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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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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트비히 카스는 독일의 사제이자 정치인으로, 1881년 트리어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신학 및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아원 교장, 트리어 신학교 교수,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중앙당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국제 연맹 독일 대표로 활동했다. 1928년 중앙당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1933년 나치 정권 수립 과정에서 수권법 찬성에 관여하여 논란을 낳았다. 이후 바티칸으로 이주하여 교황 비오 12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 발굴에 기여했으며, 1952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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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0년 카스
직함
독일 중앙당 의장시작: 1928년 12월 8일
종료: 1933년 5월 5일
이전: 빌헬름 마르크스
이후: 하인리히 브뤼닝
국회 의원시작: 1920년
종료: 1933년
선거구: 코블렌츠-트리어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시작: 1919년 2월 6일
종료: 1920년 5월 21일
개인 정보
출생일1881년 5월 23일
출생지독일 제국 트리어
사망일1952년 4월 15일
사망지이탈리아 로마
안장지성 베드로 대성당
국적독일
소속 정당독일 중앙당
직업사제, 정치인
종교 정보
종교가톨릭
사제 서품일1906년

2. 초기 생애 및 학문 활동

루트비히 카스는 1881년 5월 23일 트리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트리어로마에서 역사와 교회법을 공부했다.[2] 신학교를 거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진학하여 190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신학 박사 학위를, 1909년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中井晶夫|나카이 아키오|1984|pp=26일본어

1910년 코블렌츠 근처 고아원 겸 기숙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프로이센의 가톨릭 교회 사법권"(''Die geistliche Gerichtsbarkeit der katholischen Kirche in Preußen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s Wesens der Monarchie'')을 출판하여 교회 역사, 교회법 및 그의 정치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1918년 트리어 신학교 교회법 교수로 임명되었고, "전쟁 실종과 국가법 및 교회법에 따른 재혼"(''Kriegsverschollenheit und Wiederverheiratung nach staatlichen und kirchlichen Recht'') 연구를 발표했다. 1919년 대학교 교회법 학과장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1]

2. 1. 출생과 성장

루트비히 카스는 1881년 5월 23일 트리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20]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진학하여 190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2. 사제 서품과 학위 취득

루트비히 카스는 1881년 5월 23일 트리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트리어로마에서 역사와 교회법을 공부했다. 신학교를 거쳐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진학하여 190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같은 해 신학 박사 학위를, 1909년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中井晶夫|나카이 아키오|1984|pp=26일본어

1910년에는 코블렌츠 근처의 고아원 겸 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에는 "프로이센의 가톨릭 교회 사법권"(''Die geistliche Gerichtsbarkeit der katholischen Kirche in Preußen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s Wesens der Monarchi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918년에는 트리어 신학교의 교회법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쟁에서 실종된 배우자의 재혼 문제를 다룬 "전쟁 실종과 국가법 및 교회법에 따른 재혼"(''Kriegsverschollenheit und Wiederverheiratung nach staatlichen und kirchlichen Recht'') 연구를 발표했다. 1919년에는 대학교의 교회법 학과장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1]

2. 3. 초기 경력

트리어에서 태어난 카스는 190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트리어와 로마에서 역사와 교회법을 공부했다. 1906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1909년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10년에는 코블렌츠 근처의 고아원 겸 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33년까지 그는 여가 시간을 학문 연구에 할애했다. 1916년에는 "프로이센의 가톨릭 교회 사법권"(''Die geistliche Gerichtsbarkeit der katholischen Kirche in Preußen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s Wesens der Monarchie'')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교회 역사, 교회법 및 그의 정치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1918년에는 교구로 파견되기를 요청했지만, 트리어의 미하엘 펠릭스 코룸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1918년 트리어 신학교의 교회법 교수로 임명했다. 그 직책에서 그는 전쟁에서 실종된 배우자의 재혼 문제를 다룬 "전쟁 실종과 국가법 및 교회법에 따른 재혼"(''Kriegsverschollenheit und Wiederverheiratung nach staatlichen und kirchlichen Recht'') 연구를 발표했다. 1919년에는 대학교의 교회법 학과장 자리를 제안받아 처음에는 이를 수락하려 했지만, 본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코룸 주교와 상의한 후 제안을 거절했다.[1]

카스는 1881년 5월 23일 트리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의 신학교를 거쳐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진학하여 190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신학 박사가 되었다. 1919년 1919년 독일 국민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1920년 독일 국회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1933년까지 의석을 유지했다. 또한, 주독일 Nuncio|교황 대사영어 파첼리 추기경(후의 교황 비오 12세)의 고문이 되었으며, 1921년에는 외무성에서 바티칸으로의 특별 사절로 임명되었다. 1924년에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을 "정치적 몽유병자"라고 비판했다.

3. 정치 입문 및 활동

1881년 5월 23일 트리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루트비히 카스는 1906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19년 1919년 독일 국민 의회 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국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주로 외교 정책 분야에서 활동했다. 1921년에는 외무성에서 바티칸으로의 특별 사절로 임명되기도 했다.

카스는 독일 중앙당 내 우파에 속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우파 내셔널리즘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 1924년에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을 "정치적 몽유병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중앙당의 의장을 지냈다.

3. 1. 정치 입문 배경

독일 혁명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카스는 중앙당에 입당했다. 1919년 바이마르 국민 의회에 선출되었고, 1920년에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3년까지 재임했다. 프로이센 주를 대표하는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카스는 국회의원으로서 외교 정책을 전문으로 했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국제 연맹의 독일 대표였다.[2]

자신을 "라인란트 애국자"로 여긴 카스는 독일 제국 내 라인란트 국가 창설을 지지했다. 1923년, 콘라트 아데나워 당시 쾰른 시장과 함께 라인란트의 독일 분리를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 점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1923년 12월 5일 국회 연설에서 이를 표명했다.

사회 민주당(SPD)에 대한 개인적인 유보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고 1918년 이후 SPD의 업적을 인정했다. 카스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부 장관의 화해 정책을 지지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선동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3. 2. 의회 활동

독일 혁명에 영향을 받은 카스는 정치에 참여하여 중앙당에 입당했다. 1919년 바이마르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0년에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3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그는 프로이센 주를 대표하는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카스는 외교 정책을 전문으로 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그는 국제 연맹의 독일 대표였다.[2]

카스는 자신을 "라인란트 애국자"로 여기며 독일 제국 내 라인란트 국가 창설을 지지했다. 1923년 위기의 해에 그는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라인란트의 독일 분리를 원하는 분리주의자들에 반대했다. 프랑스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와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1923년 12월 5일 국회 연설에서 이러한 바람을 표명했다.

사회 민주당(SPD)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과 별개로, 그는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고 1918년 이후 SPD의 업적을 인정했다. 카스는 외무부 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화해 정책을 지지했으며, 이 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선동을 비판했는데, 그는 이 선동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3. 3. 중앙당 내 활동

카스는 독일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중앙당에 입당했다.[2] 1919년 바이마르 국민 의회에 선출되었고, 1920년에는 국회에 선출되어 1933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2] 그는 프로이센 주를 대표하는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에도 선출되었다.[2] 국회의원으로서 카스는 외교 정책을 전문으로 했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국제 연맹의 독일 대표였다.[2]

카스는 자신을 "라인란트 애국자"라고 여기며 독일 제국 틀 내에서 라인란트 국가 창설을 옹호했다.[2] 1923년 위기의 해에 그는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라인란트의 독일 분리를 원하는 분리주의자들과 싸웠다.[2] 프랑스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와의 화해를 모색했으며, 1923년 12월 5일 국회 연설에서 이러한 바람을 표명했다.[2]

사회 민주당(SPD)에 대한 개인적인 유보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고 1918년 이후 SPD의 업적을 인정했다.[2] 카스는 외무부 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화해 정책을 지지했으며, 이 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선동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2]

1928년 12월,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중앙당 당수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당내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성직자인 그가 적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929년 프라이부르크의 가톨릭 대회에서 "위대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인"의 출현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같은 해에 중앙당 의원인 하인리히 브뤼닝이 총리가 되어 그의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존한 의회 무시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1931년 이후 브뤼닝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32년 5월 브뤼닝 내각 붕괴 후에는 "긴급한 다수파 공동체"의 결성을 호소했지만, 나치당까지 포함하는 대연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카스는 그 후에도 나치스와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나치당이 압도적인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그 입장마저 어려워졌다.

원만한 전권 위임법 가결을 위해 아돌프 히틀러 총리와 나치당은 중앙당의 찬성을 필요로 했다. 3월 22일 히틀러와 카스 사이에 회견이 열렸다. 카스는 집행 단계에서의 대통령 관여 보장, 감시 위원회 설치, 위임법 제외 항목 확정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대통령과 자신이 대립할 수 없고, 감시 위원회는 내각 내에 설치할 것이며, 중앙당의 지지 기반인 교회와의 관계나 교육 정책은 대상이 되지 않고, 주의 권한에 대한 침해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카스는 이 의견을 가지고 돌아와 다음날 3월 23일 오후 1시부터 중앙당 회의를 열어 법안 대처를 결정했다. 카스는 반대할 경우 "당에 불쾌한 결과"가 닥칠 우려가 있으며, 찬성하지 않아도 나치당은 법에 의하지 않은 수단으로 그 권한을 획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들도 대체로 같은 생각이었고, 중앙당은 찬성으로 결의했다.

3. 4. 라인란트 문제

카스는 자신을 "라인란트 애국자"라고 여기며 독일 제국 틀 내에서 라인란트 국가 창설을 옹호했다. 1923년 위기의 해에 그는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라인란트의 독일 분리를 원하는 분리주의자들과 싸웠다. 프랑스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와의 화해를 모색했으며, 1923년 12월 5일 국회 연설에서 이러한 바람을 표명했다.[2]

4. 교황청과의 관계

1920년, 에우제니오 파첼리가 바이에른 교황 대사이자 독일 교황 대사로 임명되면서 카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파첼리는 브레슬라우의 아돌프 베르트람 추기경에게 뮌헨의 교황 대사와 프로이센 주교 간의 연결 역할을 할 전문가를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베르트람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카스를 추천했다.[3]

교수, 국회의원, 교황 대사 고문으로서의 과중한 업무에 지쳐가던 카스는 1922년 교수직을 사임하려 했으나, 베르트람과 파첼리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파첼리의 요청에 따라 베르트람은 프란츠 루돌프 보르네바서 트리어 주교에게 카스를 대성당 사제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주교는 이를 거절했다. 카스는 모든 직책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보르네바서와 화해하고 1924년 4월 1일 대성당 참사회에 임명되었다.[1]

보르네바서 주교는 카스가 1924년 9월까지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후에는 사임하고 교구 내 행정 및 학문 연구에 집중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파첼리는 주교에게 카스의 사임을 강요하지 말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카스 박사의 영향력 있는 활동을 방해하고 교회적 이익의 효과적인 대표를 손상시킬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보르네바서는 법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지만, 파첼리의 요청에 굴복하여 카스에게 사임을 요구하지 않았다. 같은 해, 카스는 학문적 지위에서 사임했다.[1]

파스칼리나 레너트는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와 카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4. 1. 교황 대사 파첼리의 고문

1920년,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바이에른 교황 대사이자 독일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다. 파첼리는 브레슬라우의 아돌프 베르트람 추기경에게 뮌헨의 교황 대사와 프로이센 주교 간의 연결 역할을 할 전문가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고, 베르트람은 국가와 가톨릭 교회 간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카스를 추천했다.[3]

1925년, 파첼리가 프로이센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베를린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파첼리와 카스 사이의 협력은 더욱 긴밀해졌다. 이들은 공식적이지만 가깝고 지속적인 우정을 나누었으며, 이는 카스의 삶에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남았다. 카스는 이 지위에서 1929년 프로이센과의 프로이센 정교 협약 협상의 성공에 기여했다.

이후 파첼리는 바티칸으로 소환되어 국무원장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파첼리는 카스에게 로마에 머물 것을 요청했지만, 카스는 독일에서의 교회적 및 정치적 의무 때문에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는 로마를 자주 방문하여 파첼리와 함께 머물렀고, 라테란 조약 체결을 직접 경험했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제국 정교 협약 협상의 고문으로 활동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5]

1929년, 카스는 교황 대사 파첼리의 연설집을 출판하면서, 파첼리를 "천사(Angelus)가 아닌, 공증인(nuntius), ... 그의 인상적인 인격, 그의 사제적 언어, 대중 집회에서 그가 만들어낸 인기"라고 묘사했다.[6]

파스칼리나 레너트는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와 카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4. 2. 프로이센 정교 협약

1925년, 파첼리가 프로이센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그의 사무실을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파첼리와 카스 사이의 협력은 더욱 긴밀해졌다. 이러한 협력을 통해 공식적이지만 가깝고 지속적인 우정이 생겨났고, 이는 카스의 삶 전체에서 기본적인 요인 중 하나로 남았다.[5] 이 지위에서 카스는 1929년 프로이센과의 프로이센 정교 협약 협상의 성공적인 결론에 기여했다.

4. 3. 파첼리의 국무원장 임명 이후

1929년, 파첼리가 국무원장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바티칸으로 소환되면서, 카스에게 로마에 함께 머물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카스는 독일에서의 교회 및 정치적 의무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는 로마를 자주 방문하여 파첼리와 함께 머물렀으며, 라테란 조약 체결을 직접 경험하고 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제국 정교 협약 협상 고문으로 활동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5]

1929년, 카스는 교황 대사 파첼리의 연설집을 출판했다. 서문에서 카스는 파첼리를 "천사(Angelus)가 아닌, 공증인(nuntius)"이라고 묘사하며, "그의 인상적인 인격, 그의 사제적 언어, 대중 집회에서 그가 만들어낸 인기"를 언급했다.[6]

라이히스 콘코르다트 협상. 왼쪽부터 카스,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 대주교, 파첼리 추기경 국무장관(이후 교황 비오 12세),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사제, 내무 차관.


카스는 히틀러가 바티칸과의 정교 조약 체결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고, 1933년 4월 7일 로마로 떠나 이후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임 당수가 된 브뤼닝을 비롯한 당 동료들은 그가 도피했다고 비판했다. 브뤼닝은 카스를 "그토록 빨리 테베레 강(로마의 은유)으로 달려간 남자"라고 평가했다. 카스는 전 중앙당원이었으며 브뤼닝의 후임 총리가 되어 중앙당에서 추방당했던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와 회담하여 히틀러가 정교 조약 체결을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카스는 파펜의 비공식적인 협상 상대가 되었고, 추기경 국무장관이 된 파첼리의 조언자가 되었다. 그 결과, 1933년 7월 20일 바티칸과 독일 간에 라이히스 콘코르다트가 체결되었지만, 카스 자신은 중앙당의 전 당원, 독일 주교단, 그리고 나치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34년 3월 20일, 카스는 비오 11세에 의해 Prothonotary|수석서기관영어으로 임명되었고, 1936년 10월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가 교황 비오 12세로 선출되자,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발굴 계획을 세우고 카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발굴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카스는 비오 12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독일 국내의 반 나치 운동 세력과 접촉했다.

5. 중앙당 의장

루트비히 카스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중앙당의 의장을 지냈다. 중앙당 내 우파에 속했던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모든 세력을 막기 위해 당이 우파 내셔널리즘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20]

1930년 카스(오른쪽 하단)가 등장하는 중앙당 선거 포스터


1932년 5월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 붕괴 후, 카스는 "긴급한 다수파 공동체"의 결성을 호소했지만, 나치당을 포함하는 대연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카스는 그 후에도 나치스와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나치당이 압도적인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그 입장마저 어려워졌다.

아돌프 히틀러 총리와 나치당은 원만한 전권 위임법 가결을 위해 중앙당의 찬성이 필요했다. 1933년 3월 22일 히틀러와 카스 간의 회견에서 카스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 집행 단계에서 대통령 관여 보장
  • 감시 위원회 설치
  • 위임법 제외 항목 확정


이에 대해 히틀러는 대통령과 자신이 대립할 수 없고, 감시 위원회는 내각 내에 설치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한 중앙당의 지지 기반인 교회와의 관계나 교육 정책은 대상이 되지 않으며, 주의 권한에 대한 침해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9] 카스는 이 의견을 가지고 돌아와 다음날인 3월 23일 중앙당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카스는 반대할 경우 "당에 불쾌한 결과"가 닥칠 우려가 있으며, 찬성하지 않아도 나치당은 법에 의하지 않은 수단으로 그 권한을 획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들도 대체로 같은 생각이었고, 중앙당은 찬성으로 돌아설 것을 결의했다.[9]

5. 1. 의장 선출 배경

1928년 9월, 루트비히 카스는 당내 분열을 중재하고 주교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7] 이는 그가 성직자로서 당내 대립을 조정하는 데 적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카스는 의장직을 맡는 동안 중앙당의 우경화를 이끌었다. 그는 전국적인 협약(Concordat)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이 과정에서 점차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는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 통치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8]

1929년, 카스는 프라이부르크 가톨릭 대회에서 "위대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인"의 출현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5. 2. 당 운영 방향

1928년 9월, 카스는 당내 분열을 중재하고 주교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당의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7] 카스는 당을 이끌면서 점차 우경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전국적인 협약(Concordat)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결국 교회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권위주의 통치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8]

1929년 프라이부르크 가톨릭 대회에서 "위대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인"의 출현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1930년부터 카스는 중앙당 소속 하인리히 브뤼닝 행정부를 충실히 지지했다. 그러나 잦은 바티칸 방문으로 당 의장 업무에 지장을 받자, 1932년 5월에 해임된 브뤼닝에게 당 지도부를 넘겨주려 했지만, 브뤼닝은 이를 거절하고 카스에게 당 의장직을 계속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1932년, 카스와 브뤼닝은 중앙당을 이끌고 프란츠 폰 파펜에 반대하는 야당 역할을 했다. 카스는 파펜을 "중앙당의 에피알테스"라고 불렀다.[9] 카스는 국가사회주의자와의 협력을 통해 의회 재건을 시도했다.

5. 3. 브뤼닝 행정부 지지

1930년부터 카스는 중앙당 소속 하인리히 브뤼닝 행정부를 충실히 지지했다. 브뤼닝은 카스가 바티칸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당의 국회 의원 대표를 맡았다.[8] 1932년에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자 "헌법의 수호자"라고 칭하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8] 잦은 바티칸 방문으로 당 의장으로서의 업무에 지장을 받자, 카스는 힌덴부르크가 5월에 해임한 브뤼닝에게 당 지도부를 넘겨주려 했지만, 전 총리는 이를 거절하고 주교에게 남을 것을 요청했다.

1929년 중앙당 의원인 하인리히 브뤼닝이 총리가 된 후, 카스는 브뤼닝의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존한 의회 무시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1931년 이후 브뤼닝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7]

5. 4. 힌덴부르크 재선 운동

1932년, 카스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재선을 위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자 "헌법의 수호자"라고 칭하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8]

5. 5. 파펜과의 대립

1932년, 카스와 하인리히 브뤼닝은 중앙당을 이끌고 당에서 이탈한 프란츠 폰 파펜 신임 총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카스는 파펜을 "중앙당의 에피알테스"라고 불렀다.[9] 카스는 국가사회주의자와의 협력을 통해 의회를 재건하려 했다.

6. 나치 정권과의 관계

카스는 1928년 12월,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중앙당 당수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당내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성직자인 그가 적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11]。 1929년 프라이부르크 가톨릭 대회에서 "위대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인"의 출현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같은 해에 중앙당 의원인 하인리히 브뤼닝이 총리가 되자 그의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존한 의회 무시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1931년 이후 브뤼닝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1]。 1932년 5월 브뤼닝 내각 붕괴 후에는 "긴급한 다수파 공동체"의 결성을 호소했지만, 나치스를 포함하는 대연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카스는 그 후에도 나치스와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나치당이 압도적인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그 입장마저 어려워졌다.

6. 1. 히틀러 집권 초기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독일 국가 인민당(DNVP), 그리고 무소속 보수 세력 간의 연합을 기반으로 총리가 되자, 중앙당이 배제된 것에 대해 카스는 배신감을 느꼈다. 5월 3일 선거를 앞두고 카스는 새 정부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선거 운동을 벌였으나, 정부 정당들이 과반수를 확보한 후에는 파펜 부총리를 방문하여 이전의 적대감을 종식시키려 했다.[11]

1933년 3월 15일부터 카스는 헌법적 보장과 종교적 보장을 대가로 히틀러 행정부의 수권법[10] 지지를 옹호했다. 히틀러는 파펜을 통해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3월 21일과 22일, 중앙당 지도부는 히틀러와 조건에 대해 협상하여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서면으로 합의를 확인할 서한은 전달되지 않았다.

3월 23일 중앙당 의원들이 투표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었을 때, 카스는 "의원들의 불안정한 상태"를 고려하여 동료 당원들에게 법안 지지를 권고했다. 그는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의 영혼을 보존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수권법 거부는 의회 의원 자격과 당에 불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남은 것은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뿐이다. 3분의 2의 다수가 확보되지 않으면 정부의 계획은 다른 수단으로 관철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브뤼닝 전 총리 등 상당수의 의원들이 반대했다. 반대자들은 가톨릭 사회 가르침에 따라 혁명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히틀러의 임명과 대통령령으로 기본 권리가 정지되면서 "국가 혁명"이 이미 발생했으며, 수권법은 혁명적 힘을 담아 정부를 법적 질서로 되돌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앙당 의원 대다수는 카스의 제안을 지지했다. 브뤼닝과 그의 추종자들은 당의 지침을 존중하여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날, 국회는 격동적인 상황 속에서 소집되었다. 일부 SA 대원들은 경비를 섰고, 다른 사람들은 반대 의견을 위협하기 위해 건물 밖에 몰려 있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특히 중앙당의 감성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카스가 요구한 보장을 거의 그대로 포함했다. 카스는 "우려를 접어두고" 법안에 대한 중앙당의 지지를 표명하는 연설을 했고, 브뤼닝은 침묵을 지켰다. 국회가 저녁에 다시 소집되었을 때, 오토 벨스가 대표하는 SPD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투표는 아돌프 히틀러 독재 체제의 수립에서 중요한 단계였으며, 스스로의 종말을 위해 투표하는 민주주의의 주요 사례로 기억된다.

카스가 보장을 요구한 것과 나중에 국가 조약 협상에 참여한 것 때문에, 카스의 동의가 성좌와 새로운 정권 간의 모종의 거래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에 성좌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카스는 연초부터 벨기에에 속한 옛 독일 도시인 오이펜말메디에서 사제가 체포된 분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할 계획이었다. 이 여행은 정치적 사건들, 즉 먼저 히틀러의 임명, 3월 선거, 그리고 수권법에 의해 연기되었지만, 결정이 있은 지 하루 뒤인 3월 24일, 카스는 마침내 로마로 떠날 수 있었다. 3월 30일, 그는 수권법 협상에서 약속된 실무 위원회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로 소환되었다. 이 위원회는 히틀러와 카스가 의장을 맡았으며 추가 입법 조치에 대해 알릴 예정이었지만, 3월 31일, 4월 2일 (카스와 히틀러 간의 비공개 회담이 이어진 후), 4월 7일에만 세 번 회의를 가졌다.

아돌프 히틀러 총리와 나치당은 원만하게 전권 위임법을 가결하기 위해 중앙당의 찬성이 필요했다. 3월 22일 히틀러와 카스는 회견을 가졌다. 카스는 집행 단계에서의 대통령 관여 보장, 감시 위원회 설치, 위임법에서 제외 항목 확정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대통령과 자신이 대립할 수 없고, 감시 위원회는 내각 내에 설치할 것이라고 답변했으며, 중앙당의 지지 기반인 교회와의 관계나 교육 정책은 대상이 되지 않고, 주의 권한에 대한 침해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카스는 이 의견을 가지고 돌아와 다음날 3월 23일 오후 1시부터 중앙당 회의를 열어 법안 대처를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카스는 반대할 경우 "당에 불쾌한 결과"가 닥칠 우려가 있으며, 찬성하지 않아도 나치당은 법에 의하지 않은 수단으로 그 권한을 획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들도 대체로 같은 생각이었고, 중앙당은 찬성으로 돌아설 것을 결의했다.

6. 2. 수권법 협상 및 찬성

카스는 1933년 3월 15일부터 헌법적 보장과 종교적 보장을 대가로 히틀러 정부의 수권법[10] 지지를 옹호했다.[11] 히틀러는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를 통해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3월 21일과 22일 중앙당 지도부는 히틀러와 조건에 대해 협상하여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서면으로 합의를 확인할 서한은 전달되지 않았다.

3월 23일 중앙당 의원총회에서 카스는 "의원들의 불안정한 상태"를 고려하여 법안 지지를 권고했다. 그는 "우리의 영혼을 보존해야 하지만, 수권법 거부는 의회 의원 자격과 당에 불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남은 것은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3분의 2의 다수가 확보되지 않으면 정부가 다른 수단으로 계획을 관철할 것이며, 대통령도 수권법에 동의했다고 덧붙였다.

하인리히 브뤼닝 전 총리 등 일부 의원들은 반대했지만, 결국 대다수는 카스의 제안을 지지했다. 브뤼닝과 그의 추종자들은 당의 지침을 존중하여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날 국회에서 히틀러는 독일 문화에 기독교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중앙당의 감성을 달래는 연설을 했다. 카스는 "우려를 접어두고" 법안에 대한 중앙당의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오토 벨스가 대표하는 SPD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수권법에 찬성했다. 이 투표는 아돌프 히틀러 독재 체제 수립의 중요한 단계였으며, 민주주의가 스스로 종말을 위해 투표하는 주요 사례로 기억된다.

카스가 보장을 요구하고 국가 조약 협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의 동의가 성좌와 새로운 정권 간의 모종의 거래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좌가 이러한 거래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6. 3. 수권법 찬성에 대한 논란

수권법 찬성을 위한 중앙당의 주요 옹호자는 루트비히 카스였다. 1933년 3월 15일부터 그는 헌법적, 종교적 보장을 대가로 히틀러 행정부의 수권법을 지지했다. 히틀러는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를 통해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3월 21일과 22일 중앙당 지도부는 히틀러와 조건에 대해 협상하여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서면으로 합의를 확인할 서한은 끝내 전달되지 않았다.[11]

카스는 이러한 보장의 의심스러운 성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월 23일 중앙당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의 불안정한 상태"를 언급하며 법안 지지를 권고했다. 그는 "우리의 영혼을 보존해야 하지만, 수권법 거부는 의회 의원 자격과 당에 불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남은 것은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3분의 2의 다수가 확보되지 않으면 정부가 다른 수단으로 계획을 관철할 것이며, 대통령이 이미 수권법에 동의했음을 강조했다.[10]

그러나 하인리히 브뤼닝 전 총리, 요제프 비르트, 아담 슈테거발트를 포함한 상당수의 의원들은 카스의 노선에 반대했다. 이들은 가톨릭 사회 가르침에 따라 혁명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지지자들은 히틀러의 임명과 대통령령으로 이미 "국가 혁명"이 발생했으며, 수권법은 혁명적 힘을 억제하고 정부를 법적 질서로 되돌릴 것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중앙당 의원 대다수는 카스의 제안을 지지했고, 브뤼닝과 그의 추종자들도 당의 지침을 존중하여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날 3월 23일, 국회는 격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집되었다. SA 대원들이 경비를 서고, 일부는 건물 밖에서 반대 의견을 위협했다. 히틀러는 독일 문화에서 기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통해 중앙당의 감성을 달래려 했고, 카스가 요구한 보장을 거의 그대로 포함시켰다. 카스는 "우려를 접어두고" 법안에 대한 중앙당의 지지를 표명하는 연설을 했다. 결국 SPD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는 아돌프 히틀러 독재 체제 수립의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카스가 보장을 요구하고 나중에 국가 조약 협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의 동의가 성좌와 새로운 정권 간의 모종의 거래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에 성좌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카스는 아돌프 히틀러 총리와 나치당에게 원만한 전권 위임법 가결을 위해 중앙당의 찬성이 필수적임을 인지시켰다. 3월 22일 히틀러와 카스 간의 회견에서 카스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조건내용
대통령 관여 보장집행 단계에서 대통령의 관여를 보장할 것
감시 위원회 설치감시 위원회를 설치할 것
제외 항목 확정위임법에서 제외할 항목을 확정할 것



이에 대해 히틀러는 대통령과 자신이 대립할 수 없으며, 감시 위원회는 내각 내에 설치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한 중앙당의 지지 기반인 교회와의 관계나 교육 정책은 대상이 되지 않으며, 주의 권한에 대한 침해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카스는 이 의견을 가지고 돌아와 다음날 3월 23일 중앙당 회의를 소집하여 법안 대처를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카스는 반대할 경우 "당에 불쾌한 결과"가 닥칠 우려가 있으며, 찬성하지 않아도 나치당은 법에 의하지 않은 수단으로 그 권한을 획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들도 대체로 동의하여 중앙당은 찬성으로 돌아서기로 결의했다.

7. 라이히스콘코르다트

1933년 7월 20일, 바티칸과 독일 간에 라이히스콘코르다트(제국 콘코르다트)가 체결되었다. 이 협상에는 루트비히 카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스는 히틀러가 바티칸과의 정교 조약 체결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고 1933년 4월 7일 로마로 떠났고, 이후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카스는 후임 당수였던 하인리히 브뤼닝을 비롯한 당 동료들로부터 도망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브뤼닝은 카스를 "그토록 빨리 테베레 강(테베레 강, 로마의 은유)으로 달려간 남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로마로 가는 과정에서 카스는 전 중앙당원이자 브뤼닝의 후임 총리가 되어 중앙당에서 추방당했던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와 만나 히틀러가 정교 조약 체결을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카스는 파펜의 비공식적인 협상 상대가 되었고, 추기경 국무장관이 된 파첼리의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카스는 중앙당 전 당원, 독일 주교단, 그리고 나치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7. 1. 협상 과정

1933년 4월 7일, 카스는 3차 실무위원회 회의 직후 베를린을 떠나 로마로 향했다. 다음 날 뮌헨에서 기차를 갈아타면서 식당칸에서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을 우연히 만났다. 파펜은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로 스키 휴가를 떠나는 것이었지만, 실제 목적지는 바티칸 시국이었으며, 독일 정부를 대신하여 라이히스콘코르다트를 제안할 예정이었다. 카스와 파펜은 함께 여행하며 기차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했다.[12]

로마에 도착한 후, 카스는 4월 9일 파첼리에게 처음 접견을 받았다. 하루 뒤, 파펜은 파첼리와 아침 회의를 갖고 히틀러의 제안을 전달했다. 파첼리는 이후 교회-국가 관계에 대한 전문 지식으로 알려진 카스에게 프란츠 폰 파펜과 함께 조항 초안을 협상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12]

이러한 논의로 인해 로마 체류가 길어지자, 독일에서는 카스가 독일 국회의원이자 바티칸의 조언자라는 점에서 이해 상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국 5월 5일 카스는 당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독일 정부의 압력으로 콘코르다트 협상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12]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와 단체의 정치 참여 배제를 막으려 했지만, 파첼리는 모든 사제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중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바티칸은 종교 및 자선 분야로의 제한을 받아들였다. 로마 협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중앙당은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해산되었고, 이로써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12]

오스카 할레키에 따르면, 카스와 파첼리는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단체로서 독일의 공적 생활에서 배제된 것을 고려하여, 교황청이 국민 생활에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보장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12]

카스는 히틀러가 바티칸과의 정교 조약 체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여 4월 7일에 로마로 출발한 후 귀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임 당수가 된 브뤼닝을 비롯한 당 동지들은 그가 탈주했다고 비판했다. 브뤼닝은 카스를 "그토록 빨리 테베레 강(테베레 강, 로마의 은유)으로 달려간 남자"라고 평했다. 이 과정에서 카스는 전 중앙당원이자 브뤼닝의 후임 총리가 되어 중앙당에서 추방당했던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와 회담하여 히틀러가 정교 조약 체결을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카스는 파펜의 비공식적인 협상 상대가 되었고, 추기경 국무장관이 된 파첼리의 조언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7월 20일에 바티칸과 독일 간에 라이히스 콘코르다트가 체결되었지만, 카스 자신은 중앙당의 전 당원이나 독일의 주교단, 그리고 나치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7. 2. 콘코르다트 체결과 그 의미

1933년 7월 20일 로마에서 열린 ''Reichskonkordat'' 조인식 (왼쪽부터: 독일 고위 성직자 루트비히 카스, 독일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 특별 교회 사무 차관 주세페 피자르도, 국무원 추기경 에우제니오 파첼리,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그리고 ''Reichsministerium des Inneren'' [내무부]의 일원 루돌프 부트만).


1933년 4월 7일, 3차 실무위원회 회의 직후 카스는 베를린을 떠나 로마로 향했다. 다음 날 뮌헨에서 기차를 갈아탄 후, 식당칸에서 부총리 파펜을 우연히 만났다. 파펜은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로 스키 휴가를 떠났지만, 실제 목적은 바티칸 시국에서 자신의 정부를 대신하여 라이히스콘코르다트(제국 콘코르다트)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카스와 파펜은 함께 여행하며 기차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몇 차례 논의했다.[12]

로마에 도착한 후, 카스는 4월 9일 파첼리에게 처음 접견을 받았다. 하루 뒤, 파펜은 파첼리와 아침 회의를 갖고 히틀러의 제안을 전달했다. 파첼리는 이후 교회-국가 관계에 대한 전문 지식으로 알려진 카스에게 파펜과 함께 조항 초안을 협상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12]

이러한 논의로 인해 카스의 로마 체류가 길어졌고, 독일에서는 그가 독일 국회의원이자 바티칸의 조언자였기 때문에 이해 상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5월 5일 카스는 당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독일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콘코르다트 협상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와 단체의 정치 참여 배제를 막으려 했지만, 파첼리는 모든 사제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중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국가에서 교회의 입장이다. 결국, 바티칸은 종교 및 자선 분야로의 제한을 받아들였다.[12] 로마 협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중앙당은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해산되었고, 이로써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12]

오스카 할레키에 따르면, 카스와 파첼리는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단체로서 독일의 공적 생활에서 배제된 것을 고려하여, 교황청이 국민 생활에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보장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히틀러가 처음부터 교회를 근절하려는 전쟁 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었다고 주장한다.[13]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는 선출 3일 후인 1939년 3월 6일 독일 추기경들을 만났다. 그는 교회에 대한 끊임없는 나치 공격과 그의 항의에 대한 나치의 대응을 언급하며, "그들은 항상 '유감스럽지만, 콘코르다트가 아직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비준 후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고 악화되었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은 고무적이지 않다."라고 말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은 "독일의 주교와 신자들과 연결하기 위해"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지속했다.[15]

콘코르다트의 결과로, 교회는 더 많은 교사, 더 많은 학교 건물, 그리고 가톨릭 학생들을 위한 더 많은 자리를 얻었다. 동시에 유대인들이 매우 다르게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파첼리와 교황 비오 11세는 잘 알고 있었다. 카스의 권유로 중앙당이 수권법에 찬성한 것은 히틀러의 폭정을 수립하는 데 기여한 행위였다.[16]

카스는 히틀러가 바티칸과의 정교 조약 체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여 1933년 4월 7일에 로마로 출발하여 이후 귀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임 당수가 된 브뤼닝을 비롯한 당 동지들은 그가 탈주했다고 비판했다. 브뤼닝은 카스를 "그토록 빨리 테베레 강(테베레 강, 로마의 은유)으로 달려간 남자"라고 평했다. 이 과정에서 카스는 전 중앙당원으로, 브뤼닝의 후임 총리가 되어 중앙당에서 추방당했던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와 회담하여 히틀러가 정교 조약 체결을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카스는 파펜의 비공식적인 협상 상대가 되었고, 추기경 국무장관이 된 파첼리의 조언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1933년 7월 20일에 바티칸과 독일 간에 라이히스 콘코르다트가 체결되었지만, 카스 자신은 중앙당의 전 당원이나 독일의 주교단, 그리고 나치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8. 바티칸에서의 활동

카스는 콘코르다트 협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콘코르다트 이행을 감독하는 정보 사무소를 이끌고자 했던 카스의 희망은 베르트람 추기경에 의해 좌절되었다. 베르트람은 카스의 정치적 과거를 문제 삼아 그를 부적절한 인물로 여겼다.[17]

카스의 행동은 동료 당원들 사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카스가 갑작스럽게 로마로 떠난 것을 탈당 행위로, 콘코르다트 협상 참여를 당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했다. 하인리히 브뤼닝은 망명 중 쓴 회고록에서 카스를 비난했는데, 이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베르트람은 카스에게 명예직을 제안했고, 카스는 1934년 3월 20일 교황 원로원으로, 1935년 4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직자로 임명되었다. 한편, 트리어 교구는 카스의 트리어 대성당 참사회 직위를 박탈했다.[17]

망명 생활 중 카스는 향수병과 동료 당원 및 독일 주교단의 냉대로 고통받았다. 1936년 8월 20일, 카스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성직자회의 경제관이자 서기로 임명되었다.[17]

1939년 파첼리가 교황 비오 12세로 선출된 후, 카스는 독일 저항 세력과 연합국 간의 비밀 협상인 '바티칸 교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요제프 뮐러는 한스 오스터 등의 지시를 받고 로마로 와서 카스, 로베르트 라이버와 협의했다.[18]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고고학적 발굴을 추진하며 카스에게 책임을 맡겼다. 1950년,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대성당 교황 제단 아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비 결과를 발표했다.[18]

1952년 카스는 로마에서 사망하여 바티칸의 캄포 산토 묘지에 처음 안장되었다. 이후 비오 12세는 카스를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도록 명했다.

8. 1. 바티칸으로의 이주

카스는 히틀러가 바티칸과의 정교 조약 체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여 1933년 4월 7일에 로마로 떠났고 이후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임 당수가 된 하인리히 브뤼닝을 비롯한 당 동료들은 카스가 도망갔다고 비판했다. 브뤼닝은 카스를 "그토록 빨리 테베레 강(테베레 강, 로마의 은유)으로 달려간 남자"라고 평가했다.[17] 카스는 로마에서 전 중앙당원이자 브뤼닝의 후임 총리였으며, 중앙당에서 추방당했던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와 만나 히틀러가 정교 조약 체결을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카스는 파펜의 비공식적인 협상 상대가 되었고, 추기경 국무장관이 된 파첼리의 조언자 역할도 맡았다.[17] 그 결과, 1933년 7월 20일에 바티칸과 독일 간에 라이히스 콘코르다트가 체결되었지만, 카스는 전 중앙당원, 독일 주교단, 나치 정부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17]

1934년 3월 20일, 카스는 비오 11세에 의해 Prothonotary|수석서기관영어으로 임명되었고, 1936년 10월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사제가 되었다. 1939년 파첼리가 비오 12세로 교황에 선출되자,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발굴 계획을 세우고 카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발굴을 통해 사도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카스는 비오 12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독일 국내 반 나치 운동 세력과 접촉하기도 했다.

카스는 1952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8. 2. 교황청 내 직책

카스는 1934년 3월 20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원로원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4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직자가 되었다. 한편, 트리어 교구는 카스에게 트리어 대성당 참사회의 직위를 박탈했다.[17]

1936년 8월 20일, 카스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성직자회의 경제관이자 서기로 임명되었다.[17]

1939년 파첼리가 교황 비오 12세로 선출된 후, 카스는 독일 저항 세력이 교황 비오 12세의 중재를 통해 연합국과 협상하려 했던 비밀 '바티칸 교환'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요제프 뮐러는 한스 오스터 또는 한스 폰 도나니의 지시를 받고 베를린에서 로마로 와서 뮐러와 교황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카스 또는 교황 비서 파테르 로베르트 라이버와 협의했다.[18]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아래의 고고학적 발굴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하고 카스에게 책임을 맡겼다. 1950년 성년의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대성당 교황 제단 아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18]

8. 3.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카스는 독일 저항 세력이 교황 비오 12세의 중재를 통해 연합국과 협상하려 했던 비밀 '바티칸 교환'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요제프 뮐러는 한스 오스터 또는 한스 폰 도나니의 지시를 받고 베를린에서 로마로 와서 뮐러와 교황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카스 또는 교황 비서 파테르 로베르트 라이버와 협의했다.[17] 이러한 교환은 카사블랑카 회의 이후인 1943년에 재개되었지만, 어느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1939년 파첼리가 비오 12세로 선출된후 교황이 되었다.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굴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자로 카스를 임명했다. 이 발굴을 통해 사도베드로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카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오 12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독일 국내의 반 나치 운동 세력과 접촉했다.

8. 4. 성 베드로 대성당 발굴

1939년, 비오 12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굴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자로 카스를 임명했다.[18] 이 발굴을 통해 사도베드로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1950년 성년의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대성당 교황 제단 아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비 결과를 발표했다.[18] 카스는 1950년 이후에도 발병하는 질병에도 불구하고 발굴을 계속했다.[18]

9. 사망과 유산

루트비히 카스는 1952년 4월 15일 로마에서 사망했다.[20] 그는 생전에 다양한 주제로 저술 활동을 했으며, 일부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9. 1. 죽음

1952년 4월 15일 로마에서 사망했다.[20]

9. 2. 저술 활동

루트비히 카스는 학자이자 다작의 작가로서, 혼인법, 교육 개혁, 윤리 및 조직 신학, 교회법, 전쟁 포로, 에우제니오 파첼리의 연설, 역사적 문제, 바이마르 공화국 및 라이히스코(Reichskonkordat)의 정책 문제 등 라틴어 또는 독일어로 된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참조

[1] 서적 Das Reichskonkordat vom 20.7.1933
[2] 웹사이트 Biographie: Ludwig Kaas, 1881-1952 http://www.dhm.de/le[...]
[3] 서적 Die Kirchen und das Dritte Reich
[4] 서적 Ich durfte ihm dienen
[5] 서적 Das Reichskonkordat vom 20.7.1933
[6] 서적 Eugenio Pacelli, Erster Apostolischer Nuntius beim Deutschen Reich, Gesammelte Reden
[7] 서적 Die Kirchen und das Dritte Reich Ullstein 1986
[8] 서적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Penguin Press 2003
[9] 서적 Die Kirchen und das Dritte Reich Ullstein 1986
[10] 서적 The Killing Trap: Genocide in the Twentie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10-21
[11] 서적 Memoirs 1918 - 1934
[12] 서적 Pius XII 1951
[13] 서적 Pius XII 1951
[14] 간행물 Proces Verbal de la 1. conference, Lettres de Pie XII aux Eveques Allemands
[15] 간행물 Proces Verbal de la 2. conference, Lettres de Pie XII aux Eveques Allemands
[16] 논문 Review by John Cornwell of Hitler's Priests: Catholic Clergy and National Socialism 2009
[17] 서적 Das Reichskonkordat vom 20.7.1933
[18] 서적 Pio XII
[19] 서적 Ich durfte ihm dienen
[20] 서적 독일 현대사: 1871년 독일제국 수립부터 현재까지 미지북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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