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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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주 루오는 1871년 파리에서 태어나 1958년 사망한 프랑스의 화가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장인에게서 기술을 배우고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귀스타브 모로의 지도를 받았다. 야수파 운동에 참여했으며,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을 주제로 한 작품과 판화집 『미제레레』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미완성 작품을 소각하는 등 독자적인 예술관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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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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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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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71년 5월 27일 |
사망일 | 1958년 2월 13일 |
국적 | 프랑스 |
직업 | 화가 |
인물 배경 | |
프랑스어 이름 | Georges-Henri Rouault (조르주 앙리 루오) |
로마자 표기 | George(eu)-Anri Ruo(u) |
사조 | |
사조 | 표현주의 |
스승 | |
스승 | 귀스타브 모로 |
2. 생애
조르주 루오는 14세 때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4년 후 에콜 데 보자르(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 포브의 스승인 모로의 지도를 받았다. 처음에는 모로의 화풍을 따랐으나, 스스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루오는 파리 코뮌으로 가족의 집이 파괴된 후 파리의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견습 기간 동안 미술학교 야간 강좌를 다녔으며, 에콜 데 보자르에서 모로에게 배우며 그의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20세기 초, 루오는 독특한 굵은 윤곽선과 보석 같은 색채를 가진 작품들을 선보였다. 예수를 그린 것 외에 창녀, 광대, 서커스 배우 등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 많다. 루오는 판화가로서도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으로, 1914년부터 시작한 판화집 『미제레레』가 잘 알려져 있다.
1917년,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와 계약을 맺고, 루오의 "전 작품" 소유권은 볼라르에게 있는 것으로 되었지만, 이 계약은 볼라르 사후 재판 소송의 불씨가 된다. 루오는 완성된 작품에도 수년 동안 가필을 계속하여, 납득이 가지 않는 작품은 세상에 내놓지 않는 화가였다. 만년의 루오는 "미완성으로, 자신의 죽음까지 완성될 가망이 없는 작품은, 세상에 내놓지 않고, 소각한다"라고 말했다. 볼라르 유족은 "미완성 작품을 포함하여 자신의 소유이다"라고 주장했지만, "미완성작 소유권은 화가에게 있다"는 루오의 주장이 1947년에 인정되어, 루오는 800점 이상의 미완성작을 볼라르로부터 되찾아, 그 중 315점을 보일러로 소각한다[4]。
루오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제작을 계속하여, 1958년, 파리에서 86세의 생애를 마쳤다.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조르주 루오는 1871년 파리 코뮌으로 가족의 집이 파괴된 후 파리의 지하실에서 태어났다.[4] 파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을 격려했다.[4] 아버지는 목공 장인이었다.[4] 루오의 가족이 살았던 벨빌 지구의 빌레트는 당시 변두리 노동자 거리였다.[4]14세 때 스테인드글라스 장인 에밀 이르슈(:fr:Émile Hirsch)의 공방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수법을 배웠다.[4] 1885년부터 1890년까지 유리 화가 및 복원사로 견습 생활을 했다.[4] 이러한 초기 경험은 훗날 루오의 화풍에서 굵은 검은색 윤곽선과 빛나는 색채로 나타났으며, 이는 납유리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4]
견습 기간 동안 미술학교 야간 강좌를 다녔으며, 1890년에는 본격적으로 화가를 지망하여 프랑스의 공식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4] 그곳에서 귀스타브 모로에게서 배우며 그의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4] 모로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작풍이나 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루오와 마티스와 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자질을 가진 제자들의 개성과 재능을 이끌어냈다.[4] 루오는 평생 스승 모로를 존경했으며, 모로가 1898년에 사망했을 때 귀스타브 모로 국립 미술관 큐레이터로 지명되었다.[4] 1903년에는 모로의 옛집을 개방한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의 초대 관장이 되었다.[4] 루오는 미술관에 기거하며 일했지만, 급료는 적었고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4]
루오의 20대 초기 작품에는 렘브란트의 영향이 보이며, 갈색 계통을 주로 한 어두운 색조가 지배적이었다.[4]
2. 2.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모로는 예술의 스승 이상이자 정신적인 선배였고, 때로는 동지나 친구로서 루오에게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1898년 모로가 사망한 후, 많은 제자들 가운데 루오가 모로 미술관의 관장으로 뽑혀 스승의 유작을 관리하는 지위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3. 작품 세계
루오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게 공감하고, 부자와 권력자를 향해 분노하는 깊은 종교적 감정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야수파와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비합리적인 세계에서의 계시를 추구했다.[1] 그의 예술은 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완성할 수 없는 것의 극을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9년, 루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탕아''의 디자인을 제작했으며, 음악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안무는 조지 발란신이 맡았다. 1930년에는 런던, 뉴욕, 시카고 등 해외에서 전시를 시작했다. 1939년, 루오는 프랑스 미술상 폴 로젠버그에게 몇몇 구매에 대해 조언했는데, 그 중 하나는 예수의 채찍질로, 반 레르 가족의 집에 전시되었다.[2]
생의 말년에 그는 자신의 그림 300점을 불태웠다(현재 가치는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심오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그림들을 완성할 만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루오는 1958년 2월 13일 파리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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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초기 작품
모로는 예술의 스승 이상으로 정신적인 선배이며 때로는 동지나 친구로서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이는 모로 사후(1898년)에 많은 제자 가운데서 뽑혀 루오가 모로 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스승의 유작을 관리하는 지위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1] 모로는 루오가 성장한 베르빌의 주민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둡고 과묵한 종교예술의 애호자이다."
이러한 지적은 루오의 장래를 멀리 예견하고 있었다. 모로 사후 루오의 시야에는 포랭과 로트렉 및 도미에가 뚜렷하게 부각되었고, 모두 사회 비판의 경향이 농후한 화가들이었다. 또한 가톨릭 문필가 위스망스와 레온 블르와와의 교우는 루오의 종교적인 인생관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공감, 부자나 권력자를 향한 분노는 루오에게 있어서 깊은 종교적인 감정에서 유래한다. "가령 창부를 그리는 경우 루오는 이 죄 많은 여인이 풍기는 전율할 향기에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죄에 울고 그녀와 더불어 괴로워하는 것이다(미술사가 드리발)." 세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루오는 야수파의 와중에 있지만 밝게 삶을 구가하는 그들과는 대극(對極)의 위치에 있었다. 루오의 신앙과 그에 입각한 예술관은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이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 빛나는 별을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극(極)을 다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까닭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야(暗夜)의 절규이며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극점에 서서 루오는 '구세주로서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단언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으로 판화집 <미세레레>(1948년 발표)가 있다.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 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역시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한때 유채화를 중지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이것이 일반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시류(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용이하게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여서, 독특한 에나멜을 칠한 것과 같은 중후한 마티에르와 농밀(濃密)한 색채로 덮인 작품으로 완성이 될 때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948년 볼라르의 유산 속에 들어가 있던 약 3백 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에 의하여 되돌려받았을 때에도, 이미 이것들을 마음대로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던 것이다. 판화 때문에 중단된 유채화 제작을 다시 시작한 때는 1929년이며,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졌으나 이후 8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聖畵像)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소재는 거의 모두가 법관·창녀·어릿광대·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의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작품으로 <교외의 크리스트>, <재판>,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등이 있고,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891년, 루오는 《갈보리 가는 길》을 그렸다. 1894년, 루오는 셰나바르 상을 수상했다.[1] 1895년부터 그는 종교적 주제, 풍경, 정물을 담은 그림들을 선보이며, 특히 그가 창립을 도운 살롱 도톤을 비롯한 주요 전시회에 참여했다.
루오는 앙리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앙리 망갱, 샤를 카무앵을 만났다. 이러한 만남은 그를 야수파 운동으로 이끌었고, 마티스가 그 지도자로 여겨졌다. 1905년, 그는 다른 야수파 화가들과 함께 살롱 도톤에 그림을 전시했다. 마티스가 그룹의 사색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반면, 루오는 더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스타일을 구현했다.
그의 강렬한 대비와 감정적 표현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과장된 그로테스크한 인물 묘사는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3. 2. 야수파 운동
앙리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앙리 망갱, 샤를 카무앵과의 만남은 루오를 야수파 운동으로 이끌었다. 1905년, 그는 다른 야수파 화가들과 함께 살롱 도톤에 그림을 전시했다. 앙리 마티스가 그룹의 사색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반면, 루오는 더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스타일을 구현했다.[1]그의 강렬한 대비와 감정적 표현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과장된 그로테스크한 인물 묘사는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3. 3. 표현주의 작품
루오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게 공감하고, 부자와 권력자를 향해 분노하는 깊은 종교적 감정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포비슴과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비합리적인 세계에서의 계시를 추구했다.[1] 그의 예술은 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완성할 수 없는 것의 극을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1]1907년, 루오는 법정, 광대, 매춘부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통해 도덕적, 사회적 비판을 표현했다.[4] 그는 영매주의와 철학자 자크 마리탱의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적 주제에 전념했다.[4] 인간 본성은 그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무는 인간의 모습과 똑같은 관심, 똑같은 특성, 똑같은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4]
1910년, 루오는 외젠 드뤼에 갤러리에서 첫 작품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의 핵심을 형성한 드레스덴 출신의 독일 미술가들에게 연구되었다. 1917년부터 그림에 전념한 그는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삼아, 세상의 고통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다.
1937년, 루오는 그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작품 중 하나인 ''늙은 왕''을 그렸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는 색채와 어우러져 종교적인 깊이를 더했다. 그의 그림 소재는 법관, 창녀, 어릿광대, 기독교인 등 인물과 도시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었다.[1] 대표작으로는 <교외의 크리스트>, <재판>,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등이 있으며,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1]
3. 4. 판화: 미제레레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1] 1917년에는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유채화를 중단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공개되었다.[1]1948년에 판화집 《미제레레》가 발표되었다.[3]
3. 5. 작품 소각
1948년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유산 속에 들어가 있던 약 300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을 통해 되돌려 받았지만, 이미 이것들을 마음대로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다.[4] 그는 "미완성으로, 자신의 죽음까지 완성될 가망이 없는 작품은, 세상에 내놓지 않고, 소각한다"라고 말했으며, 315점을 보일러로 소각했다.4. 작풍
모로는 예술 스승이자 정신적인 선배, 때로는 동지이자 친구로서 루오에게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1898년 모로가 사망한 후, 루오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뽑혀 모로 미술관 관장이 되어 오랜 기간 스승의 유작을 관리했다. 모로는 루오가 성장한 베르빌 주민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어둡고 과묵한 종교예술 애호가"라고 평하며 루오의 장래를 예견했다.
모로 사후 루오는 포랭, 로트렉, 도미에 등 사회 비판적 경향이 농후한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가톨릭 문필가 위스망스, 레온 블르와와의 교류는 루오의 종교적 인생관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공감, 부자와 권력자를 향한 분노는 루오의 깊은 종교적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미술사학자 드리발은 "루오가 창부를 그릴 때, 죄 많은 여인의 향기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죄에 울고 함께 괴로워한다"고 평했다. 루오는 포비슴 시기에 활동했지만, 밝은 삶을 추구하는 그들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루오의 신앙과 예술관은 단도직입적이었다.
루오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합리적인 세계에서의 계시를 어두운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인정하려 했다. 루오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이 아닌, 완성할 수 없는 것의 극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그에게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기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루오의 예술은 암흑 속 절규이자 울음소리였다. 그는 "나는 구세주로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단언했다. 1948년 발표된 판화집 《미세레레》는 이러한 루오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1913년 루오는 화상 볼라르의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고 전 작품을 인수받는 계약을 맺었다. 1917년에는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유채화를 중단하고 판화에 전념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공개되었다. 이는 루오가 시류에서 멀어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루오는 쉽게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였다. 독특한 에나멜 질감의 중후한 마티에르와 농밀한 색채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48년 볼라르 유산 속 300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으로 되찾았지만,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며 태워버렸다. 1929년 유채화 제작을 재개하며 명성을 얻었으나, 루오는 8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 화가로 남았다.
루오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으며, 이는 색채와 어우러져 종교적 깊이를 더했다. 그의 작품 소재는 법관, 창녀, 어릿광대, 기독교인 등 인물과 도시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었다. 대표작으로는 《교외의 크리스트》, 《재판》,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등이 있으며,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5. 사망
루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58년 파리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4]
6. 대표작
루오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이는 색채와 어울려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1] 그의 그림 소재는 대부분 법관, 창녀, 어릿광대, 기독교인 등 인물과 도시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1]
대표작으로는 다음 작품들이 있다.[1]
7. 참고 문헌
- 프랑수아 샤퐁 해설, 야나기 소겐·다카시나 슈지·사카모토 미쓰루 역, 《루오 전판화》 2권 세트, 이와나미 서점, 1979년
- 베르나르 드리발 해설, 야나기 소겐·다카노 사다코 역, 《루오 전회화》 2권 세트, 이와나미 서점, 1990년
:: 각, 루오 가문이 목록 외 감수를 맡았다.
- 자클린 맹크 편, 고토 신지 외 역, 《마티스와 루오 우정의 편지》, 미스즈 서방, 2017년
참조
[1]
웹사이트
Georges Rouault
https://www.theartst[...]
2022-07-25
[2]
웹사이트
Letter from Georges Rouault
https://www.themorga[...]
2017-07-25
[3]
서적
Rouault
Tudor Publishing
[4]
서적
芸術入門
河出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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