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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콩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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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콩고 전쟁은 모부투 세세 세코의 부패와 르완다 내전의 여파로 촉발되어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난 분쟁이다. 모부투 정권의 쇠퇴, 민족 갈등, 르완다 대학살의 영향으로 르완다와 우간다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봉기했으며, 앙골라, 부룬디, 짐바브웨 등 주변국과 UNITA, 프랑스, 미국 등 외세가 개입했다. 콩고 민주화 연합(AFDL)의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승리하여 모부투 정권을 무너뜨리고 콩고민주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카빌라 정권의 부패와 민족 갈등으로 인해 2차 콩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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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콩고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콩고 민주 연맹 (AFDL) 공세 지도
기본 정보
분쟁 이름제1차 콩고 전쟁
전쟁의 일부르완다 학살, 부룬디 내전의 파급 효과, 제2차 수단 내전의 결과
날짜1996년 10월 24일 – 1997년 5월 16일
장소자이르, 우간다수단으로 파급
결과콩고 해방 민주 세력 연맹 (AFDL)의 결정적인 승리
모부투 세세 세코 정권 전복
자이르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
제2차 콩고 전쟁 시작
교전 세력
교전국 1FAZ
화이트 군단


전 FAR / ALiR
인테라함웨
CNDD-FDD
UNITA
ADF
FLNC
지원 세력 1



(부인)
교전국 2AFDL




SPLA
지원 세력 2




(비밀 지원)
기타 세력마이마이
지휘관
지휘관 1모부투 세세 세코
도나티앵 마헬레 리에코 보쿤구 (사형)
크리스티앙 타베르니에
오마르 알바시르
조나스 사빔비
폴 르와라카비제
로버트 카주가
타르시스 렌자호
지휘관 2로랑데지레 카빌라
앙드레 키사세 응간두 (전사)
폴 카가메
제임스 카바레베
요웨리 무세베니
피에르 부요야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자이르: 약 50,000명
인터라함웨: 총 40,000–100,000명
UNITA: 약 1,000–2,000명
병력 규모 2AFDL: 57,000명
카도고 (아동 병사): 10,000–15,000명
르완다: 3,500–4,000명
앙골라: 3,000명 이상
에리트레아: 1개 대대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10,000–15,000명 사망
10,000명 탈영
수천 명 항복
사상자 23,000–5,000명 사망
기타 피해난민 222,000명 실종
총 사망자: 250,000명

2. 배경

1990년대 아프리카 전역에 민주화 물결이 휩쓸면서, 자이르는 안팎으로 민주화 요구에 직면했다.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67년부터 유지해 온 일당 체제를 종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질적인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아 국내외의 신뢰를 잃었다.[46] 자이르 국민 대다수는 공식 경제를 불신하고 비공식 경제에 의존해야 했다.[46] 자이르 군대(FAZ)는 생존을 위해 국민들을 약탈했고, 모부투는 군인들에게 무기가 있는데 왜 급여가 필요하냐고 말했다는 주장도 있다.[12]

모부투의 통치는 국내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중앙 정부의 약화로 반군들은 수도 킨샤사에서 멀리 떨어진 자이르 동부 지방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반대 세력에는 파트리스 루뭄바를 지지했던 좌파와 킨샤사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수 민족, 지역 주민들이 포함되었다. 카탕가주 출신의 루바족인 로랑 데지레 카빌라는 모부투 정권 초기부터 반대 투쟁을 벌여온 인물 중 하나였다.[48]

자이르 동부 지역은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 집단 간의 갈등, 특히 콩고의 농업 중심 부족들과 바냐르완다 사이의 갈등이 심각했다.[49] 19세기 후반 식민지 경계가 그어지면서 많은 바냐르완다인들이 르완다 국경의 콩고 측인 키부 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1960년 콩고 독립 이전에 자이르로 이주한 투치족은 바냐물렌게로 불렸고, 자이르 법에 따라 시민권을 가졌다. 독립 이후 자이르로 이주한 투치족은 바냐르완다인으로 알려졌지만, 현지 주민들은 종종 두 집단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바냐물렌게라고 부르며 외국인으로 간주했다.[50]

모부투는 소수 민족인 바냐물렌게에게 동부 지역의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여 그들이 권력을 굳게 장악하고 인구가 많은 다른 민족들의 반대 세력 형성을 막기를 기대했다.[52] 그러나 이는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북키부의 중요한 지역에 대한 바냐물렌게의 지배력을 강화함으로써 기존의 민족적 긴장을 악화시켰다.[52]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훈데족과 난데족은 북키부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을 포함한 르완다 이민자들과 싸웠으며, 이는 여러 학살을 수반한 카냐르완다 전쟁이었다.[53][54]

자이르는 1981년 바냐물렌게와 바냐르완다인들에게 시민권과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엄격한 시민권법을 채택했다.[55] 이 법은 시행된 적이 없었지만 르완다계 사람들을 크게 분노하게 했고, 민족적 증오감을 증폭시켰다.[52]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훈데족, 난데족, 그리고 냐양가족 청년들이 바냐물렌게를 정기적으로 공격하여 총 14,000명의 사망자를 냈다.[57] 1995년 자이르 의회는 바냐물렌게를 포함하여 르완다 또는 부룬디 출신 모든 사람들을 원산국으로 송환하라고 명령했다.[58]

1994년 이웃 르완다에서 발생한 르완다 대학살은 제1차 콩고 전쟁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 사건은 대규모 난민 유출을 야기했다. 대학살 기간에 수십만 명의 투치족과 이들에게 동조한 사람들이 주로 후투족 공격자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대학살은 투치족이 주도하는 르완다 애국 전선(RPF)이 키갈리의 후투족 정부를 전복시키면서 종식되었다.

1994년 자이르 동부의 르완다 난민 캠프


위기 동안 르완다를 탈출한 약 150만 명의 사람들이 자이르 동부에 정착했다.[13] 이들 난민에는 후투족 ''제노시다이어''를 피해 도망친 투치족과 투치족 RPF의 이후 보복을 피해 도망친 100만 명의 후투족이 포함되었다.[13] 후자 그룹 중에는 전 르완다군(Forces armées rwandaises|FAR프랑스어) 요소와 ''인테라함웨''로 알려진 독립적인 후투족 극단주의 단체와 같은 ''제노시다이어''들이 있었다.[16] 이들 후투족 세력은 종종 광산과 무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현지 마이 마이 민병대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위 조직이었지만, 빠르게 공격자가 되었다.[13]

후투족은 자이르 동부에 캠프를 설치하고 새로 온 르완다 투치족과 바냐물렌게족, 바냐르완다족을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으로 1996년 상반기 동안 한 달에 약 100명이 사망했다.[61] 또한, 새로 온 무장 세력은 르완다에서 권력을 되찾고자 했고, 신생 국가에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된 키갈리의 새 정권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62] 모부투 세세 세코 정부는 ''제노시다이어''들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르완다 침공을 위한 훈련과 지원을 제공했다.[63]

2. 1. 모부투 정권의 쇠퇴

자이르의 장기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


응반디족 출신인 모부투는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냉전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공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모부투의 전체주의적 통치와 부패는 자이르 경제를 파탄 냈고, 1960년 독립 이후 1997년까지 자이르의 GDP는 65%나 감소했다.[11]

1990년대 아프리카 전역에 민주화 물결이 휩쓸면서, 자이르 내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압력이 거세졌다. 모부투는 1967년부터 유지해 온 일당 체제를 종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질적인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아 국내외의 신뢰를 잃었다.[46] 자이르 국민 대다수는 공식 경제를 불신하고 비공식 경제에 의존해야 했다.[46]

더욱이, 자이르 군대(FAZ)는 생존을 위해 국민들을 약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부투 자신이 FAZ 군인들에게 무기가 있는데 왜 급여가 필요하냐고 물었다는 주장도 있다.[12]

모부투의 통치는 국내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중앙 정부의 약화로 반군들은 수도 킨샤사에서 멀리 떨어진 자이르 동부 지방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반대 세력에는 파트리스 루뭄바를 지지했던 좌파와 킨샤사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수 민족, 지역 주민들이 포함되었다. 카탕가주 출신의 루바족인 로랑 데지레 카빌라는 모부투 정권 초기부터 반대 투쟁을 벌여온 인물 중 하나였다.[48]

2. 2. 민족 갈등

자이르 동부 지역은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 집단 간의 갈등이 존재했는데, 특히 콩고의 농업 중심 부족들과 바냐르완다 사이의 갈등이 심각했다.[49] 19세기 후반 식민지 경계가 그어지면서 많은 바냐르완다인들이 르완다 국경의 콩고 측인 키부 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1960년 콩고 독립 이전에 자이르로 이주한 투치족은 바냐물렌게로 불렸고, 자이르 법에 따라 시민권을 가졌다. 독립 이후 자이르로 이주한 투치족은 바냐르완다인으로 알려졌지만, 현지 주민들은 종종 두 집단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바냐물렌게라고 부르며 외국인으로 간주했다.[50]

1965년 집권한 모부투는 소수 민족인 바냐물렌게에게 동부 지역의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여 소수 민족인 그들이 권력을 굳게 장악하고 인구가 많은 다른 민족들의 반대 세력 형성을 막기를 기대했다.[52]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북키부의 중요한 지역에 대한 바냐물렌게의 지배력을 강화함으로써 기존의 민족적 긴장을 악화시켰다.[52]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훈데족과 난데족은 북키부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을 포함한 르완다 이민자들과 싸웠다.[53] 이는 여러 학살을 수반한 카냐르완다 전쟁이었다.[54]

모부투 정부에 르완다인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이르는 1981년 바냐물렌게와 바냐르완다인들에게 시민권과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엄격한 시민권법을 채택했다.[55] 이 법은 시행된 적이 없었지만 르완다계 사람들을 크게 분노하게 했고, 민족적 증오감을 증폭시켰다.[52]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훈데족, 난데족, 그리고 냐양가족 청년들이 바냐물렌게를 정기적으로 공격하여 총 14,000명의 사망자를 냈다.[57] 1995년 자이르 의회는 바냐물렌게를 포함하여 르완다 또는 부룬디 출신 모든 사람들을 원산국으로 송환하라고 명령했다.[58] 정치적 배제와 민족적 폭력으로 인해, 1991년 초 바냐물렌게는 우간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르완다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진 주로 투치족 반군 운동인 르완다 애국전선(RPF)과 관계를 맺었다.[56]

2. 3. 르완다 내전과 대학살의 영향

1994년 이웃 르완다에서 발생한 르완다 대학살은 제1차 콩고 전쟁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 사건은 대규모 난민 유출을 야기했다. 100일 동안 지속된 대학살 기간에 수십만 명의 투치족과 이들에게 동조한 사람들이 주로 후투족 공격자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대학살은 투치족이 주도하는 르완다 애국 전선(RPF)이 키갈리의 후투족 정부를 전복시키면서 종식되었다.

위기 동안 르완다를 탈출한 약 150만 명의 사람들이 자이르 동부에 정착했다.[13] 이들 난민에는 후투족 ''제노시다이어''를 피해 도망친 투치족과 투치족 RPF의 이후 보복을 피해 도망친 100만 명의 후투족이 포함되었다.[13] 후자 그룹 중에는 전 르완다군(Forces armées rwandaises|FAR프랑스어) 요소와 ''인테라함웨''로 알려진 독립적인 후투족 극단주의 단체와 같은 ''제노시다이어''들이 있었다.[16] 이들 후투족 세력은 종종 광산과 무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현지 마이 마이 민병대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위 조직이었지만, 빠르게 공격자가 되었다.[13]

후투족은 자이르 동부에 캠프를 설치하고 새로 온 르완다 투치족과 바냐물렌게족, 바냐르완다족을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으로 1996년 상반기 동안 한 달에 약 100명이 사망했다.[61] 또한, 새로 온 무장 세력은 르완다에서 권력을 되찾고자 했고, 신생 국가에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된 키갈리의 새 정권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62] 모부투 세세 세코 정부는 ''제노시다이어''들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르완다 침공을 위한 훈련과 지원을 제공했다.[63]

3. 바냐물렌게 반란과 외세 개입

르완다 대학살 이후 자이르 동부에서 민족 갈등이 악화되고 르완다의 안보가 위협받으면서 바냐물렌게 반란이 일어났다. 1996년 8월 31일, 르완다 투치족과 자이르 녹색 베레모 부대 간의 교전은 반란의 시작을 알렸다.[17] 르완다 정부는 1995년부터 자이르에서 활동할 투치족 민병대를 조직했으며, 이 반란은 르완다 애국군(RPA)에 의해 모집된 자이르 투치족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있다.[64]

반란 초기에는 자이르 동부 키부 주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후투족 극단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모부투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반란은 전국적인 혁명으로 성장했다.[17]

이후 바냐물렌게 부대와 투치족이 아닌 민병대는 콩고 민주화를 위한 민주 세력 동맹(AFDL)으로 결합되었고, 오랫동안 모부투 정부에 반대해 온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지도자가 되었다. AFDL은 자이르 반군 운동으로 보였지만, 르완다는 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르완다 국방장관 겸 부통령이었던 폴 카가메는 AFDL이 키갈리에서 만들어지고 지휘되었으며, 르완다군 훈련 병력뿐만 아니라 RPA 정규군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18]

3. 1. 바냐물렌게 반란

1996년 8월, 르완다의 지원을 받은 바냐물렌게 투치족이 자이르 정부군과 충돌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17] 이 반란은 르완다 애국군(RPA)에 의해 모집된 자이르 투치족에 의해 선동되었다는 주장이 있다.[64]

반란의 초기 목표는 자이르 동부 키부 주를 장악하고, 후투족 극단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이었다.[17] 그러나 모부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반란은 전국적인 혁명 운동으로 발전했다.[17]

바냐물렌게 부대와 투치족이 아닌 민병대는 콩고 민주화를 위한 민주 세력 동맹(AFDL)으로 결합되었고,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지도 아래 있었다.[18] AFDL은 표면적으로는 자이르 반군 운동이었지만, 르완다는 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르완다 국방장관 겸 부통령이었던 폴 카가메는 AFDL이 키갈리에서 형성되고 지휘되었으며 르완다군 훈련 병력뿐만 아니라 RPA 정규군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18]

3. 2. 콩고-자이르 민주해방군 연합(AFDL) 결성

바냐물렌게 반군은 다른 반군 세력과 연합하여 콩고-자이르 민주해방군 연합(AFDL)을 결성하고, 로랑 데지레 카빌라를 지도자로 추대했다.[67] 카빌라는 오랫동안 반정부 운동을 해 온 인물이었다.[67] AFDL은 표면적으로는 자이르 반군 조직이었지만, 르완다가 조직 결성과 군사 작전에 깊이 관여했다.[67] 르완다 국방장관이자 부통령이었던 폴 카가메가 AFDL을 지휘하고 편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67]

3. 3. 외세 개입

약 1996년 자이르 지도


전문가들과 폴 카가메에 따르면, 르완다는 제1차 콩고 전쟁에서 가장 큰 외세 개입 역할을 했다.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해방군(AFDL)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자국군을 파병하여 반군과 함께 싸웠다.[18] 르완다의 행동은 자이르에 기반을 둔 집단학살 가담자(génocidaires)가 제기하는 안보 위협에서 비롯되었지만, 자이르 침공을 통해 여러 목표를 추구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이르에서 르완다를 공격해 온 집단학살 가담자들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카가메는 르완다 요원들이 모부투의 지원을 받아 르완다 침공 계획을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집단학살 가담자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난민 수용소를 해체하고 반(反)르완다 세력의 구조를 파괴하려는 의도로 개입을 시작했다.[18]

카가메가 언급한 두 번째 목표는 모부투의 타도였다.[68] 이는 동부 자이르의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르완다는 킨샤사에 괴뢰 정권을 세우려고도 했다.[68] 이 목표는 르완다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명목상의 수단이었고, 많은 국가들도 모부투에 반대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에게 특별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르완다는 새로운 세대의 아프리카 지도자로 카가메를 지지한 미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았다.[45]

그러나 르완다의 진정한 의도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일부 저자들은 난민 수용소 해체가 집단 학살 이후 고갈된 르완다의 인구와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수용소 파괴 후 르완다인이든 자이르인이든 상관없이 투치족의 강제 송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69] 이 개입은 복수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을 수도 있다. 르완다군과 AFDL은 여러 차례 후퇴하는 후투족 난민을 학살했다.[70] 르완다의 행동에 대한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요인은 키갈리에서 최근 집권한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자신을 투치족 국가의 보호자로 여기게 되었고, 따라서 부분적으로 자이르 투치족 동포를 방어하기 위해 행동했기 때문이다.[71]

르완다는 동부 자이르 일부를 합병하려는 야심을 품었을 가능성도 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르완다 대통령을 지낸 파스퇴르 비지문구는 당시 르완다 주재 미국 대사인 로버트 그리빈에게 "대르완다(Greater Rwanda)"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 아이디어는 고대 르완다 국가에 실제로 르완다에 속해야 하는 동부 자이르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72] 그러나 르완다가 이러한 영토를 합병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콩고의 분쟁 역사는 불법 자원 착취와 흔히 관련되어 있지만, 르완다는 자이르의 부를 약탈하여 재정적으로 이익을 얻었지만,[73] 이는 일반적으로 제1차 콩고 전쟁에 대한 르완다 개입의 초기 동기로 간주되지 않는다.[74]

르완다 애국전선의 긴밀한 동맹국인 우간다는 제1차 콩고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RPF의 주요 인물들은 요웨리 무세베니가 집권하게 된 우간다 부시 전쟁에서 그와 함께 싸웠으며, 무세베니는 RPF가 1990년 르완다 공격과 르완다 내전 동안 우간다를 기지로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역사적 유대 관계를 고려하여 르완다와 우간다 정부는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고, 무세베니는 제1차 콩고 전쟁 내내 카가메와 긴밀히 협력했다. 우간다 군인들은 갈등 전반에 걸쳐 자이르에 주둔했으며, 무세베니는 카가메가 AFDL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것을 도왔을 가능성이 높다.[64]

예를 들어, AFDL의 제임스 카바레베(James Kabarebe) 중령은 무세베니를 집권하게 한 반군 운동의 군사 부문인 우간다 국가저항군의 전직 구성원이었으며, 프랑스와 벨기에 정보 당국은 우간다에서 훈련받은 투치족 1만5천 명이 AFDL을 위해 싸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우간다가 전쟁의 모든 측면에서 르완다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무세베니는 전직 집단학살 가담자들이 활동하고 있던 동부 지역에 반란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여 모부투를 전복하는 데는 훨씬 소극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76]

앙골라는 1997년까지 관망했지만, 개입함으로써 이미 우세했던 모부투 반대 세력의 힘을 크게 증강시켰다. 앙골라 정부는 주로 1960년대 콩고에서 망명당한 경찰 부대원들의 잔당으로 구성된 대리 집단인, 원래 카탕가 헌병대로 나중에 '티그레스'(Tigres)라고 불린 집단을 통해 행동하기로 선택했으며,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웠다.[77] 앙골라는 정규군도 배치했다. 앙골라는 모부투 정부의 일원들이 앙골라 반군 집단인 UNITA(UNITA)에 직접적으로 무기를 공급하는 데 연루되었기 때문에 제1차 콩고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78]

정부가 이러한 관계로부터 어떻게 이익을 얻었는지는 몇몇 관리들의 개인적인 부를 제외하고는 불분명하지만, 모부투가 자신의 정부 일원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킨샤샤의 이유와 관계없이 앙골라는 반군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고, 자이르-UNITA 관계가 야기하는 위협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진 모부투 정부를 전복하는 데 결심했다.

모부투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UNITA는 제1차 콩고 전쟁에도 참전했다. 전쟁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아마도 앙골라가 반모부투 연합에 참여할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UNITA 부대는 적어도 몇몇 경우에 FAZ 부대와 함께 싸웠다.[79] 그 밖의 예로, 카가메는 자신의 부대가 전쟁 말기에 킨샤사 근처에서 UNITA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고 주장했다.[80]

제1차 콩고 전쟁에는 여러 다른 외부 세력들이 작은 역할을 수행했다. 투치족 지도자의 통치를 받게 된 부룬디는 자이르에 대한 르완다와 우간다의 개입을 지원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매우 제한적이었다.[81] 잠비아, 짐바브웨, 그리고 남수단의 반군인 SPLA도 반군 운동에 제한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82] 카가메 휘하 르완다의 동맹국인 에리트레아는 자이르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자국 군대의 전체 대대를 파병했다. 마찬가지로, 탄자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반 모부투 연합에 지원을 제공했다.[22][4] 모부투는 UNITA 외에도 오랫동안 SPLA에 대항하여 지원해 온 수단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았지만, 지원의 정확한 규모는 불분명하며 궁극적으로 반대 세력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83] 자이르는 또한 차드군을 포함한 여러 아프리카와 유럽 국가 출신의 외국 용병들을 고용했다.[1] 프랑스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협조를 받아 모부투 정부에 재정적 지원과 군사 원조를 제공했으며, AFDL의 진격을 막기 위한 국제 개입을 외교적으로 옹호했지만, 나중에 미국의 압력으로 후퇴했다.[23][24] 중국이스라엘은 모부투 정권에 기술 지원을 제공했으며, 쿠웨이트도 자이르에 무기 구매를 위해 6,400만 달러를 제공했다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부인했다.[86]

4. 전쟁 경과



1996년, 르완다 내전과 르완다 대학살의 여파로 대호수 난민 위기가 발생하여 르완다를 탈출한 약 150만 명의 난민이 자이르 동부에 정착했다.[13] 이들 중에는 후투족 ''제노시다이어''를 피해 도망친 투치족과 투치족 르완다 애국 전선(RPF)의 보복을 피해 도망친 100만 명의 후투족이 포함되어 있었다.[13] 후자 그룹에는 전 르완다군(FAR)과 ''인테라함웨''로 알려진 후투족 극단주의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자이르 동부에서 마이 마이 민병대와 동맹을 맺고 난민촌을 기반으로 르완다의 투치족과 바냐물렌게족, 바냐르완다족을 공격했다.[13] 이들은 르완다의 새 정권을 공격하여 르완다의 안보를 위협했고,[13] 모부투 정부는 이들을 통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르완다 침공을 위한 훈련과 지원을 제공했다.[13]

이러한 상황에서 르완다, 우간다,[86] 에리트레아[86]의 지원을 받은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콩고민주공화국 민주화를 위한 민주세력 동맹(AFDL)은 1996년 12월 25일까지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와의 국경을 따라 800 x 100km[86]의 영토를 점령했다. 앙골라가 1997년 2월 전쟁에 참전할 때까지 이 완충 지대를 확보한 후 반군의 진격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87]

이 기간 동안 르완다는 집단 학살자들이 안전 기지로 사용해 온 난민 캠프를 파괴하고 투치족을 르완다로 강제 송환했다. 또한, 다이아몬드와 콜탄 광산을 점령했다.[13][20] 르완다와 연합군은 주로 후투족 난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의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70] 국제앰네스티는 르완다군과 연합군에 의해 최대 20만 명의 르완다 후투 난민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89]

1997년 3월, 카빌라의 군대는 공세를 시작하여 킨샤사 정부에 항복을 요구했다. 4월 2일 모부투의 오랜 라이벌인 에티엔 츠세케디가 자이르 총리로 취임했다.[30] 그러나 이미 국토의 약 4분의 1을 장악한 카빌라는 이를 무시하고 츠세케디가 총리직을 수락하면 새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1997년 진격이 재개된 후, 모부투 군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카빌라의 군대는 자이르의 낙후된 인프라 때문에 진격이 늦춰졌을 뿐이었다. AFDL은 키산가니 근처 팅기-팅기 난민 캠프에서 수만 명의 후투족 난민을 학살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32]

AFDL은 5월 중순 킨샤사에 도착했다. 모부투는 5월 16일 킨샤사를 탈출했고, "해방자들"은 저항 없이 수도에 진입했다.[32] 반군의 진격 동안 국제 사회는 해결책을 협상하려고 시도했지만, AFDL은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지 않고 진격을 계속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협상에 참여하는 척했다.

모부투는 그바돌리테를 거쳐 모로코 라바트로 도망쳐 1997년 9월 7일에 사망했다.[33] 카빌라는 5월 17일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포하고 질서 회복을 위한 폭력적인 단속을 명령했다. 그리고 국가를 콩고 민주 공화국(DRC)으로 재편성했다.

앙골라는 1997년까지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반군 세력이 확장되자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동맹(UNITA)을 지원하던 모부투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참전했다.[78]

4. 1. 1996년



1996년, 르완다 내전과 르완다 대학살의 여파로 대호수 난민 위기가 발생하여 르완다를 탈출한 약 150만 명의 난민이 자이르 동부에 정착했다.[13] 이들 중에는 후투족 ''제노시다이어''를 피해 도망친 투치족과 투치족 르완다 애국 전선(RPF)의 보복을 피해 도망친 100만 명의 후투족이 포함되어 있었다.[13] 후자 그룹에는 전 르완다군(FAR)과 ''인테라함웨''로 알려진 후투족 극단주의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자이르 동부에서 마이 마이 민병대와 동맹을 맺고 난민촌을 기반으로 르완다의 투치족과 바냐물렌게족, 바냐르완다족을 공격했다.[13] 1996년 상반기에만 이러한 공격으로 한 달에 약 100명이 사망했다.[13] 이들은 르완다의 새 정권을 공격하여 르완다의 안보를 위협했고,[13] 모부투 정부는 이들을 통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르완다 침공을 위한 훈련과 지원을 제공했다.[13]

이러한 상황에서 르완다, 우간다,[86] 에리트레아[86]의 지원을 받은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콩고민주공화국 민주화를 위한 민주세력 동맹(AFDL)은 1996년 12월 25일까지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와의 국경을 따라 800 x 100km[86]의 영토를 점령했다. 이 점령으로 반군은 동부 지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고, 전직 집단 학살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외부 세력들은 집단 학살자들이 자이르를 공격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앙골라가 1997년 2월 전쟁에 참전할 때까지 이 완충 지대를 확보한 후 반군의 진격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87]

이 기간 동안 르완다는 집단 학살자들이 안전 기지로 사용해 온 난민 캠프를 파괴하고 투치족을 르완다로 강제 송환했다. 또한, 다이아몬드와 콜탄 광산을 점령했다.[13][20] 르완다와 연합군은 주로 후투족 난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의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70] AFDL과 RPF가 잔혹 행위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NGO와 언론의 접근을 통제했기 때문에 학대의 실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88] 그러나 국제앰네스티는 르완다군과 연합군에 의해 최대 20만 명의 르완다 후투 난민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89]

4. 2. 1997년

1997년 3월, 카빌라의 군대는 공세를 시작하여 킨샤사 정부에 항복을 요구했다. 반군은 3월 27일 카센가를 점령했다. 정부는 반군의 진격을 부정했지만, 협상이 제안되었고 4월 2일 모부투의 오랜 라이벌인 에티엔 츠세케디가 자이르 총리로 취임했다.[30] 그러나 이미 국토의 약 4분의 1을 장악한 카빌라는 이를 무시하고 츠세케디가 총리직을 수락하면 새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1997년 반군의 진격이 재개된 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는 앙골라가 모부투 반대 연합에 참여하여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모부투의 실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왈리칼레 전투에서 세르비아 용병의 고용은 "모부투가 르완다에 대한 실제 전쟁을 벌일 의도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폴 카가메의 주장이다.[90]

어쨌든 1997년 진격이 재개된 후, 모부투 군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카빌라의 군대는 자이르의 낙후된 인프라 때문에 진격이 늦춰졌을 뿐이었다. 일부 지역에는 도로가 없었고, 비포장 도로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31] AFDL은 키산가니 근처 팅기-팅기 난민 캠프에서 수만 명의 후투족 난민을 학살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32]

동쪽에서 진격한 AFDL은 두 갈래로 나뉘어 서쪽으로 진격했다. 북쪽 부대는 키산가니, 보엔데, 엠반다카를 점령했고, 남쪽 부대는 박왕가와 키키위트를 점령했다.[32] 수단은 AFDL에서 도망치기 위해 북쪽으로 후퇴하는 FAZ 잔여 세력과 백색 군단과 협력하려 했다. 그러나 모부투 충성 세력은 너무 빨리 붕괴되어 AFDL, 수단 인민해방군(SPLA), 우간다군이 자이르 북동부를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썬더볼트 작전 중 SPLA의 매복 공격으로 수단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AFDL은 5월 중순 킨샤사에 도착했다. 또 다른 AFDL 부대는 4월 19일 루붐바시를 점령하고 항공으로 킨샤사로 이동했다. 모부투는 5월 16일 킨샤사를 탈출했고, "해방자들"은 저항 없이 수도에 진입했다.[32]

반군의 진격 동안 국제 사회는 해결책을 협상하려고 시도했지만, AFDL은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지 않고 진격을 계속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협상에 참여하는 척했다.

모부투는 그바돌리테를 거쳐 모로코 라바트로 도망쳐 1997년 9월 7일에 사망했다.[33] 카빌라는 5월 17일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포하고 질서 회복을 위한 폭력적인 단속을 명령했다. 그리고 국가를 콩고 민주 공화국(DRC)으로 재편성했다.

앙골라는 1997년까지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반군 세력이 확장되자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동맹(UNITA)을 지원하던 모부투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참전했다.[78] 앙골라는 먼저 자이르에서 탈출한 경찰 중심의 카탕가 헌병대 티그레스(Tigres)를 투입했고,[77] 일반 부대도 파병했다.

5. 전쟁의 결과

제1차 콩고 전쟁은 모부투 세세 세코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콩고 민주 공화국을 탄생시켰지만, 전쟁의 상처는 깊었다. 모부투 정권의 군대와 그 충성파,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집단들은 콩고 공화국(콩고-브라자빌)으로 후퇴하여 1997-1999년 내전에 참전했다.[35][36]

5. 1. 카빌라 정권의 문제점

카빌라의 통치하에 들어선 새로운 콩고 민주 공화국은 모부투 시대의 자이르와 놀랍도록 유사하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경제는 심각한 붕괴 상태에 놓여 있었고, 카빌라의 부패한 통치 아래 더욱 악화되었다.[92] 그는 정부 개혁에 실패했고, 정부는 여전히 허약하고 부패한 상태를 유지했다. 대신 카빌라가 강력한 중앙 집권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치를 요구하는 동부 소수 민족과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카빌라는 또한 그를 권력에 올린 외국 정권의 도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국내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그는 해외 동맹국들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는 1998년 7월 26일 모든 외국군의 콩고민주공화국 추방으로 절정에 달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아직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국가들은 마지못해 이를 따랐지만, 일부 국가, 특히 킨샤사에 대리 정권을 수립하기를 바랐던 르완다는 이를 자국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겼다.

카빌라 집권 이후에도 제1차 콩고 전쟁으로 이어진 여러 요인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민족적 긴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역사적인 적대감이 남아 있었고, 바냐물렌게를 비롯한 모든 투치족이 외국인이라는 인식이 외국 점령군의 방어로 인해 강화되었다.[93] 게다가 르완다는 자국의 안보 우려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 르완다는 난민들을 강제 송환함으로써 갈등을 수입했다.[94]

이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극단주의 세력이 지원하는 르완다 서부 지방의 주로 후투족 반군의 형태로 나타났다. 콩고민주공화국에 주둔하는 병력이 없으면 르완다는 반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1998년 8월 초, 새로운 콩고군의 두 개 여단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군을 결성하여 키갈리와 캄팔라와 긴밀히 협력했다. 이는 콩고 민주 공화국 제2차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5. 2. 2차 콩고 전쟁 발발

카빌라의 통치하에 들어선 새로운 콩고 민주 공화국은 모부투 시대의 자이르와 놀랍도록 유사하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경제는 심각하게 붕괴된 상태였고, 카빌라의 부패한 통치 아래 더욱 악화되었다.[92] 그는 정부 개혁에 실패했고, 정부는 여전히 허약하고 부패한 상태를 유지했다. 대신 카빌라가 강력한 중앙 집권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치를 요구하는 동부 소수 민족과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카빌라 또한 그를 권력에 올린 외국 정권의 도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국내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그는 해외 동맹국들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는 1998년 7월 26일 모든 외국군의 콩고 민주 공화국 추방으로 절정에 달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 아직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국가들은 마지못해 이를 따랐지만, 일부 국가, 특히 킨샤사에 대리 정권을 수립하기를 바랐던 르완다는 이를 자국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겼다.

카빌라 집권 이후에도 제1차 콩고 전쟁으로 이어진 여러 요인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민족적 긴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역사적인 적대감이 남아 있었고, 바냐물렌게를 비롯한 모든 투치족이 외국인이라는 인식이 외국 점령군의 방어로 인해 강화되었다.[93] 게다가 르완다는 자국의 안보 우려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 르완다는 난민들을 강제 송환함으로써 갈등을 수입했다.[94]

이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극단주의 세력이 지원하는 르완다 서부 지방의 주로 후투족 반군의 형태로 나타났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 주둔하는 병력이 없으면 르완다는 반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1998년 8월 20일, 새로운 콩고군의 두 개 여단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군을 결성하여 르완다우간다와 긴밀히 협력했다. 이는 제2차 콩고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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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서적 Kongo — Kriege, Korruption und die Kunst des Überlebens Brandes & Apsel
[9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7-05-17
[100] 간행물 The World At War: January 1, 1998 The Center for Defense Information
[101]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xlsemanal 20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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