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철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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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수철은 일제강점기부터 1966년 사망하기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음악가이다. 평양요한학교에서 박재훈, 구두회와 함께 '평양요한학교 삼총사'로 불리며 동요를 작곡했고, 강릉사범학교 음악 교사,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음악 교사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 중에는 해군정훈음악대에서 활동했으며, 미국 유학 후 중앙신학교, 숭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0년에는 월드비전과 함께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창단하여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며 해외 연주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탄일종',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등이 있으며, 미국 뉴욕 킹스 칼리지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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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철 (음악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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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수철 |
출생일 | 1917년 04월 16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석정리 |
사망일 | 1966년 11월 08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직업 | 음악가 겸 대학 교수 |
배우자 | 최봉춘 |
가족 | 아버지 장시욱 선생과 어머니 이화정 여사의 2남 3녀(5남매) 중 장남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종교 | 개신교 |
악기 | 오르간, 작곡, 지휘 |
장르 | 서양 고전 클래식 음악, 기독교 음악 |
웹사이트 | 두피디아 |
활동 시기 | 1940년~1966년 |
학력 | |
학력 | 미국 뉴욕 Briarcliff Manor King's College |
2. 생애
장수철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 (평양 - 동경 - 강릉)다섯 살 때부터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국민학교 2학년까지 다녔으며, 이후 황해도 사리원과 안악으로 전학하여 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24세) 평양요한학교에 입학하여 작곡가 박재훈, 구두회와 함께 "평양요한학교 삼총사"로 알려졌다. 그는 어린이 음악단체 "참새회"를 만들어 평양방송국에 매주 출연하여 자신이 작곡한 동요를 방송하기도 했다. 1938년 최봉춘과 결혼하였고, 1943년 박재훈, 구두회와 함께 일본 동경제국고등학교 작곡부에 등록하였으나, 1944년 학비 문제로 귀국하였다. 1946년부터 1948년 초까지 강릉사범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명 장봉주를 사용하였다.
2기 (서울 - 6.25 전쟁 - 유학)1948년 3월부터 서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했으며, 같은 해 7월부터 초동교회 전도사 겸 찬양대 지휘자로 사역했다. 6.25 전쟁 중에는 친구 박재훈과 함께 해군 정훈음악대에 소속되어 정훈합창단을 지휘했다.[1] 1954년 도미하여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서학교와 시카고 아메리칸 뮤직 콘서바토리(Chicago American Music Conservatory)에서 작곡을 공부했다.[1]
3기 (서울 - 선명회어린이합창단)1957년부터 중앙신학교, 숭실대학교 전임강사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8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교회음악협회를 창립하여 지도위원과 협동총무를 역임하였다. 1960년 월드비전 총재였던 밥 피얼스 박사와 함께 선명회어린이합창단(현 월드비전 한국어린이합창단)을 창단하여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1963년 3월 미국 뉴욕 브라이어클리프 매노(Briarcliff Manor)의 [https://www.tkc.edu/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는 그에게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해외 연주 일정으로 인해 간경변을 얻어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관두었고, 1965년 한국일보 소속 소년한국합창단을 창단하여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966년 11월 8일 간경변으로 생긴 식도정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로 향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2. 1. 1기 (평양 - 동경 - 강릉)
다섯 살 때부터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국민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국민학교 3학년 때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국민학교 4학년 때 황해도 안악으로 전학하였다. 14세 때 황해도 공립 안악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40년(24세) 평양요한학교에 들어가 1942년부터 "평양요한학교 삼총사"로 알려진 작곡가 박재훈, 구두회를 만난다. 그는 어린이 음악단체 "참새회"를 만들어 평양방송국에 매주 출연하여 자신이 작곡한 동요를 방송하였다. 평양요한학교 시절 윤춘병 목사와 이태선 목사를 만나 그들의 시에 많은 곡을 붙였다.1938년 4월 29일 최봉춘과 결혼하였다. 1943년 3월, 장수철, 박재훈, 구두회 삼총사는 함께 일본 동경제국고등학교 작곡부에 등록하였으나, 1944년 9월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부터 1948년 초까지 강릉사범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때까지 아명 장봉주를 사용하였다.
2. 2. 2기 (서울 - 6.25 전쟁 - 유학)
1948년 3월부터 서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같은 해 7월부터 초동교회 전도사 겸 찬양대 지휘자로 사역했다. 초동교회 사역 시절, 매주 목사의 성경 구절에 맞춰 찬양곡을 작곡했으나, 이 작품들은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1] 초동교회에서 강릉 시절부터 알고 지낸 시인 황금찬을 만나 그의 시에 많은 곡을 작곡했다.[1] 1949년 6월,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를 졸업했다.[1]6.25 전쟁 중에는 친구 박재훈과 함께 해군 정훈음악대에 소속되어 정훈합창단을 지휘했다.[1] 1954년 도미하여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서학교(Moody Bible Institute)와 시카고 아메리칸 뮤직 콘서바토리(Chicago American Music Conservatory)에서 작곡을 공부했다.[1] 이 기간에 평생 친구인 작곡가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를 만나 함께 귀국했다.[1]
2. 3. 3기 (서울 - 선명회어린이합창단)
1957년부터 중앙신학교, 숭실대학교 전임강사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8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교회음악협회를 창립하여 지도위원과 협동총무를 역임하였다. 1960년 월드비전 총재였던 밥 피얼스 박사와 함께 선명회어린이합창단(현 월드비전 한국어린이합창단)을 창단하여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세계 16개국에 2차에 걸쳐 해외연주여행을 실시하였고 에드 설리번 쇼, 스티브 앨런 쇼, 자크 베일리 쇼, 보조 크라운 쇼, CBS의 퍼시픽 파노라마 쇼에 출연하였다.[6]1963년 3월 미국 뉴욕 브라이어클리프 매노(Briarcliff Manor)의 [https://www.tkc.edu/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는 그에게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시카고 아메리칸 뮤직 콘서바토리 후배인 Kurt Kaiser와 그의 동료인 Ralph Carmichael, Burl Ives 등과 함께 WORD 레코드 회사에서 5장의 LP를 발매하였다. ‘월드비전 한국 50년 운동사’에 따르면, 카네기 홀 공연 당시 입장한 3,500명 외에 5,000명이 입장하지 못했고, 미니애폴리스에서는 4,000여 명, 워싱턴에서는 8,000명의 입장객 외에 2,000여 명이 입장하지 못했다.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에서는 1만 2,000석이 가득 차고 약 5,000명이 입장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국 음악사에서 외국에서 이토록 많은 청중을 이끈 기록은 없었다.[6]
하지만 무리한 해외 연주 일정으로 인해 간경변을 얻어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관두었고, 1965년 한국일보 소속 소년한국합창단을 창단하여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966년 11월 8일 간경변으로 생긴 식도정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로 향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년 후 1967년 8월 5일과 6일 대만에서는 헬렌 콰(Helen Quach)의 지휘로 제임스 웨이드의 작품 'Elegy for Orchestra'가 Taipei Symphony Orchestra에 의해 장수철 박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연주되었다.[6]
3. 그의 대표작 (작사·작곡·편곡)
- 탄일종
-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4. 주요 경력
5. 학력
6. 수상
참조
[1]
음반
Faith and Joy with Burl Ives
[2]
음반
Enchanting
[3]
음반
With Ralph Carmichael
[4]
음반
Christmas Music
[5]
음반
On Tour with Kurt Kaiser
[6]
뉴스
Korea Times
196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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