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가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이 가너는 미국 육군 중장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 독일 주둔 방공 부대 지휘,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 개발 참여 등의 경력을 거쳤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 내 쿠르드족 지역의 안보를 담당했으며, 1997년 퇴역 후 방위 산업체 사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이라크 전후 재건 노력을 이끌었으나, 90일 이내 조기 선거를 통한 이라크 주도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2003년 5월 L. 폴 브레머로 교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플로리다주의 정치인 - 앨시 헤이스팅스
앨시 헤이스팅스는 미국의 정치인이자 법조인으로, 플로리다주 최초의 흑인 연방 판사였으나 탄핵 후 미국 하원 의원을 역임하며 민주당 원내 부대표 등을 지냈고, 두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총기 규제 강화와 진보적 외교 정책을 옹호했다. - 미국 육군 중장 - 로버트 싱크
로버트 싱크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군인으로, 제506 공수보병연대장으로서 주요 작전을 지휘했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과 미디어 묘사가 존재한다. - 미국 육군 중장 - 레슬리 그로브스
레슬리 그로브스는 미국의 육군 중장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펜타곤 건설을 지휘하고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를 맡아 원자 폭탄 개발을 총괄했다.
제이 가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직책 | |
직책 | 이라크 이라크 재건 및 인도 지원실 실장 |
대통령 | 조지 W. 부시 |
임기 시작 | 2003년 4월 21일 |
임기 종료 | 2003년 5월 12일 |
전임 |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
후임 | 폴 브레머 (연합 과도 행정처 행정관)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938년 4월 15일 |
출생지 | 미국, 플로리다주, 아카디아 |
정당 | 민주당 |
학력 |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문학사) 쉬펜스버그 대학교 (행정학 석사) |
군 복무 정보 | |
소속 | 미국 육군 |
복무 기간 | 1962년 – 1997년 |
계급 | 중장 |
지휘 | 미국 육군 우주 미사일 방어 사령부 합동 태스크 포스 브라보 제108 여단, 제32 포병 사령부 |
참전 |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
훈장 | 육군 공로 훈장 (2회) 국방 공로 훈장 (2회) 공로 훈장 (5회) 동성 훈장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플로리다주 아케이디아에서 태어났다. 미국 해병대에서 복무한 후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에 진학하여 1962년에 역사학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십펜스버그 주립 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 미국 육군 소위로 임관한 가너는 베트남 전쟁에 두 차례 참전하는 등 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독일에서 두 개의 방공 부대를 지휘했으며,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에서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 개발 지원, 걸프 전쟁 참전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1997년 중장으로 퇴역했다.
3. 군 경력
3. 1. 주요 군사 작전 참여
가너는 베트남 전쟁에 두 차례 참전했으며, 이후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 개발에 기여했다. 걸프 전쟁 중에는 미사일 포대를 직접 지휘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거주 지역의 안보 유지 임무를 맡았다. 이후 미국 육군 우주 및 전략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전략 방위 구상(SDI)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97년 중장 계급으로 미국 육군에서 퇴역하며 군 경력을 마쳤다.
4. 이라크 전쟁 개입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혼란에 빠진 이라크의 전후 재건을 이끌 이라크 민정청장으로 제이 가너를 임명했다. 가너는 과거 북부 이라크에서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3] 당시 바그다드 함락 이후 이라크 전역은 약탈과 무질서 상태였으며, 국가 기반 시설과 행정 체계가 마비된 상황이었다.[4]
가너는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90일 이내에 선거를 실시하고 미국 군대를 신속히 철수시키는 것을 목표로 재건 계획을 추진했다.[6] 이를 위해 2003년 4월, 나시리야와 바그다드에서 이라크 지도자들과 회의를 열어 국가의 미래를 논의하고 새로운 정부 구성원을 선정했다.[3][7]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라크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충분히 대표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지도자 선정이 비민주적이라는 논란이 일었다.[7]
결국 가너는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3년 5월 11일, 폴 브레머로 갑작스럽게 교체되었다. 가너의 교체 배경에는 이라크 재건 방향을 둘러싼 백악관과의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너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 자원을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조기 선거를 주장했지만,[8] 이는 이라크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려던 부시 행정부의 입장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가너는 "나는 [이라크인]이 미국 계획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유롭게 선출된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이라크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나라이고... 그들의 석유이다."라고 말하며 이라크의 자결권을 강조했다.[8] 일부 전문가들은 가너가 경제 재건보다 선거를 우선시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9]
이후 가너는 2007년 이라크 점령 초기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노 엔드 인 사이트''에 출연하여 인터뷰했다.
4. 1. 이라크 민정청장 임명 배경
2003년, 제이 가너는 이라크 전후 재건 노력을 이끌 적임자로 선정되었으며, 영국 준장 팀 크로스를 포함한 3명의 부관이 배정되었다. 가너는 북부에서 이전에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여겨졌다. 가너 장군은 사담 후세인이 축출된 후 이라크인들이 통치 체제를 개발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계획을 개발하고 실행할 예정이었다.[3]바그다드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이 패배한 후, 이라크 전역에서 광범위한 약탈, 난동, 그리고 일반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이라크 국립 박물관과 같은 가장 중요한 기념물 중 일부가 공격을 받았다.[3] 게다가 국가의 기반 시설은 엉망이 되었고, 부처는 붕괴되었으며, 정부 기록은 파괴되었다. 이라크 상황은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4] 점령군에 의해 보호받은 유일한 부처는 이라크 석유부였다. 또한, 이란에서 망명한 많은 지도자들과 서방에서 온 일부 인사들이 이라크로 돌아왔다.[5] 부시 행정부는 이 지역을 휩쓴 혼란과 무정부 상태를 없애기 위해 연합 임시 행정처 (과도 정부)를 이끌 인물로 미국 육군 중장 제이 가너를 선택했다. 가너의 계획은 이전 이라크 정권에서 정부 관리를 선택하여 국가를 이끌도록 돕는 것이었다.[6]
4. 2. 이라크 재건 계획 및 활동
2003년, 제이 가너는 이라크 전후 재건 노력을 이끌 적임자로 선정되었으며, 영국 준장 팀 크로스를 포함한 3명의 부관이 배정되었다. 가너는 북부에서 이전에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여겨졌다. 가너 장군은 사담 후세인이 축출된 후 이라크인들이 통치 체제를 개발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계획을 개발하고 실행할 예정이었다.[3]바그다드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이 패배한 후, 이라크 전역에서 광범위한 약탈, 난동, 그리고 일반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이라크 국립 박물관과 같은 가장 중요한 기념물 중 일부가 공격을 받았다.[3] 게다가 국가의 기반 시설은 엉망이 되었고, 부처는 붕괴되었으며, 정부 기록은 파괴되었다. 이라크 상황은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4] 점령군에 의해 보호받은 유일한 부처는 이라크 석유부였다. 또한, 이란에서 망명한 많은 지도자들과 서방에서 온 일부 인사들이 이라크로 돌아왔다.[5] 부시 행정부는 이 지역을 휩쓴 혼란과 무정부 상태를 없애기 위해 연합 임시 행정처 (과도 정부)를 이끌 인물로 미국 육군 중장 제이 가너를 선택했다. 가너의 계획은 이전 이라크 정권에서 정부 관리를 선택하여 국가를 이끌도록 돕는 것이었다.[6]
가너는 2003년 3월부터 이라크인들이 90일 이내에 선거를 치르고 미국이 도시에서 사막 기지로 신속하게 군대를 철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계획으로 재건 노력을 시작했다. 전쟁 전 쿠웨이트에서 제이 가너의 참모였던 잘랄 탈라바니는 미국이 자유주의적인 이라크 정부를 선택하도록 돕기 위해 여러 차례 자문되었으며, 이는 이라크에서 최초로 존재하게 될 자유주의 정부가 될 것이다.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가너는 "모든 전체주의 정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해 바트당에 가입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 대부분에게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담 치하에서 폭력 기구의 일부였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 미국이 두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파악하면, 그들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6] 2003년 4월 15일, 가너 장군은 나시리야 시에서 회의를 열어 100명의 이라크인과 함께 이라크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가너는 2003년 4월 28일에 후속 회의를 소집했다.[3] 이 회의에는 250명의 이라크인이 참석했으며, 이 중 5명이 가너 행정부에 의해 새로운 이라크 정부의 핵심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인물 | 소속 정당/세력 (선정 당시) |
---|---|
마수드 바르자니 | 쿠르드 민주당 대표 |
잘랄 탈라바니 | 라이벌 쿠르디스탄 애국 동맹 대표 |
압둘 아지즈 알 하킴 | 이라크 이슬람 혁명 최고 의회 대표 |
아흐마드 찰라비 | 이라크 국민 회의 대표 |
아야드 알라위 | 이라크 국민 협약 대표 |
가너의 선택은 많은 이라크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이라크인들이 가너와 미국이 이라크에 가져오는 변화에 열린 마음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분개했다. 시아파 배경을 가진 이라크인들은 가너의 정부 인선에서 과소 대표되었다고 느꼈다.[7] 이라크 새 정부의 핵심 구성원으로 임명된 5명 중 3명은 수니파 배경을, 1명은 수니파-시아파 혼합 배경을, 1명만이 순수한 시아파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시아파는 이라크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고려할 때 소외되고 과소 대표된다고 느꼈다.[7] 또한 많은 이라크인들은 미국이 약속한 대로 이 새로운 정부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선택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지도자들이 선정된 후, 이라크에서 구성원을 선출할 선거를 실시하는 계획이 2003년 5월 6일에 시작되어 2003년 11월 14일에 중단되었다.[4] 가너 장군은 이라크 주재 새로운 미국 대사 폴 브레머로 교체되었으며, 그는 연합 임시 행정처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 가너의 해임 이후, 2004년 6월에 이라크 정부가 권력을 잡을 계획이었다. 아야드 알라위는 이라크 과도 정부를 이끌 인물로 지명되었다. 알라위는 시아파 출신의 전 바트당원이었다. 알라위는 CIA와의 이전 업무 경험을 포함하여 많은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3]
가너가 2003년 5월 11일에 폴 브레머로 교체되었을 때, 그가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교체되었는지에 대한 추측이 많았다. 가너가 이라크를 어떻게 재건할지 결정해야 하는 사람에 대해 백악관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물러났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는 바그다드 함락 후 90일 이내에 조기 선거를 치르고, 새로운 정부가 국가를 운영하고 자산을 처리하는 방법을 결정하기를 원했다. 가너는 "나는 [이라크인]이 미국 계획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유롭게 선출된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이라크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나라이고... 그들의 석유이다."라고 말했다.[8] 일부 전문가들은 이라크 경제를 개선하고 민영화하는 것보다 선거를 우선시한 가너를 비난했다.[9]
가너는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인 ''노 엔드 인 사이트''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이 영화는 이라크 점령 처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4. 3. 폴 브레머로의 교체
제이 가너는 2003년 3월부터 이라크 재건 노력을 이끌었으며, 바그다드 함락 후 90일 이내에 선거를 치르고 미국 군대를 신속히 철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6] 이를 위해 4월 15일 나시리야에서 100명의 이라크인과, 4월 28일 바그다드에서 250명의 이라크인과 만나 국가의 미래를 논의했다.[3] 이 과정에서 마수드 바르자니, 잘랄 탈라바니, 압둘 아지즈 알 하킴, 아흐마드 찰라비, 아야드 알라위 등 5명을 새로운 이라크 정부의 핵심 지도자로 선정했다.[7]그러나 이 인선은 이라크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이라크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시아파는 자신들의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선정된 5명 중 순수한 시아파 배경은 1명뿐이었기 때문이다.[7] 또한, 지도자 선정이 민주주의적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3년 5월 11일, 가너는 갑작스럽게 폴 브레머로 교체되었다.[8] 교체 배경에는 여러 추측이 있었는데,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는 백악관과의 정책적 견해 차이가 거론되었다. 가너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 자원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기 선거 실시를 원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다.[6][8] 가너는 "나는 [이라크인]이 미국 계획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유롭게 선출된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이라크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나라이고... 그들의 석유이다."라고 말하며 이라크의 자결권을 강조했다.[8]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전문가들이 가너가 이라크 경제 개선이나 민영화보다 선거를 지나치게 우선시했다고 비판한 점도 교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9]
가너의 해임 이후 브레머가 연합 임시 행정처의 수장을 맡았고, 2004년 6월에는 아야드 알라위를 수반으로 하는 이라크 과도 정부가 출범했다. 알라위는 시아파 출신이지만 전 바트당원이었으며, CIA와 협력한 경력이 있었다.[3] 가너는 훗날 이라크 점령 초기 과정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노 엔드 인 사이트'' (2007)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인터뷰했다.
5. 이라크 전쟁 이후
2003년, 미국 육군 중장 제이 가너는 이라크의 전후 재건 및 안정화 노력을 이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과거 북부 이라크에서 유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이 있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게 적임자로 평가받았다.[3] 그의 임무는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국가를 재건하도록 지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3]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서는 광범위한 약탈과 폭동,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이라크 국립 박물관과 같은 중요 문화유산이 파괴되고,[3] 국가 기반 시설은 마비되었으며 정부 기록마저 소실되었다. 국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4] 점령군은 이라크 석유부 건물만은 보호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란 등지에서 망명했던 지도자들과 서방 인사들이 이라크로 귀환하기 시작했다.[5]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 혼란을 수습하고 과도 정부인 연합 임시 행정처(CPA)를 이끌도록 가너를 임명했으며, 가너는 이전 이라크 정권 관료 중 일부를 선별하여 국가 운영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6]
가너는 2003년 3월부터 재건 계획을 추진하며, 90일 이내 선거 실시와 미국 군대의 신속한 철수를 목표로 삼았다.[6] 전쟁 전 쿠웨이트에서 가너의 참모였던 잘랄 탈라바니는 미국이 이라크에 자유주의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문 역할을 했다.[6] 가너는 타임지 인터뷰에서 바트당 가입 경력자 중 사담 정권의 폭력 기구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은 포용하되, 폭력에 가담한 자들은 식별하여 제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6] 2003년 4월 15일, 가너는 나시리야에서 100여 명의 이라크인과 회의를 가졌고, 4월 28일에는 250명이 참석한 후속 회의를 열었다.[3] 이 회의를 통해 가너 행정부는 새 이라크 정부의 핵심 지도자로 5명을 선정했다: 마수드 바르자니(쿠르드 민주당), 잘랄 탈라바니(쿠르디스탄 애국 동맹), 압둘 아지즈 알 하킴(이라크 이슬람 혁명 최고 의회), 아흐마드 찰라비(이라크 국민 회의), 아야드 알라위(이라크 국민 협약).
그러나 이 지도부 구성은 많은 이라크인, 특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5명의 지도자 중 순수 시아파 배경은 1명뿐이었고, 3명은 수니파, 1명은 수니-시아 혼합 배경이었기 때문에 시아파는 소외감을 느꼈다.[7] 또한, 미국이 약속했던 민주주의적 절차 없이 지도부가 선정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7]
지도자 선정 후 정부 구성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계획은 2003년 5월 6일 시작되었으나 11월 14일에 중단되었다.[4] 2003년 5월 11일, 가너는 갑작스럽게 폴 브레머로 교체되었고, 브레머가 연합 임시 행정처 수장을 맡았다. 가너의 갑작스러운 해임 배경에는 이라크 재건 방향, 특히 조기 선거 실시와 이라크인의 자결권 존중 문제에 대한 백악관과의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너는 바그다드 함락 후 90일 내 선거를 치르고 새 정부가 국가 운영과 자원 관리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는 [이라크인]이 미국 계획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나라이고... 그들의 석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8]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가너가 이라크 경제 개선과 민영화보다 선거를 우선시한 점을 비판했다.[9] 가너의 해임 이후, 2004년 6월 이라크 정부로의 권력 이양이 계획되었고, 아야드 알라위가 과도 정부 수반으로 지명되었다. 알라위는 시아파 출신의 전 바트당원이자 CIA와 협력한 경력이 있었다.[3]
이후 가너는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 ''노 엔드 인 사이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라크 점령 초기 대응 방식에 대해 강한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참조
[1]
웹사이트
Jay Garner: The US general waiting to replace Saddam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22-07-21
[2]
웹사이트
US arms trader to run Iraq
http://www.observer.[...]
2003-03-30
[3]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Middle East
Westview Press
2006
[4]
서적
Understanding the Contemporary: Middle East
Lynne Rienner Publishers, Inc.
2008
[5]
서적
Strategic Interests in the Middle East: Opposition or Support for US Foreign Policy
Ashgate Publishing Company
2007
[6]
뉴스
Sorting The Bad From The Not So Bad
Time
2003-05-19
[7]
뉴스
Iraq: Entering a new epoch
Middle East
2003-06
[8]
웹사이트
Unreported: The Zarqawi Invitation
http://www.zmag.org/[...]
2006-06-10
[9]
웹사이트
How Bush's Iraqi Oil Grab Went Awry
https://www.thenatio[...]
The Nation
2007-09-2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