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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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경협은 1839년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성인이다. 한양에서 태어나 궁녀로 생활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궁궐 생활을 벗어나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체포 후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친오빠의 배교 시도에도 굴하지 않았다.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으며,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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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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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일 | 1790년 |
사망일 | 1839년 9월 26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전경협은 한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1] 안형광의 도움으로 궁에서 살게 되었으나, 박희순 루치아 등의 영향으로 천주교로 개종했다.[1] 신앙 생활을 위해 궁궐을 나온 그녀는 체포될 때까지 신앙생활을 이어갔다.[1]
천주교 신앙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궁녀였기에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1] 포장은 천주교를 부정하라 강요했지만, "만 번 죽어도 그렇게 못한다"며 강하게 저항했다.[1] 혹독한 매질에도 굴복하지 않아,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 감복했다.[1]
전경협의 친오빠는 조정의 고위 관리였는데, 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배교를 시키려 했다.[1] 독이 든 과자를 보내거나 형리장을 매수해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1] 전경협은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여덟 명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53세)[1]
2. 1. 신앙 생활
전경협은 한양의 한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안형광이라는 궁녀의 도움으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몇 해가 지나 친오빠가 전경협을 결혼시키려 했지만, 안형광은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전경협도 이미 궁녀 명부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희순 루치아를 비롯한 천주교인 궁녀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박희순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출궁한 후, 전경협도 꾀병을 부려 궁궐을 빠져나왔다. 궁궐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박희순과 함께 살며 기도와 종교서적 독서, 선행에 전념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복했고,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데 일조했다. 극도의 가난과 건강 악화에도 불평 한번 없었다. 그녀는 그저 체포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1]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궁녀였었기 때문에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어째서 너는 궁녀가 이교를 믿느냐?"라고 심문했고, 전경협은 "저의 종교는 이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을 천사와 사람 그리고 만물의 창조주로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포장은 그녀가 천주교를 부정하도록 만들 수 없었으므로, 형조로 이송했고 거기서 다시 심문이 이어졌다. "궁녀가 이교를 믿는 것은 대역죄이다. 너의 천주를 부정하고 천주교도들과 천주교 서적들이 숨겨져 있는 데가 어딘지 불어라."라는 심문에 "제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격심하게 매질을 당해 살가죽이 떨어져 나가고, 뼈 여러 곳이 부러졌으며, 엄청난 양의 피를 흘려 바닥이 흥건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 까지도 그녀에게 감복하였다.[1]
전경협의 친오빠는 이교도였으며, 조정의 고위 관리였다. 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애썼으나, 전경협은 오빠의 간청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빠는 그녀를 죽이려 독이 든 계란 과자를 감옥에 보냈지만, 수상하게 생각한 전경협은 과자를 비녀로 찔러 보았는데, 비녀 색깔이 금세 변했으므로 먹지 않았다. 오빠는 형리장을 매수하여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시켰지만, 형리장은 여러 차례 그녀를 때리되 죽이지는 않았다. 전경협의 조카는 그녀의 상처가 하루만에 다 낫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전경협은 오빠가 그녀가 감옥에 영원히 갖혀 있도록 요청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참수되기를 기도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1]
1839년 9월 26일에 서소문 바깥에서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그녀가 원한데로 참수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1]
2. 2. 체포와 고문
전경협은 한양의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궁녀 안형광과 박희순 루치아 등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로 개종했다. 신앙 생활을 위해 궁궐을 나온 그녀는 체포될 때까지 신앙생활을 이어갔다.[1]천주교 신앙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궁녀였기 때문에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전경협에게 천주교를 부정하도록 강요했지만, 그녀는 "제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라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녀는 격심한 매질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그녀에게 감복하였다.[1]
전경협의 친오빠는 조정의 고위 관리였는데, 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했다. 독이 든 계란 과자를 보내거나 형리장을 매수하여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전경협은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1]
2. 3. 순교
전경협은 한양의 한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궁녀 안형광의 도움으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몇 해 뒤 친오빠가 결혼시키려 했지만, 이미 궁녀 명부에 올라 있어 안형광이 보내주지 않았다. 박희순 루치아 등 천주교인 궁녀들의 영향으로 천주교인이 되었다. 박희순이 출궁한 후, 전경협도 꾀병을 부려 궁궐을 나왔다. 궁궐 생활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후 박희순과 함께 살며 기도와 종교 서적 독서, 선행에 전념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데 기여했다. 극심한 가난과 건강 악화에도 불평하지 않고 체포될 때를 기다렸다.체포 후 감옥으로 압송되어 궁녀였기 때문에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어째서 너는 궁녀가 이교를 믿느냐?"라고 심문했지만, 전경협은 자신의 종교가 이교가 아니며 하느님을 천사와 사람, 만물의 창조주로 믿는다고 답했다. 포장은 그녀를 형조로 이송했고, 심문은 계속되었다. "궁녀가 이교를 믿는 것은 대역죄이다. 너의 천주를 부정하고 천주교도들과 천주교 서적들이 숨겨져 있는 곳을 불어라."라고 했지만, 전경협은 "제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격심한 매질로 살가죽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부러졌으며, 엄청난 양의 피를 흘렸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전경협의 친오빠는 이교도였으며 조정의 고위 관리였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독이 든 계란 과자를 보냈지만, 수상하게 여긴 전경협은 비녀로 찔러 보았고, 비녀 색깔이 변해 먹지 않았다. 오빠는 형리장을 매수하여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시켰지만, 형리장은 여러 차례 때리되 죽이지는 않았다. 전경협의 조카는 그녀의 상처가 하루 만에 낫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전경협은 오빠가 그녀를 영원히 감옥에 가두도록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신앙을 위해 참수되기를 기도했고, 마침내 이루어졌다.
전경협은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1]
3. 시복 및 시성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1]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2]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1-09
[2]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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