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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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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평공주는 명나라 숭정제의 딸로,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16세에 결혼을 앞두고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하자, 숭정제는 그녀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여 왼팔을 잃었다. 청나라 시기에는 순치제에 의해 재혼했으나, 임신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장평공주는 민간 전설과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재해석되었으며, 특히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여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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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공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주미초 (朱媺娖)
별칭곤흥공주 (坤興公主)
봉호 (청나라)장평공주 (長平公主)
가문
왕조
생애
출생1630년 5월 2일
출생지자금성, 베이징, 명나라
사망1647년 9월 26일 (향년 17세)
사망지베이징, 청나라
매장1647년
매장지광안문, 베이징
가족 관계
아버지숭정제
어머니주황후
배우자주현 (周顯)

2. 생애

숭정제와 주황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생모가 신분이 낮은 후궁으로 요절하여 주황후 손에 길러졌다고도 한다.[4] 언니 곤의공주와 동생 소인공주 등이 있었다. 뛰어난 재치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16세가 되던 해, 숭정제는 무관 주세현과 혼인을 정했으나,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의 베이징 공격으로 혼사는 중지되었다. 1644년 명나라 멸망 당시, 숭정제는 황족들이 반란군에게 능욕당할 것을 우려하여 가족들을 직접 살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장평공주는 아버지의 칼에 왼팔을 베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1] 그러나 아버지 숭정제는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린 동생 소인공주는 숭정제에게 살해당했다.

명나라 멸망 후, 장평공주는 청나라 순치제에게 비구니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원래 약혼자였던 주세현과 혼인하라는 명을 받았다. 청나라 조정은 망국의 공주를 가엾게 여겨 혼인을 위한 토지와 저택, 재물 등을 하사했다. 결혼 후 남편 주세현과 서로 존경하며 지냈고 시문과 가사에도 능했지만, 망국의 슬픔과 비극적인 경험으로 인한 마음의 병을 깊이 앓았다. 결국 결혼한 지 1년여 만인 1646년경, 임신한 상태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 그녀는 베이징 광녕문(廣寧門, 창의문) 밖에 있는 주씨 가문의 묘역에 묻혔다.

2. 1. 출생과 혼인

《명사 · 공주전》에는 장평공주의 생모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다른 사료에서는 주황후 소생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다.[1] 일설에는 생모가 신분이 낮은 후궁이었고 일찍 사망하여 주황후 손에 길러졌다고도 한다.[4]

1644년 명나라 멸망 당시 나이는 《명사 · 공주전》에 따르면 16세(허세)였으나,[1] 다른 기록에는 15세 또는 11세라는 설도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1631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숭정제이며, 언니로는 곤의공주, 조인공주가 있었고, 남동생으로는 태자 주자랑(朱慈烺), 주자찬(朱慈燦), 주자형(朱慈炯), 주자소(朱慈炤), 주자환(朱慈煥), 주자경(朱慈炅) 등이 있었다. 장평공주는 뛰어난 재치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16세가 되던 해 숭정제는 무관 주세현(周世顯)과 혼인을 정했으나, 딸을 아꼈던 숭정제가 곁에 더 두기를 원해 혼례가 미뤄지고 있었다.[4] 그러나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베이징을 함락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숭정제는 황족들이 반란군에게 능욕당할 것을 우려하여 황자들을 피신시키고, 황후와 후궁, 공주들을 직접 살해하기 시작했다. 장평공주의 차례가 되자 숭정제는 "아, 너는 어찌하여 황제의 딸로 태어났는가!"[1] 라고 탄식하며 칼을 휘둘렀다. 다행히 급소를 피하고 왼팔을 베이는 데 그쳤고, 공주는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었다. 이때 환관 왕승은이 기지를 발휘해 공주가 죽은 것처럼 꾸며 빼돌렸다는 설이 있다.

장평공주는 5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으나 아버지는 이미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후였다.[1] 이후 이자성 군에게 발견되었고, 이자성은 "주상(숭정제)은 너무 잔혹하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장평공주는 잠시 이자성의 부하에게 넘겨졌다가, 이자성 군이 패퇴한 후 외할아버지인 주규(周奎)의 집에서 지냈다.

1645년, 청나라 순치제에게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순치제는 이를 거절하고 약혼자였던 주세현과 혼인을 명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섭정 도르곤은 장평공주를 가엾게 여겨 토지와 저택(이전 무청후 이국서의 집[5]), 금, 수레와 말 등을 하사하며 결혼을 지원했다. 그러나 장평공주는 명나라 멸망 후 2년 만인 1646년경, 임신한 상태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 당시 나이는 17세 혹은 18세였다.

2. 2. 명나라 멸망과 비극

숭정 16년(1643년), 16세가 된 장평공주는 숭정제에 의해 무관 주현(周顯, 또는 주세현 周世顯)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숭정제는 딸을 아끼는 마음에 곁에 두고 싶어 결혼을 미루었다.[4]

숭정 17년(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경을 공격하자 도성은 함락 위기에 처했다. 문무백관은 황제를 버리고 도망쳤고, 절망에 빠진 숭정제는 송나라 멸망 시 황족들이 겪었던 비참한 운명(왕자 고문사, 공주 기생 전락 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황족들을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황후 주씨에게 자결을 명했고, 원귀비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장평공주는 "왜 우리 가족을 낳았습니까!"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숭정제는 딸을 보며 "아, 너는 어찌하여 황제의 딸로 태어났는가!"라고 울부짖으며 칼을 휘둘렀다. 슬픔에 눈이 먼 탓인지 칼날은 빗나가 공주의 왼팔을 절단하는 데 그쳤다. 숭정제는 이어 어린 소인공주를 살해했다. 장평공주는 과다출혈로 기절했으나, 닷새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1] 이때 황제를 끝까지 모시던 환관 왕승은이 기지를 발휘하여 공주가 죽었다고 보고하고 몰래 빼돌렸다는 설과, 다음 날 이자성이 부상당한 원귀비와 장평공주를 발견하고 "숭정제는 너무 잔혹하다!"며 탄식한 뒤 유종민에게 넘겼다는 설이 있다. 이후 이자성 군대가 패주하자 장평공주는 외할아버지인 주규의 집에서 지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아버지 숭정제는 이미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목을 매 자결한 후였다.

1645년, 명나라를 대신해 중국을 장악한 청나라순치제에게 장평공주는 비구니가 되어 속세를 떠나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순치제는 이를 거절하고 그녀를 원래 약혼자였던 주현과 혼인시켰다. 청나라 섭정 도르곤은 망국의 공주를 가엾게 여겨 결혼 자금과 살림을 위해 토지, 이전 무청후 이국서[5]의 저택, 금은보화, 수레와 말 등을 하사했다.

결혼 후 장평공주는 남편 주현과 서로 손님처럼 존경하며 지냈고, 시문을 즐기고 바느질과 요리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망국의 슬픔과 태자 사건 등 비극적인 경험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깊어 우울증에 시달렸다. 결국 결혼한 지 1년여 만인 1646년, 임신한 상태에서 17세(또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6] 그녀는 북경 광녕문(창의문) 밖에 있는 주씨 가문의 묘역에 묻혔다.

2. 3. 청나라에서의 삶과 죽음

청나라 초기, 장평공주는 순치제에게 상서하여 비구니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그녀가 원래 약혼자였던 주현(周顯, 또는 주세현 周世顯)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1] 당시 섭정이던 도르곤은 장평공주를 가엾게 여겨 그녀의 결혼과 생활을 위해 토지와 이전 무청후 이국서[5]의 저택, 그리고 금과 수레, 말을 하사했다.

장천(張宸)의 《장평공주뢰(長平公主誄)》에 따르면, 결혼 후 장평공주와 주현은 서로 손님처럼 존경하며 지냈다. 공주는 시문을 좋아하고 바느질과 요리에도 능했지만, 명나라 멸망의 충격과 슬픔, 그리고 이후의 태자 사건 등으로 인해 깊은 우울감에 빠져 병을 얻었다. 결국 결혼한 지 1년여 만에 임신 중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녀는 베이징 광녕문(廣寧門, 창의문이라고도 함) 바깥의 주씨 가문 땅에 묻혔다.

명말청초의 문인 오위예(吳偉業)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릉장공주만시(思陵長公主挽詩)》를 지어 "귀한 공주의 아름다운 목소리, 옛 왕조의 빛나는 명을 받았네. 뛰어난 글은 멀리 퍼지고, 흥망의 슬픔을 슬피 노래하네...(貴主媺音美,前朝典命光,鴻文垂遠近,哀誅著興亡……)"라고 썼다.

3. 명나라 부흥 운동과의 관계

민간 전설에 따르면, 명나라 멸망 후에 장평공주는 비구니가 되어 무술을 익히고, "독비신니(獨臂神尼)"라는 이름으로 청나라에 반대하고 명나라를 되살리려는 운동(반청복명)에 참여하여 여사낭 등을 제자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모두 허구의 이야기이다. 김용의 소설 『벽혈검』의 아구, 『녹정기』의 구난, 그리고 량우성의 소설 『강호삼녀협(江湖三女侠)』에 등장하는 독비신니는 이러한 민간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된 인물들이다.

4. 위황태자 사건

1644년(순치 원년), 주규의 집에 자신을 명나라 황태자 주자랑이라고 주장하는 소년이 나타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소년은 주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 끝에 청나라 관료에게 체포되었다.[1] 재판이 열리자 주씨 집안 사람들은 소년이 황태자가 아니라고 증언했다.[1] 반면, 장평공주는 주규의 집에서 소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통곡했으며, 법정에서도 그가 자신의 오라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1] 하지만 결국 소년은 황태자를 사칭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된 후 처형되었다.[1]

5. 대중문화 속 장평공주

청나라 이후, 장평공주의 이야기는 희곡,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 작품으로 재창작되었다. 특히 광동극 《제녀화(帝女花|dì nǚ huā중국어)》는 장평공주와 부마 주세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유명한 작품으로,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민간 전승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한 뒤 장평공주가 출가하여 무예를 익히고 '외팔 신니'(獨臂神尼)라 불리며 반청복명 운동을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전설에는 그녀가 여사낭(呂四娘) 등을 제자로 두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허구이다.

이러한 '외팔 신니' 전설은 여러 무협 소설에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김용의 소설 《벽혈검》과 《녹정기》, 그리고 양우생의 소설 《강호삼녀협(江湖三女俠중국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장평공주의 전설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다.

이처럼 장평공주는 실제 역사 기록보다 민간 전승과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 속 인물로서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관련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다.

5. 1. 희곡 및 영화

청나라 이후, 장평공주의 이야기는 희곡, 소설,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문예 작품으로 창작되었다. 특히 광동극(광둥 오페라) 《제녀화(帝女花|dì nǚ huā중국어)》는 장평공주와 주세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유명한 작품이다. 1957년 홍콩 리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극 중에서는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린 밤에 독약을 마시고 함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역사에서 장평공주는 명나라 멸망 후 병으로 사망했다.) 이 오페라는 두 편의 영화로 각색되었는데, 웡 틴 람 감독의 ''황제의 딸의 비극''(1959)과 오우삼 감독의 ''장평공주''(1976)이다.

민간 전승에서는 장평공주가 명나라 멸망 후 출가하여 무예를 익히고 반청복명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외팔 신니'(獨臂神尼)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여사랑(呂四娘) 등을 제자로 두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모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이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미지는 여러 소설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김용의 소설 《벽혈검》에 등장하는 아구(阿九)와 《녹정기》에 등장하는 구난(九難)은 장평공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뛰어난 무공을 지닌 고수로 그려진다. 《벽혈검》의 아구는 주인공 원승지와 로맨스를 맺지만 팔을 잃은 후 비구니가 되어 '구난'으로 이름을 바꾼다. 《녹정기》는 《벽혈검》의 비공식적인 속편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여기서는 구난이 주인공 위소보의 무술 스승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양우생의 소설 《강호삼녀협(江湖三女俠)》에 등장하는 외팔신니(獨臂神尼) 역시 장평공주의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된 캐릭터이다.

장평공주를 다룬 주요 영상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연도구분제목배우비고
1959년영화《제녀화》 (황제의 딸의 비극)백설선웡 틴 람 감독, 광동 오페라 《제녀화》 원작
1976년영화《장평공주》(정보 없음)오우삼 감독, 광동 오페라 《제녀화》 원작
1981년드라마《장평공주》(武俠帝女花)류쑹런, 미셸 예, 강대위홍콩 ATV 제작, 무협 설정 가미
1988년영화《전국밀조》손리
1992년영화녹정기 2 - 신룡교마해륜구난 역할
1993년영화《신벽혈검》장민아구 역할
2003년드라마《사랑의 이름으로 죽다》마준위, 사시만홍콩 TVB 제작, 광동 오페라 《제녀화》 기반 각색



이처럼 장평공주는 실제 역사 기록보다 민간 전승과 이를 바탕으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 속 인물로서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비극적인 삶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창작되어 전해지고 있다.

5. 2. 소설

청나라 이후, 장평공주의 이야기는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문예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명나라가 망한 뒤 장평공주가 출가하여 무예를 익히고 '독비신니(獨臂神尼)'라는 이름으로 반청복명 운동을 이끌었다는 민간 전승이 널리 퍼졌다. 이 전설에는 여사낭 등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허구이다. 이러한 설정은 여러 소설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김용의 소설에서는 장평공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 《벽혈검》: 주인공 원승지와 로맨틱한 관계를 맺는 아구(阿九)로 등장한다. 소설 말미에는 팔을 잃고 비구니가 된다.
  • 녹정기》: 《벽혈검》의 비공식적 속편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이 소설에서는, 구난(九難)이라는 이름의 외팔 비구니이자 무공 고수로 등장한다. 그녀는 주인공 위소보의 무술 스승 역할을 하며, 이는 '독비신니' 전설을 반영한 설정이다.


양우생의 소설 《강호삼녀협(江湖三女俠)》에 등장하는 독비신니(獨臂神尼) 역시 장평공주의 '독비신니'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된 인물이다.

이처럼 장평공주는 실제 역사 기록보다 민간 전승과 이를 바탕으로 한 소설 등 대중문화 속 인물로서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소설 속 모습은 대부분 극적인 재미를 위해 각색된 허구적 설정이다.

5. 3. 드라마

장평공주는 실제 역사 기록보다는 민간 전승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문화 작품 속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활용되었다. 장평공주를 연기한 배우와 해당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배우
1977년벽혈검이통명
1980년무협제녀화미설
1983년십삼매이림림
1984년녹정기 (홍콩 TVB)진가의
1984년녹정기 (대만 CTV)이지린
1985년벽혈검모순균
1992년일대황후대옥아예숙정
1994년난세불료정조아지
1998년녹정기이려려
2000년벽혈검사시만
2000년소보여강희이비
2003년황태자비사정솽
2003년제녀화사시만
2005년명말풍운시답답
2006년수주중원장림정
2007년벽혈검손비비
2008년녹정기하가이
2014년녹정기왕완연



유명 광동 오페라 ''꽃 공주''(帝女花|dì nǚ huā중국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도 제작되었다. 1981년 홍콩 ATV Home에서 방영된 ''장평공주''(武俠帝女花중국어)는 원작 오페라에 무협 설정을 가미한 작품으로, 류쑹런, 미설, 강대위 등이 출연했다. 2003년에는 홍콩 TVB에서 오페라를 바탕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죽다''(帝女花중국어)를 제작했으며, 마준위와 사시만이 주연을 맡았다. 사시만은 2000년작 ''벽혈검''에 이어 두 번째로 장평공주 역을 연기했다.

또한, 장평공주가 명나라 멸망 후 출가하여 무술을 연마하고 외팔의 비구니가 되었다는 민간 전승은 김용의 무협 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설정은 김용의 소설 ''벽혈검''과 ''녹정기''에 반영되었으며, 이 소설들을 원작으로 하는 여러 드라마에서도 장평공주(또는 그녀를 모티브로 한 인물)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벽혈검''에서는 주인공 원승지와 로맨스 관계를 맺는 '아지우'로 등장하며, 소설 말미에는 팔을 잃고 비구니 '지난'이 된다. ''녹정기''에서는 주인공 위소보의 스승인 외팔 비구니 '지난'으로 그려진다. 위 표에 있는 여러 편의 ''벽혈검''과 ''녹정기'' 드라마에서 이러한 설정의 장평공주를 만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Cchatty: Learn Chinese and Make Friends https://www.cchatty.[...] 2022-06-03
[2] 문서 崇禎帝の[[実録]]と[[起居注]]は編まれておらず、後宮に関する記録は混乱している。清の張宸の『長平公主誄』では1644年に数え15歳、『[[明史]]』では数え16歳となっている。
[3] 서적 清『欽定續文献通考』卷203
[4] 소설 台湾の小説『明末春秋』では、長平公主の母は妃王氏(元は信王時代の崇禎帝の選侍であった)とされるが、根拠は不明である。『長平公主誄』では、周皇后が長平公主の生母だったとされている。
[5] 문서 [[孝定太后]]の弟の孫。崇禎12年(1639年)、[[薛国観]]の献策で崇禎帝から40万両の「義捐金」の供出を強要され、家財を換金してもなお足りず、自ら縊死した。
[6] 서적 張宸『長平公主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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