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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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공소는 당나라 말기 노룡군 번진의 절도사였다. 유주 출신으로, 장윤신의 휘하 장수였다가 평주자사를 거쳐, 872년 장윤신 사후 노룡군을 점거하고 절도사가 되었다. 희종 즉위 후 동중서문하평장사 칭호를 받았으나, 폭력적인 성격으로 백안상공이라 불렸다. 875년 이무훈의 반란으로 패배하여 장안으로 도주, 복주사호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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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룡군 절도사 (당) - 사사명
사사명은 안사의 난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우다 아들에게 살해당한 당나라의 장군이자 연나라 황제로, 본래 이름은 사사간이었으며 돌궐과 소그드인 혼혈로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 노룡군 절도사 (당) - 안록산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한 반란 지도자였으나, 2년 후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 당나라의 장군 - 흑치상지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나라 장군으로 활약하며 티베트, 돌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모함으로 옥사 후 명예를 회복한 인물이다. - 당나라의 장군 - 부여융
부여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자 당나라 장수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 유민을 다스렸으나 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축출되어 낙양에서 사망했으며, 백제 마지막 태자 여부 논쟁과 엇갈린 행적으로 평가가 나뉜다. - 당나라의 동중서문하평장사 - 마식 (당나라)
마식은 당나라 중기의 인물로, 헌종 연간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문종 연간에 재상이 되었으나 환관과의 관계로 파면되어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 당나라의 동중서문하평장사 - 곽자의
곽자의는 당나라 중기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토번과 위구르의 침략을 막아 당 왕조 부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분양왕에 봉해지고 그의 삶은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장공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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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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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공소 |
한자 | 張公素 |
생몰년 | 565년 ~ 632년 |
자 | 사립 (士立) |
본관 | 위주 (魏州) |
시대 | 수나라, 당나라 |
사인 | 납언 (納言), 중서령 (中書令) |
시호 | 정 (定) |
관력 | |
수나라 | 급사중 (給事中) 예부시랑 (禮部侍郞) 민부시랑 (民部侍郞) |
당나라 | 이세민의 천책부병조참군 (天策府兵曹參軍) 납언 (納言) 중서령 (中書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장위 (張威) |
아들 | 장손절 (張孫節) |
2. 생애
장공소는 노룡군 번진의 본거지인 유주 범양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 의종 함통 연간(860년 ~ 874년)에 노룡군 절도사 장윤신의 수하 장수였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현 허베이성 친황다오 시)에 이르렀다.[4]
872년 장윤신이 사망하자, 당 의종은 그의 아들 장간회를 노룡군 유후(留後)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공소는 평소 위엄과 명망이 있어 노룡군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장윤신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평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유주로 향했다. 장간회는 장공소가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해 3월 장안으로 도주하였다. 그해 4월 의종은 장공소를 노룡군 유후로 임명하였고, 6월에는 정식 절도사에 임명하였다.[5][2]
873년 희종이 즉위하면서, 장공소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재상 직함을 하사하였다.[4]
장공소는 절도사가 된 이후 잔인하고 난폭해졌으며, 거만한 태도로 인해 유주 사람들은 그를 “백안상공(白眼相公)”이라 불렀다고 한다.[6]
875년, 위구르 출신 대장 이무훈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무훈은 노룡군 장병들에게 존경받던 숙장(宿將) 진공언(陳貢言)을 암살하고 그의 군대를 장악한 뒤, 진공언을 사칭하며 장공소를 공격했다. 장공소는 이무훈에게 패하여 장안으로 도주했고, 이후 이무훈이 유주성에 입성한 뒤에야 사람들은 그가 진공언이 아님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이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4] 이후 희종은 장공소를 복주사호(復州司戶. 현 산시성 한중시)로 좌천시켰다.[4]
2. 1. 출신 배경
장공소는 노룡군 번진의 본거지인 유주 범양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 의종의 함통 연간(860년 ~ 874년)에 장공소는 당시 노룡군 절도사 장윤신의 수하 장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현 허베이성 친황다오 시)에 이르렀다.[4]2. 2. 노룡군 번진의 점거
872년 장윤신이 사망하자, 당 의종은 그의 아들 장간회를 노룡군 유후(留後)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평소 위엄과 명망이 있어 노룡군 장병들의 존경과 복종을 받던 장공소는 장윤신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평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유주로 향했다. 장간회는 장공소가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해 3월 장안으로 도주하였다. 그해 4월 의종은 장공소를 노룡군 유후로 임명하였고, 6월에는 정식 절도사에 임명하였다.[5][2]2. 3. 노룡군 절도사 시대
873년 희종이 즉위하면서, 장공소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재상 직함을 하사하였다.[4]장공소는 절도사가 된 이후 잔인하고 난폭해졌으며, 거만한 태도로 인해 유주 사람들은 그를 “백안상공(白眼相公)”이라 불렀다고 한다.[6]
875년, 위구르 출신 대장 이무훈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무훈은 노룡군 장병들에게 존경받던 숙장(宿將) 진공언(陳貢言)을 암살하고 그의 군대를 장악한 뒤, 진공언을 사칭하며 장공소를 공격했다. 장공소는 이무훈에게 패하여 장안으로 도주했고, 이후 이무훈이 유주성에 입성한 뒤에야 사람들은 그가 진공언이 아님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이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4]
그 후, 희종은 장공소를 복주사호(復州司戶. 현 산시성 한중시)로 좌천시켰다.[4]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4]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5]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6]
서적
신당서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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