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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부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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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도부흥원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등 간토 지방의 재건을 위해 일본 정부가 설치한 기관이다.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가 초대 총재를 맡았으며, 도시 기반 시설 확충, 토지 정리, 주택 건설 등을 주요 사업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와 내부 갈등, 예산 문제 등으로 인해 계획이 축소되었고, 1924년 2월 폐지되었다. 이후 부흥국과 부흥사무국으로 사업이 이관되었으나, 이들 또한 1932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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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부흥원
기본 정보
이미지 없음
제도부흥원
국명
제도부흥원
정식 명칭제도부흥원
표어(표어 없음)
행정
주석 각료 직함총재
주석 각료 이름고토 신페이(초대)
미즈노 렌타로(마지막)
차석 각료 직함(정보 없음)
차석 각료 이름(정보 없음)
보좌관 직함(정보 없음)
보좌관 이름(정보 없음)
차관 직함(정보 없음)
차관 이름(정보 없음)
상위 조직(정보 없음)
상위 조직 개요(정보 없음)
하위 조직 1(정보 없음)
하위 조직 개요 1(정보 없음)
위치(정보 없음)
위치(정보 없음)
정원(정보 없음)
연간 예산(정보 없음)
회계 연도(정보 없음)
역사
설치 날짜1923년 (다이쇼 12년) 9월 27일
명칭 변경 날짜(정보 없음)
폐지 날짜1924년 (다이쇼 13년) 2월 25일
전신(정보 없음)
후신내무성부흥국
기타
웹사이트(정보 없음)
기타(정보 없음)

2. 설립 배경

1923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파괴된 수도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의 복구를 위해 설립되었다.

2. 1. 간토 대지진

1923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의 복구를 위해 제2차 야마모토 내각 하에서 내각총리대신 직속 정부 기관으로 제도부흥원이 설립되었다.[1] 초대 총재는 내무대신이었던 고토 신페이(전 철도원 총재, 도쿄 시장)가 겸임하였으며, 그의 측근과 참모들이 간부로 참여했다. 제도부흥원에는 총재 관방을 비롯하여 계획국, 토지 정리국, 토목국, 건축국, 경리국, 물자 공급국이 설치되었다. 내무성, 철도성 등 각 부처에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수도 부흥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다.[2]

그러나 부흥원이 입안한 제도 부흥 계획은 추밀원 고문관 이토 미요지와 같은 원로 정치가들과 당시 야당이었던 정우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원래 계획보다 대폭 축소되었다. 이러한 축소 배경에는 부흥원 내부의 노선 갈등도 영향을 미쳤다.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 건축국장 사노 토시키 등 적극적인 계획 추진을 주장하는 세력과, 예산 삭감을 우선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부총재 미야오 슌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등의 대립이 있었으나, 총재 고토 신페이는 양측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3]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12월 발생한 도라노몬 사건의 여파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 총재는 고토 신페이에서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되었다. 결국 제도부흥원은 1924년 2월 25일에 폐지되었다. 제도 부흥 사업은 내무성의 외국으로 신설된 '''부흥국'''으로 인계되었다. 부흥국은 이후 1930년(쇼와 5년) 4월 1일에 '''부흥 사무국'''으로 개편되었고, 이 사무국마저 1932년(쇼와 7년) 4월 1일에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2. 2. 제도부흥원 설립

내각총리대신 직속의 정부 기관으로 설립되었다.[1] 초대 총재는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전 철도원 총재, 도쿄 시장)가 겸임하였다. 조직으로는 총재 관방, 계획국, 토지 정리국, 토목국, 건축국, 경리국, 물자 공급국이 설치되었다.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제도(帝都) 부흥 사업을 추진하였다.[2]

3. 조직 및 구성

제도부흥원은 간토대지진 이후 제도(帝都) 부흥을 위해 설립된 내각총리대신 직속 기관이었다.[1] 내무대신을 겸임한 고토 신페이가 초대 총재를 맡았으며, 총재 관방을 비롯해 계획국, 토지 정리국, 토목국, 건축국, 경리국, 물자 공급국의 여러 부서로 구성되었다. 각 부서에는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차출된 기술자들이 배치되어 부흥 사업을 담당했다.[2]

그러나 부흥 계획의 방향을 둘러싸고 내부적으로 적극적인 추진을 주장하는 세력과 예산 삭감 및 신속 처리를 우선시하는 세력 간의 대립이 존재했다.[3] 이러한 갈등 속에서 1923년 도라노몬 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총재가 교체되었고, 결국 제도부흥원은 1924년 2월에 폐지되어 그 기능은 내무성 산하 부흥국으로 이관되었다.

3. 1. 조직

제도부흥원은 내각총리대신 직속의 정부 기관으로 설립되었다.[1] 초대 총재는 내무대신이자 전 철도원 총재 및 도쿄 시장이었던 고토 신페이가 겸임했다.

조직은 총재 관방, 계획국, 토지 정리국, 토목국, 건축국, 경리국, 물자 공급국의 7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각 부서에는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차출된 유능한 기술자들이 배치되어 제도(帝都) 부흥 사업을 담당했다.[2] 간부 진용은 총재 고토 신페이의 측근과 참모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부흥원 내부에서는 부흥 계획을 둘러싸고 노선 대립이 발생했다.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 건축국장 사노 토시키 등 적극파와, 예산 삭감을 주장하며 신속한 처리를 우선시한 부총재 미야오 슌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등 소극파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총재 고토는 이를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3]

1923년 12월 도라노몬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 총재는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되었다. 결국 제도부흥원은 1924년 2월 25일에 폐지되었고, 부흥 사업은 내무성 산하의 외국으로 설치된 부흥국에 인계되었다.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 부흥 사무국으로 개편되었고, 이 사무국도 1932년 4월 1일에 최종 폐지되었다.

3. 2. 주요 간부

초대 총재는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가 겸임했으며, 그는 전 대만총독부 민정장관, 전 철도원 총재, 전 도쿄 시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간부진은 고토의 측근과 브레인들로 구성되었으며,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제도(帝都) 부흥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다.[1][2]

주요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주요 경력 및 비고
총재고토 신페이미즈노 렌타로내무대신 겸임. 고토는 전 대만총독부 민정장관, 전 철도원 총재, 전 도쿄 시장. 미즈노는 도라노몬 사건 이후 교체됨.
부총재미야오 슌지홋카이도청 장관, 전 대만총독부 관료. 토지정리국장 겸임. 소극파로 분류됨.[3]
부총재마쓰키 간이치로도쿄 시정조사회 전무이사, 전 철도원 관료, 전 대만전력 사장. 물자공급국장 겸임. 적극파로 분류됨.[3]
기술감나오키 린타로오사카시 항만부장·도시계획부장, 전 도쿄시 토목과장. 토목국장 겸임.
이사·계획국장이케다 히로내무성 사회국 국장, 전 도쿄시 부시장. 소극파로 분류됨.[3]
이사·건축국장사노 도시카타도쿄 제국대학 교수. 적극파로 분류됨.[3]
이사·토목국장나오키 린타로 (겸임) → 오타 엔조오타 엔조는 철도성 관료, 기노시타 모쿠타로의 형.
이사·토지정리국장미야오 슌지 (겸임) → 이나바 겐노스케이나바 겐노스케는 홋카이도청 토목부장.
물자공급국장마쓰키 간이치로 (겸임)부총재 겸임.
경리국장소고 신지철도성 관료, 훗날 국철 총재.
총재관방장관가나이 기요시철도성 관료, 훗날 스와 시장.



그러나 부흥원 내부는 적극적인 사업 추진을 주장하는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 건축국장 사노 도시카타 등과, 예산 삭감을 주장하며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부총재 미야오 슌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등 사이에 노선 대립이 있었다.[3] 총재인 고토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3] 1923년 12월 도라노몬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자, 총재는 미즈노 렌타로 내무대신으로 교체되었다.

4. 주요 사업 및 활동

제도부흥원의 핵심적인 활동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수도 도쿄의 복구를 위한 '제도 부흥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당시 내무대신을 겸임했던 총재 고토 신페이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으며,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차출된 우수한 인력들이 참여했다.[2]

그러나 야심 차게 시작된 부흥 계획은 당시 원로 정치인들과 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부흥원 내부에서도 노선 갈등이 발생하는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여 원래 계획보다 상당히 축소되었다.[3] 결국 1923년 12월 발생한 도라노몬 사건의 정치적 여파로[3] 1924년 2월 25일 제도부흥원은 설립된 지 약 5개월 만에 폐지되었으며, 진행 중이던 부흥 사업은 내무성 산하의 부흥국으로 넘겨졌다.

4. 1. 제도부흥계획

제도부흥원은 간토 대지진 이후 수도 도쿄의 부흥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고토 신페이가 총재를 겸임하며 계획을 주도했으며,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모인 유능한 기술자들이 사업에 참여했다.[2]

그러나 부흥원이 입안한 제도 부흥 계획은 추밀원 고문관 이토 미요지 등 원로 정치가와 야당입헌정우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원래 계획보다 대폭 축소되었다. 이러한 축소 배경에는 부흥원 내부의 노선 갈등도 영향을 미쳤다.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 건축국장 사노 토시키 등 적극적인 계획 추진을 주장하는 측과, 예산 삭감을 우선시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부총재 미야오 슌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등의 대립이 있었으며, 총재인 고토 신페이는 이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3]

결국 1923년 12월 발생한 도라노몬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 상황은 더욱 변했다. 고토 신페이가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미즈노 렌타로가 후임 총재가 되었으며, 1924년 2월 25일 제도부흥원은 폐지되었다. 제도 부흥 사업은 이후 내무성 산하의 부흥국으로 이관되었다.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 부흥사무국으로 개편되었고, 이 사무국마저 1932년 4월 1일에 폐지되면서 부흥 사업은 마무리되었다.

4. 2. 정치적 갈등과 사업 축소

제도부흥원이 입안한 제도 부흥 계획은 추밀원 고문관이었던 이토 미요지와 같은 원로 정치가들과 야당입헌정우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원래 계획보다 대폭 축소되었다.[3]

이러한 외부의 반대뿐만 아니라, 제도부흥원 내부에서도 노선 갈등이 있었다.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와 건축국장 사노 토시키 등은 적극적인 부흥 사업 추진을 주장했지만, 또 다른 부총재 미야오 슌지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등은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며 예산 삭감을 요구했다. 총재였던 고토 신페이는 이러한 내부 대립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3]

결정적으로 1923년 12월에 발생한 도라노몬 사건으로 인해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급변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총재는 고토 신페이에서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되었고, 결국 1924년 2월 25일 제도부흥원은 폐지되었다. 제도 부흥 사업은 내무성 산하의 부흥국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에 부흥사무국으로 개편되었으며, 이 부흥사무국마저 1932년 4월 1일에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4. 3. 도라노몬 사건과 총재 교체

1923년 12월에 발생한 도라노몬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3], 제도부흥원 총재는 고토 신페이에서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되었다. 이후 1924년 2월 25일에 제도부흥원은 폐지되었고, 제도 부흥 사업은 내무성의 외국(外局)으로 설치된 '''부흥국'''에 인계되었다.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에 '''부흥 사무국'''으로 개편되었으며, 1932년 4월 1일에 부흥 사무국도 폐지되었다.

5. 해체 및 이후

부흥원이 입안한 제도 부흥 계획은 추밀원 고문관 이토 미요지 등 원로 정치가와 야당 입헌정우회의 반발로 인해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1923년 도라노몬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총재가 고토 신페이에서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결국 제도부흥원은 1924년 2월 25일에 폐지되었고, 진행 중이던 부흥 사업은 내무성 산하 부흥국으로 이관되었다.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 부흥사무국으로 개편되었으며, 1932년 4월 1일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5. 1. 제도부흥원 폐지

부흥원이 입안한 제도 부흥 계획은 추밀 고문관 이토 미요지 등 원로 정치가와 야당 정우회의 반발로 인해 대폭 축소되었다.[3] 또한 부흥원 내부에서 적극적인 계획 추진을 주장하는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 건축국장 사노 토시키 등과, 예산 삭감을 주장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부총재 미야오 슌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등 사이에 노선 대립이 발생했으나, 총재 고토 신페이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3]

1923년 12월에 발생한 도라노몬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총재는 고토에서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되었다. 결국 1924년 2월 25일에 제도부흥원은 폐지되었다. 제도 부흥 사업은 내무성의 외국으로 설치된 '''부흥국'''으로 인계되었다. 이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에 '''부흥 사무국'''으로 개편되었으며, 1932년 4월 1일에 부흥 사무국도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5. 2. 부흥국 및 부흥사무국

1924년 2월 25일 제도부흥원이 폐지되면서, 제도부흥사업은 내무성의 외국(外局)으로 설치된 부흥국에 인계되었다. 부흥국은 1930년 4월 1일부흥사무국으로 개편되었으며, 이 부흥사무국 역시 1932년 4월 1일에 폐지되었다.

6. 평가

제도부흥원은 관동 대지진 이후 파괴된 제도(帝都)의 부흥을 목표로 설립된 내각총리대신 직속 정부 기관이었다.[1] 총재는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가 겸임했으며, 내무성, 철도성 등에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일본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도시 재건 사업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2]

그러나 부흥원이 입안한 제도 부흥 계획은 여러 정치적 요인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초기 구상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결국 대폭 축소되는 한계를 보였다. 당시 추밀 고문관이었던 이토 미요지 등 원로 정치가들과 야당인 정우회는 부흥 계획에 강하게 반발했다.[3] 또한 부흥원 내부에서도 적극적인 사업 추진을 주장한 부총재 마쓰키 간이치로, 건축국장 사노 토시키 등과 예산 삭감을 우선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부총재 미야오 슌지, 계획국장 이케다 히로 사이에 노선 대립이 발생했다. 총재였던 고토 신페이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3]

결정적으로 1923년 12월 발생한 호랑이 문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총사퇴하면서 정치적 기반마저 흔들렸다. 결국 총재가 미즈노 렌타로로 교체된 후, 제도부흥원은 설립된 지 약 5개월 만인 1924년 2월 25일에 폐지되었다. 제도 부흥 사업 자체는 내무성 산하의 부흥국으로 이관되었으나, 이 기구 역시 이후 부흥 사무국으로 개편되었다가 1932년에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이는 당초 거대했던 부흥 계획이 정치적 갈등과 예산 문제 등으로 인해 점차 축소되고 단명했음을 보여준다.

참조

[1] 웹사이트 帝都復興院とは https://kotobank.jp/[...] 2020-11-22
[2] 웹사이트 帝都復興院 https://kotobank.jp/[...]
[3] 서적 後藤新平をめぐる権力構造の研究 南窓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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