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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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송지는 유송 시대의 학자이자 역사가로,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널리 알려졌다. 8세에 《논어》와 《모시》에 통달했으며, 동진과 유송 왕조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유송 문제의 명으로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원본보다 3배나 긴 분량으로 만들었으며, 사료 비판적인 방법론을 통해 삼국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석은 《배송지주》 또는 《배주》로 불리며, 《삼국지연의》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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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엽은 동진 시대에 태어나 남조 송나라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역사서 《후한서》를 저술했으나 유의강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 451년 사망 - 장손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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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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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배송지(裴松之) |
자 | 세기(世期) |
출생 | 372년 |
출생지 | 산시성 원시현 |
사망 | 451년 |
국적 | 중국 남조 송 |
직업 | 역사가, 정치인 |
가족 | 조부: 배매 아버지: 배궤 어머니: 유씨 (유량의 손녀, 유희의 딸, 유개의 자매) 아들: 배음 증손: 배자야 |
주요 저서 | |
생애 | |
시대 | 동진, 남조 송 |
관직 | 중서통사사인(中書通事舍人) 비서랑(秘書郎) 보병교위(步兵校尉) 산기상시(散騎常侍) |
기타 |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삼국지주를 완성 |
2. 생애
배송지는 8살에 《논어》와 《모시(毛詩)》에 통달하였으며, 몸가짐은 늘 검소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논어와 시경과 같은 고전에 매우 익숙했다.
송나라 건국 후, 원가 3년(426년) 문제는 배송지를 중서시랑(中書侍郞) · 서향후(西鄕侯)에 봉했다. 이후 사례 · 기주의 대중정(大中正)으로 전임되었고, 원가 6년(429년)에는 문제의 명으로 《삼국지》에 주석(배송지주, 혹은 배주)을 달았다. 배송지는 여러 기록과 이설을 모아 완성하여 헌상했고, 황제는 "배세기의 이름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18] 또한 배송지는 《진기》를 저술하였으나, 이후 소실되었다.
이후에도 대중정 및 영가군 등의 지방 태수를 역임하였고, 마지막으로 국자박사(國子博士) ·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지냈다. 하승천의 국사를 뒤이어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원가 28년(451년) 이를 끝내 마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향년 80세였다.
배송지는 인용한 사료 자체의 질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19] 사실성은 차치하고 진수의 문장에 비하여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어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이는 《삼국지연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또한 출전을 반드시 기록하였으므로, 동시대 및 근미래의 어떤 사료가 인용되었는지를 그 내용과 함께 알 수 있으며, 저자의 입장이나 시대에 따라 해석과 주장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위(魏)의 기록과 촉(蜀), 혹은 오(吳)의 기록이 크게 다르며, 동시대 사료와 위의 다음 시대인 서진(西晉), 또한 그 다음 시대인 동진에 걸쳐 생겨난 사료는 제각각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배송지는 그러한 비교 검토의 재료를 기록으로 남겨두어, 사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어 조모 시해 사건의 경우, 사건에 서진을 건국한 사마씨(司馬氏)가 연루되어 있어 진수는 이를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이에 배송지는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기록된 전말이 가장 잘 정리된 것으로 보고, 주석의 맨 앞에 인용하는 한편 이어서 다른 설들을 기록하였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사료를 비교 · 검토하게끔 한 것으로, 배송지는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문헌도 주석으로 인용하여 다시 검토할 여지를 남겼다.
인용된 문헌의 수는 위 → 오 → 촉의 순으로 많으며, 본문의 분량에 대한 비율로는 위 → 촉 → 오의 순으로 많다.
2. 1. 동진 시대 활동
태원 16년 (391년) 스무살 때 전중장군(殿中將軍)에 임명되었다. 이 관직은 황제의 좌우를 호위하는 것인데, 진 효무제의 태원연간에 명가출신의 인물을 선발하여 고문역을 맡기는 것으로 바뀌었다.의희 원년(405년)경에는 상서사부랑(尙書祠部郞)을 지냈으며, 선조의 비석을 함부로 세우는 것을 금할 것을 상주하였다. 배송지는 사사로이 세운 비에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라고 상주하였고, 이후 확인되지 않은 비석은 부숴버렸다.[4]
의희 12년(416년), 훗날 송을 건국한 유유의 북벌에 사주주부(司州主簿)로서 종군하였다. 이윽고 낙양을 함락시킨 후 배송지는 사예주(司隷州)에 거하며 정무를 맡았다.
유유는 모덕조(毛德祖)를 사자로 삼아서 낙양에 보내며 말하기를
하였다.
2. 2. 송나라 시대 활동
태원 16년 (391년) 전중장군을 시작으로 동진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의희 원년 (405년) 경에는 상서사부랑이었다.당시 조상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 건립이 유행했고,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배송지는 비석을 함부로 세우는 것을 금지하고, 내용은 조정 회의의 검열을 거치도록 상주했다.[15] 의희 12년 (416년), 훗날 남조 송을 건국하는 유유(무제)의 북벌에 사주주부로 종군했다. 낙양을 탈환한 유유는 배송지에게 "배송지는 낭묘의 재능(국정을 담당할 인재)을 가졌으니, 변경의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은경인과 함께 세자세마에 임명한다."라고 명했다. 그 후, 영릉내사·국자박사로 임명되었다.
남조 송이 성립되자, 원가 3년 (426년) 문제 시대에 공적을 인정받아 중서시랑·서향후가 되었다. 이후 사례·기주 두 주의 대중정으로 전임되었다. 원가 6년 (429년), 문제의 명을 받아 삼국 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지의 '주'(배주)를 만들었다. 문 황제는 "이것은 불후의 업적이 될 것이다"라고 배송지를 칭찬했다. 또한, 『진기』를 저술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에도 대중정이나 영가군 등의 지방 태수를 역임했고, 최종적으로 국자박사·태중대부를 겸임했다.
3. 《삼국지》 주석
유송의 문제는 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가 너무 간결하다고 여겨 배송지에게 주석을 달도록 명했다. 배송지는 진수가 생략했거나, 문제가 될 만한 사항들을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삼국지》에 추가하고, 주석과 개인적인 해설을 덧붙였다.[3]
429년에 완성된 배송지의 주석(배주)은 이후 《삼국지》 판본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원본보다 세 배나 긴 분량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저작을 "배세기[18]의 이름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라며 칭찬했다.[3]
배송지는 210종에 달하는 당시의 사료 문헌을 꼼꼼한 사료 비판을 거쳐 인용했으며, 출전을 명시하여 동시대 및 근미래의 어떤 사료가 인용되었는지를 그 내용과 함께 알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저자의 입장이나 시대에 따라 해석과 주장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위나라 조모가 시해된 사건의 경우, 사건에 서진을 건국한 사마씨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진수는 이를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이에 배송지는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기록된 사건의 전말이 가장 잘 정리된 것으로 보고, 주석의 맨 앞에 인용하는 한편 이어서 다른 설들을 기록하였다. 이는 곧 독자로 하여금 사료를 비교 · 검토하게끔 한 것으로,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문헌도 주석으로 인용하여 다시 검토할 여지를 남겼다.
인용된 문헌의 수는 위, 오, 촉한 순으로 많으며, 본문의 분량에 대한 비율로는 위, 촉한, 오 순이다. 배송지는 진수를 본받아 제갈량 (촉한 승상)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순욱이나 심배 등 국가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에 대한 이설에 대해서는 충분한 반론을 남겼다.
3. 1. 주석의 특징
배송지 주석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보결(補闕): 빠진 기사를 보충한다.[16] 진수가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기술한 내용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 보충했다.
- 비이(備異): 본문 내용과 다른 설을 인용한다.[16] 여러 가지 이설을 모아 주석에 담아 독자들이 다양한 관점을 비교하고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 징망(懲妄): 본문 및 인용 사료의 오류를 바로잡는다.[16] 사료 비판을 통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바로잡고,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다.
- 논변(論辯): 사상과 사서에 대한 논평을 한다.[16] 자신의 견해를 주석에 담아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러한 배송지의 주석 작업 방식은 중국 사학에서 처음으로 내적, 외적인 사료 비판에 근거하여 본문의 정확성을 검토하는 방법론을 의식적으로 채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배송지는 210종에 달하는 당시의 사료 문헌을 꼼꼼하게 검토하여 인용했으며, 이를 통해 《삼국지》의 가치를 크게 높였다.[17] 또한, 추가한 사료의 출전을 명시하여 동시대 및 근미래의 사료가 어떤 것이 있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해 사료 저자의 입장이나 시대에 따라 설과 주장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모 시해 사건의 경우 사마씨가 연루되어 있어 진수는 모호하게 기록했지만, 배송지는 습착치의 《한진춘추》를 인용하고 다른 설들을 함께 제시하여 독자들이 비교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문헌도 인용하여 재검토의 여지를 남겼다.
인용된 문헌의 수는 위, 오, 촉한 순으로 많으며, 본문 분량에 대한 비율은 위, 촉한, 오 순이다. 배송지는 문제의 명에 따라 위나라를 정통으로 취급하고, 진수를 존중하며 제갈량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3. 2. 주석의 가치
유송 문제는 3세기 진수가 저술한 역사서 《삼국지》가 너무 간결하다고 여겨 배송지에게 주석을 달도록 명했다.[3] 배송지는 진수가 생략했던 자료들을 포함,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삼국지》에 주석을 달고 개인적인 해설을 덧붙였다.[3] 429년에 완성된 그의 주석은 이후 《삼국지》 판본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원본보다 세 배나 긴 분량이 되었다.[3] 문제는 그의 저작을 "불멸"이라고 칭찬했다.[3]진수의 『삼국지』는 위, 촉한, 오 삼국 시대 역사를 위나라의 후계인 서진 시대에 저술한 것이다. 이 때문에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생략되었고, 내용 또한 너무 간결하다고 생각한 송나라 문제가 배송지에게 명하여 「주(注)」를 붙이게 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것이 「배송지주」(「배주」)이다.[16]
중국 사학에서 내적, 외적인 사료 비판에 근거하여 본문의 정확성을 검토하는 방법론을 의식적으로 채용한 것은 「배주」가 처음으로 보인다. 배주는 「보결(補闕, 기사를 보충함)」, 「비이(備異, 본문과 다른 설을 인용함)」, 「징망(懲妄, 본문 및 인용 사료의 오류를 바로잡음)」, 「논변(論辯, 사상과 사서에 대한 논평)」의 네 가지 체례에 따라 붙여졌다.[16]
이러한 방법론에 입각하여 배송지는 『삼국지』 소재로 추정되는 210종에 달하는 당시 사료 문헌을 꼼꼼한 사료 비판을 거쳐 인용했다. 그 결과, 『삼국지』는 「배주」를 얻어 그 가치를 크게 높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사학사상뿐만 아니라 『삼국지연의』 형성에도 풍부한 재료를 제공하여 사학사상과 문학사상 모두 『삼국지』의 세계를 크게 발전시켰다.[17]
배주는 추가한 사료의 출전을 명시하여 『삼국지』와 동시대 또는 그 조금 뒤 시대에 어떤 사료가 있었는지, 그 내용과 함께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사료 저자의 입장이나 시대에 따라 설과 주장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위나라, 촉한, 오나라 측의 기록은 기조가 명백히 다르다. 동시대 사료와 위나라의 다음 시대인 서진, 더 나아가 그 이후인 동진에 성립된 사료는 사건에 대한 인식 차이로 기조가 다르다. 이러한 기조 변화에 대한 비교 검토 재료를 「배주」를 통해 기록에 남겨 사료 산실을 막고, 사료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예를 들어 위나라 조모 시해 사건의 경우, 사건에 서진을 건국한 사마씨가 관련되어 있어 진수는 기술을 흐리고 있다. 배송지는 습착치의 『한진춘추』가 관련 자료 중 가장 늦게 성립되었지만, 기록된 살해 전말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고 보아 주의 첫머리에 인용하고, 이어서 다른 설을 제시한다. 이처럼 부주를 통해 독자에게 사료 비교 검토의 기회를 제공한다. 배송지는 자신의 설에 반하는 문헌도 주에 인용하여 배주 자체의 재검토도 가능하게 한다.
인용된 문헌은 위, 오, 촉한 순으로 많다. 다만 본문 분량에 대한 비율로는 위, 촉한, 오 순이다. 배송지는 동진으로부터 선양받은 송나라 문제 시점에서 후한으로부터 선양받고 서진에 선양한 위나라를 정통으로 취급한다. 삼국지 본문에 따라 후한 재상에 머물렀던 조조를 태조 무제, 서진의 기반을 닦은 사마의를 사마 선왕이라고 부른다. 또한 선생(선배 사관)인 진수에게 경의를 표하고, 진수를 본받아 제갈량(촉한 승상)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순욱이나 심배 등 국가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에 대한 이설에 대해서는 충분한 반론을 남긴다. 『삼국지연의』에서 채택된 촉한 관련 일화는 대부분 「배주」에 근거한다. 그러나 후세에 성행한 강담이나 삼국지연의 등의 촉한 정통론에 의한 창작에서는 배송지 주의 근저에 보이는 진수에 대한 경의는 계승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지연의』는 간본에 따라 「진평양후진수사전. 후학라본관중편차」(명나라 가정 연간 판본)와 같이 진수를 원작자로 취급하는 것이 있다.
인용한 사료 자체의 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19] 사실성은 차치하고 진수의 문장에 비하여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여기에서 《삼국지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3. 3. 중도 진보적 관점
배송지는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송나라 문제 시기에, 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서진에 선양한 위나라를 정통으로 취급했다. 삼국지 본문에 따라, 후한 재상에 머물렀던 조조를 태조 무제, 서진의 기반을 닦은 사마의를 사마 선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선생(선배 사관)인 진수에게 경의를 표하고, 진수를 본받아 제갈량 (촉한 승상)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순욱이나 심배 등 국가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에 대한 이설에 대해서는 충분한 반론을 남겼다.[17] 『삼국지연의』에서 채택된 촉한 관련 일화는 대부분 "배주"에 근거한다. 그러나 후세에 성행한 강담이나 삼국지연의 등의 촉한 정통론에 의한 창작에서는 배송지 주에 보이는 진수에 대한 경의는 계승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지연의』는 간본에 따라서는 「진평양후진수사전. 후학라본관중편차」(명의 가정 연간의 판본)와 같이 진수를 원작자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4. 친족 관계
배송지는 하동 배씨의 일원이다. 그의 아들은 배인이고, 배인의 아들은 배조명(裴昭明, {{llang|zh|裴昭明|, 460년[7] - 502년[8])이며, 배조명의 아들은 배자야이다.[9] 배송지는 그의 어머니를 통해 강력한 진나라 섭정 유량의 증손자이다.
배송지의 아버지는 배규(裴圭)이고, 배규는 배매(裴昧)의 아들이다.[10] 배매의 증조부는 배강(裴康)이다. 배강은 그의 형 배려(裴黎)와 남동생 배개(裴楷) 그리고 배착(裴绰)과 함께 당시 유명했으며, "4 배씨"로 알려졌다.[11] 배강의 딸은 사마월의 아내였고, 사마월은 동해 소현왕이었다.[12] 배강의 아들 배춘은[13] 당시 흥양 태수였으며, 310년 6월 또는 7월에 건강으로 피신했다.[14]
5. 저서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다는 것 외에도, 《진기》(晉紀; 《진의 역사》; 십칠사의 일부로 간주됨), 《배씨가전》 (裴氏家傳; 《배씨 가문 열전》), 《집주상복경전》 (集注喪服經傳)과 같은 다른 책들도 저술했다.[3] 또한 《진기(晉記)》를 저술하였으나, 이후 소실되었다.
참조
[1]
서적
Jin Shu
[2]
서적
Song Shu
[3]
논문
Pei Songzhi
Garland Reference Library
1998
[4]
서적
Song Shu
[5]
문서
[6]
서적
Song Shu
[7]
서적
Nan Qi Shu
[8]
서적
Nan Qi Shu
[9]
서적
Liang Shu
[10]
서적
Song Shu
[11]
서적
Liang Shu
[12]
서적
Jin Shu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Jin Shu
[15]
문서
[16]
서적
三国志辞典
大修館書店
[17]
서적
三国志 演義から正史、そして史実へ
中公新書
[18]
문서
[1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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