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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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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혜황후는 익주 비현 출신으로, 송 진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숙비, 황태비, 황태후를 거쳐 송 인종 대에 황후로 추존된 인물이다. 12세에 진종의 측실로 입궁하여 유씨와 친밀하게 지내며 인종을 양육했다. 유씨가 황후가 된 후 숙비가 되었으며, 진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황태비가 되었다. 유태후 사후 황태후로 존숭되었고, 인종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며 정치에 참여했다. 1036년 사망했으며, 사후 장혜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남편의 시호를 더하여 장혜황후로 개칭되었다. 송나라에서 황후나 황제의 생모가 아님에도 황후로 추존된 첫 번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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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송나라의 황후, 황태후
출생일옹희(雍熙) 원년(984년)
사망일경우(景祐) 3년 11월 4일 (1036년 11월 24일) (53세)
사망 장소개봉부(開封府) 보경궁(保慶宮)
능묘영정릉(永定陵)
재위
황태비1022년 3월 30일 ~ 1033년 5월 6일
황태후1033년 5월 6일 ~ 1036년 11월 30일
인물 정보
(알 수 없음)
시호장혜(莊惠)
아버지양지엄(楊知儼)
배우자진종(眞宗) 조항(趙恒)
기타
출생지익주(益州) 비현(郫縣)
별호숙비(淑妃), 보경황태후(保慶皇太后)

2. 생애

양씨는 익주(비현) 출신으로, 양지엄(楊知儼)의 딸로 태어나 열두 살에 진종의 저택에 들어가 측실이 되었다. 양씨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1] 1004년(경덕 원년) 재인(才人)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첩여(婕妤)를 거쳐 종1품 완의(婉儀)로 진봉되었다. 지혜롭고 총명하여 진종의 총애를 받는 유씨와 친밀하게 지냈다.[1] 유씨는 황후 책봉을 공고히 하기 위해 궁녀 이씨가 진종의 아들(인종)을 낳자 자신의 아들로 공표하고, 양씨에게 인종을 양육하게 하였다.[1]

1012년, 유씨가 황후로 책봉되면서 양씨는 숙비(淑妃)로 진봉되었다.[1] 1022년, 진종이 붕어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유황후는 태후로, 양숙비는 황태비로 각각 존숭되었다.[1] 인종은 유씨를 "대낭낭", 양씨를 "소낭낭"이라고 불렀다.

1033년, 유태후가 붕어하면서 유조를 내려 황태비 양씨를 황태후로 존숭하도록 명하였다. 인종은 양씨에게 보경황태후(保慶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리고,[1] 인종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1036년 훙거하였다. 처음에는 장혜(莊惠)로 시호가 내려졌으나, 이후 '''장혜(章惠)'''로 개칭되었다.[1]

2. 1. 초기 생애

양씨는 익주(비현) 출신으로, 양지엄(楊知儼)의 딸로 태어나 열두 살에 입궁하여 진종의 저택에서 측실이 되었다. 양씨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1]

2. 2. 진종의 후궁

1004년(경덕 원년) 재인(才人)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첩여(婕妤)를 거쳐 종1품 완의(婉儀)로 진봉되었다. 지혜롭고 총명한 성격으로 진종의 총애를 받는 유씨(장헌명숙황후)와 친밀하게 지냈다.[1] 유씨는 황후 책봉을 공고히 하기 위해 궁녀 이씨(장의황후)가 진종의 아들(인종)을 낳자 자신의 아들로 공표하고, 양씨에게 인종을 양육하게 하였다.[1]

2. 3. 황태비 시절

1012년, 유씨가 황후로 책봉되면서 양씨는 숙비(淑妃)로 진봉되었다.[1] 1022년, 진종이 붕어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유황후는 태후로, 양숙비는 황태비로 각각 존숭되었다.[1] 양씨는 유씨를 대신하여 인종을 양육하였으며, 인종은 유씨를 "대낭낭", 양씨를 "소낭낭"이라고 불렀다.

2. 4. 황태후 시절

1033년, 유태후가 붕어하면서 유조를 내려 황태비 양씨를 황태후로 존숭하도록 명하였다. 인종은 양씨에게 보경황태후(保慶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리고,[1] 인종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2. 5. 사망

1036년 훙거하였다. 처음에는 장혜(莊惠)로 시호가 내려졌으나, 이후 '''장혜(章惠)'''로 개칭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친양지엄(楊知儼)
모친미상
남편진종북송의 제3대 황제 (968년 ~ 1022년)
양자인종북송의 제4대 황제 (1010년 ~ 1063년)


4. 평가

송나라에서 황후나 황제의 생모가 아님에도 황태후로 추존된 첫 번째 사례이다.[1] 인종은 친어머니를 장헌명숙황후 유씨로 알고 자랐으며, 유씨를 '큰 어마마마(大娘娘)', 양씨를 '작은 어마마마(小娘娘)'라고 불렀다.[2]

5. 기타


  • 송나라에서 황후나 황제의 생모가 아님에도 황후로 추존된 첫 번째 사례이다.
  • 인종은 친어머니를 장헌명숙황후 유씨로 알고 자랐으며, 유씨를 '큰 어마마마(大娘娘)', 양씨를 '작은 어마마마(小娘娘)'라고 불렀다.

참조

[1] 서적 양숙비(楊淑妃)
[2] 서적 경우(景祐) 3년 11월 무인(戊寅) 기사 알수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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