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아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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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아탈리는 1943년 알제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경제학자, 작가, 정치 컨설턴트이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파리 광산학교, 파리정치대학,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 고문, 유럽부흥개발은행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경제 성장과 긍정적 경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프랑스 경제 성장을 위한 개혁 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사회, 경제, 역사 등 다방면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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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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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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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자크 아탈리 |
원어명 | Jacques Attali |
본명 | 자크 호세 마르도케 아탈리 |
로마자 표기 | Jak Atalli |
출생일 | 1943년 11월 1일 |
출생지 | 프랑스령 알제리 알제 |
국적 | 프랑스 |
직업 | 경제학자, 작가, 고위 공무원 |
거주지 | 프랑스, 파리 |
가족 | 베르나르 아탈리 (쌍둥이 형제) |
학력 | |
모교 | 리세 장송 드 사일 파리 도핀 대학교 파리국립고등광업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1963-1965) 파리정치학교 (1965-1967) 프랑스국립행정학교 (1968-1970) |
경력 | |
주요 경력 | 유럽부흥개발은행 총재 (1991-1993) 아탈리 & 아소시에 (1994-) 플래닛 피낭스 (1998-) 국가 자문위원 (2000) 프랑스 성장 자유화 위원회 위원장 |
주요 직책 | 유럽부흥개발은행 총재 |
수상 | |
수상 | FP 선정 100대 글로벌 사상가 (2009) |
기타 정보 |
2. 초년
그는 알제리에서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으로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시몽 아탈리는 향수업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알제리 전쟁이 일어나자 파리로 이주했다. 자크 아탈리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국립행정학교(ENA), 국립광산학교를 졸업했다.[10]
자크 아탈리는 1968년부터 1985년까지 파리 도핀 대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퐁세 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1]
그는 사회당 출신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990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설립을 주도하여 1993년까지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10] 2007년 집권한 우파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밑에서는 경제개혁양당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10]
1979년, 국제 비정부기구인 액션 어게인스트 헝거를 공동 설립했다.[11]
1994년, 자크 아탈리는 전략 컨설팅, 기업 금융 및 벤처 캐피털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 자문 회사인 아탈리 앤 어소시에이츠(Attali & Associates, A&A)를 설립하여 기업의 장기적인 발전을 지원했다.
아탈리는 음악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과거 레스토 뒤 꾀르 협회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바바라를 위해 가사를 쓰기도 했다.[10] 그는 음악 경제와 사회 진화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다룬 에세이인 "소음: 음악의 정치경제"(Noise: The Political Economy of Music)라는 책을 저술했다(원제: ''Bruits'' (1977)).[10]
자크 아탈리는 경제 성장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긍정적 경제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1년부터 1991년까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고문을 역임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유럽부흥개발은행의 초대 총재를 지냈다.[10] 1997년에는 클로드 알레그르 교육부 장관의 요청으로 고등교육 학위 제도 개혁을 제안하기도 했다.
1943년 11월 1일, 알제에서 쌍둥이 형인 베르나르 아탈리와 함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시몽 아탈리는 독학으로 성공한 알제의 향수업체("Bib et Bab" 상점) 사업가였다. 1943년 1월 27일 페르난드 아베카시스와 결혼했고, 1954년 2월 11일 그의 어머니는 그의 여동생 파비엔을 낳았다. 1956년, 알제리 독립 전쟁(1954년-1962년)이 시작된 지 2년 후,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10]
자크와 베르나르는 파리 16구에 있는 장송 드 셀리 리세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장-루이 비앙코와 로랑 파비우스를 만났다. 1966년, 자크는 에콜 폴리테크니크(1963년 졸업생 중 1등)를 졸업했다. 그는 또한 파리 광산학교,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1970년 졸업생 중 3등)를 졸업했다.[10]
1968년, 니에브르의 현청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그는 3년 전에 처음 만났던 당시 현청장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을 두 번째로 만났다.[10]
1972년, 아탈리는 파리도팽대학교에서 알랭 코타의 지도하에 작성한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셸 세르는 그의 박사 학위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10]
1970년, 27세의 나이에 그는 프랑스 국무원의 회원이 되었다. 1972년, 29세의 나이에 그는 그의 첫 번째 책 두 권(''Analyse économique de la vie politique''와 ''Modèles politiques'')을 출판했으며, 이로 인해 과학 아카데미의 상을 수상했다.[10]
3. 학문 경력
파리 도핀 대학교에 있는 그의 연구실 IRIS에는 이브 스투르제(자크 아탈리가 공동 설립한 유럽 연구 프로그램 유레카(EUREKA)을 이끌었던 인물), 장 에르베 로렌지, 에리크 오르세나 등 여러 젊은 연구원들뿐만 아니라, 저널리즘, 수학, 쇼 비즈니스, 금융 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주요 인물들도 모였다.[1]
4. 정치 경력
아탈리와 프랑수아 미테랑의 긴밀한 협력은 1973년 12월에 시작되었다.[10] 그는 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의 선거 운동을 지휘했고, 이후 야당 시절 그의 주요 참모가 되었다.[10]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아탈리는 특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10] 이때부터 아탈리는 매일 저녁 프랑스 대통령에게 경제, 문화, 정치 또는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을 담은 메모를 작성했다. 그는 또한 모든 내각 회의, 국방 회의, 미테랑 대통령과 외국 국가 및 정부 수반 간의 모든 양자 회담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그에게 유럽 및 G7 정상회담의 셰르파(국가 원수의 개인 대표) 역할도 맡겼다.[10]
아탈리는 이후 레이몽 바르, 자크 들로르, 필립 세갱, 장-뤼크 라가르데르, Antoine Riboud, 미셸 세르, 콜뤼슈 등과 교류의 폭을 넓혔다. 그는 미테랑 대통령에게 장-루이 비앙코, 알랭 부블릴 및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의 몇몇 유망한 젊은 졸업생들(예: 프랑수아 올랑드와 세골렌 루아얄)을 그의 팀에 합류시킬 것을 조언했다.[10]
1982년, 그는 "경제적 긴축"을 옹호했다. 10년 동안 미테랑의 "셰르파"로서 그는 1982년 베르사유 G7 정상회담과 1989년 아르크 G7 정상회담을 주관했다. 그는 19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행사 조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0]
1997년, 클로드 알레그르의 요청에 따라 그는 3차 교육 학위 제도 개혁을 제안했고, 이는 LMD 모델의 시행으로 이어졌다.[10]
2008년과 2010년, 그는 당시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의 요청으로 프랑스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개혁을 제안하는 초당파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10] 2013년, 아탈리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요청으로 제출한 보고서에서 긍정적 경제 개념을 옹호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에마뉘엘 마크롱 경제장관이 제안한 법안의 일부 조항에 영감을 주었다.[10]
2011년 4월, 워싱턴 D.C.에서 미국의 스미소니언 협회 산하 우드로 윌슨 국제학자 센터는 아탈리에게 우드로 윌슨 공공봉사상을 수여했다.[10]
아탈리는 라타시즘을 지지해왔다.[2][3]
그는 에마뉘엘 마크롱을 발굴하여 그가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도록 한 공로로 종종 인정받는다. 실제로 그는 마크롱이 로스차일드에서 투자 은행가로 일할 때 그를 발견하여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4]
5. 국제 경력
1984년, "신기술 개발"에 전념하는 유럽 프로그램 유레카(EUREKA)의 실행을 지원했으며, 그 책임을 이브 스투르제(Yves Stourdzé)에게 맡겼다.
1989년 1월, 방글라데시의 치명적인 홍수에 대응하는 광범위한 국제 행동 계획을 시작했다.
1989년 8월, 프랑수아 미테랑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정계를 떠나 엘리제궁을 나왔다. 그는 런던에 유럽 부흥 개발 은행(EBRD)을 설립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인 1989년 6월에 동유럽 국가들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이 기관의 설립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는 EBRD 설립으로 이어진 파리 협상 회의를 주재했다. 그의 지휘 아래 EBRD는 원자력 발전소 보호, 환경 보호,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인프라 개발, 민간 부문 경쟁력 강화, 민주주의로의 전환 지원을 목표로 하는 투자를 장려했다.
1991년, 아탈리는 영국 수상 존 메이저(John Major)의 의견에 반대하여 런던에 있는 EBRD 본부에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를 초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도시에서 정상회담에 참석한 G7 정상들이 소련 국가원수를 만나도록 했다. 자크 아탈리와 존 메이저 사이의 격렬한 전화 통화 후, 영국 언론은 아탈리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의 기관 운영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비효율성과 방만함을 포함한 EBRD 운영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부 사항은 충격적이었다.[5] 이러한 세부 사항 중 일부는 일부 프랑스 언론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아탈리는 자신의 저서 "C'était François Mitterrand"의 "verbatim and the EBRD"라는 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해당 작업은 내가 속하지 않은 국제 작업 그룹의 감독하에 수행되었다." 실제로 아탈리가 (자발적으로) EBRD를 떠났을 때, 이사회는 그에게 기관 운영에 대한 최종 면책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회복되지 않았다.
1993년, 아탈리는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는 자신의 책 "Verbatim"에 프랑수아 미테랑의 허가 없이 비밀 기록과 다른 책을 위한 프랑스 국가원수의 여러 문장을 재현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심지어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은 1면에 미테랑 대통령이 해당 책의 판매 중지를 요청했다고 (잘못) 주장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장시간 인터뷰에서 아탈리에게 이 책을 쓰라고 요청했고, 교정을 보고 수정할 기회를 주었다고 확인했다.
1998년, 아탈리는 80개국 이상에서 활동하고 5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며 10,000개 이상의 소액금융 사업자와 이해관계자에게 자금, 기술 지원 및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인 Positive Planet을 설립했다. Positive Planet은 프랑스 빈곤 지역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2001년 아탈리는 "유용된 회사 자산 은폐 및 로비"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그는 2009년 10월 27일 파리 사법 재판소에서 "의혹의 이익"으로 석방되었다.[6]
아탈리는 새로운 세계 질서 창출을 통해 민주주의의 생존을 좌우할 세계적인 법치주의 확립을 옹호한다. 그는 세계 금융 감독 기관에 의한 경제 규제가 2008년에 시작된 금융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금융 기관은 그의 1981년 저서 "Verbatim"에 모두 제시된 대로, 유럽 연합이 실험실이 될 수 있는 민주적인 세계 정부의 설립을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6. 민간 금융 경력
2012년에는 제네바에 본사를 둔 스위스 중개 회사인 케플러 캐피털 마켓츠(Kepler Capital Markets)의 감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7] 같은 해, 크레디 아그리콜(Crédit Agricole)은 전 세계적으로 약 7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슈브뢰(Cheuvreux)를 케플러 캐피털 마켓츠에 매각했다.
그는 또한 문화와 기술 등을 다루는 종합 사이트 Slate.fr(Slate.fr)의 감사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8]
7. 음악 및 예술 활동
1978년, 그는 프랑수아 페르 감독의 영화 ''폴린 엣 롤르디나튀르''(Pauline et l'ordinateur)에서 자신을 연기했다.[10]
2003년부터 그는 파트릭 수이요 감독 아래 아마추어를 위한 그르노블 대학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10] 그는 프란츠 벤다가 작곡한 교향곡부터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모차르트가 작곡한 미사곡,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펠릭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피아노,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중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곡들을 연주했다.[10] 2012년에는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을 연주하는 "뮤직 앙 센느 오케스트라"(Musiques en scène orchestra)를 지휘했고,[10] 파리에서 열린 테크니온 공과대학교 갈라 공연에서 친구이자 유전학자인 다니엘 코헨과 함께 라무르 오케스트라를 공동 지휘했다.[10] 또한 8월에는 로잔 심포니에타를, 예루살렘과 파리에서는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리스 라벨의 G장조 협주곡을 지휘했다.[10] 그는 상하이, 봉디, 마르세유, 런던, 아스타나에서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10]
2012년, 파트릭 수이요와 함께 그르노블 오페라 제작소(Fabrique Opéra Grenoble) 모델을 따른 전국 규모의 단체를 설립하여, 직업 고등학교 학생들의 참여와 함께 협동 오페라 제작을 조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0] 2010년 9월에는 오르세 미술관 이사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0]
8. 경제 성장과 긍정적 경제에 대한 고찰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니콜라 사르코지 정권 하에서 프랑스 경제 성장 해방에 관한 초당파 정부 위원회(아탈리 위원회)를 이끌었다.[10]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에서는 긍정적 경제에 관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44가지의 개혁을 제안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아탈리 위원회의 대변인을 역임했으며, 2010년 3월 위원으로 참여했다.[10]
그는 신기술 개발에 매달리는 유럽 프로그램 유레카(EUREKA)를 공동 설립했고, 비영리 단체 플라네트 파이낸스(PlaNet Finance)를 설립했다. 또한 전략, 기업 금융, 벤처 캐피털 관련 국제 컨설팅 회사인 아탈리 앤 어소시에이츠(Attali & Associates, A&A)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아탈리는 『노이즈: 음악, 화폐, 잡음』, 『반(反)경제학』, 『2030년 잭 아탈리의 미래 예측』 등 50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다. 2009년에는 외교정책(Foreign Policy)지가 선정한 세계적 사상가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11]
1973년 프랑수아 미테랑과의 긴밀한 협력을 시작하여 1981년 미테랑 대통령 당선 후 특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미테랑을 위해 경제,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메모를 작성하고, 각료회의, 국방회의, 양자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또한 G7 정상회의를 위한 셰르파 역할을 맡았다.
레이몽 바르, 자크 드롤, 필립 세갱, 장-뤼크 라갈데르, 앙투안 리부, 미셸 푸코, 콜리슈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장-루이 비앙코와 알랭 뷰브릴을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프랑수아 올랑드와 세골렌 루아얄 등 파리정치학교 졸업생들을 자신의 팀에 합류시키기도 했다.
1982년 셰르파로서 베르사유 G7 정상회의를, 1989년에는 아르시 G7 정상회의를 조직했다. 1989년 7월 4일에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식 조직에 참여했다.
2013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제출된 보고서에서 "긍정적 경제" 개념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경제 장관 에마뉘엘 마크롱이 제안한 법률 조항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2011년 4월 7일, 미국의 스미소니언 협회 우드로 윌슨 국제 학술 연구 센터는 워싱턴 D.C.에서 PlaNet Finance 설립자 자크 아탈리에게 우드로 윌슨상을 수여했다.
8. 1. 프랑스 성장 해방 위원회 (아탈리 위원회)
2007년 7월 24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성장을 제한하는 병목 현상" 연구를 담당할 초당파 위원회 위원장으로 아탈리를 임명했다.[10] 위원회는 아탈리가 직접 선정한 4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당원이었다. 위원회의 만장일치 보고서는 2008년 1월 23일 대통령에게 제출되었으며,[10] 프랑스 경제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여 경제 성장의 병목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권고를 담고 있었다.[10]
8. 2. 긍정적 경제 위원회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아탈리에게 "긍정적 경제학" 상황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의뢰했다.[10] 이 보고서는 단기주의를 종식하고, 단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제에서 공공 이익과 미래 세대의 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로 전환하며, 부의 경제에 기반한 구 모델에서 경제 주체들이 이윤 극대화 이외의 다른 의무를 갖게 되는 모델로의 전환을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광범위한 위원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44개의 개혁을 제안했다.[10]
9. 저술 활동
자크 아탈리의 문학 작품은 수학, 경제 이론, 수필, 소설, 전기, 회고록, 아동 문학, 극작 등 문학 분야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어 작품에 공통적인 주제를 찾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의 모든 수필은 과거에 대한 장기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미래를 묘사하려는 힘든 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를 위해 그는 음악, 시간, 재산, 프랑스, 유목 생활, 건강, 바다, 현대성, 세계 정부, 사랑과 죽음 등 인간 활동과 그 다양한 측면의 이야기를 엮는다.
그의 작품은 역사와 그 연속적인 단계에 대한 독특한 비전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적, 기술적, 지정학적으로 동시에 나타난다. 더욱이 그의 작품은 인간이 죽음을 피하기 위한 대상이 되는 인공물로 인류의 느린 변형과 그러한 변형을 수반하는 혼돈으로의 지정학적 진화를 묘사한다. 한편, 인간은 미래 세대의 이익을 고려하고 안드로이드화로 나아가는 트랜스휴먼적인 의체(prosthetic) 사회, 새로운 세계적 통치, 인류 본질 구성의 성화에 이르는 각성을 기다리며, 사회주의와 이타주의(저서에서 이타주의와 트랜스휴머니즘이 결합되어 있다)의 개념과 개인적 성장의 방법을 고찰하고 있다.
초기 저서부터 아탈리는 당시에는 약했지만 나중에 실현된 미래의 신호를 예견하고 발표했다.
- 1976년 ''La parole et l'outil''에서 그는 에너지 기반 사회에서 정보 기반 사회로의 전환을 발표하고 설명했다.
- 1977년 ''Bruits''에서 그는 나중에 인터넷, 유튜브, 그리고 음악 연습의 중요성을 발표했다.
- 1978년 ''La nouvelle économie française''에서 그는 개인용 컴퓨터, 초감시 및 자기 감시의 출현에 대해 논의했다.
- 1980년 ''Les trois mondes''에서 그는 태평양을 중심으로 권력 중심의 이동을 발표했다. 같은 해 ''L'ordre Cannibale''에서 그는 현재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알려진 보철 사회의 출현을 발표했다.
- ''Histoires du temps''에서 그는 역사의 빠른 속도와 관계의 증가하는 긴급성을 발표했다.
- ''Amours''에서 그는 다중 연애 관계의 출현을 발표했다.
- ''Au propre et au figuré''에서 그는 재산과 그 사용의 단절을 발표했고, 이후 "유목적 객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 1990년 ''Lignes d'horizons''에서 그는 미국 권력의 상대적 쇠퇴를 예측했다.
- ''Brève histoire de l'avenir''에서 그는 건강 데이터 및 보험 회사에 의한 기업 권력 장악을 발표했다.
- ''L'homme nomade''에서 그는 정주 생활이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했던 인구의 대규모 이동을 묘사했다.
아탈리는 유대인 사상과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차원을 반추했다. 그는 또한 ''Du cristal à la fumée''에서 연극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또한 종교 간 대화에 대해 반추했다 (La confrérie des éveillés과 Le Destin de l'Occident).
그의 전기 출판의 초점은 그들의 생각의 힘으로 세계 역사를 뒤흔든 인물들의 삶을 다시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간디, 파스칼, 마르크스, 다윈, 드니 디드로, 마이모니데스, 토마스 아퀴나스, 아비 바르부르크, 조르다노 브루노.
아탈리의 소설은 대부분 판타지 소설 장르, 또는 적어도 약간의 디스토피아 소설 하위 장르로 분류되며, 같은 주제를 다룬다. 특히 그의 소설은 인류가 직면한 위험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인물들은 숨고 사라지려고 애쓴다.
최근 그는 범죄 소설과 디스토피아 소설을 결합하여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재등장하는 경찰서장을 상상했다.
아탈리는 여러 회고록에서 그가 참여했던 주요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미테랑 대통령 시대의 수년간을 그렸다. 그는 또한 유럽 부흥 개발 은행의 창설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고, 그의 곁에서 20년을 보낸 ''C'était François Mitterrand''에서 미테랑의 초상화를 그렸다.
10. 주요 저서
아탈리의 저술 활동은 수학, 경제 이론, 수필, 소설, 전기, 회고록, 아동 문학, 희곡 등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어 작품에 공통적인 주제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
그의 수필은 먼 과거를 분석하여 미래를 그려내는 어려운 작업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음악, 시간, 재산, 프랑스, 유목민의 삶, 건강, 바다, 근대성, 세계적 거버넌스, 사랑과 죽음 등 인간 활동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를 엮는다. 작품은 역사와 그 연속적인 단계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며, 이념적이면서 동시에 기술적이고 지정학적이다. 또한 작품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면하기 위한 인공물에 대한 느린 "변화"와 그에 따른 혼돈으로의 지정학적 진화를 그린다. 그 사이 인류는 미래 세대의 이익을 고려하면서 안드로이드화로 나아가는 트랜스휴먼적인 의체 사회, 새로운 세계적 통치, 인류 본질 구성의 성화에 이르는 각성을 기다리며, 사회주의와 이타주의(저서에서 이타주의와 트랜스휴머니즘이 결합되어 있다)의 개념과 개인적 성장의 방법을 고찰하고 있다.
아탈리는 초기 작품부터 미래의 신호를 예견하여 발표해 온 작가이기도 하다. 1977년 이미 후일의 인터넷, 유튜브, 그리고 음악적 훈련 시대의 도래에 대해 암시적으로 발표했다. 1978년의 [http://www.attali.com/livre/la-nouvelle-economie-francaise/ La nouvelle économie française]에서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 초감시, 자기 감시에 대해 논의했다. 1980년의 [http://www.attali.com/livre/les-trois-mondes-pour-une-theorie-de-lapres-crise/ Les trois mondes]에서 유럽-미국 대서양에서 미국-아시아 태평양으로의 권력 중심 이동을 예언했다. 같은 해 다른 소설 [http://www.attali.com/livre/lordre-cannibale/ L'ordre Cannibale]에서는 현재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알려진 의체 사회의 도래를 발표했다. 1982년의 [https://www.fayard.fr/sciences-humaines/histoires-du-temps-9782213011189 Histoires du temps]는 역사의 급속한 가속화와 (서로 다른 역사 간의) 직접적(즉각적) 관계의 확대를, [https://www.fayard.fr/documents-temoignages/amours-9782213630106 Amours]에서는 다중 로맨틱 관계의 출현을 그렸다(단, '시간의 역사'는 인용 없이 타인의 저작을 그대로 베낀 부분이 지적되어 표절 문제를 일으켰다[15]). [http://www.attali.com/livre/au-propre-et-au-figure/ Au propre et au figuré]에서는 재산의 분할과 그 용도, 그리고 "유목적 객체"의 개념을 제시했다. 1990년의 [https://www.fayard.fr/sciences-humaines/lignes-dhorizon-9782213024745 Lignes d'horizons]에서는 미국의 힘의 상대적 쇠퇴를 예측했다. Brève histoire de l'avenir는 건강 데이터와 보험 회사에 의한 기업의 힘 증대를, [http://www.attali.com/livre/lhomme-nomade/ L'homme nomade]는 정주 생활이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함을 주장했다.
또한 그의 저서는 유대인의 사상과 역사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 주제는 "유대인, 세계와 돈 ― 일신교와 경제의 4000년사([http://www.attali.com/livre/les-juifs-le-monde-et-largent/ Les Juifs, le monde et l'argent](2002))"와 [http://www.attali.com/livre/du-cristal-a-la-fumee/ Du cristal à la fumée]에서 다루고 있다. 서로 다른 종교 간의 대화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La confrérie des éveillés와 [https://www.fayard.fr/histoire/le-destin-de-loccident-9782213671789 Le Destin de l'Occident])을 밝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간디, 파스칼, 마르크스, 다윈, 드니 디드로, 마이모니데스, 토마스 아퀴나스, 아비 바르부르크, 조르다노 브루노 등 아탈리가 그리는 전기는 자신의 사상에 따라 세계 역사를 뒤흔든 인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은 판타지 소설 장르로 분류되거나, 또는 약간 디스토피아 소설의 아장르로 분류되며, 반복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멸망을 두려워하는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https://www.attali.com/livre/nouvelles/ Nouvelles], [https://www.attali.com/livre/les-portes-du-ciel/ Les portes du ciel], [https://www.attali.com/livre/le-premier-jour-apres-moi/ Le Premier jour après moi], [https://www.attali.com/livre/il-viendra/ Il viendra], Notre vie disentisils 등). 최근에는 범죄 소설과 디스토피아 소설을 결합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실제 경험으로서 자신이 관련된 몇 가지 사건을 회고록으로 저술하고 있다. 일간지의 의뢰로 미테랑 대통령 시대의 수년간을 그렸다. 또한 유럽 부흥 개발 은행 설립에 관한 회상을 되짚어보고, 미테랑 곁에서 보낸 20년을 회고하며, 그의 초상화를 글로 그렸다.
일본에서는 경제, 예술, 역사학에 정통한 석학이자, 시공간을 초월하는 거대한 틀에서 미래를 예언하는 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저서 속 제안들은 가까운 미래를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져 애호가들도 많으며,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21세기의 역사』(Une brève histoire de l'avenir)와 『2030년 잭 아탈리의 미래 예측』(Vivezment après-demain)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1984 | 《식인 풍습과 문명: 의학사에서의 삶과 죽음》 | |
1985 | 《소음: 음악의 정치경제학》 |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번역,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ric Jameson) 서문, 수전 맥클래리(Susan McClary) 후기 |
1987 | 《영향력 있는 한 인물: S.G. 워버그(S.G. Warburg)의 운명》 | |
1992 | 《밀레니엄: 다가오는 질서에서의 승자와 패자》 | |
1994 | 《유럽(들)》 | |
1999 | 《문화와 사회의 미궁: 지혜로 가는 길》 | 조셉 로우(Joseph Rowe) 번역 |
1999 | 《프라테르니테》 | |
2005 | 《칼 마르크스 또는 세계 사상》 | 원제: 《Karl Marx ou l'esprit du monde》 |
2002 | 《유대인, 세계 그리고 돈, 유대 민족의 경제사》 | 파야르(Fayard) 출판 |
2005 | 《프랑수아 미테랑이었다》 | 파야르(Fayard) 출판 |
2006 | 《미래의 간략한 역사》 | 아케이드 퍼블리싱(Arcade Publishing) 출판, 원제: 《Une Brève histoire de l'avenir》 |
2008 | 《위기, 그리고 그 후?》 | 파야르(Fayard) 출판 |
2010 | 《유대 민족의 경제사》 |
11.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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