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뮐러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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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기 뮐러 내각은 1928년 독일 총선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헤르만 뮐러를 총리로 하여 구성된 대연정 내각이다. SPD, 독일 민주당(DDP), 독일 인민당(DVP), 독일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BVP)이 참여했으며, 1929년 연정 협약을 통해 정식 연립 정부가 되었다. 주요 정책으로는 장갑순양함 건조, 루르 철강 분쟁, 영 플랜 등이 있었으나,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실업 보험 문제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1930년 3월 뮐러 내각이 붕괴되었다. 내각 붕괴 이후 하인리히 브뤼닝이 총리로 임명되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내각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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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뮐러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제2기 헤르만 뮐러 내각 |
내각 종류 | 해당 없음 |
내각 번호 | 16대 |
관할 | 바이마르 공화국 |
집권 | 1928년 6월 28일 ~ 1930년 3월 27일 (1년 8개월 27일) |
정부 수반 직함 | 총리 |
정부 수반 | 헤르만 뮐러 |
국가 원수 직함 | 대통령 |
국가 원수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의원 수 | 해당 없음 |
이전 의원 수 | 해당 없음 |
총 의원 수 | 해당 없음 |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 독일 중앙당 독일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 |
입법부 현황 | 다수 연립 정부 |
야당 내각 | 해당 없음 |
야당 | 해당 없음 |
야당 정당 | 독일 국가인민당 독일 공산당 나치당 |
야당 대표 | 해당 없음 |
야당 대표자 | 해당 없음 |
선거 | 1928년 연방 선거 |
마지막 선거 | 해당 없음 |
입법 기간 | 바이마르 공화국 제4대 국가의회 |
예산 | 해당 없음 |
이전 내각 | 제4기 마르크스 내각 |
다음 내각 | 제1기 브뤼닝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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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각 구성
1928년 총선 결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원내 제1당이 되면서 정부 구성 책임을 맡게 되었다. SPD는 1923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 이후 연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1927년 당 대회를 통해 다시 정부에 참여할 의향을 밝혔다.
SPD는 독일 중앙당, 독일 민주당(DDP), 독일 인민당(DVP), 바이에른 인민당(BVP)과 함께 대연정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연정 협약 없이 '인물 내각'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각 정당이 정부 정책에 대해 일부 반대할 권리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빌헬름 그뢰너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고집했고, 중앙당 좌파 출신 요제프 비르트를 부총리로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1929년 4월 13일,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가 사임하면서 중앙당의 더 많은 장관 참여를 허용했고, 내각은 정식 연립 정부가 되었다.
2. 1. 초기 구성
1928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53석으로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되어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2] SPD는 독일 민주당(DDP, 25석), 독일 인민당(DVP, 45석), 독일 중앙당(61석), 바이에른 인민당(BVP, 17석)과 함께 대연정을 구성하였다.헤르만 뮐러가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초기 내각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이후 내각 개편으로 독일 중앙당의 요구에 따라 에리히 코흐베저(DDP)가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나고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SPD 4명, 중앙당 3명, DVP 2명, DDP와 BVP 각각 1명으로 구성되었다.[4]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빌헬름 그뢰너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고집했으며,[3] 이는 군부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2. 2. 내각 개편
처음 내각이 출범했을 때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총리를 포함해 4명, 독일 민주당과 독일 인민당에서 각각 2명, 독일 중앙당과 바이에른 인민당에서 각각 1명씩 장관을 배출했다. 독일 중앙당 소속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는 교통장관과 점령지역장관을 겸직했다. 무소속은 국방장관 빌헬름 그뢰너 1명이었다.[1]이후 내각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첫 내각 구성 당시 의원 수에 비해 장관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중앙당이 법무장관 자리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 소속 에리히 코흐베저가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중앙당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가 법무장관을 맡게 되었다.[1] 결과적으로 내각 해산 당시에는 사민당 4명, 중앙당 3명, 인민당 2명, 민주당과 바이에른 인민당이 각각 1명의 장관을 배출했다.[1]
3. 내각 명단
직책 | 성명 | 정당 | 비고 |
---|---|---|---|
총리 | 헤르만 뮐러 | 사민당 | |
외무장관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인민당 | 1929년 10월 3일까지 |
율리우스 쿠르티우스 | 1929년 10월 4일부터 | ||
내무장관 | 카를 제베링 | 사민당 | |
재무장관 | 루돌프 힐퍼딩 | 사민당 | 1929년 12월 21일까지 |
파울 몰덴하워 | 인민당 | 1929년 12월 23일부터 | |
경제장관 | 율리우스 쿠르티우스 | 인민당 | 1929년 11월 11일까지 |
파울 몰덴하워 | 1929년 11월 12일부터 1929년 12월 23일까지 | ||
로베르트 슈미트 | 사민당 | 1929년 12월 23일부터 | |
노동장관 | 루돌프 비셀 | 사민당 | |
법무장관 | 에리히 코흐베저 | 민주당 | 1929년 4월 13일까지 |
테오도어 폰 게라르 | 중앙당 | 1929년 4월 13일부터 | |
국방장관 | 빌헬름 그뢰너 | 무소속 | |
우편장관 | 게오르크 셰첼 | 바이에른 인민당 | |
교통장관 | 테오도어 폰 게라르 | 중앙당 | 1929년 2월 6일까지 |
게오르크 셰첼 | 1929년 2월 7일부터 1929년 4월 13일까지 | ||
아담 슈테거발트 | 1929년 4월 13일부터 | ||
식품농업장관 | 헤르만 디트리히 | 민주당 | |
점령지역장관 | 테오도어 폰 게라르 | 중앙당 | 1929년 2월 6일까지 |
요제프 비르트 | 1929년 4월 13일부터 |
4. 주요 정책 및 활동
제2기 뮐러 내각은 1929년 영 플랜을 통해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영 플랜은 독일이 59년 동안 총 를 지불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이전 총 지불액보다 20% 낮아진 금액이었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과 나치 등 민족주의 정당들은 "독일 국민의 노예화 반대 법안"을 내세우며 반대했지만, 국민투표는 낮은 투표율로 부결되었다.[13] 연립 정부 내 각 정당들은 대체로 영 플랜을 지지했다.[13]
영 플랜과 함께 체결된 독일-폴란드 청산 협정은 양국 간 재정 청구권 포기, 폴란드 내 독일 소수 민족의 법적 안정 보장을 통해 양국 관계 정상화에 기여했다.[14]
하지만, 심각한 재정 문제는 계속되었다. 특히 DVP와 SPD는 예산 통합과 부채 감축 방법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독일 인민당은 실업 보험 등 사회 프로그램 지출 삭감을, 독일 사회 민주당은 부유층 증세를 통한 재정 확보를 주장했다. 재정 정책 개혁과 세제 개혁은 이해관계 충돌로 난항을 겪었다. 루돌프 힐퍼딩 재무 장관은 사임했고,[15] 국립 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는 정부의 재정 정책을 비판하며 추가 자금 조달을 요구했다.[16]
결국 실업 보험 문제가 내각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1927년 도입된 실업 보험은 경제 침체로 인해 급증한 실업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막대한 재정 적자를 냈다.[19] 독일 사회 민주당은 보험료율 인상과 고소득층의 연대 기여금 도입을, 독일 인민당은 혜택 삭감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하인리히 브뤼닝이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SPD 의원들과 독일 노동 총연맹(ADGB)는 이를 거부했다.[20]
4. 1. 국내 문제
장갑순양함 A 건조 문제는 제2기 뮐러 내각 출범 직후부터 큰 논란거리였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의 군비가 제한되었지만, 신형 군함 건조는 가능했다. 마르크스 내각 시절부터 국방군은 구식 함정 교체를 명분으로 장갑순양함 건조를 추진했다. 프로이센이 주도한 국가 평의회는 1927년 12월 건조에 반대했지만, 뷔르거블록 정당들이 다수였던 국회는 찬성했다.[8]1928년 국회 선거 운동에서 SPD과 KPD는 장갑순양함 건조 계획을 강하게 비판하며, "장갑순양함 대신 아이들에게 음식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9] DDP 또한 장갑순양함을 독일 해군의 명예 사업으로 간주하여 부정적이었다. 연립 협상 과정에서 DVP는 건조를 밀어붙였고, 중앙당은 DVP를 지지했지만 소극적이었으며, DDP는 기권했다. 결국 순양함 건조 결정은 연기되었다.
1928년 8월, 빌헬름 그뢰너 국방부 장관은 장갑순양함 건조를 위한 첫 번째 할부금 승인을 요청했다. 루돌프 힐퍼딩 (SPD) 재무부 장관은 재정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뢰너는 건조가 무산되면 사임하겠다고 압박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임 루머까지 돌면서 사회민주당 내각 구성원들은 압박을 받았다. 결국 이들은 자금 지원에 동의했다.
그러나 SPD 국회 의원들과 당 내부에서는 거센 비판이 일었다. KPD는 장갑순양함 건조 반대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SPD 의원단은 건조 중단 제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1928년 11월 15일 국회 표결에서 SPD 장관들과 총리 자신은 불과 몇 주 전 내각에서 지지했던 결정을 반대해야 했다. 이는 사실상 자신에 대한 불신임 투표였다. 중산층은 이를 SPD의 무능으로 비판했다.[9] 요제프 비르트는 "독일 의회주의의 점진적인 위기"를 언급했다. 그러나 SPD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정당들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건조 자금 지원은 막을 수 없었다.
1929년 6월, 장갑순양함 A에 대한 두 번째 할부금이 논의되었지만, 이전과 같은 큰 논란은 없었다. KPD는 할부금 취소를 제안했고 SPD는 동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회민주당 내각 구성원들이 당론에 따르지 않고 KPD 제안에 반대하여 자금 지원을 승인했다.[10]
루르 철강 분쟁은 1928년 10월부터 12월까지 라인강과 루르 지역의 철강 산업에서 발생한 대규모 직장 폐쇄 사태였다. 경제 침체의 조짐이 보이자, 지역 금속 고용주 협회는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요구를 거부하고 기존 협약 연장과 저임금 노동자 임금 소폭 인상만을 제안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국무부 중재인 빌헬름 요텐이 1928년 10월 26일 중재 판결을 내렸다. 노동조합은 이를 수용했지만, 고용주들은 거부했다. 루돌프 비셀 노동부 장관(SPD)은 1923년의 절차에 따라 중재 판결을 구속력 있는 것으로 선언했다.
1928년 10월 13일, 고용주들은 10월 28일부터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공장 문을 닫았다.[11] 11월 1일, 약 20만 명에서 26만 명의 노동자들이 직장 폐쇄를 당했다. 이들 중 16만 명은 노동조합원이 아니어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실업 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고용주들은 강제 중재와 일반 적용 가능성 선언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했다. 이들은 중재 판결 내용보다 절차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이들은 국가에 의한 임금 결정을 반대하며, 8시간 노동, 단체 교섭 자율성, 실업 보험 등 공화국의 사회 정책 혁신을 철회하려 했다. 사회민주당 주도 정부가 들어서자, 고용주들은 직장 폐쇄를 통해 "국가 임금 결정"에 강력히 반대한 것이다.
언론은 기업의 행동을 비판했고, 주교와 교수들은 노동자들을 위한 모금을 조직했다. 일부 도시들은 복지 혜택을 지급했다.[12] 11월 초, SPD와 KPD는 직장 폐쇄된 노동자들에게 국가 지원을 제공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DVP의 반대를 제외하고 통과되었다. 직장 폐쇄는 12월 4일에 해제되었다.
일부 중공업 고용주들은 의회 의사 결정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권위주의적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카를 제베링 내무부 장관 특별 중재인이 노동부 장관의 결정을 뒤집고, 1929년 1월 22일 독일 노동 법원이 고용주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것은 이들의 부분적인 성공이었다.
4. 2. 영 플랜
1929년 영 플랜은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독일이 59년 동안 총 1,120억 금 마르크를 지불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전의 총 지불액보다 20% 낮아진 금액이었지만, 독일 국가인민당(DNVP)과 나치와 같은 민족주의 정당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13] 이들은 "독일 국민의 노예화 반대 법안"을 제안하는 국민투표를 추진하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 법안은 충분한 서명을 얻어 국민투표에 부쳐졌으나, 낮은 투표율로 인해 결국 부결되었다.[13] 제2기 뮐러 내각에 참여한 연립 정부의 각 정당들은 영 플랜에 대해 서로 다른 정도의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대체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13]영 플랜과 함께, 독일과 폴란드 간의 독일-폴란드 청산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양국 간의 재정적 청구권을 서로 포기하고, 폴란드 내 독일 소수 민족의 법적 안정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독일과 폴란드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몇 안 되는 구체적인 조치 중 하나였다.[14]
4. 3. 경제 및 재정 문제
정부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연립 정부의 양쪽 날개에 있는 정당들, 즉 독일 인민당(DVP)과 독일 사회 민주당(SPD)은 실행 가능한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 1929년 중반 이후 독일 정부는 매달 말과 분기 말에 심각한 유동성 문제에 직면했다. 국내 경제의 약화는 이전의 세수 추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실업률 증가로 이어져 실업 보험 시스템이 제대로 자금을 지원받지 못했다.정당들은 예산을 통합하고 누적된 국가 부채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독일 인민당과 이를 지지하는 경제 단체들은 지출 삭감, 특히 실업 보험과 같은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삭감을 요구했다.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면 담배와 술과 같은 품목에 대한 소비세를 선호했고, 부와 소득에 대한 직접세 인상에 반대했다. 독일 사회 민주당은 소비세 인상에 반대했다. 그들은 소비세를 "가진 자"가 예산 안정화에 기여하지 않는 한 대중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담으로 여겼다.
재정 정책 개혁과 세제 개혁은 이해 관계의 충돌로 막혔다. 루돌프 힐퍼딩 재무 장관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1929년 12월 20일에 사임했다.[15] 국립 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는 정부의 재정 정책이 건전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이후 부채 감축을 위해 를 추가로 조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제2기 뮐러 내각을 붕괴시킨 근본적인 문제는 실업 보험이었다. 1927년에 도입된 이 보험은 최대 80만 명의 실업자를 지원하도록 설계되었으나, 경제 침체가 시작되면서 실업자 수가 급증하여 1930년 2월에는 300만 명으로 불어났다.[19] 정부는 법에 따라 국가 예산에서 추가 자금을 투입하여 보험 적자를 메워야 했다.[20]
실업 보험 프로그램에 대한 두 가지 잠재적 해결책이 있었다. 노동 조합과 사회 민주당은 근로자와 고용주가 동일하게 지불하는 3%의 기여금을 인상할 것을 제안했다. 고용주와 독일 인민당(DVP)은 혜택을 삭감하는 것을 선호했다. 1929년 12월 21일에 기여율이 3.5%로 인상되었지만, 실업자 수가 급증하면서 지속적인 완화를 제공하지 못했다.
사회 민주당은 추가 기여금 인상을 요구하고 고정 급여를 받는 사람들에게 연대 기여금을 제안했다. 독일 인민당(DVP)은 이 아이디어를 거부하고 "내부 개혁", 즉 혜택 삭감과 행정 간소화를 요구했다.
하인리히 브뤼닝은 1930년 3월 27일에 타협안을 제안했다. 그는 실업 보험 개혁 문제를 1930년 가을까지 연기하고 혜택 삭감, 기여금 인상 또는 실업 보험 보조금 마련을 위한 세금 인상 여부를 열어 두었다.[20] 그러나 사회 민주당(SPD) 의원들과 독일 노동 총연맹(ADGB)의 집행부 대표들은 브뤼닝의 아이디어를 거부하고 기여금 인상과 정부가 비상 상황에서 실업 보험을 충분히 지원할 명확한 법적 의무를 가질 것을 계속 요구했다.
5. 내각의 붕괴
독일 공산당(KPD)은 사회 파시즘 이론을 채택하고 독일 사회 민주당(SPD)을 주요 적으로 삼아 공격했고, SPD는 연립 정부에 대한 피로감이 커져 좌파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17] SPD는 연립 정부의 주도 세력이었지만, 특히 당내 좌파를 중심으로 연립 정부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다. 장갑순양함 문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우파 정당과의 연합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도 작용했다. 막스 자이데비츠는 연립 정치에 대해 "사회 민주주의, 노동 계급, 그리고 공화국의 존립에 큰 위험"이라고 말했고, 파울 레비는 연립 정부를 "정부의 풍자"라고 묘사했다.[6] 중앙당은 1928년 12월 29일 루트비히 카스가 당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우경화되었다.
1927년에 도입된 실업 보험은 최대 80만 명의 실업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비상 기금으로 60만 명을 추가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침체로 1930년 2월 실업자가 300만 명으로 급증하면서 정부는 추가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19][20]
실업 보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 조합과 사회민주당은 근로자와 고용주의 기여금 인상을 제안했다. 반면, 고용주와 독일 인민당(DVP)은 혜택 삭감을 주장하며 기업의 자본 축적을 위한 고정 기여율과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1929년 12월 기여율이 3.5%로 인상되었지만, 실업자 수 급증으로 충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중앙당 의원 하인리히 브뤼닝은 1930년 3월 27일, 실업 보험 개혁 문제를 1930년 가을까지 연기하고 혜택 삭감, 기여금 인상, 세금 인상 여부를 열어 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20] 그러나 사회민주당 의원들과 독일 노동 총연맹(ADGB)은 브뤼닝의 제안을 거부하고 기여금 인상과 정부의 명확한 법적 의무를 요구했다.
뮐러 총리는 브뤼닝의 타협안 수용을 위해 노력했지만, 당의 거부로 실패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긴급 법령 발동 요청을 거부하자, 1930년 3월 27일 내각은 사임했다.[21] 3일 후,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했고, 사회민주당 각료들은 보수주의자들과 힌덴부르크 측근으로 교체되었다. 브뤼닝은 긴급 법령 권한을 사용할 수 있었고, 국회 없이 결정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5. 1. 정당 지형의 급진화
독일 공산당(KPD)은 사회 파시즘 이론을 채택하고 독일 사회 민주당(SPD)을 주요 적으로 삼아, SPD는 좌파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17] SPD는 연립 정부의 주도 세력이었지만, 특히 당내 좌파를 중심으로 연립 정부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다. 장갑순양함 문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우파 정당과의 연합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도 작용했다. KPD와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출신이자 동독의 SPD 국회의원이었던 막스 자이데비츠는 연립 정치에 대해 "사회 민주주의, 노동 계급, 그리고 공화국의 존립에 큰 위험"이라고 말했다. KPD의 공동 창립자이자 SPD로 돌아온 파울 레비는 연립 정부를 "정부의 풍자"라고 묘사했다.[6] 좌파 일각에서는 공화국 존립이 보장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혁명적 상황이 발생할 때까지 정부 책임을 중산층 정당에 넘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 다수가 정부를 계속 지지했지만, 이러한 입장은 SPD 내에 정부 지속 참여에 대한 상당한 유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18]중앙당은 1928년 12월 29일 루트비히 카스가 당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우경화되었다. 카스는 당을 가톨릭 교회와 더욱 밀접하게 연결시키려 했다. 그는 "훌륭한 스타일의 지도자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종료되었다"고 여겨지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에 대해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중앙당을 "의회 기상 변화의 예측 불가능성"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싶어했다. 그의 발언은 당이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멀어지는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5. 2. 실업 보험 문제
1927년에 도입된 실업 보험은 최대 80만 명의 실업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비상 기금으로 60만 명을 추가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침체로 1930년 2월 실업자가 300만 명으로 급증하면서 정부는 추가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19][20]실업 보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 조합과 사회민주당은 근로자와 고용주의 기여금 인상을 제안했다. 반면, 고용주와 독일 인민당(DVP)은 혜택 삭감을 주장하며 기업의 자본 축적을 위한 고정 기여율과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1929년 12월 기여율이 3.5%로 인상되었지만, 실업자 수 급증으로 충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사회민주당은 추가 기여금 인상과 고정 급여를 받는 사람들의 연대 기여금을 제안했지만, 독일 인민당은 이를 거부하고 혜택 삭감과 행정 간소화를 요구했다.
중앙당 의원 하인리히 브뤼닝은 1930년 3월 27일, 실업 보험 개혁 문제를 1930년 가을까지 연기하고 혜택 삭감, 기여금 인상, 세금 인상 여부를 열어 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20] 또한 국가 보조금 한도를 정하고, 비용이 그 이상으로 증가해도 늘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의원들과 독일 노동 총연맹(ADGB)은 브뤼닝의 제안을 거부하고 기여금 인상과 정부의 명확한 법적 의무를 요구했다.
뮐러 총리는 브뤼닝의 타협안 수용을 위해 노력했지만, 당의 거부로 실패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긴급 법령 발동 요청을 거부하자, 1930년 3월 27일 내각은 사임했다.[21] 3일 후,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했고, 사회민주당 각료들은 보수주의자들과 힌덴부르크 측근으로 교체되었다. 브뤼닝은 긴급 법령 권한을 사용할 수 있었고, 국회 없이 결정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국방군, 중공업 지도자, 대규모 농업인 등 힌덴부르크 중심의 영향력 있는 집단은 사회민주당을 배제하거나 대항하여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들에게 의회 약화는 대통령 내각으로의 전환에 필요하고 환영할 만한 부분이었다.[22]
6. 평가
베르너 콘체는 정당 시스템의 위기가 의회 정부 실패의 주요 원인이며, 사회민주당이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에 연립 정부가 붕괴되었다고 주장했다.[23] 콘체는 연립 정부 붕괴 직후 의회주의를 후퇴시키려는 시도는 없었으며, 브뤼닝은 독일 민주주의를 구하려고 노력했다고 보았다.
반면 카를 디트리히 브라허는 하인리히 브뤼닝의 총리직을 바이마르 공화국 해체의 첫 단계로 해석하고, 의회주의 실패의 책임을 대통령, 국방군, 대규모 농업 및 중공업 등 구 권력 엘리트들에게 돌렸다.[23] 브라허는 독일 인민당 지도부가 사회민주당의 지원을 받는 정부를 교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30년 3월 27일 사회민주당의 타협안 거부는 전술적 실수로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의회주의 실패의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연구에 따르면, 1929년 가을 이후 연립 정부의 모든 정당에서 타협하려는 의지가 약화되었고, 1930년 봄 힌덴부르크 대통령 주변에서 사회민주당을 반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반의회주의적 대안이 개발되어 국회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23] 따라서 브뤼닝 하의 첫 번째 대통령 내각은 연립 정부 실패의 결과이자, 계획된 대안 정부로서 실패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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