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젠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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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니 젠틀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영국의 가수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목수 견습생으로 일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조지 베이커, 리키 데이먼 등의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1959년 필립스 레코드와 계약하며 조니 젠틀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1960년에는 스코틀랜드 투어에서 실버 비틀즈(비틀즈)의 백 보컬을 맡았으며, 이후 솔로 활동과 밴드 활동을 병행했다. 젠틀은 1998년 "Johnny Gentle & the Beatles: First Ever Tour"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2024년 2월 29일에 사망했다.
존 애스큐는 리버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학교를 떠난 후 목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빌린 지침서로 자신의 기타를 만들고 바비 크로포드와 함께 지역 클럽에서 에벌리 브라더스의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8][9] 이후 애스큐는 호화 원양 정기선에 취직했다가 돌아와 솔로 가수로 대회에 참가했고, 예명을 조지 베이커에서 리키 데이먼으로 바꾸었다.[8][9] 런던으로 건너가 건물 부지에서 일하다가 스트레텀의 로카르노 무도회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8][9] 1959년에는 필립스 레코드와의 음반 계약을 따낸 래리 판즈 감독으로부터 오디션을 받았고, 래리는 애스큐에게 조니 젠틀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다.[8][9]
2. 생애와 경력
젠틀은 1959년 필립스에서 "Wendy"와 "Milk From The Coconut"을 발매하였지만 차트에 들지 못하였으며, "I Like the Way", "Darlin' won't you Wait", "Milk form the Coconut", "This Friendly World"와 수록된 익스텐디드 플레이인 《The Gentle Touch》도 차트에 진입하지 못하였다.[8] 1960년 5월 초 판즈는 리버풀 스타디움에서 앨런 윌리엄스와 함께 진 빈센트를 필두로 지역 그룹인 카스 앤 더 카사노바스,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등이 서는 쇼와 공동 프로모션을 하였다.[8] 판즈는 빌리 퓨리가 소속된 아티스트들을 위해 백 보컬로 서 줄 그룹으로 리버풀 그룹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1960년 5월 19일 오디션을 열게 되었다.[8] 이때 조니 젠틀이 짧은 기간 동안 돌 스코틀랜드 투어의 백 보컬은 실버 비틀즈로 정해졌다.[8]
1960년 5월 20일에서 28일 사이에서 열린 이 투어에서는 앨로아, 인버네스, 프레이저버러, 키스, 포레스, 네언, 피터헤드 등에서의 공연이 포함되어 있었다.[10] 당시 실버 비틀즈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섯클리프, 그리고 드러머 토미 무어로 구성되어 있었다.[8] 비록 실버 비틀즈가 "조니 젠틀과 그의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어 구체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8] 비공식적으로 매카트니는 폴 라몬, 해리슨은 칼 해리슨, 레논은 롱 존, 섯클리프는 스튜어트 드 스탈이라고 칭했다.[8] 당시 세트리스트는 "It Doesn't Matter Anymore", "Raining in My Heart", "I Need Your Love Tonight", "Poor Little Fool", "(I Don't Know Why) But I Do", "C'mon Everybody" (진 빈센트와 함께 투어를 하던 도중 사망한 에디 코크런에게 바치는 헌정곡) 등이었다.[11] 젠틀은 투어 중 레논의 도움을 받아 "I've Just Falled For Somebody"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후에 애덤 페이스의 두 번째 음반에 수록된다.[11] 젠틀 역시 판스에게 영입을 제안했지만, 당시 판스는 솔로 가수 관리에만 관심이 있었다.[8] 리버풀로 돌아온 후, 젠틀은 공연 중 한 곳에서 실버 비틀즈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나, 그가 후에 함께 공연할 밴드가 필요했을 때, 실버 비틀즈는 함부르크로 여행을 갔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었다.[8]
조니 젠틀은 필립스 레이블에서 "Darlin' Won't You Wait", "After My Laugh Come Tears" (1960년), "Darlin" (1961년)까지 3개의 싱글을 발매하였고, '''대런 영'''이라는 예명으로 TV와 라디오 쇼에도 여러 번 출연하며 1962년 팔로폰에서 "I've just Fallen For Somebody"를 발표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9] 1964년에는 비스카운츠라는 밴드에 들어갔다.[9]
젠틀은 후에 저지섬으로 이사를 가서 소목장이로 일을 했다. 현재에는 켄트주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비틀즈 펜 컨벤션에 가끔 출연하기도 했다.[8] 1998년에는 "Johnny Gentle & the Beatles: First Ever Tour"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하였다.[8]
2. 1. 리버풀 시절 (1936~1959)
존 애스큐는 리버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학교를 떠난 후 목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스스로 기타를 만들고 바비 크로포드와 함께 지역 클럽에서 공연했다.[8][9] 예명을 조지 베이커, 리키 데이먼으로 바꾸며 솔로 가수 활동을 하다가 런던으로 건너가 건물 부지에서 일하다가 스트레텀의 로카르노 무도회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59년에는 필립스 레코드와의 음반 계약을 따낸 래리 판즈 감독으로부터 오디션을 받았고, 래리는 애스큐에게 조니 젠틀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다.[8][9]
젠틀은 1959년 필립스에서 "Wendy"와 "Milk From The Coconut"을 발매하였지만 차트에 들지 못하였으며, 익스텐디드 플레이인 《The Gentle Touch》도 차트에 진입하지 못하였다. 1960년 5월 초 판즈는 리버풀 스타디움에서 앨런 윌리엄스와 함께 진 빈센트를 필두로 지역 그룹인 카스 앤 더 카사노바스,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등이 서는 쇼와 공동 프로모션을 하였다. 판즈는 빌리 퓨리가 소속된 아티스트들을 위해 백 보컬로 서 줄 그룹으로 리버풀 그룹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1960년 5월 19일 오디션을 열게 되었다. 이때 조니 젠틀의 짧은 기간 동안 돌 스코틀랜드 투어의 백 보컬은 실버 비틀즈로 정해졌다.[8]
1960년 5월 20일에서 28일 사이에서 열린 이 투어에서는 앨로아, 인버네스, 프레이저버러, 키스, 포레스, 네언, 피터헤드 등에서의 공연이 포함되어 있었다.[10] 당시 실버 비틀즈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섯클리프, 그리고 드러머 토미 무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실버 비틀즈가 "조니 젠틀과 그의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어 구체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8] 비공식적으로 매카트니는 폴 라몬, 해리슨은 칼 해리슨, 레논은 롱 존, 섯클리프는 스튜어트 드 스탈이라고 칭했다. 당시 세트리스트는 "It Doesn't Matter Anymore", "Raining in My Heart", "I Need Your Love Tonight", "Poor Little Fool", "(I Don't Know Why) But I Do", "C'mon Everybody" (진 빈센트와 함께 투어를 하던 도중 사망한 에디 코크런에게 바치는 헌정곡) 등이었다. 젠틀은 투어 중 레논의 도움을 받아 "I've Just Falled For Somebody"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후에 애덤 페이스의 두 번째 음반에 수록된다. 젠틀 역시 판스에게 영입을 제안했지만, 당시 판스는 솔로 가수 관리에만 관심이 있었다. 리버풀로 돌아온 후, 젠틀은 공연 중 한 곳에서 실버 비틀즈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나, 그가 후에 함께 공연할 밴드가 필요했을 때, 실버 비틀즈는 함부르크로 여행을 갔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었다.[8]
조니 젠틀은 필립스 레이블에서 "Darlin' Won't You Wait", "After My Laugh Come Tears" (1960년), "Darlin" (1961년)까지 3개의 싱글을 발매하였고, '''대런 영'''이라는 예명으로 TV와 라디오 쇼에도 여러 번 출연하며 1962년 팔로폰에서 "I've just Fallen For Somebody"를 발표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1964년에는 비스카운츠라는 밴드에 들어갔다.[9]
젠틀은 후에 저지섬으로 이사를 가서 소목장이로 일을 했다. 현재에는 켄트주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비틀즈 펜 컨벤션에 가끔 출연하기도 했다. 1998년에는 "Johnny Gentle & the Beatles: First Ever Tour"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하였다.[8]
2. 2. 런던 활동과 조니 젠틀 (1959~1962)
존 애스큐는 리버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 목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기타를 직접 만들었다.[8][9] 바비 크로포드와 함께 지역 클럽에서 공연하다가 원양 정기선에 취직했다가, 돌아와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예명을 리키 데이먼으로 바꾸었다.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스트레텀의 로카르노 무도회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했다.[8][9] 1959년 래리 판즈 감독의 오디션을 통해 필립스 레코드와 계약하고, 조니 젠틀이라는 예명을 얻었다.[8][9]
젠틀은 필립스에서 "Wendy", "Milk From The Coconut", "I Like the Way", "Darlin' won't you Wait", "This Friendly World" 등을 발매했으나,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다.[8][9] 1960년 5월, 래리 판즈는 진 빈센트를 필두로 한 리버풀 스타디움 쇼를 공동 프로모션했고, 이 과정에서 실버 비틀즈가 젠틀의 스코틀랜드 투어 백 보컬로 발탁되었다.[8]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섯클리프, 토미 무어로 구성된 실버 비틀즈는 1960년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스코틀랜드 투어를 함께 했다.[8][10] 비록 '조니 젠틀과 그의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했지만, 비틀즈 멤버들은 각자 가명을 사용했다.[8] 젠틀은 투어 중 레논의 도움을 받아 "I've Just Falled For Somebody"라는 곡을 만들었으며, 이 곡은 후에 애덤 페이스의 앨범에 수록되었다.[11]
젠틀은 필립스에서 "Darlin' Won't You Wait", "After My Laugh Come Tears"(1960년), "Darlin"(1961년) 등의 싱글을 더 발매했고, '''대런 영'''이라는 예명으로 1962년 팔로폰에서 "I've just Fallen For Somebody"를 발표했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9]
2. 3. 실버 비틀즈와의 스코틀랜드 투어 (1960)
래리 판즈는 빌리 퓨리를 포함한 자신의 소속 가수들의 백 보컬 그룹으로 리버풀 그룹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960년 5월 10일 오디션을 열었고, 그 결과 조니 젠틀의 스코틀랜드 투어 백 보컬로 실버 비틀스가 선정되었다.[1] 이 투어는 1960년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앨로아, 인버네스, 프레이저버그, 키스, 포레스, 네언, 피터헤드 등지에서 진행되었다.[4]
당시 실버 비틀즈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섯클리프, 그리고 드러머 토미 무어로 구성되어 있었다.[1] 비록 투어 홍보물에는 "조니 젠틀과 그의 그룹"으로만 표기되었지만,[1] 매카트니는 폴 라몬, 해리슨은 칼 해리슨, 레논은 롱 존, 섯클리프는 스튜어트 드 스타엘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5] 그들의 레퍼토리에는 "It Doesn't Matter Anymore", "Raining in My Heart", "I Need Your Love Tonight", "Poor Little Fool", "(I Don't Know Why) But I Do", "C'mon Everybody" 등이 포함되었다.[5]
젠틀은 투어 중 레논의 도움을 받아 "I've Just Fallen For Someone"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나중에 아담 페이스의 두 번째 음반에 수록되었다.[1] 젠틀은 첫 공연 30분 전에 만났지만, 매일 밤 더 나은 소리를 만들었고 투어가 끝날 때쯤에는 함께 일했던 그 어떤 그룹보다도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11]
2. 4. 투어 이후 (1962~2024)
조니 젠틀은 필립스에서 "Darlin' Won't You Wait", "After My Laughter Came Tears"(1960년), "Darlin'"(1961년) 등의 싱글을 추가로 발매했다.[9] '''대런 영'''이라는 예명으로 TV와 라디오 쇼에 출연했고, 1962년 팔로폰에서 "I've Just Fallen For Somebody"를 발표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9] 1964년에는 비스카운츠라는 밴드에 들어갔다.[9]
이후 젠틀은 저지섬으로 이주하여 목수 일을 하다가 켄트주로 이사하여 비틀즈 펜 컨벤션에 가끔 출연했다.[8] 1998년에는 "Johnny Gentle & the Beatles: First Ever Tour"라는 책을 집필했다.[8] 젠틀은 2024년 2월 29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7]
3. 유산
4. 음반 목록
4. 1. 싱글
4. 2. EP
참조
[1]
웹사이트
Johnny Gentle & The Beatles - Bill Harry - Mersey Beat
http://triumphpc.com[...]
2018-01-26
[2]
서적
The Virgin Encyclopedia of Sixties Music
Virgin Books
1997
[3]
웹사이트
The Official Johnny Gentle Website
http://www.johnnygen[...]
2018-01-26
[4]
웹사이트
The Official Johnny Gentle Website
https://web.archive.[...]
2018-01-26
[5]
웹사이트
The Official Johnny Gentle Website
http://www.johnnygen[...]
2018-01-26
[6]
뉴스
John (Johnny Gentle) Askew
https://funeral-noti[...]
Funeral Notices
2024-03-05
[7]
뉴스
Johnny Gentle, singer whose backing band on a tour of Scotland was the future Beatles – obituary
https://www.telegrap[...]
The Telegraph
2024-03-13
[8]
웹인용
Johnny Gentle & The Beatles - Bill Harry - Mersey Beat
http://triumphpc.com[...]
2018-01-26
[9]
웹인용
The Official Johnny Gentle Website
http://www.johnnygen[...]
2018-01-26
[10]
웹인용
The Official Johnny Gentle Website
https://web.archive.[...]
2018-01-26
[11]
웹인용
The Official Johnny Gentle Website
http://www.johnnygen[...]
201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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