이 있다.[66]

1962년 이후 인도-중국 국경 관계의 주요 사건 및 외교적 노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주요 국경 사건국경 외교
19621962년 전쟁
1967나투 라/초 라
1975툴룽 라
1981국경 회담 재개
1986숨도롱 추
1988JWG 결성
19931993년 협정
19961996년 협정
20032003년 협정
20052005년 협정 (1, 2)
20122012년 협정
2013뎁상2013년 협정
2017도클람
2020갈완5개항 성명


2. 1. 식민지 시대의 경계 획정

인도-중국 국경 분쟁은 아시아의 식민주의와 명확하지 않은 역사적 경계 획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3년-1914년 심라 협약에서 영국은 맥마흔 라인을 경계선으로 설정하려 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거부했다.[6] 인도 독립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미해결된 경계 분쟁은 더욱 복잡해졌다.[6] 분쟁 지역은 외딴 곳에 위치해 행정적 관리가 미흡했고,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분쟁이 발생했다.[6]

중앙 아시아 지도(1878)는 호탄 (오른쪽 위 모서리 근처)을 보여준다. 이전 영국령 인도 제국이 주장하던 국경은 샤히둘라와 킬릭, 킬리안, 산주 고개가 국경 북쪽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색상의 자주색과 분홍색 띠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아크사이친 지역의 인도와 중국의 국경 주장, 맥카트니-맥도날드 선, 외무부 선, 그리고 중-인도 전쟁 기간 동안 중국군이 점령한 지역의 진행 상황이 표시되어 있다.


W. H. 존슨은 1865년에 아크사이친을 잠무 카슈미르에 포함시키는 "존슨 선"을 제안했다. 당시 중국은 신장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선은 중국에 제시되지 않았다. 존슨은 이 선을 잠무 카슈미르의 마하라자에게 제시했고, 마하라자는 그 안의 18000km2를 자신의 영토로 주장했다. 일부 설명에 따르면 그는 쿤룬 산맥의 산주 고개까지 북쪽의 영토를 주장했다. 잠무 카슈미르의 마하라자는 샤히둘라(오늘날의 자이둘라)에 요새를 건설하고 상단을 보호하기 위해 수년 동안 병력을 주둔시켰다. 결국, 대부분의 자료는 샤히둘라와 상부 카라카쉬 강을 신장의 영토로 확정했다. 1880년대 후반에 이 지역을 탐험한 프랜시스 영허즈번드에 따르면, 그가 샤히둘라에 갔을 때 버려진 요새만 있었을 뿐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한 채도 없었다. 그곳은 단지 편리한 중간 기착지였고 유목 키르기즈족의 편리한 본부였다.[11] 버려진 요새는 몇 년 전에 도그라스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12] 1878년 중국은 신장을 재정복했고, 1890년까지 이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샤히둘라를 소유했다. 1892년까지 중국은 카라코람 고개에 경계 표식을 세웠다.

1897년 영국의 군 장교인 존 아닥 경은 야르칸드 강 북쪽의 쿤룬 산맥 능선을 따라 경계선을 제안했다. 당시 영국은 중국이 약해지면서 러시아의 팽창 위험을 우려했고, 아닥은 그의 선이 더 방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닥 선은 사실 존슨 선의 수정안이었고 "존슨-아닥 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존슨-아르다(Johnson-Ardagh)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Macartney-MacDonald)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다.[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여겼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말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제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의 정부가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하면서 경계선이 다시 조정되었다. 하지만 지도에는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은 존슨 선에 따른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 역시 아크사이친을 인도에 포함시켰다.[32] 영국 관리들은 1940–1941년에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이 시점까지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인도의 독립 당시에도 경계선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맥마흔 라인은 붉은색으로 표시된 분쟁 지역의 북쪽 경계이다.


영국령 인도는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1824–1826)의 종결 후 얀다보 조약에 의해 1826년 인도 북동부의 아삼을 합병했다. 이후 영국-미얀마 전쟁을 거치면서 버마 전체가 합병되어 영국은 중국 윈난성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913~14년, 영국, 중국, 티베트 대표가 인도 시몰라에서 회담을 갖고 티베트의 지위와 국경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동부 지역의 티베트와 인도의 경계선으로 제안된 맥마흔 라인은 영국 협상가 헨리 맥마흔이 협정에 첨부된 지도에 그렸다. 세 대표 모두 협정에 서명했지만, 베이징은 곧 제안된 중-티베트 국경에 이의를 제기하고 협정을 거부했으며, 최종적으로 더 자세한 지도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중국이 비준하지 않는 한 협정에 따른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각서를 승인한 후, 영국과 티베트 협상가들은 시몰라 협약과 더 자세한 지도를 양자 간 합의로 서명했다. 네빌 맥스웰은 맥마흔이 중국이 거부할 경우 티베트와 양자 협정을 체결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중국 대표가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했고, 선언을 비밀로 유지했다고 주장한다.[7]

V. K. 싱은 영국령 인도와 티베트가 받아들인 이 경계의 근거는 인도의 역사적 경계가 히말라야 산맥이었고 히말라야 산맥 남쪽 지역은 전통적으로 인도였으며 인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높은 분수령이 인도와 북쪽 이웃 국가 간의 경계로 제안되었다. 인도 정부는 히말라야 산맥이 인도 아대륙의 고대 경계였으며, 따라서 영국령 인도와 이후의 인도 공화국의 현대적 경계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19]

새로 건립된 중화민국이 세운 것을 포함한 중국의 국경 표지석은 1914년 1월까지 왈롱 근처에 있었지만, 북동 변경 지역 (NEFA) 동부 지역의 행정 보조원 T. O'Callaghan이 맥마흔 라인에 더 가까운 북쪽 위치(비록 라인 남쪽에 있긴 하지만)로 옮겼다. 그 후 그는 리마로 가서 티베트 관리들을 만났고 그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발견하지 못했다.

영국은 티베트와 시몰라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양 당사자가 "중국 정부의 중재를 통해서만" 티베트와 협상할 수 있도록 한 1907년 영국-러시아 협약, 그리고 영국 정부가 "티베트 영토를 합병하지 않도록" 한 1906년 영국-중국 협약을 위반했다.[20] 협정의 법적 지위에 대한 의문 때문에, 영국은 1937년까지 맥마흔 라인을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고, 1938년까지 시몰라 협약을 조약 기록에 게시하지 않았다. 티베트의 1913년 독립 선언을 거부하면서, 중국은 시몰라 협약과 맥마흔 라인이 불법이며, 티베트 정부는 조약 체결 권한이 없는 단순한 지방 정부라고 주장했다.[7]

영국 기록에 따르면 1914년 티베트 정부가 새로운 국경을 수락한 것은 중국이 시몰라 협약을 수락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수락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티베트는 맥마흔 라인을 무효로 간주했다.[21] 티베트 관료들은 타왕을 계속 행정했으며 1938년 협상에서 영토를 양보하기를 거부했다. 아삼 주지사는 타왕이 "의심할 여지 없이 영국령"이라고 주장했지만 "티베트가 통제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자신이 티베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도의 동부가 일본군의 위협을 받고 중국의 팽창주의 위협이 가해지면서, 영국군은 추가 방어를 위해 타왕을 확보했다.

맥마흔 라인 남쪽, NEFA에 포함된 지역에 대한 중국의 주장은 전통적인 국경에 근거했다. 인도는 중국이 라다크와 아루나찰프라데시에서 제안한 경계는 문서적 근거가 없고, 중국 외에는 누구의 승인에 대한 문서도 없다고 믿는다. 인도 정부는 중국이 과거에 중국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영토를 주장한다고 주장했고,[19] 중국 정부는 인도가 과거 영국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영토를 주장한다고 주장한다.[22] 마지막 청나라 황제의 1912년 퇴위 칙령은 후임 공화국 정부가 "다섯 민족, 즉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을 "그들의 영토와 함께 완전하게" 연합하도록 승인했다.[23] 그러나 인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마우리아 제국촐라 왕조의 존재가 있었던 지역에 인도가 주장을 하지 않는 관행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19]

인도의 동부 지역에서의 주장선은 맥마흔 라인에 대한 해석을 따른다. 1914년 3월 24~25일 시몰라 조약 지도에 맥마흔이 그린 선은 분명히 부탄, 중국, 인도의 삼각점인 북위 27°45’40"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뻗어 나간다.[7]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동부 지역의 대부분의 전투는 이 선의 바로 북쪽에서 일어날 것이다.[24] 그러나 인도는 조약의 ''의도''가 맥마흔의 메모와 맥마흔 라인의 90% 이상이 실제로 히말라야 산맥의 주요 분수령 능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히말라야 산맥의 주요 분수령 능선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부탄 근처(맥마흔 라인의 대부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의 높은 능선 남쪽의 영토는 인도 영토가 되어야 하고 높은 능선 북쪽은 중국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 주장에서 두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서로 분리될 것이다.

1950년대 동안과 이후, 인도가 이 지역을 순찰하고 더 자세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1914년 시몰라 협약 지도에 묘사된 것을 확인했다. 주요 히말라야 분수령 능선을 가로지르는 6개의 강 교차점. 타왕 북쪽 부탄 근처의 가장 서쪽 위치에서, 그들은 자국의 주장선을 북쪽으로 확장하여 타그 라 능선, 롱주, 킨제만을 인도 영토로 포함하도록 지도를 수정했다.[7] 따라서 맥마흔 라인의 인도 버전은 부탄-중국-인도 삼각점을 북위 27°45’40"에서 북위 27°51’30"으로 이동시킨다.[7] 인도는 조약 지도가 타그 라 능선과 같은 지형지물을 따라 지나갔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실제 조약 지도는 지형적으로 모호하고(조약에 경계선 표시가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탄 근처와 타그 라 근처에서 직선(분수령 능선이 아님)을 보여주며, 조약에는 지리적 특징에 대한 구두 설명이나 가장 높은 능선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7][25]

1950년대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신장과 서부 티베트를 연결하는 의 도로를 건설했는데, 이 중 는 인도에서 주장하는 아크사이친 지역을 지나 존슨 선의 남쪽으로 통과했다.[7] 아크사이친은 중국에서 접근하기 쉬웠지만, 카라코람 산맥 남쪽에 있는 인도인들에게는 산맥이 아크사이친으로의 접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7] 인도인들은 1957년에야 이 도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58년에 발행된 중국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면서 확인되었다.[31]

자와할랄 네루 총리가 주장한 인도의 입장은 아크사이친이 "수세기 동안 인도의 라다크 지역의 일부"였다는 것이다.[7]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서부 국경이 아직 획정되지 않았으며, 아크사이친의 일부를 중국 국경 내에 포함시킨 맥카트니-맥도널드 선이 중국 정부에 제안된 유일한 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크사이친이 이미 중국 관할 하에 있으며, 협상 시 현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1960년, 네루와 저우언라이는 국경 분쟁의 역사적, 정치적, 행정적 근거를 검토하기 위해 인도와 중국 관리들 간의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32] 양측은 서부 지역의 국경을 정의하는 주요 분수계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32] 중국은 국경 주장에 관한 진술에서 인용된 자료를 자주 왜곡했다.

2. 2. 인도 독립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인도와 중국 간의 국경 분쟁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역사와 명확하지 않은 경계 획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3-1914년 심라 협약에서 영국은 맥마흔 라인을 경계선으로 설정하려 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거부했다.[6] 인도 독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미해결된 경계 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6] 분쟁 지역은 외딴 곳에 위치하여 행정 관리가 미흡했고, 이는 논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6]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중국과 인도가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자주 이견을 보인 것도 분쟁의 원인 중 하나이다.[6] 존슨-아르다(Johnson-Ardagh)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Macartney-MacDonald)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다.[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여겼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고, 제1차 세계 대전 말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제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 정부는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하면서 경계선이 다시 조정되었지만, 지도에는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와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어 아크사이친을 인도에 포함시켰다.[13][16][32] 1940–1941년에 영국 관리들은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이 시점까지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인도의 독립 당시에도 경계선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1947년 독립 이후, 인도 정부는 서쪽의 공식 경계를 확정했는데, 여기에는 아크사이 친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아다-존슨 라인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인도가 국경을 정의하는 근거는 "주로 오랜 관습과 관례"였다.[7] 존슨 라인과 달리 인도는 샤히둘라와 호탄 인근의 북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카라코람 고개(분쟁 지역 아님)에서 인도 측의 주장선은 아크사이 친의 염전 북쪽 카라코람 산맥 북동쪽으로 뻗어 쿤룬 산맥에 경계를 설정하고, 카라카쉬 강 및 야르칸드 강 유역의 일부를 포함했다. 거기에서 쿤룬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아크사이 친 염전을 거쳐 카라코람 산맥을 통과한 다음 팡공 호수로 향했다.

1954년 7월 1일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인도 지도를 모든 국경선에 명확한 경계를 표시하도록 수정하라는 지시가 담긴 메모를 작성했다. 이 시점까지 아크사이 친 지역의 경계는 존슨 라인을 기반으로 "미확정"으로 묘사되었다.[14]

2. 3. 1962년 중인전쟁

존슨-아르다(Johnson-Ardagh)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Macartney-MacDonald)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다.[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여겼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말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제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 정부가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하면서 경계선이 다시 조정되었다. 하지만 지도에는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 역시 아크사이친을 인도에 포함시켰다.[32] 영국 관리들은 1940–1941년에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이 시점까지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인도의 독립 당시에도 경계선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2. 4. 1962년 이후의 분쟁

인도와 중국 간의 영토 분쟁은 아시아 지역 식민주의의 역사와 명확하지 않은 국경 획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된 심라 협약에서 영국은 맥마흔 라인을 국경선으로 설정하려 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거부했다.[6] 인도 독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미해결된 국경 분쟁은 더욱 심화되었고, 분쟁 지역의 외딴 위치와 행정적 관리 미흡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6]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의 불명확성 또한 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중국과 인도는 실질 통제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견을 보이고 있다.[6] 존슨-아르다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는데,[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약화되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질적인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 정부는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에 있는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결정했지만, 지도에는 이러한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 역시 아크사이친을 인도 영토로 포함시켰다.[32]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영국 관리들은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된 후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도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를 논의하지도 않았다. 인도가 독립할 당시에도 국경선은 여전히 미확정 상태였다.[17][18]

1947년 독립 이후 인도 정부는 서쪽 국경을 확정하면서 아크사이친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아다-존슨 라인과 유사했다. 인도는 "오랜 관습과 관례"를 국경 설정의 근거로 제시했다. 존슨 라인과 달리 인도는 샤히둘라와 호탄 인근 북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은 주장하지 않았다. 인도 측의 주장선은 카라코람 고개(분쟁 지역 아님)에서 아크사이친 염전 북쪽 카라코람 산맥 북동쪽으로 뻗어 쿤룬 산맥에 경계를 설정하고, 카라카쉬 강 및 야르칸드 강 유역의 일부를 포함했다. 이후 쿤룬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아크사이친 염전을 거쳐 카라코람 산맥을 통과한 다음 팡공 호수로 이어졌다.[7]

1954년 7월 1일,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인도 지도를 수정하여 모든 국경선에 명확한 경계를 표시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아크사이 친 지역의 경계는 존슨 라인을 기반으로 "미확정" 상태로 묘사되어 있었다.[14]

1967년에는 당시 인도의 보호령이었던 시킴 왕국 국경에서 나투 라와 초 라 충돌이 발생했다.[33][34] 이는 인도와 중국 간의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1967년 9월 11일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나투 라에 있는 인도 초소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고, 10월에는 초 라에서 또 다른 군사적 대결이 벌어져 같은 날 종료되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인도군은 이 충돌에서 "결정적인 전술적 이점"을 확보하고 중국군을 격퇴했으며, 나투 라의 많은 PLA 요새가 파괴되었다고 한다.[35]

1987년에는 숨도롱 추 대치에서 중화인민해방군 육군과 인도군 사이에 세 번째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36]

중국-인도 국경 방어 추술 지역(CIA, 1963)


1975년 10월 20일에는 아루나찰프라데시의 툴룽 라에서 인도군 병사 4명이 사망했다.[37][38] 인도 정부 발표에 따르면, 부사관 1명과 병사 4명으로 구성된 아삼 소총대 순찰대가 인도 영토 내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으며, 해당 지역은 수년간 사고 없이 정기적으로 순찰하던 곳이었다. 순찰대원 4명은 처음에 실종자로 분류되었으나, 외교 채널을 통해 중국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되어 시신이 반환되었다. 인도 정부는 중국에 강력하게 항의했다.[39]

2006년, 중국 주재 인도 대사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전체가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며[40]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졌다.[41] 당시 양국은 시킴 북단에서 최대 1km까지 침범을 주장했다.[29] 2009년, 인도는 국경을 따라 추가적인 군사력 배치를 발표했고,[42] 2014년에는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해 중국이 "하나의 인도" 정책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3][44]

2013년 4월, 인도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2013년 다울라트 베그 올디 사건에서 다울라트 베그 올디 지역에 10km 침입하여 캠프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나중에 19km로 수정되었다. 인도 언론은 중국 군사 헬리콥터가 인도 영공에 진입하여 병력에 물자를 투하했다고 보도했지만, 중국 관리는 침입 사실을 부인했다.[47][48] 양국 군인들은 명확하지 않은 국경에서 서로 마주 보며 잠시 캠프를 설치했으나, 5월 초 양측이 병력을 철수하면서 긴장이 완화되었다.[49] 2014년 9월, 인도와 중국은 LAC에서 대치했다. 인도 노동자들이 라다크의 국경 마을 뎀촉에 운하를 건설하자 중국 민간인들이 군의 지원을 받아 항의했고, 약 3주 후 양측이 병력 철수에 합의하면서 대치가 종료되었다.[50] 인도군은 중국군이 인도 측 주장 영토 안에 3km 떨어진 곳에 캠프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51]

2015년 9월, 중국과 인도군은 라다크 북부 버츠 지역에서 대치했다. 이는 인도군이 양측 합의 순찰선에 가깝게 중국이 건설 중이던 감시탑을 철거했기 때문이다.[53]

2020년 6월, 인도와 중국 군대는 갈완강 계곡에서 충돌하여 20명의 인도 군인이 사망했다. 국제 언론은 40명 이상의 중국 군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중국 당국은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3. 분쟁 지역

인도-중국 국경 분쟁은 크게 서부, 중부, 동부 세 지역으로 나뉜다.


  • 서부 전선 (카슈미르 지역): 아크사이친을 포함한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다. 19세기 도그라-티베트 전쟁과 제2차 영국-시크 전쟁 이후 영국령 인도 제국 시기에 그어진 경계선(존슨 선, 맥카트니-맥도날드 선)에 대한 이견이 주요 원인이다. 트랜스카라코람 지역은 파키스탄이 중국에 양도했지만 인도는 여전히 자국 영토로 주장한다.
  • 중부 전선: 우타라칸드 주와 히마찰프라데시 주의 경계를 따라 바라호티, 자드 강가 계곡 등에서 분쟁이 발생한다.
  • 동부 전선 (아루나찰프라데시): 아루나찰프라데시 주를 둘러싼 분쟁이다. 중국은 이 지역을 남티베트라고 부르며 자국 영토로 주장한다. 1967년 나투 라와 초 라 충돌이 대표적인 분쟁 사례이다.


각 분쟁 지역에 대한 상세 정보는 다음 표와 같다.

번호분쟁 지역 / 구역
(다른 이름)
중국 성인도 주/UT작전 통제사건/비고
1트랜스카라코람 지역 (삭스감)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다크중국파키스탄이 조건부로 중국에 양도한 지역으로, 인도와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인도-파키스탄-중국이 만나는 서쪽의 "작전" 삼각점에 인도 통제 하의 인디라 콜 서쪽이 위치한다.
2아크사이친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라다크중국다울라트 베그 올디 AGL,[102] 및 다르북-쇼크-DBO 도로에서 관리한다.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중국이 통제하는 삭스감과 아크사이친은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 인도 통제 지역인 시아첸 지역과 접경하고 있다. 2013년 다울라트 베그 올디 사건, 2020년 중-인도 충돌, 뎁상 평원, 갈완, 팡공 호수, 핫 스프링, 콩카 고개도 참조. 이 지역의 주요 지점으로는 쇼크가 있다. 다른 분쟁 지역으로는 사마르 룽파가 있다.[103]
3뎀초크 / 뎀초크 (뎀초크 구역)티베트라다크인도 / 중국푸크체 AGL에서 관리한다.[102]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4추마르 북쪽티베트라다크인도뇨마 AGL에서 관리한다.[102] 추마르 구역은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비연속적인 지역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경까지 도로가 없다. 인도와 중국 모두 헬기장을 이용하고 있다.
5추마르 남쪽티베트라다크인도
6카우리크 (숨도)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심라 공항과 쿨루-마날리 공항(이중 사용)에서 관리한다.[104] 키버-랑그릭 AGL이 조사되었으며,[104] 이는 추마르, 카우리크 및 타시강-십키 라 분쟁 지역에 가장 가까운 AGL이 될 것이지만, 2020년 7월 현재 진전이 없다. 히마찰프라데시는 중국과 2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4] 인도는 바키알라에서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7타시강-십키 라 (카브 및 남기아)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
8자드 강가 계곡 (마나 고개라고도 함)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자드 강가 계곡은 중국이 주장한다. 인도는 자드 강가 전체를 통제한다. 이 지역의 일부 마을은 풀람 숨다, 상, 자드항, 넬랑 및 티르파니이며, 이들은 모두 자드 강가 계곡에 위치해 있다.
9바라 호티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친얄리소르 공항이 주요 AGL로, 피토라가르 공항이 보조 AGL로 바라호티 및 넬랑-풀람 숨다 구역에 사용된다. ITBP는 바라호티 구역과 마나 고개 지역(풀람 숨다 구역)에 42개의 BoP(국경 초소)를 가지고 있다.[105] 우타라칸드는 중국과 3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5] 인도는 이 지역의 도로를 건설하고 있으며,[106][107] 이는 2020년 12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다.[108][109]
10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일부 (특히 타왕)티베트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인도타왕 공군 기지와 알로, 메추카, 파시가트, 투팅, 비자야나가르, 왈롱 및 지로의 AGL이 이 지역을 관리한다.[110] 인도 통제 하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대부분은 중국이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타왕이 그렇다. 1987년 중-인도 충돌도 타왕에서 발생했다.


3. 1. 서부 전선 (카슈미르 지역)

인도-중국 국경 분쟁의 서부 전선은 주로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싸고 발생한다. 이 지역은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지며, 여러 차례의 분쟁을 야기했다.

실질 통제선 (LAC)의 민감하고 분쟁이 있는 위치는 뎁상 평원, 콩카 고개 지역, 쿠그랑 강 북쪽, 팡공 호수 북쪽 및 남쪽, 스팡구르 갭, 둠첼레 맞은편, 뎀초크 구역, 카우리크, 타시강, 바라호티 등이다.

분쟁 지역은 다음과 같이 목록화 할 수 있다.

번호분쟁 지역 / 구역
(다른 이름)
중국 성인도 주/UT작전 통제사건/비고
1트랜스카라코람 지역 (삭스감)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다크중국파키스탄이 조건부로 중국에 양도한 지역으로, 인도와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인도-파키스탄-중국이 만나는 서쪽의 "작전" 삼각점에 인도 통제 하의 인디라 콜 서쪽이 위치한다.
2아크사이친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라다크중국다울라트 베그 올디 AGL,[102] 및 다르북-쇼크-DBO 도로에서 관리한다.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중국이 통제하는 삭스감과 아크사이친은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 인도 통제 지역인 시아첸 지역과 접경하고 있다. 2013년 다울라트 베그 올디 사건, 2020년 중-인도 충돌, 뎁상 평원, 갈완, 팡공 호수, 핫 스프링, 콩카 고개 등 참조. 이 지역의 핫 스팟으로는 쇼크가 있다. 다른 분쟁 지역으로는 사마르 룽파가 있다.[103]
3뎀초크 / 뎀초크 (뎀초크 구역)티베트라다크인도 / 중국푸크체 AGL에서 관리한다.[102]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4, 5추마르티베트라다크인도뇨마 AGL에서 관리한다.[102] 추마르 구역은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비연속적인 지역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경까지 도로가 없다. 인도와 중국 모두 헬기장을 이용하고 있다.
6, 7카우리크
(숨도), 타시강-십키 라
(카브 및 남기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이중 사용 공항인 심라 공항과 쿨루-마날리 공항에서 관리한다.[104] 키버-랑그릭 AGL이 조사되었으며,[104] 이는 추마르, 카우리크 및 타시강-십키 라 분쟁 지역에 가장 가까운 AGL이 될 것이지만, 2020년 7월 현재 진전이 없다. 히마찰프라데시는 중국과 2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4] 인도는 바키알라에서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8자드 강가 계곡
(마나 고개라고도 함)
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자드 강가 계곡은 중국이 주장한다. 인도는 자드 강가 전체를 통제한다. 이 지역의 일부 마을은 풀람 숨다, 상, 자드항, 넬랑 및 티르파니이며, 이들은 모두 자드 강가 계곡에 위치해 있다.
9바라 호티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친얄리소르 공항이 주요 AGL로, 피토라가르 공항이 보조 AGL로 바라 호티 및 넬랑-풀람 숨다 구역에 사용된다. ITBP는 바라 호티 구역과 마나 고개 지역(풀람 숨다 구역)에 42개의 BoP(국경 초소)를 가지고 있다.[105] 우타라칸드는 중국과 3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5] 인도는 이 지역의 도로를 건설하고 있으며,[106][107] 이는 2020년 12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다.[108][109]


3. 1. 1. 아크사이친

서부 지역의 실질 통제선, 동부 라다크와 아크사이친을 구분한다. 남부 뎀촉 지역에는 두 개의 청구선만 표시되어 있다(CIA 지도).


해발 약 약 4267.20m의 카라카시 강 최저 지점에서 해발 약 6858.00m의 빙하 봉우리까지, 아크사이친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다. 면적은 약 37244km2이다. 이 지역의 황폐함은 고대 무역로가 교차하여 여름 동안 신장과 티베트에서 온 야크 대상에게 짧은 통로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7]

서부 지역 경계에 관한 초기 조약 중 하나는 도그라-티베트 전쟁 이후 1842년에 발효되었다. 펀자브 지역의 시크 제국은 1834년 라다크잠무에 병합했다. 1841년,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티베트군은 시크군을 격파하고 라다크로 진입하여 를 포위했다. 시크군의 저지를 받은 후, 티베트와 시크는 1842년 9월 추슐 조약을 체결하여 상대국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않기로 규정했다.[8] 1846년 시크의 영국 패배는 라다크에 대한 주권이 영국으로 이양되는 결과를 낳았고, 영국 위원들은 중국 관리들과 만나 국경에 대해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통적인 국경이 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인정되고 정의된다는 점에 충분히 만족했고, 국경은 획정되지 않았다.[8] 팡공 호수와 카라코람 고개의 경계는 비교적 잘 정의되었지만, 그 사이의 아크사이친 지역은 대체로 정의되지 않았다.[7][9]

존슨-아르다(Johnson-Ardagh)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Macartney-MacDonald)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다.[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여겼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말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제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 정부가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하면서 경계선이 다시 조정되었다. 하지만 지도에는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 역시 아크사이친을 인도에 포함시켰다.[32] 영국 관리들은 1940–1941년에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이 시점까지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인도의 독립 당시에도 경계선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3. 1. 2. 트랜스카라코람 지역 (삭스감 계곡)

카라코람 고개 서쪽에서는 존슨 라인이 사용되지 않는다. 1962년 10월 13일, 중국과 파키스탄은 카라코람 고개 서쪽의 경계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1963년, 두 나라는 트랜스 카라코람 지역의 5180km2~5300km2 가량을 중국에 귀속시키는 맥카트니-맥도날드 라인을 기준으로 국경을 확정했지만, 카슈미르 분쟁이 해결될 경우 재협상하기로 합의했다.[7] 인도는 파키스탄과 중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지역을 1947년 이전 카슈미르-잠무 지역의 일부로 주장한다. 그러나 인도의 이 지역에 대한 주장선은 존슨 라인만큼 카라코람 산맥 북쪽으로 뻗어 있지 않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이 국경 문제에 대해 분쟁을 겪고 있다.[7]

3. 2. 중부 전선 (우타르프라데시 주, 히마찰프라데시 주)

번호분쟁 지역 / 구역
(다른 이름)
중국 성인도 주/UT작전 통제사건/비고
6카우리크
(숨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심라 공항과 쿨루-마날리 공항(이중 사용)에서 관리한다.[104] 키버-랑그릭 AGL이 조사되었으나,[104] 2020년 7월 현재 진전이 없다. 이는 추마르, 카우리크 및 타시강-십키 라 분쟁 지역에 가장 가까운 AGL이 될 것이다. 히마찰프라데시는 중국과 2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4] 인도는 바키알라에서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7타시강-십키 라
(카브 및 남기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
8자드 강가 계곡
(마나 고개라고도 함)
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자드 강가 계곡은 중국이 주장한다. 인도는 자드 강가 전체를 통제한다. 이 지역의 일부 마을은 풀람 숨다, 상, 자드항, 넬랑 및 티르파니이며, 이들은 모두 자드 강가 계곡에 위치해 있다.
9바라 호티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친얄리소르 공항이 주요 AGL로, 피토라가르 공항이 보조 AGL로 바라 호티 및 넬랑-풀람 숨다 구역에 사용된다. ITBP는 바라 호티 구역과 마나 고개 지역(풀람 숨다 구역)에 42개의 BoP(국경 초소)를 가지고 있다.[105] 우타라칸드는 중국과 3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5] 인도는 이 지역의 도로를 건설하고 있으며,[106][107] 이는 2020년 12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다.[108][109]


3. 3. 동부 전선 (아루나찰프라데시)

1910년대 초, 영국은 존슨 선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지만, 현장에서 실질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 정부는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경계선을 채택했지만, 지도에는 반영되지 않았다.[10] 1917년부터 1933년까지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40년대 초, 영국 관리들은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그러나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대한 통제 시도를 하지 않았고, 이 문제는 인도 독립 당시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1967년에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나투 라와 초 라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인도의 보호령이었던 시킴 국경에서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었다.[33][34] 9월 11일,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나투 라에 있는 인도 초소를 공격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고,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10월에는 초 라에서 또 다른 군사적 대결이 벌어졌고 같은 날 종료되었다. 독립적인 소스에 따르면, 인도군은 이 충돌에서 "결정적인 전술적 이점"을 확보하여 중국군을 격파했다.[35]

분쟁 지역은 다음과 같다.

번호분쟁 지역 / 구역
(다른 이름)
중국 성인도 주/UT작전 통제사건/비고
1트랜스카라코람 지역 (삭스감)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다크중국파키스탄이 조건부로 중국에 양도한 지역으로, 인도와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인도-파키스탄-중국이 만나는 서쪽의 "작전" 삼각점에 인도 통제 하의 인디라 콜 서쪽이 위치한다.
2아크사이친신장 위구르 자치구 및 티베트라다크중국다울라트 베그 올디 AGL,[102] 및 다르북-쇼크-DBO 도로에서 관리한다.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중국이 통제하는 삭스감과 아크사이친은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 인도 통제 지역인 시아첸 지역과 접경하고 있다. 2013년 다울라트 베그 올디 사건, 2020년 중-인도 충돌, 뎁상 평원, 갈완, 팡공 호수, 핫 스프링, 콩카 고개도 참조. 이 지역의 주요 지점으로는 쇼크가 있다. 다른 분쟁 지역으로는 사마르 룽파가 있다.[103]
3뎀초크 / 뎀초크 (뎀초크 구역)티베트라다크인도 / 중국푸크체 AGL에서 관리한다.[102]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4추마르 북쪽티베트라다크인도뇨마 AGL에서 관리한다.[102] 추마르 구역은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비연속적인 지역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경까지 도로가 없다. 인도와 중국 모두 헬기장을 이용하고 있다.
5추마르 남쪽티베트라다크인도
6카우리크
(숨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이중 사용 공항인 심라 공항과 쿨루-마날리 공항에서 관리한다.[104] 키버-랑그릭 AGL이 조사되었으며,[104] 이는 추마르, 카우리크 및 타시강-십키 라 분쟁 지역에 가장 가까운 AGL이 될 것이지만, 2020년 7월 현재 진전이 없다. 히마찰프라데시는 중국과 2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4] 인도는 바키알라에서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7타시강-십키 라
(카브 및 남기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
8자드 강가 계곡
(마나 고개라고도 함)
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자드 강가 계곡은 중국이 주장한다. 인도는 자드 강가 전체를 통제한다. 이 지역의 일부 마을은 풀람 숨다, 상, 자드항, 넬랑 및 티르파니이며, 이들은 모두 자드 강가 계곡에 위치해 있다.
9바라 호티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친얄리소르 공항이 주요 AGL로, 피토라가르 공항이 보조 AGL로 바라 호티 및 넬랑-풀람 숨다 구역에 사용된다. ITBP는 바라 호티 구역과 마나 고개 지역(풀람 숨다 구역)에 42개의 BoP(국경 초소)를 가지고 있다.[105] 우타라칸드는 중국과 3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5] 인도는 이 지역의 도로를 건설하고 있으며,[106][107] 이는 2020년 12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다.[108][109]


3. 3. 1. 남티베트 (아루나찰프라데시)

1975년 10월 20일, 아루나찰프라데시의 툴룽 라에서 인도군 병사 4명이 사망했다.[37][38] 인도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부사관(NCO) 1명과 병사 4명으로 구성된 아삼 소총대 순찰대가 인도 영토 내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 지역은 수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정기적으로 순찰해왔던 곳이었다. 순찰대원 4명은 처음에는 실종자로 분류되었으나, 외교 채널을 통해 중국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시신은 나중에 반환되었다. 인도 정부는 중국에 강력히 항의했다.[39]

2006년, 중국 주재 인도 대사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전체가 중국 영토라고 주장했으며,[40]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졌다.[41] 당시 양국은 시킴 북단에서 최대 1km까지 침범을 주장했다.[29] 2009년, 인도는 국경을 따라 추가적인 군사력 배치를 발표했다.[42] 2014년, 인도는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해 중국이 "하나의 인도" 정책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3][44]

분쟁 지역 목록은 수백에서 수천 km2에 달하며 다음 표와 같다.

번호분쟁 지역 / 구역
(다른 이름)
중국 성인도 주/UT작전 통제사건/비고
10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일부 (특히 타왕)티베트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인도타왕 공군 기지와 알로, 메추카, 파시가트, 투팅, 비자야나가르, 왈롱 및 지로의 AGL이 이 지역을 관리한다.[110] 인도 통제 하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대부분은 중국이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타왕이 그렇다. 1987년 중-인도 충돌도 타왕에서 발생했다.


3. 3. 2. 도클람

2017년 6월, 인도와 중국 사이에 도카 라 고개 근처의 분쟁 지역인 도클람에서 군사적 대치가 발생했다.[56] 2017년 6월 16일, 중국은 분쟁 지역인 도클람 지역에 대형 도로 건설 장비를 투입하여 도로 건설을 시작했다.[56] 이전에도 중국은 인도군이 주둔하고 있는 도카 라까지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를 건설했었다.[56] 그들은 이 지점에서 로열 부탄군(RBA)의 잠페리 능선까지 도보 순찰을 수행했다.[56]

6월 16일 이후 발생한 분쟁은 중국이 인도와 부탄이 분쟁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도카 라 아래 지역에 도로 건설을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56] 이는 건설 시작 2일 후인 6월 18일, 인도가 중국의 도로 건설에 개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부탄은 중국이 1988년과 1998년에 광범위한 회담을 거쳐 작성한 양국 간의 서면 합의를 위반했다고 주장한다.[57] 작성된 합의는 1959년 3월 이전에 도클람 지역의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57] 중국은 도카 라 아래에 도로를 건설함으로써 이러한 합의를 위반한 것이다.

양국 외교부는 각국의 행동을 옹호하는 일련의 성명을 발표했다. 1890년 3월 17일 콜카타에서 서명된 1890년 영-중 협약에서 시작된 이전의 국경 회담의 모호성으로 인해, 각국은 국경 분쟁에 대한 입장을 옹호하려고 할 때 서로 다른 합의를 언급한다.[56][57] 침략 이후, 6월 28일, 중국군은 인도가 중국의 주권 영토에서 진행 중인 도로 건설을 막았다고 주장했다.[58] 6월 30일, 인도 외무부는 현 상태를 위반한 중국의 도로 건설이 인도에 대한 안보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59] 이어서, 7월 5일, 부탄은 중국에 6월 16일 이전의 현 상태를 복원할 것을 요구하는 데마치를 발표했다.[60] 7월과 8월 동안, 도클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8월 28일, 인도는 양국이 도클람 지역에서 "신속한 철수"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58]

4. 주요 쟁점

인도-중국 국경 분쟁의 주요 쟁점은 복잡하고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1947년 인도 독립 이후 인도 정부는 서쪽 국경을 확정하면서 아크사이친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오랜 관습과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7] 인도는 존슨 라인을 기준으로 국경을 주장했지만, 샤히둘라와 호탄 인근 지역은 제외했다. 인도 측 주장선은 카라코람 산맥 북동쪽으로 뻗어 쿤룬 산맥에 경계를 설정하고, 카라카쉬 강 및 야르칸드 강 유역 일부를 포함했다.[7]

1954년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인도 지도에 모든 국경선을 명확히 표시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아크사이친 지역 경계는 "미확정" 상태였다.[14] 1950년대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신장과 서부 티베트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는데, 이 중 일부가 인도가 주장하는 아크사이친 지역을 통과했다.[7] 인도는 1957년에야 이 도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58년 중국 지도에 표시되면서 확인되었다.[31]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아크사이친이 "수세기 동안 인도의 라다크 지역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7] 반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서부 국경이 획정되지 않았으며, 맥카트니-맥도널드 선이 중국 정부에 제안된 유일한 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크사이친이 이미 중국 관할 하에 있으므로 협상 시 현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1960년, 네루와 저우언라이는 국경 분쟁의 역사적, 정치적, 행정적 근거를 검토하기 위해 양국 관리들 간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32] 양측은 서부 지역 국경을 정의하는 주요 분수계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32]

분쟁 지역은 수백에서 수천 km2에 달하며,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번호분쟁 지역 / 구역
(다른 이름)
중국 성인도 주/UT작전 통제사건/비고
1트랜스카라코람 지역 (삭스감)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다크중국파키스탄이 조건부로 중국에 양도한 지역으로, 인도와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인도-파키스탄-중국이 만나는 서쪽의 "작전" 삼각점에 인도 통제 하의 인디라 콜 서쪽이 위치한다.
2아크사이친신장 위구르 자치구 및 티베트라다크중국다울라트 베그 올디 AGL,[102] 및 다르북-쇼크-DBO 도로에서 관리한다.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중국이 통제하는 삭스감과 아크사이친은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 인도 통제 지역인 시아첸 지역과 접경하고 있다. 2013년 다울라트 베그 올디 사건, 2020년 중-인도 충돌, 뎁상 평원, 갈완, 팡공 호수, 핫 스프링, 콩카 고개도 참조. 이 지역의 핫 스팟으로는 쇼크가 있다. 다른 분쟁 지역으로는 사마르 룽파가 있다.[103]
3뎀초크 / 뎀초크 (뎀초크 구역)티베트라다크인도 / 중국푸크체 AGL에서 관리한다.[102] 파둠 AGL[102] 및 레 공항은 두 번째 방어선이다.
4추마르 북쪽티베트라다크인도뇨마 AGL에서 관리한다.[102] 추마르 구역은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비연속적인 지역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경까지 도로가 없다. 인도와 중국 모두 헬기장을 이용하고 있다.
5추마르 남쪽티베트라다크인도
6카우리크
(숨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이중 사용 공항인 심라 공항과 쿨루-마날리 공항에서 관리한다.[104] 키버-랑그릭 AGL이 조사되었으며,[104] 이는 추마르, 카우리크 및 타시강-십키 라 분쟁 지역에 가장 가까운 AGL이 될 것이지만, 2020년 7월 현재 진전이 없다. 히마찰프라데시는 중국과 2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4] 인도는 바키알라에서 주장된 국경까지 도로를 가지고 있다.
7타시강-십키 라
(카브 및 남기아)
티베트히마찰프라데시 주인도
8자드 강가 계곡
(마나 고개라고도 함)
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자드 강가 계곡은 중국이 주장한다. 인도는 자드 강가 전체를 통제한다. 이 지역의 일부 마을은 풀람 숨다, 상, 자드항, 넬랑 및 티르파니이며, 이들은 모두 자드 강가 계곡에 위치해 있다.
9바라 호티티베트우타라칸드 주[105]인도친얄리소르 공항이 주요 AGL로, 피토라가르 공항이 보조 AGL로 바라 호티 및 넬랑-풀람 숨다 구역에 사용된다. ITBP는 바라 호티 구역과 마나 고개 지역(풀람 숨다 구역)에 42개의 BoP(국경 초소)를 가지고 있다.[105] 우타라칸드는 중국과 350km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105] 인도는 이 지역의 도로를 건설하고 있으며,[106][107] 이는 2020년 12월까지 완공될 예정이다.[108][109]
10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일부 (특히 타왕)티베트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인도타왕 공군 기지와 알로, 메추카, 파시가트, 투팅, 비자야나가르, 왈롱 및 지로의 AGL이 이 지역을 관리한다.[110] 인도 통제 하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대부분은 중국이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타왕이 그렇다. 1987년 중-인도 충돌도 타왕에서 발생했다.



부탄의 도클람 지역은 시킴-중국-부탄 삼각점에 위치하며, 부탄이 인도의 지원을 받아 중국과 분쟁 중이다. 2017년 중-인도 국경 대치는 도클람에서, 나투 라 및 초 라 충돌은 시킴에서 발생했다.

실질 통제선 (LAC)의 민감하고 분쟁이 있는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99][100]

4. 1. 맥마흔 라인





18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중국 고위 관리인 헝타천은 카슈가르의 영국 총영사 조지 매카트니에게 이 지역의 지도를 전달했는데, 이는 대략적인 내용이 일치했다.[13] 1899년, 영국은 매카트니가 처음 제안하고 인도 총독 엘긴 경이 발전시킨 수정된 경계를 제안했다. 이 경계선은 락창 산맥 남쪽에 있는 링지 탕 평원을 인도에, 락창 산맥 북쪽에 있는 악사이친을 중국에 두는 것이었다. 이 국경선은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영국의 관리들의 지지를 받았다. 카라코람 산맥은 자연적인 경계를 형성하여 영국 국경을 인더스강 분수계까지 설정하는 동시에 타림강 분수계를 중국의 통제하에 두었으며, 중국의 이 지역 통제는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될 것이었다.[14] 영국은 이 선을 마카트니-맥도날드 라인이라고 칭하며, 1899년 클로드 맥도날드 경의 서한을 통해 중국에 제시했다. 청나라는 이 서한에 응답하지 않았는데,[15] 일부 논평가에 따르면, 중국은 이 선이 수용된 경계라고 믿었다고 한다.[16]

4. 2. 실질 통제선 (LAC)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은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중국과 인도가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자주 이견을 보이면서 분쟁이 발생한다.[6]

해발 약 약 4267.20m의 카라카시 강 최저 지점에서 해발 약 6858.00m의 빙하 봉우리까지, 아크사이친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다. 면적은 약 37244km2이다. 이 지역의 황폐함은 고대 무역로가 교차하여 여름 동안 신장과 티베트에서 온 야크 대상에게 짧은 통로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7]

서부 지역의 경계에 관한 초기 조약 중 하나는 도그라-티베트 전쟁 이후 1842년에 발효되었다. 펀자브 지역의 시크 제국은 1834년 라다크잠무에 병합했다. 1841년,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티베트군은 시크군을 격파하고 라다크로 진입하여 를 포위했다. 시크군의 저지를 받은 후, 티베트와 시크는 1842년 9월 추슐 조약을 체결하여 상대국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않도록 규정했다.[8] 1846년 시크의 영국 패배는 라다크에 대한 주권이 영국으로 이양되는 결과를 낳았고, 영국 위원들은 이제 국경을 공유하는 중국 관리들과 만나 논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통적인 국경이 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인정되고 정의된다는 점에 충분히 만족했고, 국경은 획정되지 않았다.[8] 팡공 호수와 카라코람 고개의 두 극단에서의 경계는 비교적 잘 정의되었지만, 그 사이의 아크사이친 지역은 대체로 정의되지 않았다.[7][9]

존슨-아르다(Johnson-Ardagh)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Macartney-MacDonald)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다.[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여겼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말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제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의 정부가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하면서 경계선이 다시 조정되었다. 하지만 지도에는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 역시 아크사이친을 인도에 포함시켰다.[32] 영국 관리들은 1940–1941년에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이 시점까지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인도의 독립 당시에도 경계선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1947년 독립 이후, 인도 정부는 서쪽의 공식 경계를 확정했는데, 여기에는 아크사이친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아다-존슨 라인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인도가 국경을 정의하는 근거는 "주로 오랜 관습과 관례"였다. 존슨 라인과 달리 인도는 샤히둘라와 호탄 인근의 북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카라코람 고개(분쟁 지역 아님)에서 인도 측의 주장선은 아크사이친의 염전 북쪽 카라코람 산맥 북동쪽으로 뻗어 쿤룬 산맥에 경계를 설정하고, 카라카쉬 강 및 야르칸드 강 유역의 일부를 포함했다. 거기에서 쿤룬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아크사이친 염전을 거쳐 카라코람 산맥을 통과한 다음 팡공 호수로 향했다.[7]

1954년 7월 1일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인도 지도를 모든 국경선에 명확한 경계를 표시하도록 수정하라는 지시가 담긴 메모를 작성했다. 이 시점까지 아크사이친 지역의 경계는 존슨 라인을 기반으로 "미확정"으로 묘사되었다.[14]

4. 3. 전략적 요충지

해발 약 약 4267.20m의 카라카시 강 최저 지점에서 해발 약 6858.00m의 빙하 봉우리까지 펼쳐진 아크사이친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다. 면적은 약 37244km2이다. 이 지역은 황폐하여 인간에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고대 무역로가 교차하여 여름 동안 신장과 티베트에서 온 야크 대상에게 짧은 통로를 제공했다.[7]

서부 지역 경계에 관한 초기 조약 중 하나는 도그라-티베트 전쟁 이후 1842년에 발효되었다. 펀자브 지역의 시크 제국은 1834년 라다크잠무에 병합했다. 1841년,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티베트군은 시크군을 격파하고 라다크로 진입하여 를 포위했다. 시크군의 저지를 받은 후, 티베트와 시크는 1842년 9월 추슐 조약을 체결하여 상대국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않도록 규정했다.[8] 1846년 시크의 영국 패배는 라다크에 대한 주권이 영국으로 이양되는 결과를 낳았고, 영국 위원들은 이제 국경을 공유하는 중국 관리들과 만나 논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통적인 국경이 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인정되고 정의된다는 점에 충분히 만족했고, 국경은 획정되지 않았다.[8] 팡공 호수와 카라코람 고개의 두 극단에서의 경계는 비교적 잘 정의되었지만, 그 사이의 아크사이친 지역은 대체로 정의되지 않았다.[7][9]

존슨-아르다(Johnson-Ardagh) 선과 맥카트니-맥도날드(Macartney-MacDonald) 선은 모두 영국의 인도 지도에 사용되었다.[10] 1908년까지 영국은 맥도날드 선을 경계선으로 여겼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말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존슨 선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현장에서 실제 통제를 주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27년, 영국령 인도의 정부가 존슨 선을 포기하고 더 남쪽의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경계선을 긋기로 하면서 경계선이 다시 조정되었다. 하지만 지도에는 변경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고 여전히 존슨 선이 표시되었다.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가 발행한 "중국 우편 지도"에는 아크사이친의 경계선이 쿤룬 산맥을 따라가는 존슨 선으로 표시되었다.[13][16] 1925년에 발행된 "북경 대학교 지도" 역시 아크사이친을 인도에 포함시켰다.[32] 영국 관리들은 1940–1941년에 신장의 군벌 성스차이를 위해 아크사이친을 측량하는 소련 관리들을 알게 되자 다시 존슨 선을 옹호했다. 이 시점까지 영국은 아크사이친에 전초 기지를 건설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티베트 정부와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인도의 독립 당시에도 경계선은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17][18]

5. 외교적 노력과 군사적 대치

인도와 중국 간의 영토 분쟁은 아시아 식민주의의 역사와 명확하지 않은 경계 획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3-1914년 심라 협약에서 영국은 맥마흔 라인을 경계로 설정하려 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거부했다.[6] 인도 독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미해결 경계 분쟁은 더욱 복잡해졌다.[6] 분쟁 지역은 외딴 곳에 위치하여 행정적 관리가 미흡했고, 실질 통제선(LAC)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양국 간 이견이 잦았다.[6]

1967년 나투 라와 초 라 충돌, 1987년 숨도롱 추 대치,[36] 2017년 도클람 대치[56] 등 여러 차례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2020년에는 갈완강 계곡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양측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쟁 해결을 위해 양국은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고, 다양한 협정을 체결했다. 1960년 첫 공식 회담 이후, '경계 문제에 관한 관료 보고서'가 작성되었다.[64] 1981년 국경 회담이 재개되었고, 1988년 인도-중국 국경 문제에 관한 공동 실무 그룹(JWG)이 설치되었다. 2003년에는 특별 대표 메커니즘(SRM)이 설립되었다.[78]

군사 요원 간 분쟁 해결을 위해 5개의 국경 인적 회의 지점(BPM)이 설치되었고,[81][82] 2012년부터 군사 핫라인 구축 협상이 시작되어 2021년까지 여러 개의 핫라인이 설치되었다.[77] 2024년 10월, 인도는 국경 지역의 실질 통제선(LAC)을 따라 순찰 협정에 합의하여, 2020년 시작된 분쟁의 해소와 군대 철수로 이어질 것이라고 발표했다.[91]

5. 1. 양자 간 대화

인도와 중국 간의 영토 분쟁은 아시아의 식민주의 역사와 명확하지 않은 경계 획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3-1914 심라 협약에서 영국은 맥마흔 라인을 경계로 설정하려 했으나, 중화민국은 이를 거부했다.[6] 인도 독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미해결된 경계 분쟁은 더욱 복잡해졌다.[6] 분쟁 지역은 외딴 곳에 위치하여 행정적 관리가 미흡했고,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양국 간 이견이 잦았다.[6]

1960년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저우언라이 총리의 인도 방문 이후, 양국 간 첫 공식 국경 회담이 열렸다.[64] 이후 1960년에 세 차례의 "관료 회담"이 열렸고, 이를 통해 '경계 문제에 관한 관료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국경 협의는 지역적 분쟁과 철수, 긴장 완화와 같은 미시적인 문제와, 일괄 타결 대 부문별 타결, 실제 통제선(LAC)과 국경의 명확화 및 지도 교환,[65] 국경 분쟁과 다른 양자 관계의 연계 또는 분리[66] 등 거시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중국은 1960년에 "패키지" 제안을 했고, 1980~85년에도 다시 논의되었다. 이는 동부 지역에서 맥마흔 라인을 대체로 수용하는 대신, 인도 측이 서부 지역에서 아크사이친을 중국에 양보하는 내용이었다.[67] 1985년, 중국은 타왕을 "어떤 경계 합의에도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하며 수정된 제안을 제시했다.[67]

1981년 12월, 재개된 회담에서 중국은 국경 문제에 대해 현상 유지를 제안하며 다른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69] 1983년 10월 4차 회담에서 인도 협상가들은 다른 분야의 정상화에 동의했다.[69] 1980년대 회담 시작 무렵, 인도는 1960년 공식 보고서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양측의 법적 입장에 대해 논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20년 5월, 인도 외교부 대변인은 국경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양자 간 메커니즘이 있다고 밝혔다.[70][71][72][73]

양자 합의에 따라 국경 문제 협의를 위한 여러 기구/메커니즘이 구성되었다.

분쟁 해결 메커니즘 이름약칭제안
날짜
구성 날짜/경로첫 번째 라운드마지막 라운드
라운드
상태
날짜성명/합의
인도-중국 국경 문제에 관한 공동 실무 그룹JWG-1988[78]공동 언론 성명1989년 6월 30일-7월 4일---
인도-중국 외교 및 군사 전문가 그룹EG-1993년 9월 7일[78]국경 평화 및 평온 협정1994년 2월 2일-4일---
국경 문제에 관한 특별 대표 메커니즘SR/SRM19792003년 6월 23일[4]관계 및 포괄적 협력을 위한 원칙 선언2003년 10월 26일2019년 12월 21일[75]22기능
인도-중국 국경 문제에 관한 협의 및 조정을 위한 실무 메커니즘WMCC20102012년 1월 17일[5]협의 및 조정을 위한 실무 메커니즘 설립에 관한 협정2012년 3월 6일2020년 12월 18일[76]20기능
기타: 국경 인력 회의 지점, 핫라인(2021년 7월 기준 6개의 핫라인),[77] 정상적인 외교 채널



1962년 국경 전쟁 이후, 1981년 12월 공식적인 국경 회담이 시작되었다.[78] 1988년, 공동 언론 성명을 통해 국경 회담은 '인도-중국 국경 문제에 관한 공동 실무 그룹'(JWG)으로 공식화되었다. 2003년에는 '관계 및 포괄적 협력을 위한 원칙 선언'에 따라 특별 대표 메커니즘(SRM)이 설립되었다.[78]

2005년 4월, 또 다른 협정에서는 JWG, "인도-중국 외교 및 군사 전문가 그룹" 및 "국경 문제에 관한 특별 대표"가 계속해서 업무 및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언급했다.[4]


  • 인도-중국 국경 관련 협정
  • * 1988년: 인도-중국 국경 문제에 관한 공동 실무 그룹
  • *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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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92년: 국경 무역 출입 절차에 관한 의정서
  • ** 2003년: 국경 무역 확장에 관한 양해 각서
  • * 신뢰 구축 조치
  • ** 1993년: 1993년 국경 평화 및 평온 협정
  • ** 1996년: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에 관한 협정
  • ** 2005년: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 이행을 위한 의정서
  • * 정치적 조치
  • ** 2003년: 관계 및 포괄적 협력 원칙에 관한 선언
  • ** 2005년: 인도-중국 국경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매개변수 및 지침 원칙에 관한 협정
  • * 2012년: 인도-중국 국경 문제 협의 및 조정을 위한 실무 메커니즘 수립에 관한 협정
  • * 2013년: 국경 방위 협력 협정
  • * 2020년: 5개항 성명

5. 2. 군사적 대치

두 국가 간의 영토 분쟁은 아시아의 식민주의와 명확하지 않은 역사적 경계 획정이라는 역사적 결과에서 비롯된다.[6] 1913-1914 심라 협약 동안 영국은 맥마흔 라인이라는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중화민국은 제안된 경계선을 거부했다.[6] 인도 독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미해결된 경계 분쟁은 더욱 논란이 되었고, 분쟁 지역의 외딴 위치와 행정적 관리 미흡은 논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6]

또한 실질 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중국과 인도가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자주 이견을 보이는 것도 분쟁의 원인 중 하나이다.[6]

나투 라와 초 라 충돌은 1967년 당시 인도의 보호령이었던 히말라야 왕국 시킴 국경에서 인도와 중국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었다.[33][34] 1967년 9월 11일,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나투 라에 있는 인도 초소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고, 10월에는 초 라에서 또 다른 군사적 대결이 벌어져 같은 날 종료되었다.[35] 독립적인 소스에 따르면, 인도군은 이 충돌에서 "결정적인 전술적 이점"을 확보하여 중국군을 격파했으며, 나투 라의 많은 PLA 요새가 파괴되었다고 한다.[35]

1987년 중-인도 군사 충돌은 숨도롱 추 계곡에서 발생한 세 번째 군사 충돌로, 이전 충돌은 20년 전에 있었다.[36]

1975년 10월 20일, 아루나찰프라데시의 툴룽 라에서 인도군 병사 4명이 사망했다.[37][38] 인도 정부는 부사관(NCO) 1명과 병사 4명으로 구성된 아삼 소총대 순찰대가 인도 영토 내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으며, 해당 지역은 수년 동안 정기적으로 순찰해왔던 곳이라고 발표했다. 순찰대원 4명은 처음에는 실종자로 분류되었으나, 외교 채널을 통해 중국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되어 시신이 반환되었고, 인도 정부는 중국에 강력히 항의했다.[39]

2006년, 중국 주재 인도 대사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전체가 중국 영토라고 주장했으며,[40]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졌다.[41] 당시 양국은 시킴 북단에서 최대 1km까지 침범을 주장했다.[29] 2009년, 인도는 국경을 따라 추가적인 군사력 배치를 발표했고,[42] 2014년에는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해 중국이 "하나의 인도" 정책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3][44]

2013년 4월, 인도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2013년 다울라트 베그 올디 사건에서 다울라트 베그 올디 지역에 10km 침입하여 캠프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나중에 19km로 수정되었다. 인도 언론은 중국 군사 헬리콥터가 인도 영공에 진입하여 병력에 물자를 투하했다고 보도했지만, 중국 관리는 침입을 부인했다.[47][48] 양국 군인들은 명확하지 않은 국경에서 서로 마주보며 잠시 캠프를 설치했지만, 5월 초에 양측이 병력을 철수하면서 긴장이 완화되었다.[49] 2014년 9월, 인도와 중국은 LAC에서 대치했고, 인도 노동자들이 라다크의 국경 마을인 뎀촉에 운하를 건설하자 중국 민간인들이 군의 지원을 받아 항의했다. 약 3주 후, 양측이 병력 철수에 합의하면서 대치는 끝났다.[50] 인도군은 중국군이 인도 측 주장 영토 안에 3km 떨어진 곳에 캠프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51]

2015년 9월, 중국과 인도군은 라다크 북부의 버츠 지역에서 대치했는데, 이는 인도군이 양측 합의 순찰선에 가깝게 중국이 건설 중이던 감시탑을 철거했기 때문이다.[53]

2017년 6월, 인도와 중국 사이에 군사적 대치가 도클람에서 발생했다. 2017년 6월 16일, 중국은 도클람 지역에 대형 도로 건설 장비를 투입하여 분쟁 지역에 도로 건설을 시작했다.[56] 이전에도 중국은 인도군 주둔 도카 라까지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를 건설했고,[56] 그 지점에서 로열 부탄군(RBA)의 잠페리 능선까지 도보 순찰을 수행했다.[56] 6월 16일 이후 발생한 분쟁은 중국이 인도와 부탄이 분쟁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도카 라 아래 지역에 도로 건설을 시작하면서 비롯되었고,[56] 이는 건설 시작 2일 후인 6월 18일, 인도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부탄은 중국이 1988년과 1998년 회담을 거쳐 작성한 양국 간 서면 합의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며,[57] 작성된 합의는 1959년 3월 이전 도클람 지역 현 상태 유지를 명시하고 있다.[57] 중국은 도카 라 아래에 도로를 건설함으로써 합의를 위반했고, 양국 외교부는 각자 행동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890년 3월 17일 콜카타에서 서명된 1890년 영-중 협약에서 시작된 이전 국경 회담의 모호성으로 인해, 각국은 국경 분쟁 입장을 옹호할 때 서로 다른 합의를 언급한다.[56][57] 침략 이후, 6월 28일, 중국군은 인도가 중국 주권 영토에서 진행 중인 도로 건설을 막았다고 주장했고,[58] 6월 30일, 인도 외무부는 현 상태를 위반한 중국의 도로 건설이 인도 안보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59] 7월 5일, 부탄은 중국에 6월 16일 이전 현 상태 복원을 요구하는 데마치를 발표했다.[60] 7월과 8월 동안 도클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8월 28일, 인도는 양국이 도클람 지역에서 "신속한 철수"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58]

2019년, 인도와 중국은 LAC를 따라 한 분쟁 지점에서 국경 순찰을 조정하기로 결정했다.[61]

2020년 6월, 인도와 중국 군대는 갈완강 계곡에서 난투극을 벌여 20명의 인도 군인이 사망했다. 국제 언론은 40명 이상의 중국 군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중국 당국은 확인하지 않았다.

군사 요원 간 분쟁 해결 회담을 위한 다섯 개의 국경 인적 회의 지점 (BPM)이 있으며, 대령, 준장, 소장 간의 단계적 조정 절차를 따른다.[81][82] 이 다섯 개의 BPM 중 두 곳은 중국 남부 신장 군구에 해당하는 인도 라다크 또는 서부 (북부) 지역, 한 곳은 시킴, 두 곳은 중국 티베트 군구에 해당하는 인도 중부 및 동부 지역인 아루나찰프라데시에 있다.

2012년, 군사 간 핫라인 구축 협상이 시작되어 처음에는 인도 동부 사령부와 중국 인민해방군 청두 군구 사령부 간 통신을 위해 계획되었다. 2013년에는 군사 작전 참모부장(DGMO)급 핫라인 구축 협상이 계속되었고, 2014년에는 양국 DGMO 간 핫라인이 설치되었다.[83] 2021년에는 양국 외교부 장관 간 핫라인 구축에 합의했고,[84] 2021년 7월 31일까지 사령관 간 6개 핫라인(라다크 2개, 시킴 2개, 아루나찰 프라데시 2개)이 설치되었다.[77]

2020-2021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기간 동안 열린 '군단장급 회담'은 양측 입장 교환 및 소통 유지에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다.[85][86] 회담 길이는 9시간[87]에서 12시간 이상[88]까지 다양했고, 군 관계자 외 인도-티베트 국경 경찰 청장과 외무부 대표도 참석했다.[89][90]

2024년 10월, 인도는 국경 지역 실질 통제선(LAC)을 따라 순찰 협정에 합의했으며, 이는 2020년 시작된 장기간 분쟁 해소와 군대 철수로 이어질 것이라고 발표했다.[91]

인도와 중국은 분쟁 지역인 히말라야 국경에서 군사적 대치를 종료하기 위한 합의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4년 전 양국 군대 간 치명적인 충돌 이후 중요한 외교적 발전이며, 양측은 병력 근접 배치 LAC를 따라 긴장 완화를 위한 단계적 군대 철수 조치에 합의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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