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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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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공부성은 1870년 메이지 시대에 사회 및 산업 발전을 위해 설립된 일본의 중앙 관청이다. 철도, 광산, 통신, 토목 공사 등 다양한 산업을 관할하며,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역설계를 통해 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공부성은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공학료를 운영했으며, 1885년 폐지될 때까지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등 주요 인물들이 관여했다. 폐지 후 업무는 농상무성과 통신성으로 분할되었고, 공학료는 도쿄 대학 공학부의 전신인 제국대학 공과대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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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철도성은 메이지 시대에 설립되어 교통통신부로 통합되기 전까지 일본의 철도 administration을 담당했던 행정 기관으로, 철도망 정비, 전기화 추진, 육상 교통 부문 관할 등의 사업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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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부성
개요
공업성 표장 (위) 및 청사 (아래)
공업성 표장 (위) 및 청사 (아래)
정식 명칭공부성 (工部省)
영어 명칭Ministry of Public Works
공부성 어함 기장
공부성 어함 기장
주요 정보
주석 각료 직책공부경 (工部卿)
초대 공부경이토 히로부미
전신민부성에서 분할
후신철도국 (내각 직할), 체신성, 농상무성
설치일1870년 12월 12일 (신력)
폐지일1885년 12월 22일
조직
하부 조직료 (寮)
하부 조직 상세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 측량

2. 연혁

1870년 12월 12일, 메이지 정부는 민부성의 일부 기능을 이관하여 공부성을 설치했다. 이는 영국 출신 철도 기사 에드먼드 모렐의 제안을 이토 히로부미야마오 요조가 받아들여 추진한 결과였다.[6] 공부성은 관영 사업을 통해 철도, 조선, 광산, 제철, 통신, 등대 등 근대 국가에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871년 9월 28일, 10개 료(寮)와 1개 사(司)로 구성된 조직 체계를 갖추었으며,[2][7] 초기에는 외국인 기술 고문에게 의존했으나,[3] 1871년 공부대학교(도쿄 대학 공학부의 전신)를 설립하여 일본인 기술자 양성에도 힘썼다. 또한 해외 선진 기술 도입과 역설계를 통한 국산화도 시도했다.[4]

1880년대 전반, 국가 재정 압박 등으로 사사키 다카유키 공부경 주도 하에 철도와 전신 등 일부를 제외한 관영 공장의 민간 불하(관영 사업 불하)가 진행되었다.

1885년 12월 22일, 내각제 시행과 함께 공부성은 폐지되었다. 그 기능은 신설된 체신성(전신, 등대 담당)과 농상무성(광산, 공작 담당)으로 분할 이관되었으며, 철도 사업은 내각 직속 철도국으로, 공부대학교는 문부성으로 이관되었다.[9]

공무성 계층


대신 및 차관[5]
이름한자재임 기간퇴임 기간
대신 (工部卿|고부쿄일본어)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일본어1873년 10월 25일1878년 5월 15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일본어1878년 7월 29일1879년 9월 10일
야마다 아키요시山田 顕義일본어1879년 9월 10일1880년 2월 28일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일본어1880년 2월 28일1881년 10월 21일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 高行일본어1881년 10월 21일1885년 12월 22일
차관 (工部大輔|고부타이후일본어)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일본어1872년 10월 27일1880년 2월 28일
요시이 도모자네吉井 友実일본어1880년 6월 17일1882년 1월 10일
이노우에 마사루井上 勝일본어1882년 7월 8일1885년 12월 22일


2. 1. 설립 배경

1870년 12월 12일(메이지 3년 윤10월 20일), 메이지 정부는 급변하는 사회 및 산업 발전에 대응하기 위해 공부성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6] 이는 철도 건설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외국인 기술자 에드먼드 모렐의 제안을 이토 히로부미야마오 요조가 받아들여 태정관에 건의한 결과였다.[6] 설립 목적은 관영사업을 통해 철도, 조선, 광산, 제철, 통신, 등대 등 근대 국가에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6], 해외 산업 기술을 도입하여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8]

설립 결정 후 10개월 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871년 9월 28일(메이지 4년 8월 14일)에 조직 구성이 완료되었다. 공부성은 기존 민부성의 기능을 상당 부분 이관받아, 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의 10개 료(寮)와 측량사(司)를 포함한 총 11개 부서로 구성되었다.[2][7] 이 중 공학료와 측량사를 제외한 대부분은 민부성에서 이관된 조직이었다.[7]

설립 초기에는 각 부서 운영에 필요한 전문 지식 부족으로 외국인 기술 고문과 관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3] 그러나 정부는 자체적인 기술 인력 양성에도 힘써, 1871년 인재 육성 기관인 공부대학교(도쿄 제국 대학 공과대학의 전신)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일본인 엔지니어로 점차 외국인 인력을 대체해 나갔다. 또한, 공부성은 해외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필요한 경우 역설계를 통해 국산화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예를 들어, 1877년에는 전화기가 발명된 지 불과 1년 만에 견본을 입수하여 국내 생산을 시도하기도 했다.[4]

한편, 공부성의 역할에 대한 초기 인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설립을 제안한 모렐은 공공 사업 전반을 주관하는 부서를 구상했지만, 태정관 내에서는 주로 해외 기술 도입을 통한 식산흥업 추진 기관으로 인식되었다.[8]

2. 2. 주요 활동

1870년 12월 12일 민부성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공부성은 철도, 조선, 광산, 철강, 통신, 등대 등 근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사회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는 당시 철도 건설 수석 엔지니어였던 에드먼드 모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였다.[2]

공부성의 핵심 활동 중 하나는 해외 선진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역설계를 통한 기술 국산화 추진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예시로 1877년, 이 전화기를 발명한 지 불과 1년 만에 공부성 소속 기술자들이 전화기 견본을 입수하여 일본 내 자체 생산 모델 개발을 시도한 것을 들 수 있다.[4]

기술 개발과 더불어 전문 인력 양성에도 주력했다. 1871년 기술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공부대학교의 전신인 공학료(工学寮)를 설립하고 그 산하에 공학교(工学校)를 운영했다.[2] 1873년 7월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기술자 헨리 다이어가 공학교 도험(都検, 실질적인 교장)으로 부임하여 6년제 대학교육 체계를 마련했다. 초기에는 기초 교육을 위한 소학교 과정 설립도 검토되었으나, 다이어의 계획에 따라 대학 과정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876년에는 공학 기술뿐 아니라 예술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해 공부미술대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1877년 공학료 제도가 폐지되고 공학교 본관 건물이 완공되면서 기관의 공식 명칭이 공부대학교로 변경되었다. 이 학교는 설립 초기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에게 의존했던 일본 산업계가 점차 자국 기술 인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3] 공부대학교는 1885년 공부성이 폐지되면서 문부성으로 이관되었고[9], 이듬해인 1886년 제국대학령 공포에 따라 도쿄 대학의 공과대학(현재 도쿄 대학 공학부의 전신)으로 개편되었다.

2. 3. 관영 사업 민영화와 폐지

1880년대 전반, 사사키 다카유키 공부경 하에서 국가 재정 압박 등의 이유로 철도전신을 제외한 관영 공장의 민간 불하(관영 사업 불하)가 진행되었다. 1883년 9월 22일에는 공작국과 광산국이 폐지되고 해당 사무는 성의 직할로 변경되었으며, 시나가와 공작 분국은 시나가와 유리 제조소로, 효고·나가사키 공작 분국은 각각 효고·나가사키 조선국으로, 각지 광산 분국은 해당 지역 광산국으로 개칭되었다.

1885년 12월 22일, 내각 제도가 시행되면서 공부성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9] 공부성의 기능은 다음과 같이 여러 성(省)과 기관으로 분할 및 통합되었다.[9]

  • 광산 및 공작 사무: 농상무성으로 이관되었다.[9]
  • 전신 및 등대 사무: 신설된 체신성으로 이관되어 우편 사업과 통합되었다.[9]
  • 철도 사업: 내각 직속으로 편제되었다 (철도국 참조).[9]
  • 공부대학교: 문부성으로 이관되었다.[9]

3. 조직 구조

1870년 12월 12일, 메이지 정부는 철도 건설 수석 엔지니어였던 에드먼드 모렐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업 발전을 총괄할 공부성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약 10개월 간의 준비 끝에 1871년 9월 28일, 민부성에서 대부분의 기능을 넘겨받아 철도, 조선, 광산, 통신 등 다양한 산업 분야를 관할하는 11개 부서로 구성된 조직이 정식 출범했다.[2]

초기에는 각 부서 운영에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나,[3] 공부성 산하의 공학 기관(공부대학교의 전신)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일본인 기술자들이 배출되면서 점차 이들을 대체해 나갔다. 이 공학 기관은 기술자 양성뿐만 아니라 해외 선진 기술을 탐색하고 도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4]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공부성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많은 산업체들이 민간에 매각되었다. 결국 1885년 12월 22일, 메이지 헌법에 따른 근대적 내각 제도가 수립되면서 공부성은 폐지되었고, 그 기능은 새로 설치된 농상무성과 통신성으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대신 및 차관[5]
이름한자재임 기간퇴임 기간
대신 (工部卿|코부쿄일본어)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일본어1873년 10월 25일1878년 5월 15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일본어1878년 7월 29일1879년 9월 10일
야마다 아키요시山田 顕義일본어1879년 9월 10일1880년 2월 28일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일본어1880년 2월 28일1881년 10월 21일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 高行일본어1881년 10월 21일1885년 12월 22일
차관 (工部大輔|코부타이후일본어)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일본어1872년 10월 27일1880년 2월 28일
요시이 도모자네吉井 友実일본어1880년 6월 17일1882년 1월 10일
이노우에 마사루井上 勝일본어1882년 7월 8일1885년 12월 22일


3. 1. 10료 1사

철도 기사 에드먼드 모렐의 제안과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의 건의에 따라 메이지 3년 윤10월 20일(1870년 12월 12일) 태정관은 공부성 설치를 결정했다.[6] 당시 결정된 공부성의 역할은 백공(百工)과 광산, 제철, 등명대(등대), 철도, 전신기 등을 장악하고 상벌을 내리는 것이었다.[6]

그러나 실제 조직 구성에는 10개월이 소요되어, 메이지 4년 8월 14일(1871년 9월 28일)에 이르러 10개의 료(寮)와 1개의 사(司) 체제가 발족했다.[7] 이는 민부성에서 대부분의 기능을 이관받아 구성되었다.[2][7] 구체적인 부서는 다음과 같다.

공부성 10료 1사 (1871년 발족 당시)[7]
구분명칭 (日本語|일본어일본어)주요 담당 업무
료 (寮)철도료 (鉄道寮|てつどうりょう일본어)철도 건설 및 운영
료 (寮)조선료 (造船寮|ぞうせんりょう일본어)조선소 운영 및 선박 건조
료 (寮)광산료 (鉱山寮|こうざんりょう일본어)광산 개발 및 운영
료 (寮)제철료 (製鉄寮|せいてつりょう일본어)제철소 운영 및 철강 생산
료 (寮)전신료 (電信寮|でんしんりょう일본어)전신망 구축 및 운영
료 (寮)등대료 (灯台寮|とうだいりょう일본어)등대 건설 및 관리
료 (寮)제작료 (製作寮|せいさくりょう일본어)기계 및 설비 제작
료 (寮)공학료 (工学寮|こうがくりょう일본어)공학교 운영 및 기술자 양성, 기술 도입
료 (寮)권공료 (勧工寮|かんこうりょう일본어)산업 진흥 및 장려
료 (寮)토목료 (土木寮|どぼくりょう일본어)토목 공사
사 (司)측량사 (測量司|そくりょうし일본어)측량 업무



공학료와 측량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서는 민부성에서 이관되었다.[7] 공부성 설립을 제안했던 모렐은 공공 사업을 총괄하는 부서를 구상했지만, 태정관 내에서는 해외 기술 도입을 통해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기관으로 인식하는 시각차가 있었다.[8]

초기에는 각 부서 운영에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의 도움이 필요했지만,[3] 점차 공학료 산하의 공학교(도쿄 대학 공과대학의 전신)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기술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갔다.[3] 공학료는 기술자 양성 외에도 해외 신기술을 탐색하고 역설계를 통해 국산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1877년 전화기가 발명된 지 불과 1년 만에 공부성 소속 기술자들이 견본을 입수하여 일본 자체 모델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다.[4]

3. 2. 공부대학교

1871년 공부성은 기술자 양성을 위한 기관으로 공학료를 설치했다.[2] 처음에는 예비 교육을 위한 초등학교 과정도 계획되었으나, 1873년 실질적인 교장으로 부임한 헨리 다이어는 6년제 대학 과정만을 두는 학칙을 제정했다. 1876년에는 공부미술대학교가 병설되었다.

1877년 공학료가 폐지되고 대학 본관이 완공되면서 정식으로 공부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1885년 공부성이 폐지됨에 따라 공부대학교는 문부성으로 이관되었다.[9] 다음 해인 1886년 제국대학령이 공포되면서 제국대학 공과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는 현재 도쿄 대학 공학부의 전신이 된다.

4. 주요 인물

공부성 설립에는 영국 출신 철도 기술자 에드먼드 모렐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2] 초기에는 각 부서 운영을 외국인 고문과 관리에게 의존했으나,[3] 점차 공학 학교(도쿄 제국 대학 공과대학의 전신)에서 양성된 일본인 기술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공부성을 이끈 주요 직책으로는 대신에 해당하는 공부경(工部卿|고부쿄일본어)과 차관급인 공부대보(工部大輔|고부타이후일본어)가 있었다. 역대 공부경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다 아키요시, 야마오 요조, 사사키 다카유키 등이 있으며, 공부대보로는 고토 쇼지로,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요시이 도모자네, 이노우에 마사루 등이 임명되었다.[5] 이들 중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와 같이 이후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물로 성장한 경우도 많았다. 상세한 역대 명단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4. 1. 공부경 (工部卿)

工部卿|고부쿄일본어메이지 시대 공부성의 최고 책임자였다. 철도, 통신, 광업, 조선 등 근대 산업 육성을 담당하는 공부성의 정책을 총괄했다.[2]


4. 2. 공부대보 (工部大輔)

공부경을 보좌하며,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차관급 직책이다.[5] 역대 공부대보는 다음과 같다.

역대 공부대보[5]
이름한자재임 기간
고토 쇼지로後藤 象二郎일본어1871년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일본어1871년1873년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일본어1872년 10월 27일 – 1880년 2월 28일
요시이 도모자네吉井 友実일본어1880년 6월 17일 – 1882년 1월 10일
이노우에 마사루井上 勝일본어1882년 7월 8일 – 1885년 12월 22일


5. 평가 및 영향

1870년 12월 12일, 일본 내각은 사회 및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목표로, 철도 건설 수석 엔지니어였던 에드먼드 모렐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부성(工部省)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약 10개월간의 논의 끝에 1871년 9월 28일, 메이지 정부는 민부성에서 대부분의 기능을 넘겨받아 11개 부서로 구성된 공부성의 조직 정비를 완료했다. 이 부서들은 철도, 조선소, 등대, 광산, 철강 산업, 통신, 토목 공사, 제조업, 산업 진흥, 공학 기관 운영 및 측량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담당했다.[2]

설립 초기에는 각 부서 운영을 위해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에게 상당 부분 의존해야 했으나,[3] 점차 공부성 산하 공학 기관(공부대학교, 이후 도쿄 제국 대학 공과대학의 전신)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기술 인력으로 대체되었다. 공학 기관 운영은 공부성의 핵심 기능 중 하나였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일본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공부성은 선진 외국 기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필요한 경우 역설계를 통해 국산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예를 들어, 1877년에는 이 전화를 발명한 지 불과 1년 만에 견본을 입수하여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4]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공부성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많은 산업체들이 민영화되었다. 이후 1885년 12월 22일, 메이지 헌법에 따른 내각 제도가 수립되면서 공부성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그 기능은 새로 설립된 농상무성과 통신성으로 나뉘어 이관되었다.

공부성은 비록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일본의 근대적인 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후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880년대 진행된 관영 사업 민영화 과정에서 정경유착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대신 및 차관[5]
이름한자재임 기간퇴임 기간
대신 (工部卿|고부쿄일본어)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이토 히로부미일본어1873년 10월 25일1878년 5월 15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이노우에 가오루일본어1878년 7월 29일1879년 9월 10일
야마다 아키요시山田 顕義|야마다 아키요시일본어1879년 9월 10일1880년 2월 28일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야마오 요조일본어1880년 2월 28일1881년 10월 21일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 高行|사사키 다카유키일본어1881년 10월 21일1885년 12월 22일
차관 (工部大輔|고부타이후일본어)
야마오 요조山尾 庸三|야마오 요조일본어1872년 10월 27일1880년 2월 28일
요시이 도모자네吉井 友実|요시이 도모자네일본어1880년 6월 17일1882년 1월 10일
이노우에 마사루井上 勝|이노우에 마사루일본어1882년 7월 8일1885년 12월 22일


5. 1. 긍정적 평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기관으로 평가받는다. 1870년 12월 12일, 민부성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공부성은 국가 주도로 철도, 조선, 광산, 철강, 통신, 등대 등 근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사회 기반 시설 구축을 담당했다.[2] 이는 당시 일본이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 근대적인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식산흥업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공부성은 단순히 시설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진 기술 도입과 자체 기술력 확보에도 힘썼다. 해외 기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필요한 경우 역설계를 통해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1877년에는 전화가 발명된 지 불과 1년 만에 견본을 입수하여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려는 시도를 했다.[4] 초기에는 외국인 기술 고문에게 의존했지만, 점차 자체적으로 양성한 인력으로 대체해 나갔다.[3]

특히 인재 양성에 큰 중점을 두어 1871년 공학료를 설치하고, 이후 공부대학교로 발전시켜 체계적인 기술 교육을 시행했다. 이는 도쿄 대학 공학부의 전신이 되었으며, 일본의 지속적인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배출하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9] 비록 1885년 내각제 도입과 함께 폐지되어 체신성과 농상무성으로 기능이 분할되었지만, 공부성이 짧은 기간 동안 이룩한 산업 기반 구축과 기술 인력 양성은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2. 비판적 평가

1880년대 중반 단행된 공부성 관할 사업의 민영화 과정은 정경유착 및 특혜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적 평가가 존재한다.[2] 당시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민영화 과정에 관여하여 특정 기업이나 개인에게 이권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이는 공정한 시장 경쟁을 저해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5] 또한, 민영화 이후에도 해당 사업들이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이나 보호를 받음으로써 자유로운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초기 산업 발전을 위해 외국 기술과 전문가에 의존했던 점[3]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기술 자립을 지연시키거나 특정 분야로의 산업 편중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5. 3. 한국에 대한 영향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부재함)

참조

[1] 서적 The Technological Transformation of Japan
[2] 논문 Reconsideration of Foundation of Ministry of Public Works 2016
[3] 서적 Technology and Industrial Growth in Pre-War Japan
[4] 서적 National Innovation Systems
[5] 웹사이트 太政官時代 http://homepage1.nif[...] 2014-01-09
[6] 간행물 工部省ヲ置ク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1873-10-20
[7] 간행물 工部省中諸寮司ヲ置ク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1871-08-14
[8] 논문 工部省創設再考 2015-03
[9] 간행물 太政官達第七十号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188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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