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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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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은 1809년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맺은 동맹으로,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 배경은 나폴레옹의 해상 봉쇄와 스페인 반도 전쟁에서의 실패였다. 오스트리아는 군제 개혁을 통해 전쟁을 준비했으나, 동맹국 부재와 개혁의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주요 전투로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바그람 전투 등이 있었으며, 프랑스의 승리로 쇤브룬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잃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우위를 약화시키고 독일 민족주의를 고조시키는 등 유럽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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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대프랑스 동맹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투 이미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벤스베르크 전투, 란츠후트 전투, 에크뮐 전투, 레겐스부르크 전투,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바그람 전투
시기1809년 4월 10일 - 1809년 10월 14일
장소중앙유럽, 이탈리아 북부, 저지대 국가
결과프랑스 승리
영토 변경프랑스 제1제국이 일리리아 주를 합병
바이에른 왕국이 잘츠부르크를 합병
바르샤바 공국에 서갈리치아 할양
러시아 제국이 타르노폴을 합병
교전 세력
제5차 대프랑스 동맹오스트리아 제국
영국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양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반군
검은 군대 (브라운슈바이크) (라인 연방에 대한 반란)
티롤 백국 (바이에른에 대한 반란)
고체인 (일리리아에서 프랑스에 대한 반란)
이탈리아 반군 (이탈리아 왕국에 대한 반란)
프랑스 연합군프랑스 제1제국
라인 연방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베스트팔렌 왕국
바르샤바 공국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왕국
러시아 제국
지휘관
제5차 대프랑스 동맹프란츠 2세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공작
요한 폰 외스터라이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제3대 포틀랜드 공작)
스펜서 퍼시벌
안드레아스 호퍼 (사형)
요한 에르커 (사형)
프랑스 연합군나폴레옹 1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제롬 보나파르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외젠 드 보아르네
조아생 뮈라
루이 보나파르트
알렉산드르 1세
병력 규모
제5차 대프랑스 동맹초기 야전군: 283,400명 (예비군, 수비대 등 314,810명 제외)
영국: 39,000명
프랑스 연합군275,000명
러시아: 40,000 - 50,000명
피해 규모
제5차 대프랑스 동맹170,000명
사망 및 부상: 90,000명
포로: 80,000명
프랑스 연합군140,000명
사망: 30,000명
부상: 90,000명
포로: 20,000명

2. 배경

180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유럽 대륙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상봉쇄를 계속하고 있었다.[1] 스페인에서는 프랑스 통치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으로 각지에서 게릴라들이 봉기하였다. 영국은 아서 웰즐리를 파견하여 스페인의 반란 세력을 지원했고, 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17] [18]

이러한 상황을 본 오스트리아 제국1809년 4월 9일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85] 오스트리아는 3년 동안 군대를 개혁하며 프랑스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9]

2. 1. 제4차 대프랑스 동맹 (1806-1807)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이 크게 변화하면서 프랑스의 패권이 중앙 유럽까지 미치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자국의 안보에 위협을 느껴 1806년 러시아와 함께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68] 1806년 가을, 18만 명의 프랑스군이 튀링겐 숲을 경유하여 프로이센에 침공했으나, 프로이센은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잘레 강 우안과 흰 엘스터 강 좌안을 따라 진격했다.[68]

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9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호엔로에예나에서 격파했다. 같은 날, 다부는 2만 7천 명의 제3군단을 이끌고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이끄는 6만 3천 명의 프로이센군을 아우어슈타트에서 격파했다.[69] 이후 프랑스군은 북독일에서 프로이센 잔당을 격렬하게 추격한 후, 폴란드[70]로 진격하여 프로이센을 구원하지 못한 러시아군과 만났다.

1807년 2월 프리드란트 전투에서 양측은 격렬하게 교전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71] 나폴레옹은 군대를 재편성하고 몇 달 동안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1807년 6월 14일 프리드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궤멸시켰다. 그 결과 7월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어 2년간의 유혈 사태가 종식되었고,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반면 프로이센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유럽 각국의 문제는 프랑스와 러시아에 의해 해결되는 상황이 되었다.

2. 2.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7-1809)

1807년,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대영국에 대한 무역 금수 조치인 대륙봉쇄령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려 했다.[15][16] 섭정 왕자 주앙이 이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장군 쥐노를 파견하여 1807년 포르투갈을 침공하게 했다. 이는 6년간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특히 나폴레옹이 스페인 국왕을 축출한 후 스페인군과 시민들이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킨 후 프랑스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17] [18]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의 통치가 현지 주민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켜 게릴라가 각지에서 봉기하고 있었다. 영국은 아서 웰즐리를 파견하여 스페인 반란 세력을 지원했다. 프랑스가 바일렌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나폴레옹은 직접 프랑스군을 지휘하여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19][20] 장 드 듀 수르트는 1809년 1월 코루냐 전투에서 영국군을 스페인에서 몰아냈다.[20]

1809년 초, 나폴레옹의 형제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통치하는 프랑스의 괴뢰국 스페인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북부 대부분을 장악했다. 아서 웰즐리 장군이 이끄는 영국과 포르투갈 연합군은 1809년 봄부터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호아킨 블레이크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정규군도 계속 싸웠고, 시골 지역에서 벌어진 게릴라 활동은 프랑스군의 작전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1809년 6월, 25만 명에 달하는 상당한 프랑스군이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내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다.

스페인 게릴라들은 나폴레옹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에서 프랑스가 곤란을 겪는 것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더 쉽게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랐다.

2. 3. 오스트리아의 고립

1805년 패배 이후, 오스트리아는 3년 동안 군대를 개혁했다.[19]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에 고무된 오스트리아는 패배를 설욕하고 잃어버린 영토와 권력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와 다시 한번 맞붙으려 했다.[20]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중앙 유럽에 동맹국이 없었다. 1805년 주요 동맹국이었던 러시아는 틸지트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과 평화를 맺었고, 1807년-1812년 영러 전쟁, 핀란드 전쟁, 1806년-1812년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에서 영국, 스웨덴, 오스만 제국과 같은 이전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16] 프랑스는 1808년 9월-10월 에르푸르트 회의를 통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17]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공격받을 경우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18] 1809년 초, 오스트리아 장관 요한 필립 슈타디온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로 진군하는 동안 러시아군이 느리게 이동하고 "모든 충돌과 적대 행위를 피할 것"이라는 확약을 받았다.[7] 동시에 프랑스 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는 알렉산더에게 프랑스에 저항하라고 비밀리에 조언했다.[20]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유지했다.[6]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원해주기를 바랐지만, 프로이센 장관 바론 폰 슈타인이 협상에 대해 논의한 편지가 프랑스 첩보원에 의해 가로채어져 9월 8일 ''르 몽니퇴르 앙니베르셀(Le Moniteur Universel)''에 게재되었다.[5] 나폴레옹은 슈타인의 베스트팔렌 소유지를 몰수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에게 그를 해임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슈타인은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5] 슈타인이 위기에 처한 같은 날 파리 조약은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종전 이후 프로이센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주둔군 철수 일정에 합의했다. 철수는 30개월에 걸쳐 총 의 높은 배상금 지불을 조건으로 했다. 프로이센 군대의 규모도 전쟁 전의 6분의 1인 4만 2천 명으로 제한되었다. 이 조약은 프로이센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했다.[16][15]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슈타디온은 프로이센이 마음을 바꿀 것이며, 프랑스가 통제하는 독일의 라인 동맹으로의 오스트리아 진군이 프랑스를 산만하게 만드는 대중 봉기를 야기할 것이라고 희망했다.[4]

2. 4. 오스트리아의 개혁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는 3년 동안 군대 개혁에 힘썼다.[20] 카를 대공이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프랑스식 군단 편성을 도입하고, 국방군(Landwehr)을 창설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20]

2. 5. 오스트리아의 준비

1808년 나폴레옹의 권력이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지만, 해상에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상 봉쇄를 계속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스 지배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으로 각지에서 게릴라들이 봉기했고, 영국은 아서 웰즐리를 파견하여 스페인의 반란 세력을 지원하면서 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본 오스트리아 제국1809년 4월 9일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85]

2. 6. 에르푸르트 회의 (1808)

Erfurt프랑스어 회의는 1808년에 열렸지만, 주어진 자료에는 이 회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다만, 1809년 2월 유럽의 정세를 보여주는 지도가 있는데, 남부 독일에 프랑스군이, 남동쪽에 오스트리아군이 집결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2. 7. 프랑스의 준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공격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병력을 잘못 배치했다. 1808년-1809년 겨울, 나폴레옹은 스페인 원정에서 파리로 돌아와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에게 남부 독일에서 프랑스군을 어떻게 배치하고 집결시킬지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나폴레옹은 1805년처럼 다뉴브 계곡을 주요 작전 지역으로 삼고, 외젠 드 보아르네와 오귀스트 마르몽에게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막도록 했다.[25]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주 공격이 다뉴브 강 북쪽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26] 1809년 3월 30일, 그는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보내 14만 명의 병력을 레겐스부르크(라티스본) 부근에 집결시키려 했는데, 이곳은 오스트리아군이 실제로 공격할 계획이었던 지점보다 훨씬 북쪽이었다.[27] 나폴레옹은 4월 중순까지 병력 재배치를 완료하고, 베르티에에게 4월 15일 이전에 공격이 시작되면 레흐 강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의 예상보다 일주일이나 빠른 1809년 4월 9일에 바이에른을 침공했다.[83]

3. 전쟁의 전개

1809년, 오스트리아 제국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을 침공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기울어졌고, 프로이센은 1806년 러시아와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맞섰다. 그러나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대패하고,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마저 패배하면서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번 프랑스에 도전장을 던졌다. 전쟁 초반,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격돌했다.


  • '''오스트리아군의 초기 공세와 프랑스군의 반격''': 레겐스부르크에서 철수한 다부의 프랑스군은 케를하임과 바트 아프바흐 사이를 북상하는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프랑스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마세나프라이징과 랑츠후트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압박했다.
  • '''주요 전투''':
  • '''아벤스베르크 전투''':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 '''에크뮐 전투''': 4월 22일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5월 21일부터 5월 22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에게 승리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지휘한 전투 중 첫 패배였다.
  • '''바그람 전투''': 7월 5일부터 7월 6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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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번 프랑스에 굴복하였다.

3. 1. 오스트리아의 선제 공격

다부는 문제를 인지하고, 2000명의 수비대를 남겨둔 채 레겐스부르크에서 그의 군단을 철수시켰다.[93] 케를하임과 바트 아프바흐 사이를 북상하는 오스트리아군은 19일 이른 아침, 노이슈타트 안 데어 도나우를 향해 서쪽으로 진군하는 프랑스군 4개 부대와 조우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느리고 산만했으며, 노련한 프랑스 제3군단에 의해 신속하게 격퇴되었다. 나폴레옹은 다부가 방어하고 있는 지점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미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의 마세나의 군단도 공격했다. 마세나는 모든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포위하고, 다부에 대한 공격을 완화하기 위해 남서쪽의 프라이징과 랑츠후트를 공격했다. 마세나의 군단에는 나중에 니콜라 우디노의 군대도 합류했다.[94]

3. 2. 에크뭘 전투

1809년 4월 20일, 나폴레옹은 주력 9만을 이끌고 아벤스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선봉을 돌파했다. 다부에게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맡기고, 오스트리아 군 좌익을 추격하여 남하하였다. 4월 21일 란츠후트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격파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4월 22일 에크뭘 전투에서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격파했다. 카를 대공은 다뉴브강 북쪽으로 퇴각했다.[31]

4월 21일, 나폴레옹은 다부로부터 토이겐-하우젠 전투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다부는 위치를 고수했고, 나폴레옹은 증원군을 보냈지만, 약 3만 6천 명의 프랑스군이 7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야 했다.[37] 샤를이 동쪽으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이후 란츠후트 기동이라고 불리는 작전에서 알레망 군의 축을 재정렬했다. 힐러를 추격하는 장 바티스트 베시에르 휘하의 2만 명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고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에크뮐을 공격했다.[38]

4월 22일, 샤를은 로젠베르크와 호엔촐레른 휘하의 4만 명의 병력을 다부와 르페브르에게 공격하도록 남겨두고, 콜로브라트와 리히텐슈타인 휘하의 2개 군단을 아바흐로 진격시켜 강변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38] 나폴레옹은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오후 1시 30분에 도착했다. 다부는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전선에 걸쳐 공격을 명령했고, 제10경보병연대는 레우클링 마을을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운터-레우클링 숲을 점령했다.[39] 샤를은 자신의 좌측 측면에 대한 나폴레옹군의 위협을 인식하고 레겐스부르크 방향으로 후퇴를 명령하여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3. 3. 란트슈트 책략

유럽 지도. 남서쪽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의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줌
란츠후트 기동과 바이에른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축출


나폴레옹은 다부의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칠 새로운 전략을 고안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북쪽으로 공격하는 동안, 우디노의 병력이 증강된 마세나의 군단은 프라이징과 란츠후트 방향으로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위협하고 다부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려 했다.[32] 나폴레옹은 다부와 르페브르의 군단이 오스트리아군을 묶어두는 동안 다른 부대가 오스트리아군 후방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33]

오스트리아군 중앙의 제5군단은 아벤스베르크 전투에서 패배하여 프랑스군이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드는 잘못된 가정 하에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34] 란츠후트로의 마세나의 진격은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되어 힐러가 이자르 강을 건너 남쪽으로 탈출할 수 있게 했다. 레겐스부르크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도나우 강 다리와 동쪽 강둑은 파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이 강을 건널 수 있었고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4월 20일, 오스트리아군은 1만 명의 사상자와 30문의 대포, 600량의 탄약 수레, 7,000대의 기타 차량을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35]

4월 21일, 나폴레옹은 다부로부터 토이겐-하우젠 전투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다부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지만, 나폴레옹이 증원군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약 3만 6천 명의 프랑스군이 7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야 했다.[37] 샤를이 동쪽으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나중에 란츠후트 기동이라고 불린 작전에서 알레망 군의 축을 재정렬했다. 힐러를 추격하는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휘하의 2만 명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고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에크뮐을 공격했다.[38]

3. 4.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5월 18일부터 20일에 걸쳐 프랑스군은 다뉴브강의 나카스에 있는 로바우 섬을 점령하고 가교를 설치하여, 맞은 편의 아스페른에서 에슬링 일대에 걸쳐 교두보를 마련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파괴 공작으로 가교가 자주 떠내려가서 충분한 병력을 도하시킬 수 없었다. 5월 21일 - 5월 22일, 오스트리아군은 반도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뒀다. 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나폴레옹이 지휘한 전투 중 첫 패배였다. 병력의 피해는 물론이고, 가장 신뢰하는 부하 장 란이 전사하는 등 나폴레옹 자신에게 매우 뼈아픈 패배였다.[118]

3. 5. 바그람 전투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외젠 군단 등의 도착을 기다리며 다시 결전을 준비했다. 7월 4일, 폭풍우를 뚫고 야간에 전위 부대가 다뉴브강을 도하하여, 7월 5일 저녁까지 단숨에 14만 명이 도하에 성공했다. 7월 5일부터 6일까지 치러진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오스트리아군에 승리를 거뒀다.[122] 7월 12일 휴전이 성립되어, 오스트리아는 다시 프랑스에 굴복했다.

3. 6. 다른 전역

나폴레옹의 바이에른 동맹에 대한 억압에 맞서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기대하며 봉기한 티롤 알프스 지방 주민들의 모습 (1809년).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티롤에서는 안드레아스 호퍼가 바이에른과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고립된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호퍼는 1810년 1월 말 체포되어 2월 20일 처형되었다.[124]

작센주에서는 키너마이어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와 흑색 군단 연합군이 게프레스 전투(영문판)에서 장-앙드레 쥐노 휘하 군단을 격파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수도 드레스덴을 점령하고 제롬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군대를 몰아내며 작센주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이미 바그람 전투에서 패배했고, 즈노이모 휴전(영문판)이 체결되었다.[125]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휴전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싸워,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독일을 가로질러 베저 강 어귀까지 진군했다. 그곳에서 영국으로 항해하여 영국군에 합류했다.[126]

1809년 7월, 영국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고 프랑스 해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왈케런 원정을 시작했다.[56] 채텀(John Pitt, 2nd Earl of Chatham) 백작이 이끄는 39,000명이 넘는 영국군은 7월 30일 왈케런에 상륙했다.[56] 그러나 영국군은 "왈케런 열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원정 중 4,000명이 질병으로 사망했다.[56] 결국 영국은 주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원정을 끝냈다.

3. 6. 1. 이탈리아와 달마티아

이탈리아에서는 요한 대공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싸웠다. 오스트리아군은 4월 사칠레 전투에서 외젠의 여러 차례의 서투른 공격을 방어하여 외젠을 베로나와 아디제 강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51] 외젠은 자신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지만, 요한은 샤를을 지원하기 위해 부대를 분리했다. 요한은 4월 30일 칼디에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외젠의 우세가 커지고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전선에서의 움직임으로 인해 후퇴해야 했다. 요한은 5월 8일 피아베 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52] 외젠은 요한을 헝가리로 추격하여 라아브 전투에서 그를 크게 패퇴시켰다. 외젠은 요한을 추격하기 위해 막도날을 분리하고 나머지 군대와 함께 빈에 있는 나폴레옹과 합류했다.

달마티아 원정에서 외젠의 명목상 지휘 아래 마르몽은 슈토이헤비히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마르몽은 4월 30일 산악지대에서 반격을 가했지만, 그렌처 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53] 5월의 추가 공격은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에 대해 일련의 승리를 거두게 했다.[54] 월말까지 마르몽은 그의 대부분의 부대를 이끌고 빈에 있는 황제와 합류할 수 있었다.[55]

3. 6. 2. 폴란드

1809년 7월 요제프 포냐토프스키 공이 크라쿠프에 입성하는 모습


오스트리아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하여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1809년 4월 19일 라신 전투에서 포냐토프스키의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했고, 바르샤바는 4일 후 점령되어 6월 1일까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122] 폴란드군은 갈리치아를 침공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큰 희생을 치르면서 공세는 곧 막히게 되었다.[122] 오스트리아군도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의도가 불분명한 러시아군에 의해 진격이 방해받았다.[122]

바르샤바 공국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침공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 마지못해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에 참전했다.[123] 1809년 6월 3일 세르게이 골리친(영문판)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이 갈리치아로 진입했다.[123] 골리친은 오스트리아군과의 어떠한 주요 충돌도 피하라는 지시를 받고 가능한 한 천천히 진격했다.[123]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는 사소한 충돌이 있었지만, 최소한의 손실만 발생했다.[123]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령관들은 빈번하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작전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123] 러시아 사단장인 안드레이 고르차코프 장군이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보낸 정중한 편지는 폴란드군에 의해 가로채졌고, 폴란드군은 원본을 나폴레옹 황제에게, 사본을 알렉산더 황제에게 보냈다.[123] 그 결과 고르차코프는 알렉산더에 의해 지휘권에서 해임되었다.[123] 러시아군은 갈리치아에서 포냐토프스키와 협력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고르차코프와 포냐토프스키 사이에는 끊임없는 불화가 있었다.[123] Schönbrunn 조약의 결과로 러시아는 타르노폴 지역을 갈리치아에서 할양받았다.[123]

3. 6. 3. 독일

1901년 티롤 반군을 묘사한 그림


티롤에서는 안드레아스 호퍼가 바이에른과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고립된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호퍼는 1810년 1월 말 체포되어 2월 20일 처형되었다.[124]

작센주에서는 키너마이어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와 흑색 군단 연합군이 게프레스 전투(영문판)에서 장-앙드레 쥐노 휘하 군단을 격파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수도 드레스덴을 점령하고 제롬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군대를 몰아내며 작센주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이미 바그람 전투에서 패배했고, 즈노이모 휴전(영문판)이 체결되었다.[125]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휴전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싸워,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독일을 가로질러 베저 강 어귀까지 진군했다. 그곳에서 영국으로 항해하여 영국군에 합류했다.[126]

3. 6. 4. 홀란드

영국군의 왈케런 철수


1809년 7월, 영국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고 프랑스 해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왈케런 원정을 시작했다.[56] 이 원정은 왈케런에 병력을 상륙시켜 서스헬트를 따라 프랑스 해군 기지인 안트베르펜 항구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영국 해군의 서스헬트 순찰과 안트베르펜의 조선소 공격은 프랑스에게 이 지역의 취약성을 알렸고, 이에 프랑스는 방어를 강화하고 수비대를 증강했다.

채텀(John Pitt, 2nd Earl of Chatham) 백작이 이끄는 39,000명이 넘는 영국군(이베리아 반도에 주둔하는 병력보다 많았으며, 나폴레옹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영국 원정군)은 7월 30일 왈케런에 상륙했다.[56] 그러나 보트 부족으로 서스헬트 남쪽에 충분한 병력을 상륙시키지 못해 카잔(Cadzand)의 강화된 수비대를 점령할 수 없었다.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려면 플러싱을 점령하여 영국 해군 함정이 서스헬트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8월 13일 포위포대가 설치되었고, 플러싱은 8월 16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말라리아와 티푸스가 합쳐진 "왈케런 열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원정 중 4,000명이 질병으로 사망했다.[56] 전투 중 사망자는 106명에 불과했다. 8월 24일, 채텀 백작은 열병으로 인해 병력이 너무 줄었고 안트베르펜의 방어가 너무 강해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영국은 주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원정을 끝냈다. 최초의 영국군은 9월 7일에 철수했지만, 질병에 시달린 수비대는 12월 9일까지 왈케런에 남아 있었다. 이 원정의 실패로 포틀랜드 공작(William Cavendish-Bentinck, 3rd Duke of Portland) 영국 총리는 사임하고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이 뒤를 이었다.[127]

4. 여파

10월 14일, 쇤브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60] 카린티아, 크라인, 아드리아 해의 항구들이 프랑스에 넘어가 오스트리아는 지중해 접근이 차단되었다. 서갈리치아는 바르샤바 공국에, 잘츠부르크 공국은 바이에른에, 테르노필 지역은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오스트리아는 300만 명이 넘는 백성을 잃었는데, 이는 왕국 전체 인구의 약 20%에 해당했다.[60] 프란츠 황제는 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며, 영국 무역을 배제하는 대륙봉쇄령을 재확인해야 했다.[60]

1810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가 프랑스의 황후가 되었다.[60] 나폴레옹은 이 결혼으로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을 공고히 하고 자신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으나, 이 혼인 관계는 1813년 프란츠 황제가 다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츠나임 전투는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의 마지막 전투였다


이 무렵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 등을 합병한 프랑스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스페인, 베스트팔렌 왕국, 나폴리 왕국, 스위스, 라인 동맹, 바르샤바 공국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전쟁의 영향이 모두 프랑스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티롤베스트팔렌 왕국에서 일어난 반란은 독일인들 사이에 프랑스 지배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61] 쇤브룬 조약 체결 며칠 전, 독일인 프리드리히 슈탑스가 나폴레옹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61]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독일 민족주의 세력 발전에 기여했다.[61]

에슬링 전투 후 나폴레옹의 로바우 섬 귀환, 1809년 5월 23일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첫 대규모 패배였으며, 프랑스군의 전술적 결점이 드러났다.[62] 오스트리아는 전략적 통찰력과 전술적 능력이 더 이상 프랑스의 독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62] 프랑스 보병의 질적 저하로 인해 대규모 보병 대형이 기동을 피하고 숫자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는 바그람 전투에서 맥도날드의 공격에서 잘 드러났다.[62] 프랑스군의 규모가 커지면서 군사 전략을 관리하기 어려워졌고, 이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명백해졌다.[63]

5. 관련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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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문서 동일한 이유로 오스트리아는 스웨덴의 지원을 고려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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