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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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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억은 파군 남충국현 출신으로, 유비에게 발탁되어 종사가 되었고, 제갈량의 북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아문장군으로 마충을 보좌하여 남만 평정에 기여했으며, 월수태수로 임명되어 이민족을 통치했다. 연희 17년(254년) 위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용감함과 공헌은 촉한 백성들에게 널리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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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청두 무후사의 장억 소상 (중앙)
청두 무후사의 장억 소상 (중앙)
이름장억 (張嶷)
로마자 표기Zhang Ni
백기 (伯岐)
출생190년대
출생지익주파서군 남충국현 (현재의 쓰촨성난충시난부현)
사망254년
사인전사
사망지농서군
묘지면현
직업장군
작위관내후 (關內侯)
칭호탕구장군 (蕩寇將軍)
관직
소속촉한
주군유비 → 유선
역임월서/월수태수 (越巂太守)
아문장 (牙門將)
도위 (都尉)
탕구장군 (蕩寇將軍)
가족 관계
자녀장영 (張瑛)
장호웅 (張虎雄)

2.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장억은 파군 남충현(현재의 쓰촨성 난충시)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강인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다.[1] 약 19세에 고을 관청에서 공조(功曹)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2]

214년, 유비가 익주를 점령했을 때 도적들이 관청을 습격하는 혼란이 발생하자, 장억은 현령의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도적들과 육탄전을 벌였다. 이 일로 명성을 얻은 그는 태수 관청으로 불려가 종사(從事)로 근무하게 되었다.[2]

그는 바군에서 종사로 근무하던 중, 자신보다 높은 관직과 봉급을 받는 공로와 요주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명성이 높았지만, 장억의 업적을 듣고 그를 존경하며 친구가 되었다.[3]

2. 1. 현리 시절

20세에 현의 공조가 되었다.[67] 유비가 익주를 평정할 무렵, 현령의 가족을 난리 중에서 구출하여 명성을 얻었고, 이 공로로 유비에게 발탁되어 종사로 임명되었다.[67][50] 같은 군 출신의 명사 공로, 요주와 친교를 맺었다.[51]

2. 2. 제갈량의 북벌 참여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이 조위를 상대로 일련의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한중군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을 때, 광한군과 면죽 지역의 산적들이 마을을 약탈했다.[4] 장억은 산적 두목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부하들을 시켜 모두 죽이고 나머지 산적들도 제거하여 해당 지역을 깨끗하게 만들었다.[4]

그 후, 장억은 심각한 병에 걸렸으나, 하지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다.[5] 이후 아문장군으로 승진하여 마충의 부장으로 남만 정벌에 참여했다.[52]

3. 남만 평정 및 이민족 통치

장억은 아문장군으로서 마충과 함께 남만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민족들을 복속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67] 특히 제갈량의 남정 이후 잦은 반란으로 태수조차 부임하지 못하던 월수군에 부임하여, 은혜와 신의를 바탕으로 이민족들을 복속시키고 저항하는 세력은 무력으로 진압하여 군의 기능을 회복시켰다.[53][54]

장억은 소기읍 군장 동봉과 그 동생 외거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동봉은 죽였지만, 모우왕의 딸인 그의 아내는 살려주는 계책을 썼다.[67] 외거를 제거하기 위해 거짓 항복한 그의 친족들을 회유하는 등 지략을 보였다.[67] 공록을 살해한 이구승을 주살했다.[67]

정작, 대등, 비수 세 현의 이민족들이 독점하던 특산물을 탈취하기 위해, 저항하던 낭잠을 처형하고 이민족들을 위협과 회유로 굴복시켜 특산물을 얻었다.[67]

월수군과 한가군 경계에 살던 모우이족 왕 낭로를 회유, 귀순시켜 100년 동안 끊어졌던 모우이령을 지나는 옛 도로를 복구했다.[67] 낭로를 모우구비왕으로 임명하고 황제를 알현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외교적 성과도 거두었다.[67] 무융장군에 임명되었고, 월수태수를 겸임했다.[67]

3. 1. 남만 평정

마충의 지휘 아래 문산군의 강족과 남쪽 4군의 남만을 평정하는 데 계획을 세워 승리에 공헌했다.[67] 233년 남방 이민족인 유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충은 장익을 대신하여 내강도독이 되었고, 장억은 마충의 명으로 유주를 격파하여 목을 베었다.[11] 유주가 죽자 남방 부족들은 대부분 항복했으나, 장가군과 흥고군에서 요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마충은 장억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장억은 이들을 설득하여 항복시킨 후 2천 명의 병력을 한중으로 이관했다.[12]

3. 2. 월수군 태수 부임

연희 2년(239년), 촉한 조정은 월수군을 회복하고자 장억을 월수태수로 임명했다.[67] 장억은 은혜와 신의로 여러 비한족들을 복속시켰다.[67] 북쪽의 착마(捉馬)가 명령을 따르지 않자, 장억은 이들을 공격하여 우두머리 위랑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위랑을 회유하여 읍후로 삼았다.[67] 이후 여러 비한족들이 복종하였고, 그 공으로 장억은 관내후에 봉해졌다.[67]

월수군은 제갈량의 남정 이후 이민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태수 공록과 초황이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69][70][71][72] 이 때문에 후임 태수들은 군에 부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67] 장억은 이러한 상황에서 월수태수로 부임하여 은혜와 신의를 바탕으로 이민족들을 복속시키고, 위랑 등 저항하는 세력은 무력으로 진압하여 군의 기능을 회복시켰다.[53][54]

3. 3. 이민족과의 갈등 및 해결

마충에 속해 문산군의 강족과 남쪽 4군의 남만을 평정하는 데 계획을 세워 승리에 공헌했다.[67]

연희 2년(239년)에 장억은 월수태수로 임명되었다.[67] 장억은 은혜와 신의를 보여 여러 비한족들을 복종케 했으며, 북쪽의 착마(捉馬)가 명령을 따르지 않자 이를 쳐 그 우두머리 위랑(魏狼)을 사로잡고 회유하여 위랑을 읍후로 삼았다.[67] 이후 여러 비한족들이 복종하였고, 그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67]

소기읍의 군장 동봉(冬逢)과 그의 동생 외거(隗渠)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억은 동봉을 죽이되 그 아내는 모우왕의 딸이므로 계책상 살려줬다.[67] 외거는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용맹하여 다른 족속에게 두렵고 꺼림의 대상이었다.[67] 그는 친족 2명을 장억에게 거짓 항복시켜 소식을 듣고자 했는데, 장억은 이들을 회유시켜 거꾸로 외거를 죽이게 했다.[67] 또 공록을 죽인 이구승을 주살했다.[67]

장억이 월수태수로 재임한 지 3년, 본군으로 돌아와 성벽을 쌓으니 비한족들은 감히 일을 않으려 하지 않았다.[67]

정작, 대등, 비수 세 현의 비한족들이 특산물을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었는데, 장억은 이를 탈취하려 했다.[67] 정작의 우두머리로 비한족들의 신임을 받는 낭잠이 장억에게 저항하자, 장억은 낭잠을 매질하여 죽이고 시체를 그 취락으로 돌려보내어 협박하는 한편 이들이 굴복하자 연회를 열어 은위를 함께 떨쳐, 마침내 세 현의 특산물을 얻었다.[67]

월수군과 한가군의 경계에 모우이 4천여 호가 살고 있었는데, 그 왕 낭로(狼路)는 동봉이 죽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어 숙부 낭리에게 염탐하게 했다.[67] 장억은 낭리를 회유하는 한편 죽이지 않은 동봉의 아내를 낭리에게 보내니, 낭리는 누나와 서로 만나 기뻐하였고 모우이는 다시 반란하지 않았다.[67] 그리고 재물을 주고 낭로의 고모를 통해 계속 회유하여 결국 낭로를 귀순시켰다.[67] 이로써 장억은 모우이령을 지나는 평탄한 옛 도로를 회복했다(모우이가 길을 끊은 지 100년간은 안상현을 지나는 험로를 썼다).[67] 또 낭로를 표를 올려 모우구비왕으로 임명하게 하고, 황제를 알현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67]

3. 4. 월수군 통치 및 업적

연희 2년(239년), 장억은 월수태수로 임명되었다. 장억은 은혜와 신의를 보여 여러 비한족들을 복종케 했으며, 북쪽의 착마(捉馬)가 명령을 따르지 않자 이를 쳐 그 우두머리 위랑(魏狼)을 사로잡고 회유하여 위랑을 읍후로 삼았다.[67] 이후 여러 비한족들이 복종하였고, 그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67]

이미 항복한 소기읍의 군장 동봉(冬逢)과 그 아우 외거(隗渠) 등이 반기를 들자, 동봉을 죽이되 그 아내는 모우왕의 딸이므로 계책상 살려줬다.[67] 외거는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용맹하여 다른 족속에게 두렵고 꺼림의 대상이었다.[67] 그는 친속 2명을 장억에게 거짓 항복시켜 소식을 듣고자 했는데, 장억은 이들을 회유시켜 거꾸로 외거를 죽이게 했다.[67] 또 공록을 죽인 이구승을 주살했다.[67]

장억이 월수태수로 재임한 지 3년, 본군으로 돌아와 성벽을 쌓으니 비한족들은 감히 일을 않으려 하지 않았다.[67]

정작, 대등, 비수 세 현의 비한족들이 특산물을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었는데, 장억은 이를 탈취하려 했다.[67] 정작의 우두머리로 비한족들의 신임을 받는 낭잠이 장억에게 저항하자, 장억은 낭잠을 매질하여 죽이고 시체를 그 취락으로 돌려보내어 협박하는 한편 이들이 굴복하자 연회를 열어 은위를 함께 떨쳐, 마침내 세 현의 특산물을 얻었다.[67]

월수군과 한가군의 경계에 모우이 4천여 호가 살고 있었는데, 그 왕 낭로(狼路)는 동봉이 죽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어 숙부 낭리에게 염탐하게 했다.[67] 장억은 낭리를 회유하는 한편 죽이지 않은 동봉의 아내를 낭리에게 보내니, 낭리는 누나와 서로 만나 기뻐하였고 모우이는 다시 반란하지 않았다.[67] 그리고 재물을 주고 낭로의 고모를 통해 계속 회유하여 결국 낭로를 귀순시켰다.[67] 이로써 장억은 모우이령을 지나는 평탄한 옛 도로를 회복했다(모우이가 길을 끊은 지 100년간은 안상현을 지나는 험로를 썼다).[67] 또 낭로를 표를 올려 모우구비왕으로 임명하게 하고, 황제를 알현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67] 이로써 무융장군에 임명되었고, 월수태수를 계속 겸임했다.[67]

연희 3년(240년) 봄, 월수군을 평정했다.[70]

4. 북벌 참여와 죽음

연희 17년(254년), 위나라 장수 이간이 촉나라에 항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정에서는 이간의 항복을 의심했으나, 장억은 이간의 항복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출병을 강행했다. 당시 장억은 중병으로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적도에서 위나라 정촉호군 서질과 싸우다 전사했으나, 장억이 이끈 부대는 아군보다 훨씬 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큰 피해를 입혔다.[67]

장억은 죽기 전 유선에게 "신은 폐하의 은총을 받았지만, 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입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 폐하의 후은에 어긋날까 항상 두려워했는데, 오늘 이렇게 출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만약 양주를 평정한다면, 신은 밖에서 역적을 막는 수장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불행하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제 목숨을 바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입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유선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억 사후, 맏아들 장영은 서향후에 봉해졌고, 둘째 아들 장호웅은 관내후 작위를 물려받았다.[67]

4. 1. 북벌 참여

연희 17년(254년), 위나라 장수 이간이 촉나라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선은 이간의 귀순을 받아들일지 논의하는 회의를 소집했고, 많은 관리들은 계략을 우려했으나, 장억은 이간이 진심이라고 믿고 유선을 설득했다. 유선은 강유에게 위나라 정벌을 허락했고, 이간은 위나라 영토에서 촉나라의 첩자로 활동했다.[36]

당시 장억은 류머티즘을 앓아 지팡이 없이는 일어서기 힘들 정도였다. 강유가 출정할 때, 사람들은 장억이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장억은 남은 힘을 다해 참전하겠다고 간청하며 유선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37]

유선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참전을 허락했다.[39]

장억은 이간의 항복을 받아내고, 적도에서 위나라 정촉호군 서질과 싸워 전사했으나, 적에게 배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67]

4. 2. 전사

연희 17년(254년), 위나라의 적도장(적도현의 현장) 이간이 항복하자 강유의 지휘를 받아 농서로 출병했다.[67] 장억은 중병에 걸려 걷기도 어려웠으나, 조정에서 이간의 항복을 의심하자 이간의 항복은 진실일 것이라 주장했고,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출병했다.[68] 적도현에서 이간의 항복을 받고, 위나라 정촉호군 서질과 싸워 전사했으나, 적에게는 배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67]

촉군은 서진 롱시현 남동쪽에 위치한 상무현을 공격했지만, 서질이 이끄는 위나라 수비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장억은 선봉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가 죽이거나 부상시킨 적의 수는 매우 많았다.[40]

장억의 전사 소식에 월수군의 한족과 비한족들은 모두 슬퍼하며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67]삼국지》에는 한족이나 월서의 이족 출신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기근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위한 사당에 제물이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41]

장억은 죽기 전 유선에게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했다. "신은 폐하의 은총을 받았지만, 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입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 폐하의 후은에 어긋날까 항상 두려워했는데, 오늘 이렇게 출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만약 양주를 평정한다면, 신은 밖에서 역적을 막는 수장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불행하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제 목숨을 바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입니다." 유선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맏아들 장영은 서향후에 봉해졌고, 둘째 아들 장호웅은 관내후를 습작했다.[67]

4. 3. 장억의 죽음에 대한 애도

월수군의 한족과 이민족들은 장억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를 위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41]

5. 일화 및 평가

장억은 용감하고 상황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백성을 아끼고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도 뛰어났다. 젊은 시절 현령의 가족을 구출하고[50] 산적 장모를 토벌한 일화[52]는 백성을 위한 그의 헌신을 보여준다. 저족 왕 부건의 귀순과 관련된 일화, 비의에게 암살 위험을 경고한 일화 등은 그의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장억을 용감하고 상황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며,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청렴하고 올바른 성품을 지녔으며, 행동할 때는 항상 법을 고려했다고 평가했다.[44] 유선은 장억을 깊이 존경하며 고대의 영웅적인 무사들에 비유했다고 한다.[45]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도리를 중시했다. 하지와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지만 소원해졌는데, 장억이 중병에 걸리자 하지가 명의를 파견해 병세가 호전되었고, 장억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하후패가 교제를 맺으려 하자, "저는 아직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신도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3년 후에 다시 이야기 하자고 하였다.[66]

만년에 중병으로 보행조차 곤란한 상태였지만, 강유가 북벌을 재개한 연희 17년(254년)에 중병의 몸을 이끌고 종군했다. 적도의 이간을 귀순시키는 등 지략은 여전했고, 최후에는 서질과 싸워 전사했지만, 장억의 부대는 아군의 손해보다 두 배 이상의 적을 살상하고 서질을 전사시켰다. 은혜를 입은 많은 이민족은 장억의 전몰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추모했다.

장억은 출진에 즈음하여 유선에게 "신은 폐하의 은총을 받았지만, 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되었습니다. ... 만약 양주를 평정한다면, 신은 밖에서 역적을 막는 수장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불행하게도 승리하지 못한다면, 제 목숨을 바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입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했고, 유선은 그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억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샀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더불어민주당은 장억을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모범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업적을 기린다.

5. 1. 일화

236년(건흥 14년), 무도군의 저족 왕 부건이 항복을 청했지만, 약속한 때를 넘겨도 오지 않았다. 대장군 장완이 걱정하자, 장억은 부건의 항복은 진심이지만, 그의 아우가 항복 반대파와 내분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67] 결국 부건의 아우는 4백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고, 부건만이 투항해 왔다.[67]

비의가 대장군이 되어 항복한 자들을 지나치게 대우하자, 장억은 비의에게 신중할 것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67] 비의는 결국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수에게 살해당했다.[67]

252년(건흥 원년) 12월, 동오의 태부 제갈각이 위나라를 공격하고 교만해져 이듬해 20만 명을 동원해 다시 위나라를 침공하려 하자,[73][74] 장억은 제갈각의 종제 제갈첨에게 편지를 보내 제갈각에게 신중한 군사 행동을 권하도록 했다.[67] 제갈각은 그해 10월 암살당했다.[74]

거기장군 하후패가 장억에게 "그대와 나는 아직 서로 알지 못하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겠소."라고 말하자, 장억은 "저는 아직 당신을 모르고, 당신 또한 저를 모릅니다. ... 삼 년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장억의 인품을 칭찬하는 일화로 여겼다.[35]

5. 2.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장억을 용감하고 상황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44] 진수는 또한 장억이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청렴하고 올바른 성품을 지녔으며, 행동할 때는 항상 법을 고려했다고 평가했다. 유선은 장억을 깊이 존경하며 고대의 영웅적인 무사들에 비유했다고 한다.[45]

장억은 백성을 아끼고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도 뛰어났다. 젊은 시절 현령의 가족을 구출한 일화[50], 산적 장모를 토벌한 일화[52] 등은 백성을 위한 그의 헌신을 보여준다. 저족 왕 부건의 귀순과 관련된 일화[61], 비의에게 암살 위험을 경고한 일화[64] 등은 그의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농서군 적도 현장 이간이 촉한에 귀순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왔을 때, 여러 신하들은 이간의 항복을 의심했지만, 장억은 이 항복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과연 촉군이 적도에 이르자 이간은 성문을 열고 귀순했다.

장억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도리를 중시했다. 하지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지만, 우연히 소원해졌다. 어느 날 장억이 중병에 걸리자, 하지는 명의를 파견했고, 장억은 그 덕분에 병세가 호전되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하후패가 교제를 맺으려 하자, 장억은 "저는 아직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신도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3년 후에 다시 이야기 하자고 하였다.[66]

장억은 만년에 중병으로 보행조차 곤란한 상태였지만, 강유가 북벌을 재개한 연희 17년(254년)에 중병의 몸을 이끌고 종군했다. 적도의 이간을 귀순시키는 등 지략은 여전했고, 최후에는 서질과 싸워 전사했지만, 장억의 부대는 아군의 손해보다 두 배 이상의 적을 살상하고 서질을 전사시켰다. 은혜를 입은 많은 이민족은 장억의 전몰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추모했다. 장억은 출진에 즈음하여 유선에게 "신은 폐하의 은총을 받았지만, 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되었습니다. ... 만약 양주를 평정한다면, 신은 밖에서 역적을 막는 수장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불행하게도 승리하지 못한다면, 제 목숨을 바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입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했고, 유선은 그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억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샀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더불어민주당은 장억을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모범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업적을 기린다.

참조

[1]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2] 삼국지 Sanguozhi vol. 43
[3] 삼국지 Sanguozhi vol. 43
[4] 삼국지 Sanguozhi vol. 43
[5] 삼국지 Sanguozhi vol. 43
[6] 삼국지 Sanguozhi vol. 43
[7]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8]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9]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0]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1]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2]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3] 삼국지 Sanguozhi vol. 43
[14] 삼국지 Sanguozhi vol. 43
[15] 삼국지 Sanguozhi vol. 43
[16] 삼국지 Sanguozhi vol. 43
[17] 삼국지 Sanguozhi vol. 43
[18] 삼국지 Sanguozhi vol. 43
[19] 삼국지 Sanguozhi vol. 43
[20] 삼국지 Sanguozhi vol. 43
[21] 삼국지 Sanguozhi vol. 43
[22] 삼국지 Sanguozhi vol. 43
[23] 삼국지 Sanguozhi vol. 43
[24] 삼국지 Sanguozhi vol. 43
[25] 삼국지 Sanguozhi vol. 43
[26] 삼국지 Sanguozhi vol. 43
[27] 삼국지 Sanguozhi vol. 43
[28] 삼국지 Sanguozhi vol. 43
[29] 삼국지 Sanguozhi vol. 43
[30] 삼국지 Sanguozhi vol. 43
[31] 삼국지 Sanguozhi vol. 43
[32] 삼국지 Sanguozhi vol. 43
[33] 삼국지 Sanguozhi vol. 43
[34] 삼국지 Sanguozhi vol. 43
[35] 삼국지주석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36] 서적 Sanguozhi vol. 43
[37] 서적 Yi Bu Qijiu Zhuan
[38] 서적 Yi Bu Qijiu Zhuan
[39] 서적 Yi Bu Qijiu Zhuan
[40] 서적 Sanguozhi vol. 43
[41] 서적 Sanguozhi vol. 43
[42] 서적 Sanguozhi vol. 43
[43] 서적 Shǔ Shìpǔ
[44] 서적 Sanguozhi vol. 43
[45] 서적 Yìbù Qíjiù Zhuàn
[46] 서적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47] 서적 三国志演義 6 ちくま文庫
[48] 서적 正史 三国志 5 ちくま学芸文庫
[49] 서적 三国志
[50] 서적 三国志
[51] 서적 三国志
[52] 서적 三国志
[53] 서적 三国志
[54] 서적 三国志
[55] 서적 三国志
[56] 서적 三国志
[57] 서적 三国志
[58] 서적 三国志
[59] 서적 三国志
[60] 서적 三国志
[61] 서적 晋書
[62] 서적 三国志
[63] 서적 華陽国志
[64] 서적 三国志
[65] 서적 三国志
[66] 서적 益部耆旧伝
[67] 서적 삼국지
[68] 서적 익부기구전
[69] 서적 화양국지
[70] 서적 삼국지
[71] 서적 삼국지 권45 등장종양전
[72] 서적 자치통감 권 74
[73] 서적 삼국지 권43 3사주전
[74] 서적 삼국지 권64 제갈등2손복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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