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2세 드 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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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2세 드 로렌은 15세기 로렌 공작으로, 나폴리 왕위를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그는 아버지 르네 1세로부터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아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불렸으며,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에 맞서 여러 차례 원정을 감행했으나 밀라노의 지원으로 패배했다. 이후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대립하여 공익 동맹에 가담했으나 탈퇴했고, 아라곤 왕위 쟁탈을 위해 카탈루냐로 향했지만 1470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그는 마리 드 부르봉과 결혼하여 니콜라 1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으며, 니콜라 1세 사망 후 조카 르네 2세가 로렌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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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세 드 로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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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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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 2세 |
칭호 | 로렌 공작 |
출생일 | 1426년 8월 2일 |
출생지 | 낭시 |
사망일 | 1470년 12월 16일 |
사망지 | 바르셀로나 |
배우자 | 마리 드 부르봉 |
자녀 | 이자벨 장 르네 마리 니콜라 1세 장 알베르 잔 다방쿠르 마르그리트 딸 |
가문 | 앙주 가문 |
아버지 | 르네 |
어머니 | 이자벨 |
로렌 공작 | |
통치 기간 | 1453년 – 1470년 |
이전 통치자 | 이자벨와 르네 |
다음 통치자 | 니콜라 1세 |
칼라브리아 공작 | |
통치 기간 | 1435년 – 1470년 |
이전 통치자 | 르네 |
다음 통치자 | 니콜라 1세 |
지로나 공 | |
통치 기간 | 1466년 – 1470년 (주장자) |
이전 통치자 | 카를로스 데 비아나 |
다음 통치자 | 페르난도 2세 |
2. 로렌 공작
장 2세는 아버지 앙주 르네와 어머니 여공작 이자벨 사이에서 태어났다.[1] 1453년 어머니 이자벨이 사망하면서 로렌 공작위를 계승하였다.[1] 상속자로서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불렸다.[1]
장 2세는 아버지 앙주 르네로부터 앙주 가문의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았다.[1] 그는 상속자로서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불렸다.[1] 장 2세는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전쟁을 걸어 1457년,[2] 1459년부터 1462년까지 나폴리로 원정을 떠났다.[2] 1460년, 놀라에서 페르디난드 1세를 결정적으로 격파했으나, 다른 세력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페르디난도 1세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냈고, 장 2세는 패배하여 나폴리 왕위를 포기했다.[2] 그는 1462년 트로이아에서, 1465년에는 이스키아에서도 패배하며 나폴리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1466년, 카탈루냐인들이 그의 아버지 앙주 르네를 아라곤 왕으로 추대하면서, 장 2세는 상속자로서 헤로나 공이 되었다. 그는 가문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카탈루냐로 향했다. 1457년과 1459년부터 1462년까지 나폴리로 원정을 떠났으나, 밀라노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페르디난도 1세를 지원하여 패배하고 나폴리 왕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대립하여 부르고뉴 공작 샤를등이 결성한 에 가담했으나, 루이 11세와 협상하여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1466년 아들 니콜라와 루이 11세의 딸 안 드 보죄의 약혼을 통해, 아라곤 왕 후안 2세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카탈루냐의 지원을 받아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지만, 1470년 바르셀로나에서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했다.
장 2세는 1465년 프랑스왕 루이 11세와 대립하여 부르고뉴공작 샤를, 브르타뉴공작 프랑수아 2세, 부르봉 공작장 2세 등 반(反) 국왕파 귀족들이 결성한 공익 동맹에 가담했다.[3] 그러나 군비 마련의 어려움과 동맹의 결속력 약화로 인해 루이 11세와 협상하여 동맹에서 탈퇴했다.[3]
장 2세는 아버지 르네 1세와 마찬가지로 나폴리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르네 1세는 과거 나폴리를 아라곤의 알폰소 5세에게 빼았긴 적이 있었다. 장 2세는 나폴리 왕이자 알폰소 5세의 서자였던 페르디난도 1세에게 전쟁을 걸어 1457년, 1459년부터 1462년까지 나폴리로 원정을 떠났다.[2] 1460년 놀라에서 페르디난드 1세를 결정적으로 격파했지만, 다른 이들이 그를 돕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2]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페르디난도 1세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냈고, 결국 장 2세는 패배하여 나폴리 왕위를 포기했다.[2] 1462년 트로이아에서 패배했고, 1465년에는 이스키아에서도 패배했다.[1]
1465년,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대립하여 부르고뉴 공작 샤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부르봉 공작장 2세 등 반 국왕파 귀족들이 결성한 에 가담했다.[3] 그러나 군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결속력이 약한 공익 동맹은 분열되었고, 루이 11세와 협상하여 동맹에서 탈퇴했다.[3]
1466년, 아들 니콜라와 루이 11세의 딸 안 드 보죄가 약혼했고, 국왕으로부터 10만 리브르의 지참금을 받았다.[4] 이를 계기로 아라곤 왕 후안 2세 (알폰소 5세의 동생)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카탈루냐의 지원을 받아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아버지도 후안 2세의 대립왕으로 추대되었다).[4] 같은 해, 카탈루냐는 그의 아버지를 아라곤 왕으로 선택했고, 그는 상속자로서 헤로나 공이 되었다.[1] 그는 가문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카탈루냐로 갔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했다.[1] 아라곤과 싸우는 동안 다시 루이 11세 반대파가 되어 니콜라와 안의 약혼은 파기되었지만, 아라곤 왕위를 빼앗지 못한 채 1470년, 아버지보다 먼저 바르셀로나에서 병사했다.[4]
부르봉 공작샤를 1세의 딸 마리 (1428년 - 1448년)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니콜라 1세를 제외한 3명의 딸은 요절했다.[1] 장 2세 사후 니콜라 1세가 뒤를 이었지만, 1473년 니콜라 1세마저 사망하자 조카 르네 2세 (여동생 욜란드의 아들)가 로렌을 상속했다.[1]
3. 칼라브리아 공작과 나폴리 왕위 계승 전쟁
4. 카탈루냐 개입과 헤로나 공
5. 프랑스와의 관계 및 공익 동맹
1466년에는 아들 니콜라와 루이 11세의 딸 안 드 보죄의 약혼이 성사되어, 국왕으로부터 10만 리브르의 지참금을 받기도 했다.[4] 하지만, 장 2세가 다시 루이 11세의 반대파가 되면서 약혼은 파기되었다.[4]
6. 결혼과 자녀
1444년, 장 2세 드 로렌은 샤를 1세의 딸인 마리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마리는 부르봉 가문 출신으로, 발루아-앙주 가문 통치 하의 유일한 로렌 공작 부인이었다.
마리와 장 2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있었다.
대부분의 자녀는 요절하였고, 니콜라만이 살아남았다.
6. 1. 자녀 목록
1444년, 장 2세 드 로렌은 샤를 1세(부르봉 공작)와 부르고뉴의 아녜스의 딸인 마리 드 부르봉 (1428–1448)과 결혼했다. 결혼 계약은 1437년 4월에 서명되었지만, 결혼식은 마리가 더 나이가 들어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1444년경에 거행되었다. 마리는 부르봉 가문 출신이었으며, 발루아-앙주 가문의 통치하에서 유일한 로렌 공작 부인이었다.
마리와 장은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마리는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인 니콜라를 낳다가 사망했다. 그녀는 1448년 7월 7일에 사망하여 프랑스 뫼르트에모젤 로렌에 묻혔다.
장은 또한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7. 사망과 계승
1465년, 프랑스왕 루이 11세와 대립하여 부르고뉴공작 샤를, 브르타뉴공작 프랑수아 2세, 부르봉 공작장 2세 등 반 국왕파 귀족들이 결성한 공익 동맹/Ligue du Bien public프랑스어에 가담했지만, 군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결속력이 약한 공익 동맹이 분열되었고, 루이 11세와 협상하여 동맹에서 탈퇴했다.[3]
다음 해인 1466년, 아들 니콜라와 루이 11세의 딸 안 드 보죄가 약혼했고, 국왕으로부터 10만 리브르의 지참금을 받았다.[4] 이를 계기로 아라곤 왕 후안 2세 (알폰소 5세의 동생)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카탈루냐의 지원을 받아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4] 아라곤과 싸우는 동안 다시 루이 11세 반대파가 되어 니콜라와 안의 약혼은 파기되었지만, 아라곤 왕위를 빼앗지 못한 채 1470년, 아버지보다 먼저 바르셀로나에서 병사했다.[4]
부르봉 공작샤를 1세의 딸 마리 (1428년 - 1448년)와 결혼하여 니콜라 1세를 포함한 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니콜라 1세를 제외한 3명의 딸은 요절했다.[4] 장 2세 사후 니콜라 1세가 로렌 공작위를 계승했으나,[4] 1473년 니콜라 1세마저 사망하면서 조카 르네 2세 (여동생 욜란드의 아들)가 로렌을 상속받았다.[4]
참조
[1]
문서
三角、P167 - P168
[2]
문서
三角、P159 - P160、グイチャルディーニ、P63、P75、P101
[3]
문서
ミシュレ、P87、P101 - P102、P109 - P110
[4]
문서
三角、P160 - P161、P168、関、P245、ミシュレ、P172 - P173、P231、P285 - P286、P444 - P445
[5]
웹인용
ANJOU
http://fmg.ac/Projec[...]
Foundation of Medieval Genealogy
200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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