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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J. 코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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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J. 코빗은 186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젠틀맨 짐 코빗"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미국의 권투 선수이다. 그는 "현대 복싱의 아버지"로 불리며, 1892년 존 L. 설리번을 KO로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1897년 밥 피츠시먼스에게 타이틀을 잃었으며, 이후 제임스 J. 제프리스와의 경기에서 패배하며 은퇴했다. 은퇴 후 연기 활동을 하였으며, 1933년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90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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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J. 코빗
기본 정보
본명제임스 존 코벳
별칭젠틀맨 짐
체급헤비급
신장185 cm
리치185 cm
국적미국
출생일1866년 9월 1일
출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사망일1933년 2월 18일 (향년 66세)
사망지미국, 뉴욕시, 퀸스, 베이사이드
스타일오소독스
통계
총 경기 수35
승리24
KO 승12
패배4
무승부3
무효 경기2
제임스 J. 코벳
제임스 J. 코벳 (1890년)

2. 생애 및 선수 경력

1866년 9월 1일, 캘리포니아 주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복서로 전향했다. 1892년 9월 7일, 5온스 글러브를 사용하는 퀸즈베리 규칙에 의해 처음으로 치러진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존 L. 설리번과 싸워 21회 1분 30초 KO 승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21] 이 경기는 퀸즈베리 규칙이 제정되기 전의 베어너클(맨손) "런던 프라이즈 링 룰스" 시대의 챔피언이었던 설리번과 근대 복싱 기술을 구사한 코벳의 대결이었다. 3년간의 공백으로 술을 계속 마셔 배가 불룩해진 34세 약 96.62kg (약 96kg)의 설리번은 아웃복싱 스타일의 27세 약 80.74kg (약 80kg) 코벳에게 고전했다. 당시에는 왼손 과 풋워크를 구사하여 상대의 펀치를 피하는 코벳의 전법이 익숙하지 않아, '빅 존'이라고 불린 설리번은 농락당한 결과, 결국 코벳을 잡지 못하고 21회에 3번 다운을 빼앗겨 KO 당했다.[21] 그러나 당시 민중들은 이 코벳의 전법을 "비겁자의 전법"이라고 욕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21]

1897년 3월 17일, 네바다 주 카슨시티에서 밥 피시몬스에게 14회 KO 패배로 세계 챔피언 자리를 잃었다. 1933년 2월 18일,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베이사이드에 있는 자택에서, 코벳은 오후 2시 10분에 사망했다. 유나이티드 프레스는 코벳이 "심장병을 유발한 선 장애"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AP 통신은 코벳이 "간암과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2. 1. 초기 생애

그는 1866년 9월 1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1854년 아일랜드 메이요주 발린로브의 발리커신에서 이민 온 패트릭 코벳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계였다. 제임스 코벳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세이크리드 하트 대성당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 다양한 극장에서 공연하며 배우 경력을 쌓았으며, 권투 트레이너이기도 했다. 그의 형제인 조 코벳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가 되었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복서로 전향했다.

2. 2. 복싱 경력

언론으로부터 '''젠틀맨 짐 코빗'''(Gentleman Jim Corbett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과학적인 접근 방식과 기술 혁신을 통해 "현대 복싱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3]

  • 1892년 9월 7일, 5온스 글러브를 사용하는 퀸즈베리 규칙에 의해 처음으로 치러진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존 L. 설리번을 21회 KO로 꺾고 챔피언이 되었다.
  • 1897년 3월 17일, 네바다 주 카슨시티에서 밥 피시몬스에게 14회 KO패하며 세계 챔피언 자리를 잃었다.

2. 2. 1. 코벳-잭슨 경기 (1891)

1891년 5월 21일, 코빗은 "블랙 프린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피터 "블랙 프린스" 잭슨과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는 코빗과 잭슨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명망 있는 두 체육 클럽의 권투 강사였기 때문에 큰 기대를 모았다.[6][4] 경기는 61라운드까지 진행되었으나 무승부로 끝났다.[6][4]

이 경기로 코빗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고, 대중들은 그와 챔피언 존 L. 설리번과의 경기를 열렬히 원했다. 설리번은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고, 경기 날짜가 잡혔다.

2. 2. 2. 코벳-설리번 경기 (1892)

코벳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샌프란시스코 무대에서 설리번과 짧은 시범 경기를 치른 후 자신의 승산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다. 1892년 9월 7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올림픽 클럽에서 코벳은 21라운드에서 존 L. 설리번을 KO로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21] 코벳의 새로운 과학적인 복싱 기술은 설리번의 맹렬한 공격을 피하고 으로 지치게 만들 수 있게 했다.[21]

퀸즈베리 규칙에 의해 처음으로 치러진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존 L. 설리번과 싸워 21회 1분 30초 KO 승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21] 퀸즈베리 규칙이 제정되기 전의 베어너클(맨손) "런던 프라이즈 링 룰스" 시대의 챔피언으로, 3년간의 공백으로 술을 계속 마신 결과 배가 불룩해진 34세 213파운드 (약 96kg)의 설리번과 근대 복싱의 기술을 구사한 27세 178파운드 (약 80kg)의 아웃복싱 스타일의 코벳의 경기에서, 당시에는 왼손 과 풋워크를 구사하여 상대의 펀치를 피하는 코벳의 전법은 익숙하지 않아, '''빅 존'''이라고 불린 설리번은 농락당한 결과, 결국 코벳을 잡지 못하고 21회에 3번의 다운을 빼앗겨 KO 당했다.[21] 그러나 당시 민중들은 이 코벳의 전법을 "비겁자의 전법"이라고 욕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21]

2. 2. 3. 챔피언 방어전

코벳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샌프란시스코 무대에서 설리번과 짧은 시범 경기를 치른 후 자신의 승산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다. 1892년 9월 7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올림픽 클럽에서 코벳은 21라운드에서 존 L. 설리번을 KO로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코벳의 새로운 과학적인 복싱 기술은 설리번의 맹렬한 공격을 피하고 잽으로 지치게 만들 수 있게 했다.

코벳은 오늘날의 의미로 "파이팅 챔피언"임을 증명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타이틀 방어를 매우 드물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복싱 위원회가 없었고, 스포츠 규제는 기껏해야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주에서 복싱은 불법이었으므로 경기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은 대체로 운에 맡기는 일이었다. 코벳은 자신의 타이틀을 소중히 여겼고, 타이틀을 자신의 두 가지 주요 수입원인 연극 공연과 복싱 시범을 위한 최고의 홍보 도구로 여겼다.

1894년 피터 코트니와의 복싱 경기


1894년 1월 25일에 있었던 유일한 타이틀 방어전에서 코벳은 3라운드 만에 영국의 찰리 미첼을 KO로 꺾었다.

제임스 코벳은 1894년에 아버지의 고향인 볼린로브로 돌아갔고, 그의 방문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볼린로브 타운 홀에서 열린 복싱 시범이었다. 이 행사의 입장료 수익금은 그의 삼촌인 제임스 코벳 신부가 당시 교구 사제였던 메이요주 파트리(현재는 파트리)의 교구 교회를 유지하는 데 기부되었다. 그는 또한 교회에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기증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올림픽 클럽에서 복싱을 가르쳤다.

1894년 9월 7일, 그는 최초로 기록된 복싱 이벤트 중 하나인 피터 코트니와의 경기에 참여했다. 이 경기는 웨스트 오렌지, 뉴저지의 블랙 마리아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으며, 윌리엄 K.L. 딕슨이 제작했다. 이는 두 번째로 기록된 복싱 경기였다.

2. 2. 4. 피츠시몬스-코벳 경기 (1897)

1897년 카슨시티, 네바다에서 코벳은 영국의 코니시 복서 밥 "루비 로버트" 피츠시먼스에게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잃었다. 코벳은 시합 대부분을 지배했고 6라운드에 피츠시먼스를 캔버스에 쓰러뜨렸다. 피츠시먼스는 회복했고 심하게 베였음에도 그 시점부터 반격했다. 피츠시먼스 부인이 "그의 옆구리를 쳐, 밥!"이라고 외쳤는데, 여기서 "옆구리"는 복부 부위를 의미하며,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 몸통 공격은 효과를 발휘했고 코벳은 상대를 능숙하게 아웃복싱했지만 링사이드 관중들은 챔피언의 기력이 쇠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피츠시먼스는 14라운드에 명치에 몸통 공격을 가해 코벳을 쓰러뜨렸고, 코벳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10초 안에 일어설 수 없었다.[8] 1시간 반 이상 지속된 이 경기는 그해 말 ''코벳-피츠시먼스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관에 개봉되었으며, 당시 역대 최장 길이의 영화였다.

타이틀을 잃은 것에 절망한 코벳은 피츠시먼스를 링으로 다시 유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는 피츠시먼스의 승리가 우연의 일치라고 확신했고, 그(코벳)가 과도하게 훈련하여 후반 라운드에 스태미나가 부족했다고 믿었다. 아마도 피츠시먼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코벳의 매니저 윌리엄 A. 브래디가 보장한 30000USD의 상금에도 불구하고 루비 로버트는 젠틀맨 짐과 다시 링에 오지 않았다. 피츠시먼스가 종종 공개적으로 그를 모욕했던 코벳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인 반감도 또 다른 싸움의 기회를 없앴을 수 있다.[9]

2. 2. 5. 제프리스-코벳 경기 (1900, 1903)

제프리스는 코빗과 함께 많은 훈련을 받았고, 현재는 코빗의 옛 매니저인 윌리엄 브레이디가 그를 관리했다. 제프리스가 피츠시몬스를 꺾은 후, 피츠시몬스 시대에 활동이 뜸했던 코빗은 새로운 챔피언과 자신과의 타이틀전을 제안했다. 브레이디는 코빗을 좋아했고, 톰 샤키와의 최근 경기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34세의 노장에게 남은 힘이 별로 없다고 판단하여 경기에 동의했다. 이 경기는 뉴욕주 코니아일랜드의 씨사이드 아레나에서 열렸다.[10]

제프리스가 훈련에서 형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안, 코빗은 전투를 위해 스파르타인처럼 준비했다. 그는 자신의 속도로 더 크고 강한 상대를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집, 힘, 거의 약 13.61kg의 체중 차이와 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해야 했다. 그가 생각한 핵심은 체력과 25라운드 경기 제한을 견딜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초반 라운드에서 코빗은 빠르게 움직였고, "빅 제프"는 바디 샷을 시도했다. 그러나 제프리스는 "춤추는 거장"에게 제대로 펀치를 날리지 못했다. 라운드마다 코빗은 잽을 날리고, 반격을 피하기 위해 춤을 추며 경기를 지배했다. 20라운드쯤 되자 제프리스의 코너는 당황했다. 매니저 브레이디는 트레이너 토미 라이언을 코너에서 내쫓고 직접 지휘하며 "KO시키거나 타이틀을 잃어라!"라는 간단하지만 직접적인 명령을 내렸다. 코빗은 마지막 5라운드를 버티기만 하면 다시 헤비급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제프리스는 틈을 노리며 링 주위를 코빗을 쫓아다녔다. 코빗은 22라운드까지 어떤 위협도 피하며 춤을 췄다.[3]

23라운드 중반, 코빗은 제프리스의 펀치를 피하려다 로프에 부딪히고 짧은 오른손 펀치에 의해 캔버스에 쓰러졌다. 그는 카운트 아웃되었다.[3] 코빗은 이 훌륭한 노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다음 경기인 키드 맥코이와의 5라운드 KO 승리는 조작된 경기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3]

2. 3. 은퇴 이후

복싱 은퇴 후, 코벳은 연기 활동을 재개하여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고 격투에 관한 강연을 했다. 또한 코넬리우스 J. 오브라이언과 함께 민스트럴 쇼의 촌극을 공연했다.[12]

코벳은 1886년부터 1895년 이혼할 때까지 메리 올리브 모리스 히긴스와 결혼했다. 이후 배우 제시 테일러(무대 이름은 베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코벳보다 25년 이상 더 오래 살았다. 190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코벳은 뉴욕시 퀸스 자치구의 베이사이드 지역에 있는 3층집(221-04 코벳 로드)[13]에 살았다.[14]

1924년, 그는 코벳의 과학적인 스타일을 존경하는 미래 챔피언 진 터니와 친선 스파링 경기를 가졌다. 터니는 60세가 넘은 코벳의 스파링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코벳이 베니 레너드보다 방어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했다.[15]

3. 사망

코빗은 1933년 2월 18일, 간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 그의 시신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사이프러스 힐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4. 유산 및 평가

제임스 J. 코빗은 1990년에 사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었다.[1] 1902년부터 1933년까지 그가 거주했던 퀸스 베이사이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1]

마누엘 로젠버그가 그린 제임스 J 코빗의 사인 스케치, 신시내티 포스트 1922년


코빗의 증손자인 댄 코빗은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출신의 프로 헤비급 복서로, 은퇴 전까지 미국 복싱 연맹과 국제 복싱 기구 인터컨티넨탈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1]

제임스 J. 코빗은 영 코빗 2세와는 친척 관계가 아니다.[1]

4. 1. 현대 복싱의 선구자

언론에서 '''젠틀맨 짐 코빗'''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과학적인 접근 방식과 기술 혁신을 통해 "현대 복싱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3]

4. 2. 문화적 영향

스폴딩 사는 1892년에 자체 출판사인 스폴딩 애슬레틱 라이브러리를 통해 "제임스 J. 코빗의 생애와 전투" 제1권 1호를 발행했다. 이 책에는 코빗의 과거 상대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편집자 리처드 K. 폭스는 코빗을 캘리포니아의 불가사의이자 (권투) 교수라고 칭했다.[17]

코빗은 1894년에 ''군중의 함성''이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썼다. 이 이야기는 1894년 10월/11월 동안 ''토요일 이브닝 포스트''에 6주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듬해 G.P. 퍼트넘스 선즈는 이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여 "챔피언의 흥망성쇠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로 홍보했다. 1942년, 이 이야기는 에롤 플린이 코빗 역을 맡은 젠틀맨 짐이라는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되었다.

4. 3. 명예의 전당

1990년 제임스 J. 코빗은 사후에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사후 추대되었다.[1] 1902년부터 1933년까지 거주했던 퀸스 베이사이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1]

코빗의 증손자이자 현손자인 댄 코빗은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출신의 프로 헤비급 복서로, 은퇴 전까지 미국 복싱 연맹과 국제 복싱 기구 인터컨티넨탈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1]

제임스 J. 코빗은 역시 복싱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영 코빗 2세와는 친척 관계가 아니다.[1]

5. 전적

번호결과기록상대타입라운드, 시간날짜장소비고
3523–4–5 (3)제임스 J. 제프리스TKO10 (20)1903년 8월 14일세계 헤비급 타이틀전
3423–3–5 (3)키드 맥코이KO5 (25)1900년 8월 30일
3322–3–5 (3)제임스 J. 제프리스KO23 (25)1900년 5월 11일세계 헤비급 타이틀전
3222–2–5 (3)톰 샤키반칙승9 (20)1898년 11월 22일
3122–1–5 (3)밥 피츠시먼스KO141897년 3월 17일세계 헤비급 타이틀 상실
30무승부22–0–5 (3)톰 샤키판정41896년 6월 24일
2922–0–4 (3)찰리 미첼KO31894년 1월 25일세계 헤비급 타이틀 방어
2821–0–4 (3)존 L. 설리번KO211892년 9월 7일세계 헤비급 타이틀 획득
2720–0–4 (3)존 맥캔TKO11892년 4월 6일
26무효19–0–4 (3)조 랜넌판정41892년 2월 16일
2519–0–4 (2)에드 키니판정41891년 10월 8일
24무효18–0–4 (2)피터 잭슨NC611891년 5월 21일
2318–0–4 (1)도미니크 맥카프리TKO4 (4)1890년 4월 14일
2217–0–4 (1)제이크 킬레인판정61890년 2월 18일
21무승부16–0–4 (1)데이브 캠벨판정101889년 12월 28일
2016–0–3 (1)호주 빌리 스미스판정61889년 12월 12일
1915–0–3 (1)호주 빌리 스미스판정61889년 12월 11일
1814–0–3 (1)조지 앳킨슨KO11889년 7월
1713–0–3 (1)조 초인스키판정41889년 7월 15일
1612–0–3 (1)조 초인스키KO271889년 6월 5일
15무효11–0–3 (1)조 초인스키NC41889년 5월 30일
1411–0–3윌리엄 밀러판정61888년 11월
13무승부10–0–3프랭크 글로버판정31888년 6월 30일
1210–0–2빌 헤이즈KO31887년
11무승부9–0–2잭 버크판정31887년 8월 27일
109–0–1마틴 코스텔로판정31887년 2월 2일
98–0–1제임스 C. 데일리TKO21887년 2월 2일
87–0–1덩컨 맥도널드판정61886년 12월
7무승부6–0–1덩컨 맥도널드판정61886년 7월 3일
66–0프랭크 스미스실격31886년 7월 3일
55–0윌리엄 T. 웰치KO11885년 12월 3일
44–0데이브 아이스먼TKO21885년 8월 28일
33–0존 도널드슨 교수판정41885년
22–0빌리 키니얼리판정41884년
11–0조 초인스키KO11884년


  • 프로 복싱: 24전 14승 5KO 4패 3무 3무효 시합

참조

[1] 서적 Female Spectators and the Corbett-Fitzsimmons Fight Film https://books.google[...] 1997
[2] 서적 Counterpunch: The Cultural Battles over Heavyweight Prizefighting in the American West https://books.google[...] 2016
[3] 뉴스 The Boilermaker vs. the Gentleman: A look Back at The Last Heavyweight Title Fight In Brooklyn https://sports.vice.[...] 2016-01-15
[4] 뉴스 Sixty One Rounds Of Combat: Jackson Versus Corbett https://www.boxingin[...] 2017-01-30
[5] 웹사이트 County Mayo http://www.mayo.ie 2017-03-08
[6] 뉴스 On This Day: Boxing pioneer James J. Corbett passes away aged 66 http://www.boxingnew[...] 2018-02-18
[7] 웹사이트 Rare and Old Boxing Film Database http://www.fitzsimmo[...] 2007-03-17
[8] 서적 Boxing's Strangest Fights: Incredible But True Encounters from Over 250 Years of Boxing History https://books.google[...] Pavilion Books 2015
[9] 뉴스 Corbett Nearly Reclaimed The Crown https://www.boxing24[...] 2005-07-13
[10] 서적 More Tales From Ringside https://books.google[...] iUniverse 2004
[11] 뉴스 Jeffries Was No Gentleman http://archive.nytim[...] 2018-07-13
[12] 뉴스 Neil O'Brien Dies at 85. Retired Minstrel Once With Primrose and Dockstader https://query.nytime[...] 2015-02-02
[13] 뉴스 Gentleman in the House on Corbett Road https://www.nytimes.[...] 1985-09-01
[14] 뉴스 A High Quality of Life Within the City https://query.nytime[...] The New York Times 1996-08-04
[15] 서적 The Fireside Book of Boxing https://books.google[...] Simon & Schuster 1961
[16] 웹사이트 Bayside's 'Gentleman Jim' Corbett {{!}} I Have Often Walked {{!}} qchron.com https://www.qchron.c[...] 2015-03-05
[17] 웹사이트 Life and battles of James J. Corbett https://openlibrary.[...] 2020-11-22
[18] 간행물 The First Film Star Tells His Own Story https://archive.org/[...] Tower Magazines, Inc. 2015-11-09
[19] 웹사이트 JAMES J. CORBETT: Film / Movie Information http://www.citwf.com[...] 2017-03-08
[20] 서적 ボクシング・バイブル 1999-03-29
[21] 문서 後にロバート・L・リプレイは、自らのコラムでコーベットを取り上げ、相手に傷一つ負わせた事さえない、紳士的なボクサー。と紹介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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