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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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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화가로, 역사와 신화를 주제로 한 상징주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 교수로 재직하며 앙리 마티스와 조르주 루오를 배출했으며, 만년에는 뛰어난 교사로도 명성을 얻었다. 모로의 작품은 19세기 말 상징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는 그의 저택이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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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모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50년 ギュスターヴ・モロー 자화상
1850년 ギュスターヴ・モロー 자화상 (ギュスターヴ・モロー 미술관 소장)
본명Gustave Moreau
출생일1826년 4월 6일
출생지프랑스 파리
사망일1898년 4월 18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국적프랑스
직업화가
교육
사사콜레주 롤랭 (콜레주-리세 자크-데쿠르)
에콜 데 보자르
프랑수아-에두아르 피코
작품 활동
분야유화
수채화
사조상징주의
주요 작품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이아손
오르페우스
L'Apparition (1876년)
살로메 춤
유피테르와 세멜레 (1894–95년)
영향 관계
기타 정보

2. 생애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1848년 이후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역사와 신화에서 그림의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그림 기술을 향상시켰고, 파리로 돌아와 살롱 초대전에 약 20년간 작품을 출품했다. 1864년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과 일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모로는 인간의 번민과 고통, 이상적인 영웅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표현주의에 영향을 준 화가로 평가받는다. 1892년 파리의 예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에게 자상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교수로 존경받았다.

1898년 파리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그가 살던 집은 모로 박물관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26-1856)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모로(Louis Moreau)는 파리시 건축가였고, 어머니는 음악가였다. 허약한 체질로 6세 때부터 소묘를 하며 놀았다. 1841년 어머니와 친척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60페이지 분량의 그림 앨범을 채웠다.[3] 1844년 프랑수아-에두아르 피코의 제자가 되었다. 1846년 에콜 데 보자르(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했다. 1848년과 1849년 두 차례 로마 대상 콩쿠르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에콜 데 보자르를 중퇴했다. 친교가 있었던 테오도르 샤세리오를 비롯한 낭만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샤세리오의 양식적 영향은 『아가[31](디종 미술관), 『아르벨라 전투에서 도망친 후 지쳐서 연못에서 물을 마시는 다리우스』(모로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51년에 제작한 『피에타』(현재 소재 불명)에는 외젠 드라크루아의 영향이 나타난다.

모로는 1849년부터 1854년까지 프랑스 정부로부터 여러 점의 그림을 주문받았다. 1852년에 『피에타』를 살롱에 처음 출품했다. 1855년에는 『크레타 섬의 미궁 속의 아테네 젊은이들』(브루 미술관)[32]을 그려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했다. 이 작품에서는 낭만주의의 극적인 조형 언어와 르네상스고전주의에 기반한 질서, 균형 감각, "적절함" decorum에 관한 아카데미의 이상이 융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이 모로'' , 캔버스에 유채, 45 x 31 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폴린 모로'' (날짜 미상), 캔버스에 유채,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구혼자들'' [미완성] (1852-1896), 385 x 343 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2. 2. 이탈리아 유학과 귀국 (1857-1860)

1856년 테오도르 샤세리오의 죽음은 모로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는 공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의 상태를 걱정한 모로의 부모는 그에게 다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갈 것을 제안했다.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발견했다.[5]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6]

1857년 10월, 모로는 친구이자 예술가인 프레데릭 샤를로 드 쿠르시와 함께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에서 치비타베키아로 항해하여 로마로 향했다. 그는 이탈리아 체류를 파리 국립 고등 미술 학교에서의 조기 퇴학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연장된 연구 기간으로 삼았다. 며칠 동안 주변을 둘러보고 관광을 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도시에서 예술을 연구하고 모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두 달 넘게 천장의 인물들을 하루에 일곱, 여덟 시간씩 모사했다. 그는 기성 거장들만큼이나 비교적 덜 알려진 예술가들의 작품도 자주 모사했다. 특히 그는 여러 인물의 복잡한 군상과 구성적인 색채 배합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는 빌라 메디치를 자주 방문하여 실물 모델을 보고 작업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엘리 들로네, 앙리 샤퓌, 에밀 레비, 조르주 비제를 포함한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다른 파리 출신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어린 에드가 드가를 만났고, 모로는 이탈리아에서 드가에게 일종의 멘토가 되었다. 1858년 8월, 그의 부모가 합류했다. 최근 은퇴한 그의 아버지는 건축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예술가인 비토레 카르파초에게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여러 점 모사했다. 피렌체, 밀라노, 피사, 시에나를 방문했다.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카르파초의 그림 (1858), 140 x 358 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1859년 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나폴리폼페이의 여름은 긴장된 시기였다. 모로는 이탈리아에서 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사했고, 그곳에서 몇 점의 독창적인 작품만을 제작했다. 예로는 '헤시오도스와 뮤즈'를 주제로 한 몇 점의 대형 드로잉과 야외 사생으로 그린 수많은 수채 풍경화가 있다. 1859년 9월, 모로와 그의 부모는 수백 점의 드로잉과 그림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드가는 1860년에 모로의 작은 초상화를 그렸고, 이 그림은 모로의 생애 동안 그의 작업실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드가가 에두아르 마네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의 관계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고, 모로는 역사화에 집중했다. 모로는 드가에게 "자네는 발레를 통해 예술을 쇄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말했고, 드가는 "그럼 당신은 보석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대답했다.[3][4]

1857년 9월, 모로는 사비로 로마 유학을 시작했다. 유학 중의 서한집은 프랑스에서 발행되었다.[33] 1859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로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피사, 시에나, 나폴리,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이때 모로는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벽화를 모사했다. 1858년경, 이탈리아에 체류 중이던 모로는 에드가 드가를 알게 되었다.[34] 이탈리아에서는 이 외에도 훗날 화가가 되는 인물들, 즉 쥘-엘리 들로네, 레옹 보나, 외젠 플로망탱, 앙리-레오폴드 레비, 에밀 레비와 알게 되었다.

2. 3. 중기: 살롱 성공과 양식 확립 (1860-1880)

1864년 살롱에서 메달을 수상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는 비토레 카르파초, 안드레아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에 대한 모로의 면밀한 연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8] 확고한 윤곽선과 세밀한 모델링은 그가 이십 년 동안 비평가와 대중에게 성공을 안겨준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8] 모로는 이 작품으로 빠르게 기이한 평판을 얻었는데, 한 평론가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면서 그림에서 벗어나는 독일 학생이 만든 안드레아 만테냐의 파스티쉬와 같다"고 평했다.[9] 이 그림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영구 소장품으로 소장되어 있다.[10]

『갈바리아로 가는 길』(데카즈빌Decazeville, 노트르담 대성당) 제작 이후, 모로는 이탈리아에서의 성과를 자신의 회화 양식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 모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작에 전념했다. 1864년, 살롱 (관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 보수적인 살롱에서 물의를 일으켰지만, 모로에게 상패를 안겨주었고, 더 나아가 나폴레옹 공[35]이 구매했다. 모로 미술관에는 이 작품 제작에 사용된 습작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양식적으로는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 앵그르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19세기 전반 프랑스에 걸쳐 활약한 화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뚜렷한 윤곽선과 정교한 붓놀림은 르네상스 예술 연구와 아카데미에서의 수련을 통해 모로가 얻은 조형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로가 남긴 메모를 통해 그가 선과 악, 남성과 여성, 물질성과 정신성의 이항 대립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대중과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대중지에는 관련 희화가 게재되었다.

1870년대에 그는 자신의 작품이 형식화되었다는 비판에 시달리면서 예술을 쇄신하는 데 집중하면서 몇 년 동안 전시를 중단했다. 1876년 그는 후기 작품의 특징이 될 더욱 회화적인 스타일을 예고하는 ''헤로데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를 완성했다.[8]

1886년에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열린 수채화전에 출품된 『성스러운 코끼리 (페리)』 (국립서양미술관)[36]는 모로의 수채화 기법의 가장 뛰어난 부분을 보여준다. 높은 평가를 받은 이 전시회는 라 퐁텐의 『우화』에 기초한 수채화 연작과 일곱 점의 독립적인 주제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로의 생전 유일의 개인전이 되었다. 이 『성스러운 코끼리』라는 주제에 특정적인 전거는 없어 보이지만, 힌두교의 신이 타는 신성한 코끼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되는 한편, 동시대 출판물 등에서, 다른 『페리』, 『성스러운 호수』, 『동양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페리페르시아정령이며, 코끼리 위에 누워 동양풍의 악기를 가진 여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19세기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모로 자신도 인도세밀화에 기초한 페리를 몇 점 그렸다. 여기서 이미 인도와 페르시아의 혼합을 볼 수 있지만, 『성스러운 코끼리』에서는 다양한 이미지의 단편들이 모자이크처럼 접착되어, 보석 세공과 같은 "환상의 동양"이 창출되었다. 당시 유포되었던 장식 모티프집의 도판에서는 인도풍의 장식물이 인용되었다. 또한, 『우화』의 연작을 그리는 데 있어서 모로는 파리 좌안의 동식물원에 다니며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스케치에 힘썼는데, 그 성과도 여기에 활용되었다. 페리와 그녀에게 헌상하는 날개 달린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로가 반복해서 그린 시인과 영감의 도상이 보인다.

그는 1875년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1883년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로 임명되었다.

2. 4. 후기: 교육 활동과 만년 (1881-1898)

1888년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92년에는 국립 고등 미술 학교(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되었다. 모로의 지도 방침은 제자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 재능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건너가기 위한 다리다"라고 모로는 말했다고 한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모로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는 앙리 마티스조르주 루오라는 두 거장이 있었다. 반면, 전통을 중시하는 다른 회원들로부터는 소외되었고, 마티스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모로 사후 에콜 데 보자르에서 추방되었다.[3][14]

모로는 만년에 사회와 점점 더 거리를 두었고, 살롱에 출품을 중단했으며 해외 전시는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그림을 제작했고,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와 같은 곳에서 산발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때때로 집에 손님을 초대했고, 매력적인 대화로 유명했지만, 방문객들이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은 드물었다. 그는 매우 교양 있고 박식했으며, 1,600권이 넘는 개인 서재를 가진 탐독가였다. 당시 파리에서 그 정도의 성공을 거둔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그는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근처에 살면서 때때로 그와 교류했던 에드가 드가는 만년의 모로를 "기차가 몇 시에 떠나는지 아는 은둔자"라고 묘사했다.[3]

''개구리, 임금을 구하다''(1880년대), 라 퐁텐의 우화에서, 수채화, 개인 소장


미술 수집가 앙투안 루는 장 드 라 퐁텐의 우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의뢰했다. 그 결과물들은 1881년 파리의 세르클 데 아쿠아렐리스트에서 함께 전시되었고, 모로의 작품(25점)은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 연작을 계속하도록 의뢰받았다. 그의 생애 유일한 개인전에서 64점의 라 퐁텐 우화와 6점의 다른 대형 수채화가 1886년 구필 앤 시 갤러리에서 전시되었고, 그곳의 매니저는 테오 반 고흐였으며, 이후 런던에서도 전시되었다. 이 연작은 1906년 파리에서 사후에 다시 전시되었고, 한 점은 귀스타브 모로 국립 박물관에 기증되었다.[3][11][12][13]

모로와 그의 어머니는 평생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1884년 어머니가 사망한 것은 그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6년 후, 알렉상드린 뒤레가 1890년에 사망했을 때 그녀의 죽음 또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죽음은 그의 고립을 강화했고, 그는 자신의 작품에 몰두했는데, 이는 더욱 더 우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3][4]

''가니메데의 납치''(1886), 캔버스에 유채, 58.5 x 45.5 cm, 개인 소장


모로는 1888년 에콜 데 보자르에 선출되었지만, 교수직과 수업을 거절했고, 교장 폴 뒤부아는 그에게 모든 공식적인 의무를 면제했다. 그러나 엘리 들로네(로마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는 임종 시에 모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학교의 주요 아틀리에 중 하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모로는 1891년 10월에 잠정적으로 수업을 맡았지만, 1892년 1월, 예순다섯 살의 나이에 교수이자 아틀리에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891년에서 1898년 사이에 약 125명의 학생들이 모로의 작업실을 거쳐갔다.[3][14]

그는 만년에 뛰어난 교사로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15] 모로의 수업은 곧 가장 진보적이고 모험적인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1896년 초 로제-마르크스는 "반란의 불꽃이 에콜 데 보자르의 심장부에서 타올랐다. 틀에 박힌 것에 반대하는 모든 반역자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하려는 모든 이들이 귀스타브 모로의 방패 아래 모였다."라고 썼다.[16] 모로는 자신의 견해나 스타일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극적인 분위기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따르도록 지적인 격려를 제공했다.[17] 그는 학생들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데려가 거장들을 연구하고 모방하게 했는데, 이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티스는 "우리에게 박물관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 것은 그의 거의 혁명적인 태도였다"고 말했다.[4] 학생들은 일요일 오후에 그의 집으로 초대되었지만 (그의 작업실은 볼 수 없었다), 그는 가끔 학생들을 방문했다.

알베르 마르케의 ''야수파 누드''(1898), 유채, 73 × 50 cm; 보르도 미술관


조르주 루오는 "그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의 교수가 아니라, 그를 본받는 것이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23] 루오는 이미 모로가 수업을 시작했을 때 학생이었다. 그는 곧 루오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봤고, 루오는 항상 모로를 최고의 존경심으로 대했다.[18] 마티스는 "귀스타브 모로의 훌륭한 점은 젊은 학생의 마음이 평생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하며 다양한 학문 시험을 통과하도록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라고 말했다.[23]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 입학을 거부당했지만, 모로는 학교의 공개 안뜰에서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자신의 수업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여 입학 시험을 면제했다.[19][20] 마티스는 곧 모로의 작업실에서 야수주의로 발전한 학생들 중 핵심 인물이 되었다. 알베르 마르케는 "1898년 초, 마티스와 저는 나중에 야수파라고 불리게 될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었고",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그려진 ''야수파 누드''가 그 예시라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종종 마음에 새겨졌던 그의 예언적인 말을 기억했다.[17] [16]

모로는 자신의 작품의 운명에 대한 관심을 1860년대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884년경에 자신의 그림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1891년 들로네의 죽음은 예술가의 사후 작품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였다. 모로는 자신의 집을 박물관으로 국가에 기증하고, 1895년에 집을 개조하여 3층의 작은 작업실을 훨씬 더 넓은 전시 공간으로 확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약 1년 동안 건강이 악화된 후, 모로는 1898년 4월 18일위암으로 사망했으며, 파리 몽마르트 묘지의 부모 무덤에 묻혔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언론에 알리지 말 것, 장례식은 매우 작고 간소하게 치를 것, 꽃은 자신의 무덤이 아닌 알렉상드린 뒤레의 무덤에 놓을 것을 명시하는 지침을 남겼다. 당시 예술가의 집 박물관은 매우 드물었고 프랑스에서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재산을 인수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의 조수 앙리 륍은 재산을 정리하고 정부가 인수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4]

3. 주요 작품

귀스타브 모로는 회화와 수채화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 회화: 1864년 살롱에 출품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를 비롯하여, 이아손(1865년),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운반하는 트라키아의 딸(1865년), 레다(1865년-1875년), 헤로데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1876년), 출현(1876년), 야곱과 천사(1878년), 성 체칠리아(1885년-1990년), 유피테르세멜레(1894년-1895년) 등이 대표적이다.

  • 수채화: 1886년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열린 수채화전에 출품된 『성스러운 코끼리 (페리)』 (국립서양미술관)[36]는 모로의 수채화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전시회는 라 퐁텐의 『우화』를 바탕으로 한 수채화 연작과 7점의 독립적인 주제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로의 생전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파에톤'' (1878년), 루브르 박물관

3. 1. 회화



귀스타브 모로는 1849년부터 1854년까지 프랑스 정부로부터 여러 점의 그림을 주문받았다. 1852년에는 『피에타』를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했다. 1855년에는 『크레타 섬의 미궁 속의 아테네 젊은이들』(브루 미술관)[32]을 그려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낭만주의의 극적인 표현과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기반한 균형미, 그리고 "적절함"(decorum)에 대한 아카데미의 이상이 융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로는 『갈바리아로 가는 길』(데카즈빌Decazeville, 노트르담 대성당) 제작 이후, 이탈리아에서의 성과를 자신의 회화 양식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에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작에 전념하여 1864년 살롱 (관전)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보수적인 살롱에서 논란을 일으켰지만, 모로에게 상을 안겨주었고, 나폴레옹 공[35]이 구매했다.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는 이 작품 제작에 사용된 습작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양식적으로는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 앵그르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와 19세기 전반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뚜렷한 윤곽선과 정교한 붓놀림은 르네상스 예술 연구와 아카데미에서의 수련을 통해 모로가 얻은 기법이다. 모로의 메모를 보면 그가 선과 악, 남성과 여성, 물질성과 정신성의 대립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대중과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대중지에는 관련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1886년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열린 수채화전에 출품된 『성스러운 코끼리 (페리)』 (국립서양미술관)[36]는 모로의 수채화 기법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을 보여준다. 높은 평가를 받은 이 전시회는 라 퐁텐의 『우화』에 기초한 수채화 연작과 일곱 점의 독립적인 주제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로의 생전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성스러운 코끼리』라는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전거는 없지만, 힌두교의 신이 타는 신성한 코끼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동시대 출판물 등에서, 다른 『페리』, 『성스러운 호수』, 『동양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페리페르시아정령이며, 코끼리 위에 누워 동양풍의 악기를 가진 여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19세기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모로 자신도 인도세밀화에 기초한 페리를 몇 점 그렸다. 여기서 이미 인도와 페르시아의 혼합을 볼 수 있지만, 『성스러운 코끼리』에서는 다양한 이미지의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접착되어, 보석 세공과 같은 "환상의 동양"이 만들어졌다. 당시 유포되었던 장식 모티프집의 도판에서는 인도풍의 장식물이 인용되었다. 또한, 『우화』의 연작을 그리는 데 있어서 모로는 파리 좌안의 동식물원에 다니며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스케치에 힘썼는데, 그 성과도 여기에 활용되었다. 페리와 그녀에게 헌상하는 날개 달린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로가 반복해서 그린 시인과 영감의 도상이 보인다.

모로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제작 연도기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년
이아손1865년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운반하는 트라키아의 딸1865년
레다1865년-1875년
헤로데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1876년
출현1876년
야곱과 천사1878년
성스러운 코끼리 (펠리)1886년
성 체칠리아1885년-1990년
유피테르세멜레1894년-1895년



레다, 모로 박물관

3. 2. 수채화

1886년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열린 수채화전에 출품된 『성스러운 코끼리 (페리)』 (국립서양미술관)[36]는 모로의 수채화 기법의 가장 뛰어난 부분을 보여준다. 높은 평가를 받은 이 전시회는 라 퐁텐의 『우화』에 기초한 수채화 연작과 일곱 점의 독립적인 주제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로의 생전 유일의 개인전이 되었다.

이 『성스러운 코끼리』라는 주제에 특정적인 전거는 없어 보이지만, 힌두교의 신이 타는 신성한 코끼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되는 한편, 동시대 출판물 등에서는 『페리』, 『성스러운 호수』, 『동양의 시인』이라고도 불렸다. 페리페르시아정령이며, 코끼리 위에 누워 동양풍의 악기를 가진 여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19세기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모로 자신도 인도세밀화에 기초한 페리를 몇 점 그렸다. 여기서 이미 인도와 페르시아의 혼합을 볼 수 있지만, 『성스러운 코끼리』에서는 다양한 이미지의 단편들이 모자이크처럼 접착되어, 보석 세공과 같은 "환상의 동양"이 창출되었다.

당시 유포되었던 장식 모티프집의 도판에서는 인도풍의 장식물이 인용되었다. 또한, 『우화』의 연작을 그릴 때 모로는 파리 좌안의 동식물원에 다니며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스케치에 힘썼는데, 그 성과도 여기에 활용되었다. 페리와 그녀에게 헌상하는 날개 달린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로가 반복해서 그린 시인과 영감의 도상이 보인다.

4. 영향

귀스타브 모로는 생전에 15,000점이 넘는 그림, 수채화, 드로잉 작품을 제작했다.[3]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사망 당시 1,200점의 그림과 수채화, 그리고 10,000점의 드로잉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국가에 기증했다.[1] 그의 제자였던 조르주 루오가 관장으로 임명되어 1903년 1월 14일 일반에 공개된 귀스타브 모로 국립 미술관은 파리 9구에 위치해 있다.[22]

그는 생전과 사후 10년 동안 상징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술사학자 장 셀츠는 "그는 상징주의자 이전의 상징주의자이자, 그들 중 가장 특별한 인물이었다."라고 썼다.[4] 그는 장 델빌과 페르낭 크노프와 같은 벨기에 상징주의 주요 인물과 프랑스의 오딜롱 르동에게 영향을 미쳤다.[1][3] 르동은 그의 작품에 대해 "모로는 독신으로, 삶의 충격으로부터 엄격하게 격리된 우아한 독신자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그것의 결실이며, 예술이고, 오직 예술일 뿐이며,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고 말했다.[2]

당대의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모로의 그림을 존경했으며, 테오필 고티에,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드 생-빅토르, 에밀 졸라가 모두 그의 작품을 칭찬했다. 테오도르 드 방빌, 호세 마리아 데 에레디아, 클라우디우스 포펠랭, 장 로랭, 앙리 카잘리스 등은 모로의 작품에 대해 시를 썼다.[3][2]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부상과 확산, 그리고 야수파, 입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추상 미술, 다다이즘의 등장으로 모로와 대부분의 상징주의 회화는 모더니즘과 덜 관련되어 보였고, 거의 잊혀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모로가 가지고 있던 약간의 명성은 조르주 루오, 앙리 마티스야수파의 스승으로서의 지위와 관련이 있었다.[1]

앙드레 브르통은 모로 미술관을 자주 찾았으며, 모로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저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이 운동의 선구자들을 열거했는데, 그중 "초현실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는" 시인과 화가로 모로, 피카소, 데 키리코 등을 포함한 소수의 예를 들었다.[24] 조르주 바타유는 그의 작품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쓰며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렀다.[26] 살바도르 달리 역시 모로의 작품을 매우 칭찬했으며,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27] 막스 에른스트는 때때로 모로의 작품 복사본을 사용하여 콜라주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앙드레 브르통은 자신의 저술을 통해, 그리고 다른 작가와 예술가들을 파리의 미술관으로 안내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생 동안 모로의 작품을 옹호했다.[1][3] 모로와 상징주의가 잊혀져 가던 시기에 브르통은 1958년 파리의 다토-라부아르 갤러리에서 상징주의 드로잉 전시회를 후원했다. 이 전시는 모로의 작품에 대한 인식을 재확립하는 데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1961년에는 루브르 박물관[28]과 현대 미술관[29]에서 모로의 회화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이어서 1962년 브뤼셀에서 상징주의의 획기적인 전시회인 ''르 그루프 데 XX와 그 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모로와 상징주의에 대한 전시회와 단행본이 비교적 정기적으로 출판되었다.[2]

아마노 요시타카파이널 판타지, 엔젤 에그, 뱀파이어 헌터 D와 같은 작품으로 유명한 일본의 예술가이며, 모로의 스타일에 영감을 받았다. 아마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처음 시도했을 때, 모로의 작품을 모방하려 했다고 말했다.[30]

5.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1898년 귀스타브 모로가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살던 파리 9구 로슈푸코 거리( rue de la Rochefoucauld프랑스어 ) 14번지의 집은 현재 모로 미술관( Musée Moreau프랑스어 )으로 사용되고 있다.[24][25][26][27]

모로의 집이자 작업실이었던 국립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의 상층부. 화가가 사망하기 직전에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모로 미술관을 자주 방문했으며, 모로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여겼다.[24] 그는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모로를 피카소, 데 키리코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는 예술가로 언급했다.[24] 조르주 바타유 역시 모로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칭송했으며,[26] 살바도르 달리도 모로의 작품과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을 극찬했다.[27] 막스 에른스트는 모로의 작품 복사본을 사용하여 콜라주를 제작하기도 했다.[3]

앙드레 브르통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로의 작품을 옹호했으며,[1][3] 1958년에는 상징주의 드로잉 전시회를 후원하여 모로 작품의 인식을 재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루브르 박물관[28]과 현대 미술관[29]에서 모로의 회화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1970년대에는 모로와 상징주의에 대한 전시회와 단행본이 정기적으로 출판되었다.[2]

아마노 요시타카파이널 판타지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일본 예술가로, 모로의 스타일에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30]

참조

[1] 서적 The Concise Encyclopedia of Symbolism Chartwell Books, Inc.
[2] 서적 Symbolist and Symbolism Editions D'Art Albert Skira, Geneva//Rizzoli International Publishing, Inc.
[3] 서적 Gustave Moreau Flammarion
[4] 서적 Gustave Moreau Crown Publishers, Inc.
[5] 서적 Gustave Moreau: His Life and Work https://archive.org/[...] Praeger Publishers
[6] 서적 Les Peintres celebres Tours
[7] 서적 Gustave Moreau https://archive.org/[...] Little Brown & Company
[8] 백과사전 Moreau, Gustave Ox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Symbolist Art Thames & Hudson
[10] 학술지 A Letter to Bryan Osburn from Trevor Winkfield http://brooklynrail.[...] 2012-04-00
[11] 서적 Gustave Moreau: The Assembler of Dreams
[12] 웹사이트 Sting in the tale – how Gustave Moreau added bite to La Fontaine’s fables https://www.apollo-m[...] 2021-10-11
[13] 웹사이트 An exhibition of rarely seen watercolours by a great French artist, that illustrate the 17th-century Fables of Jean de la Fontaine https://waddesdon.or[...] 2021-10-11
[14] 서적 Des hommes et des activities: autour d'un demi-siecle https://books.google[...] N/A
[15] 서적 History of modern Art: Painting, Sculpture, Architecture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16] 서적 The Fauves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17] 서적 Fauvism: Biographical and Critical Study Editions D'Art Albert Skira, Geneva
[18] 서적 Rouault: Biographical and Critical Study Editions D'Art Albert Skira, Geneva
[19] 서적 Matisse: Biographical and Critical Study Editions D'Art Albert Skira, Geneva
[20] 서적 Matisse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21] 서적 Grammaire de l'ornement, Le Costume hisetorique, Le Costume les armes, ustensiles, outils des peuples anciens et modernes N/A
[22] 서적 Rouault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23] 서적 Modern Art: The Decisive Years 1884-1914 Editions D'Art Albert Skira, Geneva//Rizzoli International Publishing, Inc.
[24] 서적 Manifestos of Surrealism Ann Arbor Paperbacks,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5] 서적 Surrealists and Surrealism, 1919-1939 Editions D'Art Albert Skira, Geneva/Rizzoli International Publishing, Inc.
[26] 학술지 Gustave Moreau l'attardé, précurseur de surréalisme
[27] 서적 Les Passions selon Dalí Denoel
[28] 서적 Gustave Moreau: Deuxième édition, revue et corrigée Musée du Louvre, Éditions des Musées Nationaux
[29] 서적 Odilon Redon, Gustave Moreau, Rodolphe Bresdin Museum of Modern Art / Art Institute of Chicago / Doubleday
[30] 웹사이트 This mini-documentary makes me love Yoshitaka Amano even more https://www.destruct[...] 2017-10-27
[31] 그림 모로《솔로몬의 야곡》 http://art.pro.tok2.[...] 1853
[32] 그림 모로『크레타 섬의 미궁에 있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지는 아테네 사람들』 http://art.pro.tok2.[...] 1854-55
[33] 서적 Gustave Moreau Correspondance d’Italie Somogy Éditions d’Art
[34] 그림 모로가 연필로 스케치한 도가의 초상화
[35] 문서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
[36] 웹사이트 国立西洋美術館公式サイトの作品解説 https://collecti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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