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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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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는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개최된 축구 대회이다. 조선중앙일보 주최로 시작하여 조선일보, 조선축구협회와 매일신보 공동 주최로 이어졌으며,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전국 도시 간의 축구 열기를 고취하고 지역 연고를 다지는 데 기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경성 축구단이 3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평양 축구단과 함흥 축구단이 각각 2회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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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대회 정보
이름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한자 표기全朝鮮都市對抗蹴球大會
설립 연도1936년
폐지 연도1942년
지역일제강점기 조선
참가 팀 수7~17 팀
최다 우승경성 축구단 (3회)

2. 명칭

처음에는 조선중앙일보 주최 제1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개최되었다.[1]

3. 역사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여운형 사장 재직 하에 각종 스포츠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축구를 통한 전국 도시의 향토애를 높이기 위해 1936년 4월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경성, 평양을 비롯한 10개 도시가 참가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정간되면서 1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1]

3. 1. 조선중앙일보 주최 대회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1930년대 여운형 사장의 주도로 각종 스포츠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축구를 통해 전국 도시의 향토열을 고취시키기 위해 1936년 4월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1] 이 대회에는 경성, 평양을 비롯한 10개 도시가 참가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차례의 예선과 준결승, 결승전이 치러졌다.[1] 특히 1935년 이후 중단되었던 경평전에서 경성과 평양 양대 강팀에 참가했던 유명 선수들이 자신들의 출신지 팀 소속으로 출전하는 등 도시 간 전력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결승에서는 경성이 평양을 꺾고 우승하여 양 팀은 여전히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였다.[1] 그러나 1936년 여름, 손기정 선수 사진에 대한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중앙일보가 정간되면서 이 대회는 제1회를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1]

3. 2. 조선일보 주최 대회 (1938년~1940년)

1938년 각 도시 축구인들의 요청에 따라 조선일보 주최로 대회가 부활했지만, 대회 횟수를 다시 제1회로 명명했다.[1] 1936년 조선중앙일보 주최의 대회와 동일한 명칭과 성격의 대회였다.[1] 전국 주요 도시에서 1938년 7개 팀, 1939년 12개 팀, 1940년 13개 팀이 참가하는 등 점차 대회 규모가 확대되었다.[1] 그러나 조선일보사 역시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8월 폐간됨에 따라 이 대회 역시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1]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시대항축구대회

3. 3. 조선축구협회, 매일신보 공동 주최 대회 (1941년~1942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는 대회의 명맥을 잇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 공동으로 1941년 제4회 대회를 주최했다. 1941년 14팀, 1942년 17팀이 참가하는 등 외연을 확대해갔지만, 1942년 대회를 끝으로 일제의 구기 종목 전면 금지에 따라 다시 중단되었다.[1]

4. 대회 운영

대회는 매년 4월이나 5월에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전국 각 도시에서 출전한 10~20여 개의 팀이 예선 1~3회전을 치른 뒤, 상위 4팀을 뽑아 준결승을 치르고, 다시 이 경기의 승자끼리 결승을 치르는 토너먼트 방식이 적용되었다.

5. 결과 및 기록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는 일제강점기에 개최된 축구 대회로, 여러 도시의 축구단이 참가하여 실력을 겨루었다. 1936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1942년까지 총 6회의 대회가 열렸다.

5. 1. 역대 대회 개요

매일신보 공동1941.4.21~2514경성, 마장,
개성, 수원광주(光州), 전주평양, 신의주함흥, 홍원, 삼호, 북청, 원산, 덕원평양6제5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조선축구협회,
매일신보 공동1942.5.16~2017경성, 인천춘천전주, 군산부산, 마산, 대구평양, 진남포, 신의주, 해주함흥, 홍원, 북청, 원산, 청진경성, 평양


5. 2. 역대 우승팀

횟수팀명우승 연도
3경성 축구단1936, 1938, 1942[1]
2함흥 축구단1939, 1940
2평양 축구단1941, 1942[1]



1942년은 경성과 평양의 공동 우승이다.[1]

6. 의의와 한계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축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도시 단위 참가를 유도하여 축구의 지역 연고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서울, 평양, 함흥 등 기존의 축구 강호들은 물론, 기타 지방의 주요 도시들까지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전국 단위의 대회였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1] 1942년 중단되었던 대회는 1946년 서울신문사에 의해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1966년까지 지속되었으나, 규모나 열기 면에서 이전만 못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그 흐름이 끊겨 소규모 대회로 전락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1]

6. 1. 의의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는 비록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축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도시 단위 참가를 유도하여 축구의 지역 연고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서울, 평양, 함흥 등 기존의 축구 강호들은 물론, 기타 지방의 주요 도시들까지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전국 단위의 대회였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1] 1942년 중단되었던 대회는 1946년 서울신문사에 의해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1966년까지 지속되었다.[1] 하지만 규모나 열기 면에서 이전의 것에 미치지 못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그 흐름이 끊겨 소규모 대회로 전락했다는 점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1]

6. 2. 한계

조선중앙일보 주최의 대회가 첫 대회를 끝으로 중단되었지만, 1938년 각 도시 축구인들의 요청에 따라 2년 만에 대회를 부활시킨다. 비록 대회 주최가 조선일보로 바뀌고 대회 횟수를 다시 제1회로 명명하였지만, 1936년 조선중앙일보 주최의 대회와 동일한 명칭과 성격의 대회였다.[1] 전국 주요 도시에서 1938년 7개 팀, 1939년 12개 팀, 1940년 13개 팀이 참가하는 등 점차 대회 규모가 확대되었다.[1] 그러나 조선일보사 역시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8월 폐간됨에 따라 이 대회 역시 중단될 위기에 처한다.[1]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는 대회의 명맥을 잇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 공동으로 1941년 제4회 대회를 주최한다.[1] 1941년 14팀, 1942년 17팀이 참가하는 등 외연을 확대해가지만, 이 역시 1942년 대회를 끝으로 일제의 구기종목 전면금지에 따라 다시 중단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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