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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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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윤신은 당나라 덕종 시대에 태어나 872년에 사망한 노룡군 절도사이다. 859년 재상 직함을 받았으며, 868년 연국공에 책봉되었다. 방훈의 난 때 군량미와 소금을 지원하여 조정에 기여했고, 870년 시중의 직함을 받았다. 22년간 절도사로 재직하며 근면하고 검소하게 백성을 다스려 평화를 유지했고, 14명의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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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85년 출생 - 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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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리아노 2세는 867년 7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로타르 2세 사후 상속 분쟁을 중재하고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특사를 파견했으나, 대립 교황 아나스타시우스를 잘못 임명하여 프랑크 왕국과 불화를 겪고 872년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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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신
장윤신(張允伸)
장윤신 영정
장윤신 영정
봉창(逢昌)
시호충렬(忠烈)
봉작완산군(完山君)
본관인동(仁同)
출생지황해도 금천(金川)
사망지평안도 삭주(朔州)
관력
최종 관직중추부 지사(知事)
가계
아버지장연(張淵)
어머니해주 최씨(海州 崔氏)
배우자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安東 金氏)
자녀장지화(張之華)
장사화(張士華)
장백화(張百華)
장천화(張千華)
장만화(張萬華)
기타 정보
묘소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사당충현사

2. 생애

장윤신은 당 덕종 재위 기간인 785년에 태어났다. 그는 범양 출신으로, 증조부 장수(張秀), 조부 장암(張巖), 부친 장조액(張朝掖)을 포함한 그의 직계 조상들은 모두 노룡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장윤신 자신도 노룡군 장교로 복무했다.[1] 850년, 절도사 주림이 사망하자, 병사들은 장윤신을 주림의 후임으로 옹립했고, 당시 재위 중이던 당 선종은 이를 승인하여, 먼저 장윤신을 절도사 대리로 임명하고 그 해 말에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4]

872년 1월, 장윤신은 중풍으로 쓰러져, 건강 관리를 위해 책임을 내려놓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의종은 이를 수락하고 그의 아들 장건회를 임시 절도사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윤신은 사망했다.[3] 장윤신은 22년간 절도사로 재직하면서 근면하고 검소했으며, 관할 지역은 평화롭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전해진다.[1]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장윤신은 당나라 당 덕종 치세 중이었던 785년에 노룡군 번진의 본거지인 유주 범양(현재의 허베이성 베이징 시 서남쪽)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장수(張秀)는 단주자사(檀州刺史, 현재의 허베이성 미윈 현)를 역임하였고, 조부 장암(張巖)은 납항군사(納降軍使, 현재의 허베이성 베이징 시 북동쪽에 있던 기지부대의 사령관)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장조액(張朝掖)은 사후 태위(太尉)에 추증되었다.[7] 이들 3대를 포함한 그의 남계 선조들은 모두 대대로 노룡군에서 장수를 역임하였다. 장윤신 역시 노룡군에서 장수로 근무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최종적으로 압아(押牙, 의장시위를 담당하는 무관) 겸 마보도지병마사(馬步都知兵馬使)에 이르렀다.[7]

2. 2. 노룡군 절도사 시대

859년, 의종이 즉위한 직후, 장윤신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재상 직함을 하사하였다. 868년, 그는 연국공(燕國公)에 책봉되었다.[8]

869년, 조정은 서주(현 장쑤성 쉬저우 시)에서 방훈에 의해 주도된 반란(방훈의 난)에 직면하였다. 이때 장윤신은 그의 동생 장윤고(張允皐)가 노룡군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정부군 측의 작전을 지원하여 방훈군을 토벌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의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장윤신은 10만 석의 군량미와 2만 석의 소금을 정부군 측에 제공할 뜻을 밝혔다. 이에 의종은 그렇게 할 것을 명하였고, 조서를 내려 그를 칭찬하였다.[7] 870년에는 장윤신에게 시중(侍中)의 직함을 추가로 하사하였다.[6]

872년 1월, 장윤신은 중풍을 앓아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는 조정에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타인에게 군정을 위임해 줄 것을 청구하였다. 의종은 이를 받아들여 그의 아들 장간회를 유후에 임명하였다. 이후 병이 위독해지자,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정절(旌節. 의장의 한 가지)을 반납하였다. 그 직후인 1월 25일, 장윤신은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6]

3. 인물 및 평가

장윤신은 22년간 절도사로 재임하면서 근면하고 검소하며 공경하는 자세로 임하였고, 그가 다스리는 번진은 변경 지역에 있음에도 근심과 경비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으며,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풍족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성들은 무기 대신 낫을 들고 농사에 임하는 등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의지하며 편안하게 지냈다. 이후 5대 10국 시대를 거쳐 북송 때에도 그를 훌륭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7][6][9]

859년, 의종은 장윤신에게 재상 명예직인 '동중서문하평장사()' 칭호를 하사했다.[4] 868년에는 연공(Duke of Yan)에 봉해졌다. 869년, 방훈의 반란에 조정이 직면했을 때, 장윤신은 그의 형제 장윤고()에게 군대를 지휘하여 조정의 작전을 지원하도록 제안했다. 의종이 이를 거절하자, 장윤신은 군대 지원을 위해 쌀과 소금을 바쳤고, 의종은 그를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1] 870년, 의종은 장윤신에게 더 큰 재상 명예 칭호인 '시중(侍中|시중중국어)'을 하사했다.[3]

872년, 장윤신은 뇌졸중을 겪었고, 건강 관리를 위해 책임을 내려놓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의종은 이를 수락하고 그의 아들 장건회를 임시 절도사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윤신은 사망했다.[3] 그는 22년간 절도사로 재직하면서 근면하고 검소했으며, 관할 지역은 평화롭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14명의 아들 대부분도 이후 당나라의 다양한 군직에서 복무했다.[1]

4. 자녀

장윤신에게는 14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이후 당나라 조정에 출사하여 친위군 대장(주로 대장군・장군 등)・자사(刺史) 등의 여러 무관직(武官職)을 역임하였다.[7] 이 중 장간회, 유주좌사마(幽州左司馬) 장간진(張簡眞),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 장간수(張簡壽)의 이름만이 사서(史書)에 전해지는데, 장간진은 장윤신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불명)[7]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웹사이트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타이완 중앙연구원
[6] 서적 자치통감
[7] 서적 구당서
[8] 서적 자치통감
[9] 서적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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