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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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는 제3대 포틀랜드 공작으로, 1738년 4월 14일에 태어나 1809년 10월 30일에 사망했다. 그는 1761년 영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762년 포틀랜드 공작 작위를 계승하여 영국 상원으로 옮겨갔다. 그는 휘그당의 주요 인물로, 1765년 궁내부 장관, 1782년 아일랜드 총독을 역임했으며, 1783년에는 명목상의 재무부 제일경 (수상)을 맡았다. 1794년부터 1801년까지 내무 장관을 지냈고, 1807년부터 1809년까지 두 번째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국내 정책, 아일랜드 문제, 그리고 선거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766년에 도로시 캐번디시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으며, 그의 이름은 자메이카의 포틀랜드 교구, 런던의 포틀랜드 플레이스 등 여러 지역에 사용되었다.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는 1738년 4월 14일 버킹엄셔주 불스트로드 공원에서 윌리엄 벤팅크, 제2대 포틀랜드 공작과 마거릿 캐번디시-할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대영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으며,[2] 어머니와 외할머니(초대 뉴캐슬 공작존 홀리스의 외동딸)로부터 많은 영지를 상속받았다.[3][4]
로킹엄 경의 휘그당과 연관되어 궁내장관을 역임한 포틀랜드는 다른 보수적인 휘그당원들처럼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5] 그는 이 문제로 찰스 제임스 폭스와 결별하고 1794년 소 피트 정부에 내무 장관으로 합류했다. 그는 그 직책에서 1800년 연합법 통과를 위해 종종 비밀리에 이루어진 후원과 재정적 유인책의 관리를 감독했다.[18]
2. 초기 생애와 교육
1757년 12월, 19세의 티치필드 경(벤팅크의 당시 작위)은 스토몬트 경에게 1년 동안 바르샤바에서 학업을 받도록 보내졌으며, 스토몬트의 비서인 벤자민 랑글루아가 동행했다. 스토몬트는 그의 장비에 대한 모든 지출을 감독했고, 랑글루아는 현지 교사를 고용하여 십 대의 티치필드의 학업을 지도했다. 그가 그에게 읽도록 지시한 책은 고대사, 근대사, 일반 법이었다.[7]
1759년, 티치필드는 랑글루아와 함께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로 여행하여 토리노에서 1년을 보낸 후 피렌체로 갔다. 스토몬트가 1763년 빈 주재 대사로 임명되자 랑글루아도 대사관 서기관으로 함께 갔다.[8]
2. 1. 가문 배경
윌리엄 헨리 캐번디시벤팅크는 1738년 4월 14일 버킹엄셔주 불스트로드 공원에서 윌리엄 벤팅크, 제2대 포틀랜드 공작과 마거릿 캐번디시-할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대영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으며,[2] 어머니와 외할머니(초대 뉴캐슬 공작존 홀리스의 외동딸)로부터 많은 영지를 상속받았다.[3][4] 1755년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 중 외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성에 '캐번디시'를 추가했지만, 이 변경이 국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된 것은 1801년 10월 5일이었다.
1747년부터 1754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후, 1755년 3월 4일에 옥스퍼드 대학교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57년 2월 1일에 M.A. 학위를 취득했다.[6][5] 1757년 12월 그랜드 투어를 떠나 스토몬트 경에게 1년 동안 바르샤바에서 학업을 받도록 보내졌으며, 스토몬트의 비서인 벤자민 랑글루아가 동행했다. 1759년부터 1760년에 걸쳐 랑글루아와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토리노에 1년 동안 체류한 후 피렌체로 향하여 1761년 10월에 귀국했다.[7][8]
2. 2. 교육 과정
웨스트민스터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을 받았다. 1757년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6][5] 1757년 12월, 19세의 나이에 그랜드 투어를 떠나 바르샤바에서 1년 동안 스토몬트 경에게 학업을 배웠다.[7] 1759년에는 랑글루아와 함께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로 가서 토리노에서 1년을 보낸 후 피렌체로 갔다.[8]
3. 정치 경력
1800년 연합법 통과를 위해 노력했으나,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관련하여 국교회로 만들려는 시도는 조지 3세와 애딩턴의 설득으로 좌절되었다.[18] 1803년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포틀랜드는 소 피트의 재집권을 지지했다. 1804년 소 피트가 내각을 조직했고, 포틀랜드 공작은 추밀원 의장직을 계속 유지했다. 소 피트는 포틀랜드 공작 외에 찰스 제임스 폭스, 윌리엄 그렌빌도 입각시키려 했으나, 조지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포틀랜드 공작은 조지 3세의 결정을 환영했다.
1805년, 소 피트가 애딩턴을 입각시키려 하자 포틀랜드 공작은 추밀원 의장 자리를 애딩턴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무임소 장관으로 옮겼다.
3. 1. 초기 정치 활동
포틀랜드는 1761년 영국 의회에서 웨블리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부친의 뒤를 이어 포틀랜드 공작이 되면서 귀족원에 입성했다.[5] 그는 로킹엄 경의 귀족적인 휘그당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로킹엄의 첫 번째 정부 (1765–1766)에서 궁내장관을 역임했다.[5]
1761년 영국 총선에서 웨오블리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영국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762년 5월 1일에 부친이 사망하자 포틀랜드 공작위를 계승하여[28] 영국 상원으로 옮겨갔다. 하원 의원으로서의 재임 기간이 짧았고, 투표와 연설 기록도 없었다.
상원으로 이적할 당시 24세에 불과했지만,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평판에 흠이 없었기 때문에 휘그당의 여러 파벌에서 환영받아 로킹엄 후작 찰스 왓슨-웬트워스의 파벌(로킹엄파)에 들어갔다.
1765년 7월 제1차 로킹엄 후작 내각이 성립되자 궁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7월 10일에 추밀원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23] 1766년 6월 5일,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4] 1766년 3월에 로킹엄 후작 내각이 무너지자 포틀랜드 공작도 사임하려 했지만, 로킹엄파와 수상 초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와의 교섭역으로 유임을 요청받아 이를 받아들였다. 11월에 교섭이 실패로 끝나 포틀랜드 공작이 소수의 귀족과 함께 관직을 사임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채텀 백작을 철저히 혐오하게 되었고 로킹엄파에 완전히 가담하게 되었으며, 궁내부 장관과 같은 의례적이고 실권이 없는 관직 임명을 거부하게 되었다.
사임 후에는 상원에서 야당으로 돌아서 제1재무경 제3대 그래프턴 공작 오거스터스 피츠로이를 격렬히 비판했다. 당시 그래프턴 공작을 비판하던 익명의 작가 주니우스의 정체로 의심받았지만, 영국 인명 사전은 이 의심을 "터무니없는 일"(absurdly영어)이라고 평했다. 로킹엄 파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로킹엄 후작이 수상을 맡아야 한다는 입장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장기간 야당으로 머물게 되었지만, 동시에 자파의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컴벌랜드의 칼라일 선거구는 전통적으로 칼라일 백작 가문 (하워드 성), 머스그레이브 가문과 로더 가문 사이에서 경쟁이 벌어졌으며,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이 작위를 계승했을 당시에는 로더 가문의 당주인 제5대 준남작 서 제임스 로더(후의 초대 론즈데일 백작)가 1석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1석의 지배도 노리고 있었다.[35] 로더는 1761년에 토리당의 제3대 뷰트 백작 존 스튜어트의 딸과 결혼했으며,[36] 칼라일에서는 자신이 1759년부터 컴벌랜드 령을 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36] 자신의 측근을 부령관, 칼라일 시 법원, 칼라일 자치체(corporation영어)에 배치하는 등 지배를 착실하게 진행했다.[35]
포틀랜드 공작은 로더의 자치체 지배를 깨뜨릴 수 없었기에, 대신 자유 시민(freemen영어)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1768년 영국 총선에서 로더가 칼라일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스코틀랜드인 존 엘리엇과 조지 존스턴을 지지하는 실책을 범했기에 2석 모두 포틀랜드 공작이 지지하는 후보 (포틀랜드 공작의 동생 에드워드 벤팅크 경과 머스그레이브 가문의 조지 머스그레이브)가 당선되었다.[35]
칼라일 백작 가문은 1769년에 5대 백작 프레데릭 하워드가 성년이 되자 반격을 시도, 1774년 영국 총선에서는 3월에 포틀랜드 공작과 로더가 1석씩 지명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진 상황에 끼어들어, 두 사람의 지명에 대한 승인을 지연시킨 결과 포틀랜드 공작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냈고, 그 결과 칼라일 백작과 로더가 1석씩 지명했다.[35]
1780년 영국 총선에서는 하워드 가문의 본가인 노퍽 공작 가문이 제5대 칼라일 백작 가문을 제치고 개입하면서 칼라일 백작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서리 백작 찰스 하워드가 당선되었다.[35] 이후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은 칼라일 선거구에 개입하는 일이 없어졌다.[35]
3. 2. 아일랜드 총독 (1782년)
포틀랜드는 제2차 로킹엄 내각 (1782년 4월–8월)에서 아일랜드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영국 정부로 인해 수년간의 강압과 과세 이후 화해 조치를 강력하게 요구받았다.[14] 포틀랜드는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보고를 받는 내무 장관인 셸번 백작의 반대를 극복하고 선언법을 폐지하고 포이닝스 법을 수정하도록 의회를 설득했다.[15]
포틀랜드 공작이 아일랜드 총독에 취임했을 때는 영국의 미국 독립 전쟁에서의 패배가 확정된 직후였으며, 아일랜드 자치를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 애국당은 기회를 틈타 아일랜드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했다. 포틀랜드 공작은 이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자치권을 부여하고 어떤 대가를 얻어내려고 했지만, 셸번 백작과 조지 3세가 방해했기 때문에, 결국 아일랜드에 대한 양보만 이루어졌고, 그레이트 브리튼 측에 대한 반대급부는 아무것도 없었다.
3. 3. 제1차 포틀랜드 내각 (1783년)
1782년 7월, 로킹엄 후작이 사망하면서 휘그당은 다시 분열되었다.[39] 국왕 조지 3세는 후임 총리로 내무장관이었던 셸번 백작을 임명했지만, 외무 장관 찰스 제임스 폭스는 셸번 백작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하여, 존 캐번디시 경과 함께 포틀랜드 공작을 총리로 앉히도록 조지 3세에게 요구했다.[39] 이 요구가 거부되자 폭스와 캐번디시는 사임했고, 곧이어 포틀랜드 공작, 에드먼드 버크, 리처드 브린즐리 셰리던도 사임했다.[39]
셸번 백작은 소 피트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려 했지만, 노스 경이 폭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셸번 백작 내각은 서민원(하원)과 귀족원(상원) 모두에서 소수파로 남게 되었고, 결국 1783년 4월에 사임했다.[39]
셸번 백작이 사임함에 따라, 찰스 제임스 폭스(외무부 장관)와 노스 경 (내무부 장관)의 연립 정권 (폭스-노스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고, 포틀랜드 공작은 명목상의 재무부 제일경(수상)을 맡았다.[40][39] 포틀랜드 공작은 "양측의 정책 차이는 대미 전쟁의 종결과 함께 소멸했다"고 설득하여, 이전까지 적대 관계였던 로킹엄파와 노스파의 연립 내각 성립에 기여했다.
이 내각 시기에 미국 독립 전쟁의 강화 조약인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지만,[27] 그 외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정책은 폭스의 동인도 법안뿐이었다.[41] 이 법안은 하원에서는 큰 차이로 가결되었지만, 귀족원에서는 템플 백작의 협박[42]에 의해 1783년 12월 17일 찬성 76표, 반대 95표로 부결되었고, 조지 3세는 다음날 연립 내각을 파면했다.[41]
1784년 영국 총선에서 연립 내각 지지자들의 다수가 낙선한 것은 폭스, 노스, 포틀랜드의 인기가 없음을 보여주었지만, 내각의 붕괴로 인해 포틀랜드 공작은 다시 정쟁의 희생양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포틀랜드 공작의 수상 재임은 휘그당 복권의 절대 조건이 되었다.
직책 | 이름 |
---|---|
재무부 제일경 | 포틀랜드 공작 |
추밀원 의장 | 스토먼트 경 |
국새 상서 | 칼라일 경 |
내무부 장관 | 노스 경 |
외무부 장관 | 찰스 제임스 폭스 |
해군본부 제일경 | 케펠 자작 |
재무장관 | 존 캐번디시 경 |
병기국 총감 | 타운젠드 자작 |
아일랜드 총독 | 노싱턴 경 |
대법관 | 대법관 직무 위임 |
3. 4. 야당 시절
소 피트 내각 기간 동안 포틀랜드 공작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39] 그는 로킹엄 후작의 파벌인 로킹엄파를 계승했다. H. 모스 스티븐스에 따르면, 포틀랜드 공작은 뛰어난 연설가는 아니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인품, 높은 가문, 많은 재산 등 로킹엄 후작과 비슷한 특징을 지녔다.[39] 그러나 야당 지도자로서 약했고, 의회 전술은 찰스 제임스 폭스와 에드먼드 버크에게 맡기고, 자신은 불스트로드 파크 저택에서의 생활과 취미인 음악에 전념했다.[39] 또한 선거 개혁과 심사법 폐지에 반대하는 등 당내 급진파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39]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소 피트와 폭스처럼 혁명에 동조했지만, 혁명이 급진화되자 다른 대지주들처럼 혁명이 영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39] 휘그당 내에서도 1791년 5월 버크가 폭스를 비판하고, 1792년 4월 의회 개혁을 목표로 하는 국민의 벗 협회가 설립되는 등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39]
소 피트는 알렉산더 웨더번을 중재자로 하여 포틀랜드 공작과 협상해 포틀랜드 공작과 폭스를 이간질하려 했지만, 포틀랜드 공작은 폭스의 입각을 연립 내각의 전제로 했기 때문에 교섭이 난항을 겪었다.[39] 결국 소 피트의 계획은 실패했고, 프랑스 혁명과 함께 휘그당은 분열을 심화시켰다.[39] 포틀랜드 공작은 보수파였지만, 가능한 많은 의원을 자기 파로 끌어들이기 위해 폭스와의 결렬을 1794년 1월까지 지연시켰다.[39]
야당 시절 포틀랜드 공작은 정부로부터의 은혜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가터 훈장 수여도 사퇴했지만,[39] 1792년 9월 27일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7일에는 민법학 박사(D.C.L.) 명예 학위를 받았다.[32]
3. 5. 내무 장관 (1794-1801년)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많은 보수적인 휘그당원처럼, 포틀랜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여겼으며, 이 문제로 찰스 제임스 폭스와 결별하고 1794년 소 피트 정부에 내무 장관으로 합류했다. 그는 그 직책에서 1800년 연합법 통과를 확보하기 위해 종종 비밀리에 이루어진 후원과 재정적 유인책의 관리를 감독했다.[18]내무 장관 취임 전후로 Aliens Act 1793|1793년 외국인법영어, 1795년 반역법, Seditious Meetings Act 1795|1795년 선동 집회법영어이 제정되어 내무 장관의 재량권이 확대되었다. H. Morse Stephens|H. 모스 스티븐스영어는 『영국인명사전』에서 포틀랜드 공작이 재량권을 남용하지 않고 정부의 악평을 초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정부에 대한 분노가 최대 "의회 개회식으로 향하는 국왕의 마차가 창문을 깨는" 정도였다고 하며, 초대 시드머스 자작헨리 애딩턴의 내무 장관 재임 기간 (1812년 – 1822년)에 피털루 학살 (1819년)이나 Cato Street Conspiracy|캐토 스트리트 음모영어가 일어난 것과 대조적이라고 했다.
아일랜드와 관련해서는 Irish Rebellion of 1798|1798년 아일랜드 반란영어이 발발하고, 1800년 연합법이 가결되는 등 큰 사건이 잇따랐다. 특히 후자는 연합 법안이 1799년에 한 번 부결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부결을 피하기 위해 포틀랜드 공작은 아일랜드 의회 의원을 대대적으로 매수하여, 1799년 10월부터 1800년 5월까지 30850GBP가 그레이트브리튼에서 아일랜드로 보내졌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Civil List Act|왕실비 법영어에 위반되는 행위이다.
3. 6. 추밀원 의장 (1801-1805년)
헨리 애딩턴 내각에서 추밀원 의장을 역임했다.[26][28] 1800년 연합법 통과를 위해 노력했으나,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관련하여 국교회로 만들려는 시도는 조지 3세와 애딩턴의 설득으로 좌절되었다.[18] 1803년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소 피트의 재집권을 지지했다.
1804년 소 피트는 을 조직했고, 포틀랜드 공작은 추밀원 의장직을 계속 유지했다. 소 피트는 포틀랜드 공작 외에 찰스 제임스 폭스, 초대 그렌빌 남작윌리엄 그렌빌도 입각시키려 했으나, 조지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포틀랜드 공작은 조지 3세의 결정을 환영했다.
1805년, 소 피트가 애딩턴을 입각시키려 하자 포틀랜드 공작은 추밀원 의장 자리를 애딩턴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무임소 장관으로 옮겼다.
3. 7. 제2차 포틀랜드 내각 (1807-1809년)
1807년 3월, 모든 재능 내각이 붕괴된 후, 소 피트의 지지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포틀랜드는 조지 캐닝, 캐슬리 경, 호크스베리 경, 스펜서 퍼시벌 등 분열된 각료 집단을 이끄는 명목상의 지도자가 되었다.[45]포틀랜드의 두 번째 정부 시기에는 영국이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지만, 반도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조지 캐닝과 캐슬레이 경은 서로 앙숙이었다.[18] 캐닝이 캐슬레이를 파면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하자, 포틀랜드 공작은 캐슬레이의 파면을 승낙했다. 그러나 결정을 미루고 시간을 끌었다. 결국 캐닝과의 교섭 사실이 캐슬레이에게 알려졌고, 두 사람은 캐슬리-캐닝 결투를 벌인 후 모두 사임했다.
1809년 말, 포틀랜드는 건강이 악화되고 내각이 흔들리자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곧 사망했다.
제2차 포틀랜드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재무부 제1재상 | 포틀랜드 공작 |
대법관 | 엘던 경 |
추밀원 의장 | 캠던 경 |
국새상서 | 웨스트모어랜드 경 |
내무부 장관 | 호크스베리 경(1808년 이후 리버풀 경) |
외무부 장관 | 조지 캐닝 |
육군 및 식민부 장관 | 캐슬레이 경 |
해군 본부 제1경 | 멀그레이브 경 |
재무부 장관 겸 랭커스터 공작령 재상 | 스펜서 퍼시벌 |
병기총감 | 채텀 경 |
무역 위원회 의장 | 배서스트 경 |
;변동 사항
- 1809년 7월 — 해로우비 경(통제 위원회 의장) 및 그랜빌 레베슨고어 경(육군 장관)이 내각에 합류.
4. 선거 활동
1761년 영국 총선에서 Weobley영어 선거구에 출마하여 영국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762년 부친이 사망하자 포틀랜드 공작위를 계승하여 영국 상원으로 옮겨갔다.[28] 하원 의원 재임 기간이 짧아 투표와 연설 기록은 없었다.[28]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은 부친과 달리 선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768년 영국 총선에서는 자신의 지지 후보 8명을 당선시키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28]
포틀랜드 공작은 위건 선거구, 칼라일 선거구, 컴벌랜드 선거구, 웨스트모어랜드 선거구 등 여러 선거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1. 위건 선거구
1768년 영국 총선에서는 포틀랜드 공작이 추천하는 후보인 조지 빙과 보몽 호텀이 토리당 후보 존 스미스 배리(John Smith Barry, 제4대 배리모어 백작 제임스 배리의 아들)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1774년 영국 총선에서도 재선되었다.[33]1780년대에 포틀랜드 공작이 선거 활동을 줄이면서 위건 선거구에서 한 의석의 지배권을 헨리 브리지먼에게 양도했고, 1780년 영국 총선에서 브리지먼의 아들 헨리 심슨 브리지먼이 당선되었다.[33] 그 후에도 포틀랜드 공작은 위건에서 일정 영향력을 가졌지만, 1790년대에는 브리지먼이 두 의석을 모두 지배했다고 한다.[34]
4. 2. 칼라일 선거구
컴벌랜드의 칼라일 선거구는 전통적으로 칼라일 백작 가문 (하워드 성), 머스그레이브 가문과 로더 가문 사이에서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이 작위를 계승했을 당시에는 로더 가문의 당주인 제5대 준남작 서 제임스 로더(후의 초대 론즈데일 백작)가 1석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1석도 지배하려 했다.[35] 로더는 1761년에 토리당의 제3대 뷰트 백작존 스튜어트의 딸과 결혼했으며,[36] 칼라일에서는 1759년부터 컴벌랜드 영주를 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36] 자신의 측근을 부령관, 칼라일 시 법원, 칼라일 자치체에 배치하는 등 착실하게 지배를 진행했다.[35]포틀랜드 공작은 로더의 자치체 지배를 깨뜨릴 수 없었기에, 대신 자유 시민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1768년 영국 총선에서 로더가 칼라일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스코틀랜드인 존 엘리엇과 조지 존스턴을 지지하는 실책을 범하면서, 2석 모두 포틀랜드 공작이 지지하는 후보(포틀랜드 공작의 동생 에드워드 벤팅크 경과 머스그레이브 가문의 조지 머스그레이브)가 당선되었다.[35]
1769년, 칼라일 백작 가문의 5대 백작 프레데릭 하워드가 성년이 되자 반격을 시도했다. 1774년 영국 총선에서는 3월에 포틀랜드 공작과 로더가 1석씩 지명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진 상황에 끼어들어, 두 사람의 지명에 대한 승인을 지연시킨 결과 포틀랜드 공작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냈다. 그 결과 칼라일 백작과 로더가 1석씩 지명했다.[35]
1780년 영국 총선에서는 하워드 가문의 본가인 노퍽 공작 가문이 제5대 칼라일 백작 가문을 제치고 개입하면서 칼라일 백작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서리 백작 찰스 하워드가 당선되었다.[35] 이후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은 칼라일 선거구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35]
4. 3.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 선거구
1768년 영국 총선에서 포틀랜드 공작은 컴벌랜드 선거구에서 자신의 후보들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37] 그는 또한 웨스트모어랜드 선거구에서 자신의 후보를 지원했다.[38]포틀랜드 공작은 컴벌랜드 젠트리들의 요청에 따라 웨스트모어랜드 선거구와 컴벌랜드의 칼라일 선거구에 개입하게 되었다.[37] 당시 컴벌랜드 선거구에서는 로더 가문이 최대 지주였고, 칼라일 백작, 포틀랜드 공작, 에그레몬트 백작 가문이 그 뒤를 이었다.[37] 인접한 웨스트모어랜드 선거구는 유권자 수가 가장 적은 선거구였으며, 로더 가문이 최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38]
로더 가문은 거만하고 이기적인 태도로 컴벌랜드 하급 젠트리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들은 로더 가문에 대항할 인물로 포틀랜드 공작을 선택했다.[37]
1768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로더 가문은 서퍽 백작 가문과 손을 잡고 웨스트모어랜드에서의 선거전을 피하려 했지만, 서퍽 백작은 이미 포틀랜드 공작 파를 지지하기로 약속했기에 실패했다.[38] 한편, 포틀랜드 공작은 웨스트모어랜드에서 후보자 선정에 난항을 겪었지만, 선거 직전에 포틀랜드 공작 파와 칼라일의 반 로더 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토머스 펜윅(Thomas Fenwick)이 출마를 선언했다.[38] 펜윅은 선거 직전 출마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로더 가문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 득표수 2위로 당선되었다.[38]
컴벌랜드에서는 로더 가문이 고용한 변호사가 잉글우드 숲에 대한 포틀랜드 공작의 영유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37] 로더 가문은 즉시 정부에 잉글우드 숲 대여를 신청했고, 정부가 이를 승인하면서 선거에서 유리해질 예정이었다.[37] 그러나, 포틀랜드 공작 가문이 이미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던 영지를 강제로 빼앗는 방식에 현지 주민들은 불만을 느꼈다.[37] 결국 투표에서 로더 가문은 패배했고, 영국 하원은 반 로더 파 후보의 당선을 선언했다.[37]
1774년 총선에서 로더 가문은 포틀랜드 공작에게 타협을 제안했다.[37] 선거 비용이 부담되었던 포틀랜드 공작은 타협을 받아들였고, 이후 로더 가문이 사망할 때까지 로더 파가 1석, 그 외가 1석을 지배했다.[37] 잉글우드 숲 소유권 분쟁은 1777년 포틀랜드 공작의 소유권이 유효하다는 판결로 종결되었다.[37]
5. 사생활
제3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는 1809년 10월 30일 불스트로드 파크에서 사망했으며, 11월 9일 메릴본에 매장되었다.[28] 장남 윌리엄 헨리가 작위를 승계했다.[28]
1766년 결혼 당시 영지로부터의 수입은 연간 9000파운드 정도였으며, 이 중 1600파운드는 어머니에게 지급되었다. 1785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연간 수입 약 12000파운드를 얻을 수 있는 노팅엄셔의 Welbeck Abbey|웰베크 수도원영어 (약 15000acre[46])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사망 당시에는 영지의 연 수입이 약 17000파운드로 감소했으며, 약 52만파운드의 채무를 남겼다. 이 채무로 인해 아들인 제4대 포틀랜드 공작은 브루스트로드 등의 영지를 매각해야 했다.
5. 1. 결혼과 가족

1766년 11월 8일, 도로시 캐번디시(제4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딸)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28]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윌리엄 헨리 | 1768년 | 1854년 | 제4대 포틀랜드 공작[47] |
윌리엄 헨리 | 1774년 | 1839년 | 인도 총독. 1803년 메리 애치슨(Mary Acheson영어, 초대 고스퍼드 백작 아서 애치슨의 딸)와 결혼[47] |
샬럿 | ? | 1862년 7월 28일 | 1793년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영어, 풀크 그레빌의 아들)와 결혼, 자녀 있음[47] |
메리 | ? | 1843년 11월 6일[47] | |
윌리엄 찰스 오거스터스 | 1780년 | 1826년 | 1808년 조지아나 오거스타 프레데리카 시모어(Georgiana Augusta Frederica Seymour영어)와 결혼, 딸 1명. 1816년 앤 애브디(Anne Abdy영어, 초대 웰즐리 후작 리처드 웰즐리의 서녀)와 재혼, 자녀 있음.[47] 제6대 포틀랜드 공작의 조부[47] |
프레데릭 | 1781년 | 1828년 | 1820년 메리 로더(Mary Lowther영어, 초대 론즈데일 백작 윌리엄 로더의 딸)와 결혼, 자녀 있음.[47] 제8대 포틀랜드 공작의 증조부[47] |
5. 2. 재정
1766년에 결혼했을 당시 영지로부터의 수입은 연간 9000파운드 정도였으며, 이 중 1600파운드는 어머니에게 지급되었다. 1785년에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연간 수입 약 12000파운드를 얻을 수 있는 영지를 상속받았다.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영지에는 노팅엄셔의 Welbeck Abbey|웰베크 수도원영어 (약 1만 5천 에이커[46])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사망 당시에는 영지의 연 수입이 약 17000파운드로 감소했으며, 약 52만파운드의 채무를 남겼다. 이 채무로 인해 아들인 제4대 포틀랜드 공작은 브루스트로드 등의 영지를 매각해야 했다.6. 유산과 평가
포틀랜드 공작은 요로 결석 수술 후 1809년 10월 30일 피카딜리 벌링턴 하우스에서 사망했으며, 런던 세인트 메리러본 교구 교회에 묻혔다.[19] 그는 연간 17,000 파운드(2005년 기준 57.7만파운드 상당)의 수입이 있었지만,[20] 사망 당시 부채는 5만 2천 파운드(2005년 기준 176만파운드 상당)였다.[20] 이 부채는 그의 아들이 벌스트로드 파크를 포함한 일부 재산을 매각하여 해결했다.[21]
그는 로버트 필 경, 애버딘 백작, 벤자민 디즈레일리, 솔즈베리 후작, 헨리 캠벨-배너먼 경, 보나 로 및 네빌 체임벌린과 함께 직계 후임자가 재임 중 사망한 8명의 영국 총리 중 첫 번째였다.
그의 이름을 딴 유산은 다음과 같다:
- 로마 유리로 만들어진 포틀랜드 화병은 그의 가족 거주지였던 불스트로드 공원에 포틀랜드가 소유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다.
- 자메이카의 포틀랜드 교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786년에 설립된 티치필드 학교도 교구에 있으며 그의 이름을 기려 명명되었다. 학교의 문장은 그의 개인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 메릴본의 두 주요 거리인 포틀랜드 플레이스와 그레이트 포틀랜드 스트리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둘 다 한때 그가 소유했던 토지에 건설되었다. 1863년에 개통된 그레이트 포틀랜드 스트리트 역은 후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조지 밴쿠버는 1793년에 벤팅크 가문의 이름을 따서 노스 벤팅크 암과 사우스 벤팅크 암을 명명했으며, 포틀랜드 운하와 포틀랜드 해협과 같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해안의 다른 이름들과 함께 명명되었다.
- 호주 빅토리아 주의 포틀랜드 만은 1800년에 영국 항해사 제임스 그랜트에 의해 명명되었다. 포틀랜드시는 만에 위치해 있다.
노팅엄 대학교의 필사본 및 특별 컬렉션 부서는 그와 관련된 많은 논문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 정치적 논문(Pw F)은 포틀랜드(웰벡) 컬렉션의 일부이며, 포틀랜드(런던) 컬렉션(Pl)에는 특히 Pl C 시리즈에 그의 서신과 공식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 노팅엄셔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포틀랜드 부동산 논문에는 제3대 공작의 재산과 관련된 항목도 포함되어 있다. 고급 및 장식 미술의 포틀랜드 컬렉션[22]에는 조지 스텁스의 그림을 포함하여 그가 소유하고 의뢰한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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