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애버크롬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군인으로, 1734년부터 1754년까지 밴프셔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7년 전쟁 중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했으나, 타이컨더로가 요새 전투에서 패배하여 해임되었다. 애버크롬비는 조직 능력은 뛰어났지만, 지휘력 부족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미국 식민지에 대한 강경 정책을 지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코틀랜드의 장군 - 제1대 헤이그 백작 더글러스 헤이그
더글러스 헤이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솜 전투와 파스샹달 전투를 지휘하며 논란을 겪었지만, 종전까지 영국군을 이끌고 연합군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후에는 전역 군인 복지에 헌신한 영국의 군인이다. - 영국 육군 장성 - 조지 프레보스트
조지 프레보스트는 1767년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서인도 제도와 캐나다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고, 미영 전쟁 중 플래츠버그 전투 패배로 해임된 후 사망했다. - 영국 육군 장성 - J. F. C. 풀러
J. F. C. 풀러는 전차 중심 기계화 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전격전 이론에 영향을 주고 캉브레 전투에서 전차 부대를 주력으로 한 공세 작전을 계획한 영국의 군인이자 군사 이론가, 역사가, 오컬트 작가이다. - 1781년 사망 - 투팍 아마루 2세
투팍 아마루 2세는 페루 부왕령의 카시케로서 스페인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그의 반란은 페루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페루 사회와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 1781년 사망 - 홍국영
홍국영은 조선 후기 정조 시대에 정조의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원빈 홍씨의 죽음과 효의왕후와의 갈등으로 몰락한 풍산 홍씨 출신의 인물이다.
제임스 애버크롬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706년 |
출생지 | 스코틀랜드 밴프셔 글래스오 |
사망 | 1781년 4월 23일 |
사망지 | 스코틀랜드 스털링셔 스털링 |
소속 | 영국 육군 |
군 복무 | |
복무 기간 | 1717년–1772년 |
최종 계급 | 대장 |
참전 전투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티콘데로가 요새 전투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스코틀랜드 밴프셔 글라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742년 소령 계급으로 군에 입대했다.[3] 1746년 대령, 1756년 소장으로 진급했다.[7]
1734년 영국 총선에서 밴프셔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4] 1739년에는 스털링 성의 부지사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플랑드르 전역에서 복무했으며, 1746년 로리앙 습격 당시 제임스 세인트 클레어 장군 휘하의 군수참모총장이었고, 1747년 헐스트에서 부상을 입었다.[1]
7년 전쟁 발발과 함께 1756년 소장으로 진급,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로던 경의 부사령관으로 북아메리카에 파견되었다.[1] 1757년 루이부르 요새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했고, 1758년 3월에는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타이컨더로가 요새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고 1759년 영국으로 소환되었다.[7]
2. 1. 출생 및 가문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스코틀랜드 밴프셔주 글라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3] 그는 알렉산더 애버크롬비와 그의 아내 헬렌 멜드럼의 장남이었다. 11세의 나이에 제25 보병 연대의 기수로 임명되었으며, 윌리엄 더프, 초대 파이프 백작의 여동생인 메리 더프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4]2. 2. 초기 군 경력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스코틀랜드 밴프셔주 글라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3] 1742년 소령 계급으로 육군에 입대했으며, 1746년에는 대령, 1756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7]1757년 루이스버그 요새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했으며, 1758년 3월 존 캠벨의 사임 후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7]
1758년 여름,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공격했다. 애버크롬비는 조직 관리 능력은 뛰어났지만, 리더십은 부족하여 부하 군인들에게 '크롬비 아줌마(Mrs. Nanny Cromby)'라고 불렸다.[7] 그는 15,000명의 부대를 편성하고 보급 물자와 함께 광야를 이동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으나, 7월 8일 2,000명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7] 이는 대포와 3,000명의 병사로 보호되는 돌 요새는 15,000명이 정면으로 총검 돌격을 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었다.[7] 애버크롬비 부대는 당황하여 조지 호 남쪽의 견고한 기지까지 패주했다. 이 참패로 애버크롬비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759년 영국으로 소환되었다.[7] 귀환 후 하원의원이 되어 미국 식민지에 대한 강경책을 추진했다.
2. 3. 정치 경력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1734년 영국 총선에서 매형이자 훗날 브라코 경이 된 윌리엄 더프의 지지로 밴프셔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정부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4] 1741년 영국 총선에서는 밴프의 국회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747년 영국 총선에서는 구 휘그당 소속으로 밴프에서 무투표 당선되었다. 1754년 영국 총선에서는 브라코 경의 아들이 성년이 되자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3. 군사 경력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1742년에 소령 계급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1746년에는 대령, 1756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1] 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참전했다.
3. 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애버크롬비는 174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플랑드르 전역에서 복무했다.[1] 1746년 로리앙 습격 당시 제임스 세인트 클레어 장군 휘하의 군수참모총장이었으며, 1747년 헐스트에서 부상을 입었다.[1]3. 2. 7년 전쟁 (프랑스-인디언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애버크롬비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로던 경의 부사령관으로 북아메리카에 파견되었다.[1]3. 2. 1. 북아메리카 총사령관
1757년 루이부르 요새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했으며, 1758년 3월 존 캠벨의 사임 이후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1]그해 여름, 그는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공격했다. 애버크롬비는 조직을 정리하는 재능은 있었지만, 리더십에 관해서는 결단력이 부족하여, 부하 군인에게 ‘크롬비 아줌마(Mrs. Nanny Cromby)’라고 불렸다.[5] 그는 15,000명의 부대를 편성하고 보급 물자와 함께 광야를 이동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으나, 7월 8일에는 그중 2,000명이 사상당했다. 그것은 대포와 3,000명의 병사로 보호된 돌 요새는 15,000명의 병사가 정면에서 총검으로 돌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애버크롬비 부대는 당황했고, 조지 호 남쪽에 있는 견고한 기지까지 패주했다.[5] 이 참패로 애버크롬비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759년에 영국으로 소환되었다.[6] 귀환 후 하원 의원이 되어 미국 식민지에 강경책을 추진했다.
3. 2. 2. 타이컨더로가 요새 전투
1757년 여름, 애버크롬비는 몬트리올 점령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카리용 요새(후에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알려짐)에 대한 원정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다.[1] 애버크롬비는 조직에는 뛰어났지만, 지휘력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하여 패배 후 "낸시 크롬비 부인"이라고 불렸다. 그는 뉴욕주 포트 에드워드에 1만 5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그들과 보급품을 광야를 통해 이동시키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정찰 중 1757년 7월 7일 부사령관 조지 하우, 제3대 하우 자작을 잃은 후, 1758년 8월 8일 포병 지원 없이 요새화된 프랑스 진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2천 명이 넘는 병사가 죽거나 부상을 입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그의 부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했고, 그는 뉴욕주 조지 호수 남쪽에 있는 요새화된 캠프로 후퇴했다.[5]이 참사로 인해 1758년 9월 애버크롬비는 영국으로 소환되었고,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으로 교체되었다.[6]
3. 2. 3. 해임
1758년 타이컨더로가 요새 전투에서 2,000명이 넘는 병력을 잃는 참패를 겪은 후,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으로 교체되었고, 1759년에 영국으로 소환되었다.[6] 그는 조직력은 뛰어났지만, 리더십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아 부하들로부터 '크롬비 아줌마(Mrs. Nanny Cromb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5]4. 영국 귀환 및 말년
1758년 타이컨더로가 요새 전투의 참패로 애버크롬비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으로 교체되었고, 1759년에 잉글랜드로 소환되었다.[6] 귀환 후 하원 의원이 되어 미국 식민지에 대한 강경 정책을 추진했다.
5. 평가
제임스 애버크롬비는 조직을 관리하는 재능은 있었지만, 리더십에 관해서는 결단력이 부족하여 부하 군인들에게 '크롬비 아줌마(Mrs. Nanny Cromby)'라고 불렸다.[3] 그는 15,000명의 부대를 편성하고 보급 물자와 함께 광야를 이동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으나, 1758년 7월 8일 타이컨더로가 요새 공격에서 2,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참패를 겪었다. 이 전투는 대포와 3,000명의 병사로 보호된 돌 요새는 15,000명의 병사가 정면에서 총검으로 돌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었다.[3] 애버크롬비 부대는 당황했고, 조지 호수 남쪽에 있는 견고한 기지까지 패주했다.[3] 이 참패로 애버크롬비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759년 영국으로 소환되었다.[3]
참조
[1]
encyclopedia
Abercrombie, James
https://archive.org/[...]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
문서
There is discrepancy on his exact date of death with sources vacillating between 23 and 28 April
[3]
서적
Who Was Who in America, Historical Volume, 1607-1896
Marquis Who's Who
[4]
웹사이트
ABERCROMBY, James (1706-81), of Glasshaugh, Banff.
http://www.historyof[...]
History of Parliament Online
2019-02-12
[5]
문서
Montcalm and Wolfe
[6]
간행물
Abercromby, James
http://www.biographi[...]
[7]
서적
Who Was Who in America, Historical Volume, 1607-1896
Marquis Who's Who
196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