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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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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주는 후한 말, 유우의 막료로 헌제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유우 사후에는 산 속에 은거하며 자치 세력을 형성했다. 조조의 오환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의 행적은 후세에 칭송받았으며, 조비는 그의 종손 전속을 관내후에 봉했다.

2. 행적

전주는 본래 유우의 막료였다. 유우 사후에는 그를 따르던 무리를 이끌고 은거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원소원상의 초빙을 거절하고 오환 정벌에 나선 조조를 도와 큰 공을 세웠으나, 조조가 내린 작위를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207년, 조조의 오환 정벌에 전예를 통해 초빙에 응했다.[2]

이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전주의 덕과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종손 전속관내후에 봉해 전주의 뒤를 잇게 했다.[2]

2. 1. 유우의 막료 시절

초평 원년(190년), 유우의 명을 받아 헌제에게 사자로 파견되어 삭방을 거쳐 장안에 이르렀다. 이때 전주의 나이는 22세였다. 황제에게서 기도위에 배해졌고 또 삼공의 추천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유주로 돌아갔는데, 도착하기 전에 유우가 공손찬에게 살해당하자 유우의 묘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고 제사를 지내고 떠났다.[2]

이에 공손찬은 크게 노하여 포상금을 걸고 전주를 사로잡았으나, 전주는 포악한 공손찬 앞에서 한치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했으며 오히려 은근히 그를 비판하였다. 공손찬은 전주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죽이지는 않았으나 군영 안에 감금해 놓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해 곧 전주를 풀어주었다.[2]

유우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탄식하며 일족 수백 명을 이끌고 산 속에 은거했는데, 현명하고 공정한 전주를 따라 백성들이 점차 귀의했으므로 몇 년 사이에 5천여 가구의 무리가 모이게 되었고, 전주는 여러 장로들에게 만장일치로 우두머리에 선출되었다. 전주는 여러 가지 법령을 정하고, 예의를 제정하며 학술을 강연하는 등 그들을 다스렸는데, 여러 조치가 알맞게 행해졌으므로 일체의 불만이 없었으며 계속 번성했다고 한다.[2]

2. 2. 은거와 자치

유우공손찬에게 살해당하자, 전주는 일족 수백 명을 이끌고 산 속에 은거했다. 현명하고 공정한 전주를 따라 백성들이 점차 모여들어 몇 년 사이에 5천여 가구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전주는 법령 제정, 예의 제정, 학술 강연 등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여러 조치가 알맞게 행해져 불만이 없었고 계속 번성했다고 한다.[2]

원소는 전주를 흠모하여 다섯 차례나 초빙했고, 원소가 죽은 뒤 원상도 예의를 갖춰 거듭 초빙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는 원소와 친밀한 관계였던 오환이 예전에 전주의 고향인 우북평에서 다수의 고관들을 죽인 것을 항상 증오하며 오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

2. 3. 조조의 오환 정벌 지원

207년, 원상조조에게 패하여 오환으로 망명하자, 조조는 원상을 쫓아 오환을 공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전주는 곧바로 무리를 이끌고 조조를 따랐다.[2] 당시 조조군은 무종을 통해 오환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큰길은 비로 인해 끊겼고, 여러 샛길들은 원상과 답돈이 선점하여 철저히 지키고 있었으므로 조조는 고전하고 있었다.[2]

전주는 2백 년 동안 이용이 끊겨 있었던 노룡(盧龍) 방면의 옛 샛길을 안내하며 진군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노룡을 통해 오환의 본거지를 향해 잠행했다.[2] 오환은 노룡을 통한 샛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조조군이 사라지자 조조가 철수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총사령부인 유성(柳城)에서 불과 2백 리 지점에서 조조의 대군이 포착되자 경악했다.[2] 결국 답돈은 전투 중 사로잡혀 참수되었으며, 오환은 엄청난 사망자를 내 시체가 들판을 뒤덮을 지경이었다고 한다.[2] 원상은 선우 누반 등 살아남은 오환 지도부를 이끌고 요동으로 도망갔으나, 요동의 지배자 공손강은 원상을 죽여 그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2]

조조는 원상의 머리를 효수한 뒤 원상의 머리 앞에서 슬퍼하는 자가 있으면 그대로 처형한다는 엄명을 내렸으나, 전주는 원상의 죽음을 접하자 원상의 머리 앞에서 곡을 하며 제사를 지냈다.[2] 조조는 이 사실을 알았으나 연유를 묻지 않았다. 조조는 노룡의 길을 안내한 공을 치하하며 전주를 정후로 봉하고 5백 호의 식읍을 내렸으나, 전주는 공손찬에게 복수하지 못해 사람들을 인솔하여 산 속으로 달아났으나 뜻은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받기를 사양했다.[2] 조조는 억지로 상을 받게 하지 않았으나, 훗날 전주의 공이야말로 특별히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전주에게 작호를 받기를 권했다. 조조의 거듭된 협박과 강권에도 전주는 노룡의 길을 안내한 공으로 인해 작호를 받기를 거부했다. 조조는 전주의 관직을 박탈하고 처형하는 것을 신중히 검토했으며, 마지막으로 전주와 친교가 있는 하후돈을 보내 전주에게 작호를 받기를 권했으나, 전주는 눈물을 흘리며 부득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차라리 머리가 잘려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조조는 이를 전해 듣고는 깊이 탄식하며 작호를 내리는 것을 포기했다.[2]

2. 4. 절개와 은둔

전주는 유우의 막료로 있다가 유우가 공손찬에게 살해당하자 유우의 묘를 찾아가 슬퍼했으며, 공손찬이 체포령을 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전주는 유우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탄식하며 일족 수백 명을 이끌고 산 속에 은거했는데, 그의 현명함과 공정함에 백성들이 따르면서 몇 년 사이에 5천여 가구의 무리가 모였다. 전주는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법령과 예의를 제정하고 학술을 가르쳤으며, 원소원상의 거듭된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다.[2]

207년, 조조오환을 공격할 때 전주는 조조군에 합류하여 200년 동안 이용되지 않았던 노룡 방면의 옛 샛길을 안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주는 공손찬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조에게 이용당했다는 수치심에 조조가 내린 작위를 거부했다. 조조는 거듭 작위를 권했으나, 전주는 죽음을 택할지언정 작위를 받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여 결국 조조도 포기했다.[2]

이후 46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문제는 전주의 덕과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종손 전속관내후에 봉했다.[2]

3. 평가

진수는 전추의 절개가 세속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1]

배송지는 전추가 원상에게 조문한 것을 비판하며, 오환 토벌을 도와 원상을 죽게 한 전추의 행동을 위선적이라고 평가했다.[1]

3. 1. 진수의 평가

"전추의 절의는 세속을 교정하기에 충분하다."[1]

배송지는 전추전에 대한 주석에서, 전추가 원상을 곡하며 조문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였다. 배송지는 전추가 오환 토벌을 도와 원상이 붙잡혀 죽었으므로 "그의 곡하는 행위는 위선적이다"라고 평가했다.[1]

3. 2. 배송지의 비판

배송지는 전추전에 대한 주석에서, 전추가 원상을 곡하며 조문한 행위에 대해, 전추가 오환 토벌을 도운 결과 원상이 붙잡혀 죽었으므로 "그의 곡하는 행위는 위선적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1]

4. 친족 관계

전주

참조

[1] 서적 後漢書
[2] 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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