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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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4세는 1442년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난 요크 공작 리처드 3세의 장남으로, 1461년부터 1470년, 그리고 1471년부터 1483년까지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했다. 그는 장미 전쟁 시기에 요크 가문을 이끌었으며,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와 토우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워릭 백작과의 갈등, 폐위와 복위를 겪었으며, 통치 후반기에는 런던 시와의 사업 투자, 문화 후원 등 긍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말년에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과도한 지출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그는 1483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는 삼촌 리처드 3세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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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4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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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에드워드 4세 |
원어 이름 | Edward IV |
칭호 | 잉글랜드 국왕 |
재위 (1차) | 1461년 3월 4일 – 1470년 10월 3일 |
재위 (2차) | 1471년 4월 11일 – 1483년 4월 9일 |
대관식 | 1461년 6월 28일 |
대관식 장소 | 웨스트민스터 사원 |
이전 통치자 | 헨리 6세 |
다음 통치자 | 에드워드 5세 |
출생일 | 1442년 4월 28일 |
출생지 | 루앙, 노르망디 공국, 프랑스 왕국 |
사망일 | 1483년 4월 9일 |
사망 장소 | 웨스트민스터, 미들섹스, 잉글랜드 왕국 |
매장일 | 1483년 4월 18일 |
매장 장소 |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우드빌 (1464년 5월 1일 결혼) |
자녀 | 엘리자베스 오브 요크 메리 오브 요크 세실리, 웰스 자작부인 에드워드 5세 마거릿 오브 요크 리처드, 요크 공작 앤, 하워드 부인 조지, 베드퍼드 공작 캐서린, 데번 백작부인 브리짓 오브 요크 아서, 리즐 자작 (사생아) |
왕가 | 요크 |
아버지 |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
어머니 | 세실리 네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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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칭호 (아일랜드) | 아일랜드 영주 |
재위 (아일랜드) | 1461년 3월 4일 - 1470년 10월 3일 |
이전 통치자 (아일랜드) | 헨리 6세 |
후임 통치자 (아일랜드) | 헨리 6세 |
재위 (아일랜드, 2차) | 1471년 4월 11일 - 1483년 4월 9일 |
이전 통치자 (아일랜드, 2차) | 헨리 6세 |
후임 통치자 (아일랜드, 2차) | 에드워드 5세 |
작위 | 요크 공작 케임브리지 공작 마치 백작 얼스터 백작 |
작위 계승 | 1460년 - 1461년 3월 4일 |
이전 작위 계승자 |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
작위 후임자 | 폐지 (잉글랜드 왕위에 통합) |
참전 | 백년 전쟁 랭커스터 전쟁 장미 전쟁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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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계 및 출생
에드워드 4세는 1442년 4월 28일 노르망디 루앙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 3세와 세실리 네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아버지 요크 공작이 사망할 때까지 머치 백작으로 불렸다.[1] 그의 부모는 모두 에드워드 3세의 직계 후손이었으므로, 에드워드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특히 1447년, 자녀가 없던 헨리 6세의 후계자였던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망하면서 요크 공작이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가 되면서 이러한 권리는 더욱 강화되었다.[2]
에드워드 4세와 그의 형제들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버건디 공작 부인 마가렛은 키가 크고 금발이었던 반면, 아버지 요크 공작은 키가 작고 검은 머리였기에 에드워드 4세의 출생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4]
에드워드는 리처드 플랜태저넷과 세실리 네빌의 차남으로 1442년 4월 28일 프랑스 왕국의 루앙에서 태어났다. 요크 가문은 랭커스터 가문을 제외하고 에드워드 3세의 남계 후손이었다.[5] 형 헨리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사실상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마치 백작(웨일스 변경 백작)에 임명되었고, 소년 시절 대부분을 웨일스 국경 지방의 래들로 성에서 보냈다.
아버지 요크 공작 리처드는 프랑스와의 백년 전쟁에서 주전파였으며, 헨리 6세가 신임하는 평화파 서머셋 공작에드먼드 보포르와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를 일으키며 장미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머셋 공작을 죽인 요크 공작 리처드는 섭정에 올라 권력을 잡았지만, 왕비 마가렛 오브 앙주의 반격으로 위기에 몰리자 1459년 다시 내전을 일으켰다.[6]
래드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요크 군이 패배하자, 에드워드는 외삼촌 솔즈베리 백작리처드 네빌과 그의 아들이자 사촌인 워릭 백작리처드 네빌과 함께 칼레로 피신했다. 1460년 7월, 에드워드는 그들과 함께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런던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고, 노섬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군을 격파하고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았다.
런던에 입성한 아버지 요크 공작은 왕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섭정 재임과 헨리 6세 사후 왕위 계승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했다.[7] 이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파 토벌을 위해 웨일스로 돌아갔다.[8] 1461년 초, 아버지 요크 공작 리처드와 동생 럿랜드 백작에드먼드, 그리고 솔즈베리 백작이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 1. 가계도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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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우드빌 |
에드워드는 1442년 4월 28일 노르망디의 루앙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 3세와 세실리 네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머치 백작으로 알려졌다.[2] 그의 부모는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기에 에드워드는 왕위 계승에 대한 잠재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1447년, 자녀가 없는 헨리 6세의 후계자였던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망하면서 요크 가문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 더욱 강화되었다.[3]
이 시기 에드워드는 필리프 드 코망과 같은 당대 인물들에게 잘생기고 상냥하며 활기찬 인물로 묘사되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약 1.83m의 큰 키를 가진 그는 갑옷을 입었을 때 인상적이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하여 자신의 지위를 약화시킨 헨리 6세와 대조를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2]
에드워드 4세는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으로 왕권을 지켜냈다.
3. 초기 생애
에드워드의 유년 시절, 영국은 경제적 침체와 해외 군사적 패배를 겪었고, 무능하고 부패한 중앙 정부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에드워드와 그의 동생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는 모두 루앙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아버지인 요크 공작은 1445년 서머싯 공작 헨리 보퍼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프랑스의 영국령 총독으로 재직했다. 에드워드와 에드먼드는 아마도 요크 공작이 가장 큰 토지 소유주였던 웨일스 변경부의 루들로 성에서 자랐을 것이다.[4]
1447년,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 총독이 되었지만, 직책을 맡은 것은 1449년이 되어서였다. 노르망디의 대부분은 프랑스에 의해 탈환되었고, 칼레만이 북프랑스에 남은 영국의 영토로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패배의 책임자로 여겼던 서머싯은 헨리 6세 국왕의 수상으로 임명되었다.[5] 영국의 정치는 요크 가문 지지자들과 랭커스터 가문(특히 서머싯 공작,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 그리고 헨리 6세의 왕비인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 지지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지배되었다.[5]
1453년 8월, 헨리 6세 국왕이 300년 이상 영국의 영토였던 가스코뉴의 상실 소식을 듣고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상황은 극에 달했다. 요크 공작이 정부를 장악했고, 그의 주요 지지자는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솔즈베리의 장남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었다.[6] 1454년 1월, 12세의 에드워드는 아버지와 함께 대평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7]
1453년 10월 헨리 6세 국왕의 아들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태어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적임자가 등장했고, 1450년대는 두 파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지배되었다. 17세가 되었을 때, 마치 백작은 스스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1459년 루드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아버지와 에드먼드는 아일랜드로 도망쳤고, 마치 백작,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은 칼레로 향했다. 에드워드의 이름은 그들의 다툼은 헨리의 악한 조언자들과의 다툼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널리 유포된 선언문에서 그의 아버지, 워릭, 솔즈베리의 이름과 함께 등장한다.[8]
1460년, 에드워드는 워릭과 솔즈베리와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진군했다.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그는 요크 가문의 승리로 이어진 세 개의 부대 중 하나를 지휘하여 헨리 6세를 사로잡았다.[9] 요크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왔고,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들어서면서 스스로 왕이라고 선포했지만, 모인 귀족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10] 협정법은 헨리가 왕으로 남지만 요크와 그의 후손들이 그의 계승자로 지정되는 타협안에 동의했다.[11]
법적으로 인정된 왕위 계승자를 제거한다는 것은 요크 가문의 정부에 대한 상당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1460년 말, 에드워드는 그의 첫 독립적인 지휘권을 받아 웨일스의 랭커스터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워릭은 런던에 남았고, 요크, 솔즈베리, 에드먼드는 요크셔에서 또 다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지만, 세 사람 모두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망하여 에드워드가 새로운 요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12]
4. 즉위 과정
1461년 2월 2일, 에드워드는 헤리퍼드셔의 모티머 크로스 전투에서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환일 현상 또는 삼태양이라고 알려진 기상 현상에 앞서 일어났는데, 그는 이를 자신의 상징인 "태양의 영광"으로 삼았다.[2] 그러나 이는 2월 17일에 일어난 세인트 올번스 제2차 전투에서 워릭의 패배로 상쇄되었고, 랭커스터파는 헨리 6세를 다시 구금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 만났고, 에드워드는 서둘러 왕으로 임명된 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토우턴 전투에서 양측이 만났다. 3월 29일 눈보라 속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영국 땅에서 일어난 전투 중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투였으며, 결정적인 요크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2]
사망자 수는 9,000명에서 2만 명까지 추산되지만, 대부분의 집단 무덤이 수세기 동안 비워지거나 옮겨졌고, 시체는 매장 전에 일반적으로 의복이나 갑옷을 벗겨졌기 때문에 수치는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랭커스터 귀족들 사이의 사상자는 엄청났고,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지속적인 적개심을 설명한다. 1996년 이후 발굴 작업을 통해 전투에서 50구 이상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그들의 부상 분석 결과 사후 훼손을 포함한 전투의 잔혹성이 드러났다.[2]
마거릿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도망쳤고, 새로운 왕은 1461년 6월 28일 즉위식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2] 헨리 6세는 1년 이상 도주했지만 잡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의 아들이 살아 있는 한 그를 죽일 이유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허약한 포로로부터 젊고 자유로운 사람에게 랭커스터의 권리를 이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
요크 공작 작위와 아버지의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게 된 에드워드는 급히 군대를 소집하여, 펜브룩 백작과 자스퍼 튜더 그리고 제임스 버틀러가 이끄는 랭커스터 군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랭커스터 군은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이끄는 요크 군에게 패배하여 헨리 6세를 빼앗겼고, 런던에 접근했으나, 병사들이 약탈을 허용했기 때문에 민중의 신망을 잃고 런던 입성을 거부당했다.
이 기간 동안 에드워드는 워릭 백작과 합류하여 런던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했다. 그는 클러켄웰에서 열린 요크당의 평의회에서 국왕으로 추대되어 3월 4일에 즉위했다('''에드워드 4세''').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 국왕과 워릭 백작은 북쪽으로 향했고, 3월 28일 토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랭커스터당의 왕비 마가렛과 왕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그 다음에는 프랑스로 도망쳤고, 헨리 6세는 1465년에 잡혀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5. 통치 기간
대부분의 귀족들이 헨리 6세에게 충성하거나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에드워드 4세는 네빌 가문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초기에는 체제 강화에 힘썼으며, 1464년 헥섬 전투에서 존 네빌이 승리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위협은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시기 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 공국 간의 외교 관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다.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를 선호했지만, 워릭 백작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조약을 협상했고, 여기에는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 공주 또는 사보이의 보나와의 결혼 제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1464년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엘리자베스의 가문은 상류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추밀원은 에드워드 4세에게 "그녀는 공작이나 백작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왕자에게 적합한 아내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이 결혼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계산된 정치적 행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새 왕비의 형제자매들이 유리한 결혼을 하면서 불만이 커졌다. 1467년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형제인 요크 대주교 조지 네빌을 해임했고,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 클라렌스 공작과 동맹을 맺었다. 1469년 에지코트 전투에서 왕실 군대가 패배한 후, 에드워드 4세는 미들햄 성에 갇혔고, 그의 장인과 장인의 막내아들은 케닐워스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워릭 백작과 클라렌스 공작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에드워드 4세는 1469년 9월 석방되어 왕위를 되찾았다.
1470년 워릭 백작과 클라렌스 공작은 프랑스로 도망쳤고,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은 워릭 백작은 1470년 9월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헨리 6세를 복위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4세는 브뤼헤로 피신해야 했다.
에드워드 4세는 1471년 3월 헐에 상륙하여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런던에 입성했고,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았다. 1471년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패배하고 사망했으며, 1471년 테우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 군대가 궤멸되면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웨스트민스터가 전사하고, 헨리 6세도 사망했다.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공국의 소유권을 왕실로 이전했고, 런던 시와의 사업 투자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15세기 대침체에서 경제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4세의 지출은 항상 수입을 초과했다.
에드워드 4세의 통치는 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 사이의 삼자 외교 경쟁이 지배했다. 1477년 샤를 용담공의 죽음은 1482년 아라스 조약으로 이어졌고, 에드워드 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5. 1. 1461년 ~ 1470년: 워릭 백작과의 갈등과 폐위
1461년 6월 28일, 19세의 에드워드 4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의 왕위는 네빌 가문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당분간은 그들의 지도를 받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에드워드 4세는 아직 젊었고, 향락을 즐기는 한편 빈번히 원정에 참가했으며, 1462년부터 1463년까지 북부에서 랭커스터파 잔당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최종적인 승리를 확정지은 1464년 5월 14일의 헥섬 전투에는 불참했고, 이 시기에 에드워드 4세는 리버스 경 리처드 우드빌의 딸이자, 랭커스터파 기사 존 그레이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 결혼을 했다. 이 신분 차이가 나는 결혼은 귀족들로부터 비난을 샀다[19]. 이 결혼은 1464년 9월 29일 미카엘 축일에 공표되었고,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의붓누이 보나 디 사보이아와의 혼인 교섭을 진행하고 있던 워릭 백작의 체면을 깎는 결과가 되었다.[19]
에드워드 4세는 새로 친족이 된 우드빌 가문을 총애하여, 장인은 리버스 백작으로 서작되어 시종무관장에 임명되었고[19], 왕비 엘리자베스의 남동생과 자녀들도 귀족으로 서작되었으며, 여동생들은 귀족과 결혼시켰다.[19] 외교 정책에서는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친불 정책을 뒤엎고, 부르고뉴 공국과의 동맹을 원했다.[19] 이 대립은 수 년 동안은 파탄에 이르지 않았지만, 우드빌 가문에 대한 세간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의도에 반하여 그의 딸 이자벨과 결혼한 왕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의 동맹을 맺고 146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19] 에지코트 무어 전투에서 왕군은 패배했고, 불시에 잡힌 에드워드 4세는 워릭 성에 유폐되었고, 장인은 참수되었다.
6개월 동안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감시하에 있었지만, 링컨셔에서의 반란의 기회에 자신의 군대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19] 루즈코트 필드 전투에서 잡힌 반란의 지도자는 워릭 백작의 연루를 자백했고,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프랑스로 탈출해야 했다.[19]
에드워드 4세는 이로써 자신의 안전은 확보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왕비 마거릿을 중심으로 한 망명 랭커스터파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들의 반격을 받은 에드워드 4세는 네덜란드로 탈출해야 했다(1470년 9월). 워릭 백작은 런던 탑에 유폐되어 있던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19]
5. 2. 1471년 ~ 1483년: 재집권과 통치 후반
에드워드 4세는 1471년 재집권 후, 이전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1471년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패배하고 사망했으며, 테우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 군대가 궤멸되면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웨스트민스터가 전사하고 헨리 6세마저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위협은 사라지는 듯했다.[19]
하지만 클라렌스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 사이의 갈등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이들은 각각 워릭 백작의 딸들과 결혼하여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다.[19] 에드워드 4세는 이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475년에는 프랑스와 피키니 조약을 체결하여 연금을 받고 평화를 유지했다.[19] 이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고 의회 소집 없이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한자 동맹과의 전쟁을 끝내고 유트레히트 조약을 체결하여 해상 무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말년에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했으며, 1482년 루이 11세가 피키니 조약을 파기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19]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드 4세는 1483년 4월 9일 급사했고, 왕위는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에게 넘어갔으나 곧 삼촌인 리처드 3세에게 빼앗겼다.
에드워드 4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1대 | 2대 | 3대 | 4대 |
---|---|---|---|---|
에드워드 4세 | 부친: 요크 공 리처드 | 조부: 캠브리지 백작 리처드 | 증조부: 요크 공 에드먼드[1] | |
증조모: 이사벨라 오브 카스티야[2] | ||||
조모: 앤 모티머 | 증조부: 마치 백작 로저 | |||
증조모: 엘레노어 | ||||
모친: 세실리 네빌 | 조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 증조부: 존 드 네빌 | ||
증조모: 모드 퍼시 | ||||
조모: 조앤 보퍼트 | 증조부: 랭커스터 공 존[3] | |||
증조모: 캐서린 스윈포드 |
# [1]과 [3]은 모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왕비 필리파 오브 에노의 자녀이다.
# [2]는 카스티야 왕 페드로 1세의 딸이다. 누이 콘스탄스는 [3]의 두 번째 부인이다.
# [3]는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이며,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헨리 4세는 첫 번째 부인 블랑슈 오브 랭커스터의 아들이다.
6. 죽음과 유산
에드워드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여러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의사들은 이를 그의 습관적인 구토제 사용 때문이라고 부분적으로 해석했는데, 그는 식사를 과하게 한 후 구토하고 다시 먹는 행위를 반복했다.[20] 그는 1483년 부활절에 치명적인 병에 걸렸지만, 유언에 부록을 추가할 만큼 오래 살아남았다. 가장 중요한 부록은 그의 사후 보호자로 그의 형제를 지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1483년 4월 9일에 사망하여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그의 열두 살 아들인 에드워드 5세는 결코 즉위하지 못했고, 글로스터는 7월에 리처드 3세가 되었다.
에드워드의 사망 원인은 불확실하다. 의학 지식이 부족했던 시대에는 사망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독살 의혹이 흔했다. 폐렴이나 말라리아도 가능성으로 제기되었지만, 둘 다 당시 잘 알려져 있고 쉽게 진단 가능한 질병이었다. 한 당대의 기록은 과도한 쾌락으로 인한 뇌졸중을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는 그의 신체적 습관과 일치한다.[22] 또 다른 이론은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다.[3]
장미 전쟁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에드워드 개인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19세기 역사가들, 예를 들어 윌리엄 스터브스는 그를 잔인한 무능한 인물로 치부했다. 가장 포괄적인 현대 전기는 1974년 찰스 로스가 저술했는데, 그는 그의 후기 통치의 평화와 안정이 단기적인 이익 추구에 낭비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한 에드워드가 "1066년 이후 잉글랜드 역사상 왕좌를 장악했지만 아들의 안전한 계승을 확보하지 못한 유일한 국왕"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정치적 선견지명 부족이 그의 조기 사망 이후의 불행한 결과에 큰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해설가들은 에드워드의 재위 초기와 후기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관찰한다. 서머싯과 같은 옛 적들과의 화해 시도 실패는 그가 1471년 이후로 형 클래런스의 처형을 포함하여 현저히 더 무자비해졌음을 의미한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는 능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군 지휘관이었고, 최전선에서 지휘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당대 사람들이 언급한 활력이 덜 두드러졌다.
이로 인한 한 가지 결과는 의회가 에드워드가 수행하지 못한 전쟁에 대한 세금을 승인하는 것을 점점 꺼리게 되었고, 대신 그 자금을 그의 가계 지출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통치하에 랭커스터 공국의 소유권은 왕실로 이전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남아 있다. 1478년 그의 참모들은 이른바 '흑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정부 재정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였고, 1세기 후에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그는 런던 시와의 사업 투자에 상당한 투자를 했고, 이를 추가적인 자금원으로 사용했다.
1450년부터 1470년까지의 불황에서 경제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지출은 항상 수입을 초과했고, 1483년 그의 죽음 당시 왕실은 1200GBP 미만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메디치 은행 런던 지점과의 긴밀한 관계는 파산으로 끝났고, 1517년 메디치 가문은 여전히 에드워드의 빚 상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경제는 외교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에드워드의 통치는 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 공국 사이의 삼자 외교 경쟁이 지배했고, 세 나라 중 두 나라가 세 번째 나라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플랑드르 상인들이 영국 양모의 가장 큰 구매자였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일반적으로 부르고뉴 친화적이었지만, 1471년 샤를 공작이 그를 지원하기를 주저한 것은 그들의 관계를 식혔다. 1477년 샤를의 죽음은 1482년 아라스 조약으로 이어졌다. 플랑드르는 부르고뉴 네덜란드로 알려진 지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프랑스는 나머지를 획득했다. 에드워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들의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에드워드 4세의 지위는 왕세자 에드워드(후의 에드워드 5세)의 탄생(망명 중이던 1470년 11월 4일에 왕세자가 태어났다)으로 강화되었고, 적대자들의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왕실 재정도 풍족해졌다. 클라렌스 공은 에드워드 4세에게 귀순했지만, 동생인 글로스터 공과의 불화가 있었다. 클라렌스 공은 워릭 백작의 장녀 이자벨과 결혼했지만, 글로스터 공도 차녀 앤과 결혼하여 네빌가의 유산 상속을 주장했다. 그들의 불화에 더하여 클라렌스 공은 음모에 계속 관여하여 에드워드 4세를 괴롭혔지만, 결국 이 문제는 1478년 클라렌스 공이 처형됨으로써 해결되었다.
에드워드 4세 치세 후반의 군사적 모험은 1475년의 단기간의 대프랑스 전쟁이었고, 이 결과 에드워드 4세는 피키니 조약을 체결했다. 외교적으로 이 조약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고, 동맹국 부르고뉴 공국과의 당초 계획과도 동떨어진 것이었다.[19] 그러나 이 조약은 잉글랜드가 국력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했다. 조약에 의해 정해진 루이 11세로부터 에드워드 4세에게 지불되는 20000FRF의 연금은 본국 정부의 재정을 충당하게 하여, 과세를 위해 의회를 여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한자 동맹과는 1469년부터 잉글랜드-한자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1474년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을 통해 선박의 안전을 확립하고, 해적 행위의 대폭적인 감소로 이어졌다.
말년의 에드워드 4세는 방탕해지고 추문에 물들었지만, 런던 시민들은 그의 불품행에 익숙해져 있었다.[19] 궁정의 권력은 인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드빌 가가 장악하고 있었고, 북부를 통치하는 어려운 일은 글로스터 공에게 맡겨졌다. 1482년, 루이 11세는 피키니 조약을 어기고 프랑스 왕세자 샤를 8세와 잉글랜드 왕녀 엘리자베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연금 지불도 중단했다. 에드워드 4세는 재정벌을 준비하지만 그 도중에 병에 걸렸다.
에드워드 4세는 신체가 건강하고 40대에 접어든 참이었지만, 아마도 방탕과 방종에 의해, 1483년 4월 9일에 웨스트민스터에서 급사했다. 윈저 성 내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왕위는 겨우 12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에게 계승되었지만, 3개월도 되지 않은 6월 26일에 삼촌 글로스터 공에 의해 폐위되었고, 대신 그가 리처드 3세로서 즉위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사이에는 장남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 오브 슈루즈베리의 두 명의 남자아이가 있었지만, 리처드 3세에 의해 형제는 런던 탑에 유폐되었고, 아마도 살해되었을 것이다. 5명의 여자아이 중 장녀 엘리자베스는 리처드 3세를 타도하고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와 결혼했다.
7. 문화적 유산
해설가들은 에드워드 4세의 재위 초기와 후기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1471년 이후 에드워드는 옛 적들과의 화해 시도에 실패하고, 형 클라렌스 처형을 포함하여 현저히 더 무자비해졌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는 능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군 지휘관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활력이 덜 두드러졌다고 당대 사람들이 언급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중 하나는 의회가 에드워드가 수행하지 않은 전쟁에 대한 세금 승인을 꺼리게 되었고, 에드워드는 그 자금을 가계 지출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통치하에 랭커스터 공국의 소유권은 왕실로 이전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남아 있다. 1478년 그의 참모들은 '흑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정부 재정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였고, 1세기 후에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그는 런던 시와의 사업 투자에 상당한 투자를 했고, 이를 추가적인 자금원으로 사용했다.
1450년부터 1470년까지의 불황에서 경제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지출은 항상 수입을 초과했고, 1483년 그의 죽음 당시 왕실은 1,200파운드 미만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메디치 은행 런던 지점과의 긴밀한 관계는 파산으로 끝났고, 1517년 메디치 가문은 여전히 에드워드의 빚 상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 유럽 방문객은 에드워드 4세의 궁정을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값비싼 사치품에 많은 돈을 썼으며, 그의 수집 습관은 스타일 감각과 학문, 특히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고급 의류, 보석, 가구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삽화가 들어간 역사 및 문학 원고를 수집했는데, 그중 많은 수가 브뤼헤(Bruges)의 장인들이 특별히 그를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그의 서적 구매에는 오락과 교육을 위한 책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그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그 책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비롯한 위대한 통치자들의 삶,[4] 역사 연대기,[5] 그리고 교육 및 종교 서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6] 1476년, 윌리엄 칵스턴(William Caxton)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부속 건물에 영국의 최초 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477년 11월 18일에는 에드워드 4세의 매제인 앤써니 우드빌(Anthony Woodville)이 영어로 번역한 ''철학자들의 언행록(Sayengis of the Philosophres)''을 출판했다.
에드워드 4세의 도서관이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대장옷감 창고(Great Wardrobe)에서 엘섬 궁전으로 책들을 옮겼고, "왕의 책을 보관하는" 궁내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5세기의 그의 책 40권 이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그 책들이 조심스럽게 보관되었음을 시사하며, 영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왕실 사본에 소장되어 있다. 에드워드 4세는 엘섬 궁전(Eltham Palace)에 많은 돈을 썼는데, 현존하는 대연회장도 포함되며, 이곳에서는 4월 사망 직전인 1482년 12월 2,000명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7] 그는 또한 윈저 성 조지 예배당(St George's Chapel, Windsor)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1483년에 이곳에 매장되었다. 후에 헨리 7세에 의해 완공되었지만, 잉글랜드 내전(First English Civil War) 중에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8. 인물 평가
에드워드 4세에 대한 평가는 그의 통치 시기와 개인적인 면모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초기에는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군사 지도자로 칭송받았으나, 1471년 이후로는 이전의 적들과 화해하지 못하고 형인 클라렌스 공작을 처형하는 등 잔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3] 또한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의 활력을 잃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24]
필리프 드 코미네는 회고록 『Mémoires』에서 에드워드 4세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공자"라고 칭찬하며 그의 뛰어난 용모와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 코미네는 에드워드 4세가 성실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는 칭찬을 통해 기쁨을 얻는 인물이었다고 기록했다.[26] 그러나, 지나친 쾌락주의자이며 사람을 의심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했고, 워릭 백작에 대한 처벌이 너그러웠던 점에 대해서는 "약간 너무 순진하다"고 평가했다.[26]
폴리도르 베르질리우스는 『Anglica Historia』에서 에드워드 4세가 돈과 유능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일을 좋아하고 통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친화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친절하여 위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22]
19세기 역사가 윌리엄 스터브스는 에드워드 4세를 잔인하고 무능한 인물로 평가했다. 찰스 로스는 에드워드 4세의 후기 통치의 평화와 안정이 단기적인 이익 추구로 낭비되었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또한 에드워드 4세가 정치적 선견지명이 부족하여 조기 사망 이후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31]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생활 태도를 자각하고 장남 에드워드 5세의 도덕관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27] 장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도 열심이었지만, 튜더 왕조 이후에는 점성술에 현혹되어 돈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르네상스 군주로서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 최초의 전제군주였으며, 새로운 문화의 후원자이자 잉글랜드 최초의 인쇄업자 윌리엄 캑스턴의 친구였다.[19] 그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런던 상인들과 공동 경영자로 투자하기도 했다.[19] 부르고뉴 공국에서 장식 필사가와 건축가를 초청하여 장식 필사본을 많이 소장했으며, 세인트 조지 예배당, 엘섬 궁전 등 건축물 개축에도 힘썼다.
8. 1. 긍정적 평가
에드워드 4세는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필리프 드 코미네는 회고록 『Mémoires』에서 에드워드 4세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공자"라고 칭찬하며 그의 뛰어난 용모와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 코미네는 에드워드 4세가 성실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는 칭찬을 통해 기쁨을 얻는 인물이었다고 기록했다.[26] 또한, 백성과 적에게 관대한 점을 언급하며, 특히 적의 시체를 학대하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했다.폴리도르 베르질리우스는 『Anglica Historia』에서 에드워드 4세가 돈과 유능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일을 좋아하고 통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친화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친절하여 위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22]
에드워드 4세는 자녀 교육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는 장남 에드워드 5세의 도덕관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래들로 성에서 장남을 양육하던 리버스 백작 등에게 편지를 보내 왕자의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전달했다.[27]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딸들에게 예절, 수학, 연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제공했다.[29]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로서,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 최초의 전제군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새로운 문화의 후원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잉글랜드 최초의 인쇄업자인 윌리엄 캑스턴을 후원했으며,[19] 상업적인 목적으로 런던 상인들에게 투자하기도 했다.[19] 또한, 부르고뉴 공국에서 장식 필사가와 건축가를 초청하여 영국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장식 필사본을 제작하고, 세인트 조지 예배당, 엘섬 궁전 등 주요 건축물의 개축을 추진했다.
8. 2. 부정적 평가
에드워드 4세에 대한 평가는 그의 통치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초기에는 유능하고 카리스마 있는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았지만, 1471년 이후로는 이전의 적들과 화해하지 못하고 형인 클라렌스 공작을 처형하는 등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23]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의 활력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다.[24]의회는 에드워드 4세가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세금을 요구하고, 그 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랭커스터 공국의 소유권이 왕실로 이전되었고, 1478년에는 정부 재정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인 '흑서'가 작성되었다.[31] 그는 런던 시의 사업에 투자하여 추가적인 자금원을 확보하기도 했다.[19]
경제적으로는 1450년부터 1470년까지의 불황에서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4세의 지출은 수입을 초과했다. 그의 사후 왕실은 1,200파운드 미만의 현금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메디치 은행 런던 지점은 파산했으며, 1517년까지도 메디치 가문은 에드워드 4세의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27]
외교 정책은 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 사이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4세는 플랑드르 상인들이 영국 양모의 주요 구매자였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우호적이었지만, 1471년 샤를 공작이 지원을 주저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477년 샤를의 죽음 이후 1482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프랑스는 나머지 지역을 차지하면서 에드워드 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31]
에드워드 4세는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그의 방탕함으로 인해 시민들은 아내와 딸들을 숨기기도 했다.[22] 젊은 시절에는 미남이었지만, 복위 후 방탕한 생활로 인해 말년에는 비만해졌다.[3] 제인 쇼어와 엘리자베스 루시가 그의 유명한 애첩들이었다. 엘레노어 탈봇과의 약혼은 리처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는 구실이 되었고,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은 무효화되어 그 사이의 자녀들은 서자로 간주되었다.[23]
에드워드 4세의 출생에 대한 추문도 있었는데,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가 어머니 세실리 네빌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주장했다.[23]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4세가 요크 공작 리처드와 닮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왕위를 찬탈했다.[22]
필리프 드 코미네는 에드워드 4세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공자"라고 칭찬했지만, 지나친 쾌락주의자이며 사람을 의심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했다. 워릭 백작에 대한 처벌이 너그러웠던 점에 대해서는 "약간 너무 순진하다"고 평가했다.[26] 그러나 백성과 적에게 관대하고 신하들이 군주를 위해 헌신한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6]
폴리도르 베르질리우스는 에드워드 4세가 성욕을 억제하지 못했고, 워릭 백작을 토벌한 후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해졌다고 기록했다. 돈과 유능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지나치게 친절하여 위엄이 없었다고도 평가했다.[22]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생활 태도를 자각하고 장남 에드워드 5세의 도덕관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27] 장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도 열심이었지만, 튜더 왕조 이후에는 점성술에 현혹되어 돈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르네상스 군주로서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 최초의 전제군주였으며, 새로운 문화의 후원자이자 잉글랜드 최초의 인쇄업자 윌리엄 핵스턴의 친구였다.[19] 그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런던 상인들과 공동 경영자로 투자하기도 했다.[19] 부르고뉴 공국에서 장식 필사가와 건축가를 초청하여 장식 필사본을 많이 소장했으며, 세인트 조지 예배당, 엘섬 궁전 등 건축물 개축에도 힘썼다.
19세기 역사가 윌리엄 스터브스는 에드워드 4세를 잔인하고 무능한 인물로 평가했다. 찰스 로스는 에드워드 4세의 후기 통치의 평화와 안정이 단기적인 이익 추구로 낭비되었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또한 에드워드 4세가 정치적 선견지명이 부족하여 조기 사망 이후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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