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이시도르 아리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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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이시도르 아리스프는 176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발발 후 군에 입대하여 피레네 전쟁, 나폴레옹 전쟁, 스페인 반도 전쟁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특히 스페인 반도 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세워 사단장으로 승진하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도 군에서 복무했으며, 7월 혁명 이후에는 정치에 참여하여 대의원, 지사, 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1855년 사망 후 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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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이시도르 아리스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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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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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68년 12월 7일 |
출생지 | 생-에티엔-드-베고리, 프랑스 |
사망일 | 1855년 5월 26일 |
사망지 | 라카레, 프랑스 |
소속 |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부르봉 왕정복고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프랑스 제2제국 |
군 종류 |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792년–1855년 |
최종 계급 | 마레샬 드 프랑스 |
주요 참전 | 피레네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반도 전쟁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백일천하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크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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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별칭 | (한국어 번역 정보 없음) |
추가 정보 | |
관련 인물 | (한국어 번역 정보 없음) |
기타 활동 | (한국어 번역 정보 없음) |
2. 어린 시절
아리스프는 부유한 바스크 지방 지주의 아들로 생테티엔드베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아리스프는 1792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화국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1793년 생장피드포르 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리스프는 피레네 전쟁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명성을 얻었다. 1795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강화 조약을 맺은 후 보르도 수비대를 이끌었고, 오트가론에서 반란군과 싸웠다. 1799년 자크 마크도날 휘하에서 그라우뷘덴 주 전투에 참전한 후, 봉 아드리안 자노 드 몽세와 기욤 마리 안 브륀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전출되었다. 1802년 5월 앙굴렘 수비대로 조직된 제16 바스크 쉬세르(chasseurs) 반여단(demi-brigade)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아리스프는 피에르 오주로 원수 휘하의 대양 연안군에 배속되어 1805년 및 1806년 전역에서 데스자탱 사단에서 복무했다. 1807년 1월 예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준장으로 승진했다. 니콜라 장드듀 술트 원수의 군단으로 옮겨 장앙투안 베르디에 사단 예하 여단을 지휘했다. 하일스베르크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프리틀란트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1]
3. 나폴레옹 전쟁
3. 1. 스페인 반도 전쟁
1807년 12월, 아리스프는 몽세 원수 휘하 대양 연안군 정찰군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이 군단과 함께 1808년 스페인 전역에 참여했다. 1808년 11월 란 원수 지휘하에 투델라 전투 및 사라고사 포위전에 참가했다. 란이 프랑스로 귀국하고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쉬셰의 참모장이 되었다.
마리아 전투에서 아리스프는 부상을 입었으나, 쉬셰가 이끄는 10,000명의 군대로 더 많은 수의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하여 사단장(general de division)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레리다, 타라고나, 발렌시아 점령 과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Grand Officer)를 수여받고 제국 백작 작위를 받았다.
아리스프는 1813년까지 아라곤에서 근무했다. 1814년 술트의 증원군으로 바르셀로나로 파견되었다. 비토리아 전투 이후 웰링턴 공작의 프랑스 남부 침공을 방어했다. 프랑스로 퇴각하던 중 스페인군이 자신의 고향 성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불태웠다. 오르테즈 전투에서 군대의 퇴각을 지원했다. 1814년 3월 20일 타르브에서 포르투갈 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툴루즈 전투에서 Calvinet 고지를 방어하던 중 포탄에 맞아 다리를 절단했다.[1]
4. 후기 생애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아리스프는 생 루이 훈장 기사 작위를 받고 제15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1]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에게 합류하여 스페인 국경 방어를 맡았다.[1] 제2차 왕정복고 이후 스페인의 프랑스 남부 침공을 저지하려 했다.[1] 7월 혁명 때까지 샤토에 은퇴했다가, 혁명 동안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7월 왕정에서 오트와 바스-피레네(Basses-Pyrénées, 1830-1833) 지사, 피레네 서부방면군단장(Pyrénées occidentales, 1833-1840), 제20군단장(1840-1850)으로 복귀했다.[1]
4. 1. 정치 경력
아리스프는 바스피레네의 하원의원으로 활동(1831–1835)했으며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받았다.[1] 1835년 프랑스 귀족으로 임명된 그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1] 프랑스 제2제정 수립 후, 상원의원이 되었다.[1]5. 사망
아리스프는 1855년 라갈(Lacarre)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에투알 개선문 서쪽에 새겨져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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