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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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주기는 1803년 수원에서 태어나 한문학을 공부하고 천주교 교리를 배운 인물이다. 26세에 세례를 받고,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회장으로 활동하며 배론성지에서 신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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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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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주기 요셉 |
출생일 | 1803년 |
사망일 | 1866년 3월 3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수원 느지지 |
사망지 | 충청도 갈매못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시복인 |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2. 생애
장주기는 1803년 수원에서 태어나 한문학을 공부하고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해박해 이후 모방 신부에게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배론성지에서 신학교 설립을 돕고 관리인으로 봉사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1866년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되며 순교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1803년 수원 느지지(현 화성시 양감면 육당리)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학을 공부했으며, 형수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26세 때 양지마을에서 병을 앓던 중, 조선에 입국한 두 번째 사제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장주기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녀들도 모두 세례를 받았다.[1]2. 2. 신앙 활동과 배론성지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모방 신부는 장주기의 헌신과 충실함을 인정하여 그를 교리 교사(회장직)으로 임명하였고, 장주기는 죽을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1]박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 배론에서 12년 동안 살았다.[1]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조선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할 때, 장주기는 자신의 집을 신학교에 기증하였다.[1] 이듬해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를 인수하였고, 장주기는 그곳의 관리인으로 일했다.[1] 장주기는 신학교와 천주교 공동체를 위하여 11년 동안 훌륭히 봉사하였으며,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았다.[1]
2. 3.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했고, 3월 1일 포졸들이 장주기의 집을 급습했을 때, 그는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푸르티에 신부는 장주기의 석방을 위해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었지만, 장주기는 사제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죄수들이 한양으로 이송되려 할 때, 푸르티에 신부는 장주기의 석방을 요구했고, 장주기는 슬픔에 싸인 배론성지로 되돌아왔다. 닷새 후, 장주기는 쌀을 사려 노루골에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제천의 관장에게 압송되었다. 장주기는 자신이 배론신학교의 건물주인 것을 시인했다.관장은 장주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배교를 설득했지만, 장주기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관장은 장주기를 한양으로 이송시켰다. 장주기는 극심한 고문 끝에 1866년 3월 24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에 갈매못(충청도에 있던 해군 기지)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참수되었고 군문효수되었다. 그러므로 배론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장주기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64세였다.
3. 시복 및 시성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2][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인용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https://web.archive.[...]
2015-02-15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2-15
[3]
뉴스
교황 "순교자 유산, 세계 평화·인간가치 수호에 이바지할 것"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디지털 신문
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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