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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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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개최된 공모전 형식의 미술 전시회이다.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를 모방하여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부문으로 운영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미술계 신인 등용문 역할을 했지만, 일본인 심사위원 비율 증가와 권위주의 만연, 친일 화가 양성 등의 비판을 받았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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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전람회
개요
명칭조선미술전람회 (朝鮮美術展覽會)
약칭선전 (鮮展), 조선미전 (朝鮮美展)
기간1922년 ~ 1944년
역사
시작1922년
종료1944년
설명
성격일제강점기 한국에서 개최된 미술 전람회
주최
주최조선총독부
목적
목적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하에 조선 미술계를 장악하고, 친일 미술가를 양성하기 위함
영향
영향친일 미술가 양산
한국 미술계의 왜곡
기타
관련 인물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참고 문헌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2004년 12월 27일, 민족문제연구소)

2. 역사

조선총독부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설립하였다.[2][3] 1922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개최되었으며, 초기에는 미술학교 설립 대신 개최되었다.[3] 많은 관람객과 출품작을 기록하며 성장했고, 전람회 장소는 저동, 소공동, 경복궁 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심사위원은 초기에는 1930년1931년에 심사위원을 맡은 김돈희 (서예가)|김돈희한국어와 같이 한국인도 참여했으나,[3] 점차 일본인의 비율이 높아졌다.

2. 1. 설립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설립하였다.[2][3] 당시 한국에는 미술을 위한 주요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3] 총독부는 처음에는 미술학교 설립을 고려했으나, 비용 문제로 대신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3]

1922년 5월에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었으며, 1944년 제23회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문부성 미술전람회를 모방한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양화,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도 조선미술의 특성을 살린 서예 부문이 있었다.

2. 2. 개최 과정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강점기1922년 5월에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어 1944년 제23회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되었다.[3]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이었다.[2][3] 당시 한국에는 미술을 위한 주요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3] 총독부는 처음 미술학교 설립을 고려했지만, 비용 문제로 대신 이 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3]

첫 번째 전람회에는 약 3,000명이 참관했으며, 개장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전시회와 이후의 모든 전시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당시 신문에서 자세히 다루었다.[3] 두 번째와 세 번째 전람회에는 각각 약 3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다.[3] 입장료는 어른 20전, 어린이 10전, 학생 또는 단체 관람객 5전이었다.[3] 첫 해에는 291명이 430점의 작품을 출품했으며, 171명의 작가가 215점의 작품을 선정되었다. 매년 출품자 수가 증가하여 1930년대에는 연간 1,000명이 넘는 출품이 있었다.[3]

전람회는 문부성 미술전람회를 모방한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양화,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도 조선미술의 특성을 살린 서예 부문이 있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일본인의 비율이 증가했다. 제15회부터는 추천 작가 제도가 신설되어,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 발표 무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다.

전람회 장소는 일정하지 않았다.[3] 1920년대 초에는 저동에 있는 총독부 건물에서, 그 후 10년 동안에는 소공동에 있는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개최되었다. 1930년부터는 경복궁에서 개최되었고, 1937년에는 경복궁 후원에 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용 전시관이 추가되었다.[3]

최초로 심사위원이 된 한국인은 1930년1931년에 심사위원을 맡은 김돈희 (서예가)|김돈희한국어였다. 1937년에 다른 한국인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지만,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3]

2. 3. 일제강점기 한국 미술계에 미친 영향

조선미술전람회는 현대 한국 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2][3]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출품된 한국 미술 작품에서 서양 미술의 영향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3] 그러나 전람회의 구성과 심사위원에 대한 일본의 통제는 서양 미술과 일본 미술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한국 미술을 축소 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회에서 전통적인 한국 미술이 선보여지고 홍보되었다.[2]

3·1 운동 이후 시행된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었다. 1922년 5월에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1944년 제23회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주로 미술계 신인의 등용문 역할을 수행하여,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일제강점기 하의 선전을 통해 등단하게 되었다.

문부성 미술전람회(문전) 또는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를 모방한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도 조선미술의 특성을 살린 서예 부문이 설치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일본인의 비율이 증가했다. 제15회부터는 추천 작가 제도가 신설되어,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 발표 무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많은 예술가를 배출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관전이라는 형식에서 예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전후 한국의 근대 미술이 일본화되어, 화단이 일본화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광복 이후 1949년대한민국에서 창립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조선미술전람회를 계승하는 형태가 되었다.[2]

3. 구성 및 심사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미술원전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한국 미술계의 주요 권위로 여겨졌다.[2][3]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장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당시에는 스캔들로 여겨졌던 누드 그림이 전시되기도 했다.(사진 누드는 불허)[3]

6개월 이상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도 출품 자격이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출품자의 약 70%가 일본인이었다. 이에 잡지 《개벽》은 1924년 7월호에 조선미술전람회를 "한국인은 구경꾼인 일본인을 위한 축제"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3]

3·1 운동 이후 시행된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1922년 5월에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1944년 제23회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되었으며, 미술계 신인의 등용문 역할을 수행하여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등단하게 되었다.

문부성 미술전람회(문전) 또는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를 모방한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전후 한국 근대 미술이 일본화되어 화단이 일본화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독립 이후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립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조선미술전람회를 계승하는 형태가 되었다.

3. 1. 부문

이 전람회는 일본미술원전을 본떠 만들어졌다.[2] 처음에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의 세 가지 부문으로 나뉘었다.[2] 1932년에 부문이 재편성되어 서예는 새로운 공예 부문에 포함되었다.[2][3]

3. 2. 심사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미술원전을 본떠 만들어졌다.[2]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심사하여 수상자를 선정했으며, 다양한 기준에 따라 여러 상과 표창이 수여되었다. 수상자는 종종 상당한 인정을 받았고, 작품이 구매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년도 수상작을 보고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경우도 있었다.[3] 심사위원으로 조선인도 위촉되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일본인의 비율이 증가했다. 제15회부터는 추천 작가 제도가 신설되어,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 발표 무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다.

4. 비판 및 논란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는 많은 예술가를 배출했지만, 예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전후 한국 근대 미술이 일본화되어 화단이 일본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출품자들은 전년도 수상작을 보고 수상자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도 했다.[3]

4. 1. 일본의 영향력 과다

이 전람회는 일본미술원전을 본떠 만들어졌다.[2] 초기에는 출품자의 약 70%가 일본인이었다. 잡지 《개벽 (잡지)|개벽한국어》은 1924년 7월호에 조선미술전람회를 "한국인은 구경꾼인 일본인을 위한 축제"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3] 수상자는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거쳐 선정되었다.[3]

이 전람회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으며, 문부성 주최의 "문부성 미술전람회" 또는 "제국미술원전람회"를 모방한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일본인의 비율이 증가했다.

이러한 일본의 상당한 통제는 서양 미술과 일본 미술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한국 미술을 축소 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2] 관전이라는 형식에서 예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전후 한국의 근대 미술이 일본화되어, 화단이 일본화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4. 2. 권위주의 심화

3·1 운동 이후 시행된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었다.[2] 1922년 5월에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었고,[2] 1944년 제23회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되었다.[2]

조선미술전람회는 주로 미술계 신인의 등용문 역할을 수행하여, 일제강점기 하에서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등단하게 되었다.

문부성 주최의 "문부성 미술전람회"(문전) 또는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를 모방한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도 조선미술의 특성을 살린 서예 부문이 설치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일본인의 비율이 증가했다. 제15회부터는 추천 작가 제도가 신설되어,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 발표 무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많은 예술가를 배출했지만, 관전이라는 형식에서 예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전후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가 진행되어, 화단이 일본화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4. 3. 친일 논란

이 전람회는 일본미술원전을 본떠 만들어졌다.[2] 3·1 운동 이후 시행된 문화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었다. 1922년 5월에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1944년 제23회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개최되었다.[3]

초창기 출품자의 약 70%가 일본인이었다. 이에 잡지 《개벽 (잡지)|개벽한국어》은 1924년 7월호에 한국인과 일본인 출품자 비율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한국인은 구경꾼인 일본인을 위한 축제"라고 묘사했다.[3]

수상자는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거쳐 선정되었다.[3]

선전은 많은 예술가를 배출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관전이라는 형식에서 예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전후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가 진행되어, 화단이 일본화의 영향에 물들게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5. 해방 이후

광복 이후 1949년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창립하여 조선미술전람회를 계승하였다.[2]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그 관행을 대부분 조선미술전람회의 관례에 기반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미술전람회 https://www.donga.co[...] 2009-12-31
[2] 백과사전 조선미술전람회 (朝鮮美術展覽會)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3] 웹사이트 관전의 시작, 조선 미술 전람회 http://contents.hist[...]
[4]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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