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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혈연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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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족(혈연 집단)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친족 조직을 의미한다. 송대(宋代)에 과거 제도로 인해 특정 가문의 장기 집권이 어려워지자, 사대부들은 종족 제도를 통해 친족과 족인을 조직화하여 장기적인 유지를 도모했다. 종법, 사당, 족보 등의 제도가 종족 조직의 근간이 되었으며, 범중엄의 범씨의장은 새로운 종족 조직의 탄생을 상징했다. 종족은 일반적으로 결속력과 전통을 중요시하며, 조상의 가훈을 전하고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특징을 보인다. 중국에서는 호족이 동족 간의 결합을 강화하면서 종족이 발전했으며, 수·당 시대에는 약화되었으나 당 말 문벌 귀족 몰락 후 신흥 지주들이 상호 부조 수단으로 종족을 강화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종족은 쇠퇴하였으나, 한국, 베트남 등 유교 문화권에서는 종족 개념이 전해져 정착되었다. 중국 종족 협회는 같은 성씨와 조상 고향을 공유하는 친족들의 모임으로,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조상 숭배 의례를 수행하며, 공동 소유 재산과 자원을 통해 혜택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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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혈연 집단)
가족 및 친족 관계
정의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 및 사회적 연결망
중요성사회 구조, 문화, 경제, 정치에 영향
가족의 형태
직계 가족 (핵가족)부모와 자녀로 구성
확대 가족여러 세대의 가족 구성원이 함께 거주
부계 가족아버지 혈통을 중심으로 가족 구성
모계 가족어머니 혈통을 중심으로 가족 구성
가족 내 역할
가장가족을 대표하고 책임을 지는 역할
주부가사와 자녀 양육을 담당하는 역할
장남가문의 전통을 잇고 부모를 봉양하는 역할
장녀가사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보는 역할
가족 행사
결혼두 가문의 결합을 의미하는 중요한 행사
제사조상을 기리고 가족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행사
명절가족 구성원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즐기는 행사 (설날, 추석 등)
가족 관련 용어
친족혈연 또는 혼인으로 연결된 사람
촌수친족 간의 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단위
항렬같은 혈통 내에서 세대의 위치를 나타내는 순서
가족 관계의 변화
현대 사회의 변화핵가족화, 저출산, 고령화, 이혼 증가 등으로 인해 가족 형태와 기능이 변화
새로운 가족 형태1인 가구, 동거 가족, 다문화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 등장
宗族 (종족)
정의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혈연 집단
특징혈연, 지연, 신앙 등으로 연결
역할사회 질서 유지, 상호 부조, 교육, 문화 전승
종족 (혈연 집단)
정의공통의 조상을 중심으로 맺어진 혈연 집단
특징혈연 중심, 공동체 의식 강조
역할사회적 결속 강화, 상부상조, 전통 문화 유지

2. 기원

종족 조직의 기원은 송대(宋代)에 있다.[11] 앞서 당대(唐代)의 사족(士族)과 문벌(門閥)은 누대에 걸쳐 관리가 되었고 사족 태생부터 벼슬길에 진출하였지만, 송대에는 과거(科擧) 제도 하에서 어떤 집안도 장기 집권하기 어려웠고, 통치 집단은 빠르고 빈번하게 물갈이가 되었으며, 번성하던 가문이 갑자기 기울기도 했다.[11]

송대 사대부(士大夫)들은 개인의 역량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자신과 자손을 위해 앞으로 친속과 그 족인을 조직화함으로써 조직을 통해 오랜 세월을 유지할 수 있는 종족 제도를 만들었고, 종법(宗法), 사당(祠堂), 족전(族田), 족학(族學), 족보(族譜), 족장(族長), 가법(家法) 등을 제창하였다. 그것은 이후 8백 년에 걸쳐 지속될 종족이라는 친속 조직의 근간이 되었다.[12]

11세기 중기 범중엄(范仲淹)의 종족이 모인 이른바 범씨의장(范氏義莊)이 나타났는데, 새로운 종족 조직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13] 소주(蘇州) 사람이었던 범중엄이 의창(潁昌)으로 옮겨 살게 된 뒤, 재물을 내어 집안의 고향인 소주의 족인(族人)들을 위해 의장을 설립하였다. 의장에서는 의미(義米)라 불리는 쌀을 지급하여 빈궁한 족인들을 구제하였으며, 아울러 과거 수험생을 위한 지원도 해 주고 있어 이들이 벼슬길에 나아간 뒤 동족에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러한 의미 지원은 해당 인물이 벼슬에 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14]

송대의 종족들은 한곳에 모여 살았지만 집집마다 제각기 집안을 다스렸고 청명(清明)제(淸明祭) 같은 소수의 가족 행사만이 있었으며 족보 또한 흔하지 않았고, 족산이라 불리는 종족의 공통재산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조직은 대부분 느슨해져서 집안도 재산도 나뉘어 있었다. 이는 같은 조상을 공유할 뿐인 「공조」(共祖) 집단이었고,극소수만이 「취거형」(聚居型) 가족을 이루었다.[15] 상층 사대부만이 종족을 돌볼 능력이 있었고, 의장은 으레 한 집안 재산이라는 명분만 있을 뿐 일족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고 임시로 종족을 도우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며, 자주적인 족학이나 조상 제사를 지낼 만한 능력은 없었다.[16]

송대의 사인(士人)들은 이러한 종족 제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식들을 연구했지만, 이러한 방식들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원대(元代)에 이르러서였다.[17]

2. 1. 송대 종족 제도의 형성

당대(唐代)의 사족(士族)과 문벌(門閥)은 대대로 관직을 독점하였으나, 송대(宋代)에는 과거(科擧) 제도의 시행으로 특정 가문의 장기 집권이 어려워졌다. 통치 집단의 빈번한 교체와 가문의 급작스러운 몰락은 사대부(士大夫) 계층에게 개인 역량의 한계를 인식시키고, 친족과 족인(族人)을 조직화하여 장기적인 생존을 도모하는 종족 제도를 탄생시켰다.[11] 종법(宗法), 사당(祠堂), 족전(族田), 족학(族學), 족보(族譜), 족장(族長), 가법(家法) 등은 이후 8백 년간 지속될 종족 조직의 근간이 되었다.[12]

11세기 중기 범중엄(范仲淹)의 범씨의장(范氏義莊)은 새로운 종족 조직의 탄생을 상징한다.[13] 범중엄은 재산을 출연하여 고향 소주(蘇州)의 족인들을 위해 의장을 설립하고, 의미(義米)를 지급하여 빈궁한 족인을 구제하고 과거 시험을 지원했다.[14]

송대의 종족들은 한곳에 모여 살았지만 집집마다 제각기 집안을 다스렸고 청명제(清明祭) 같은 소수의 가족 행사만이 있었으며 족보 또한 흔하지 않았고, 족산이라 불리는 종족의 공통재산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조직은 대부분 느슨해져서 집안도 재산도 나뉘어 있었다. 이는 같은 조상을 공유할 뿐인 「공조」(共祖) 집단이었고,극소수만이 「취거형」(聚居型) 가족을 이루었다.[15] 상층 사대부만이 종족을 돌볼 능력이 있었고, 의장은 으레 한 집안 재산이라는 명분만 있을 뿐 일족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고 임시로 종족을 도우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며, 자주적인 족학이나 조상 제사를 지낼 만한 능력은 없었다.[16] 송대 사인(士人)들은 종족 제도 유지를 위한 다양한 방식을 연구했지만, 실행은 원대(元代)에 이르러서였다.[17]

2. 2. 송대 종족의 특징

3. 특징

종족은 일반적으로 모여 살고, 단결과 전통을 중요시했으며, 여러 세대를 불문하고 서로 도우며 결속력을 유지한다.[18] 동년배의 족속은 이름 가운데 항렬자가 같은 것으로 연대를 표시하고 씨족의 응집력을 나타낸다. 종족은 조상의 가훈을 전하고, 명절에는 함께 모여 제사와 연회를 올린다.[19] 아들이 없는 경우, 종족 내 다른 남성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종족의 양식은 중국에서 20세기까지 보존되었다.[18]

4. 중국에서의 종족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戶, 가구)라고 불리는 단위의 소가족이 일반화되었고, 이 호의 파악(호적 작성)이 왕조의 정치 경제력의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토지를 축적하여 지주로 성장한 호족은 축적한 자산의 산실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동족 간의 결합이 강했고, 한나라, 육조 시대의 호족 세력은 향리에서 대대로 동거하는 형태를 취했다.

대대손손 동거는 중국에서 미풍으로 여겨졌고, 의문(義理, 의리가 굳은 일족)으로 표창받는 경우가 있다. 자주 인용되는 예로는 당나라 초기의 장공예(張公藝)의 일가가 있는데, 9대 전부터 계속 일족이 동거를 해왔다. 천자인 고종이 그 집을 방문하여 어떻게 하면 많은 일족이 동거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묵묵히 "참을 인(忍)" 자를 백 자 넘게 써서 바쳤다고 한다.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결합이 약화되었지만, 당나라 말에 명족이라고 불린 문벌 귀족이 몰락한 후, 신흥 지주가 몰락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상호 부조 수단으로 종족을 강화했다. 족장 아래 족보를 두고, 종사를 설치하며, 족산을 두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화중, 화남 지방에 널리 보급되었다.

4. 1. 송대 이후의 종족

수(隋) ・ 당(唐) 시대에는 동족간의 결합이 약화되었으나, 당 말기 문벌 귀족 몰락 이후 신흥 지주들이 상호 협조 수단으로 종족을 강화했다. 족장(族長)을 중심으로 족보를 소유하고, 종사(宗祠)를 지내며, 족산(族産)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화중(華中) ・ 화남(華南)에 널리 보급되었다.

11세기 중기, 범중엄과 이사중(李師中)은 의장을 설립하여 초기 종족을 세웠다.[20] 송대에는 관리와 사대부들이 종족 창설을 주도했고, 상인과 백성들의 참여는 적었다.[21] 종족 조직은 교육을 통한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을 지원함으로써 종족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휴녕현의 오씨, 왕씨, 청씨 일문은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고, 많은 재산을 보유한 종족이었다.[22]

4. 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변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사촌 간 결혼을 법으로 금지하고, 근친결혼의 위험성을 선전하여 종족 세력을 약화시켰다.[20] 고대 중국에서는 동성결혼을 금하고 사촌 남매의 결혼은 이성(異性)으로 간주되어 금기시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20]

1953년 이후 토지개혁 운동을 통해 종족 조직의 주요 후원자였던 보수적 지주, 부농 계층이 타격을 입고, 토지 경작권이 소가족 또는 개인 단위로 재분배되었다.[20] 1955년에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모든 농민이 생산협동조합에 편입되었다.[20]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족보가 봉건 잔재로 취급되어 소각되기도 했다.[20]

현대 중국에서는 사회 발전, 도시화, 사회사상의 해방, 핵가족 중심의 가족 모델 확산 등으로 인해 종족이 일상에서 거의 사라졌다.[20]

5. 동아시아에서의 종족

종족이라는 단어나 이념은 유교 체제가 침투한 한반도베트남에도 전해져서 정착하였다.[7]

거꾸로 일본에서는 씨성(氏姓) 사회가 비교적 유지되고 있었고, 유교 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종족제는 형성 초기부터 중국이나 한반도와는 다른 유교관 ・ 가족관이 형성되어 있었다.

동성불혼[7]의 원칙을 따르며, 여계는 포함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戶, 가구)라고 불리는 단위의 소가족이 일반화되었고, 이 호의 파악(호적 작성)이 왕조의 정치 경제력의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토지를 축적하여 지주로 성장한 호족은 축적한 자산의 산실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동족 간의 결합이 강했고, 나라, 육조 시대의 호족 세력은 향리에서 대대로 동거하는 형태를 취했다.

대대손손 동거는 중국에서 미풍으로 여겨졌고, 의문(義理, 의리가 굳은 일족)으로 표창받는 경우가 있다. 자주 인용되는 예로는 나라 초기의 장공예(張公藝)의 일가가 있는데, 9대 전부터 계속 일족이 동거를 해왔다. 천자인 고종이 그 집을 방문하여 어떻게 하면 많은 일족이 동거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묵묵히 "참을 인(忍)" 자를 백 자 넘게 써서 바쳤다고 한다.

나라, 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결합이 약화되었지만, 당나라 말에 명족이라고 불린 문벌 귀족이 몰락한 후, 신흥 지주가 몰락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상호 부조 수단으로 종족을 강화했다. 족장 아래 족보[8]를 두고, 종사[9]를 설치하며, 족산[10]을 두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화중, 화남 지방에 널리 보급되었다. 종족이라는 말과 이념은 유교 체제가 침투한 한반도베트남에도 전해져 정착되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씨족 사회가 비교적 유지된 채 유교 체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종족제가 형성되지 않아 중국이나 한반도와는 다른 유교관, 가족관이 형성되었다.

5. 1. 한국의 종족

한국에는 유교와 함께 종족 개념이 전래되어 정착되었다.[8] 한국의 종족은 동성동본을 중시하며, 족보를 통해 혈통을 기록하고, 문중(門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5. 2. 베트남의 종족

베트남 또한 유교 체제의 영향으로 종족이라는 개념과 이념이 정착되었다.[7]

5. 3. 일본의 경우

일본에서는 씨족 사회가 비교적 유지된 채 유교 체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이나 한반도와는 다른 유교관 및 가족관이 형성되어 종족제가 발달하지 않았다.[7]

6. ''족보''(族譜)

zúpǔ/族譜중국어는 중국의 친족 등록부 또는 족보로, 친족의 기원, 남성 혈통, 그리고 저명한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등록부는 일반적으로 대가족의 장자에 의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며, 장자는 이 책임을 다음 세대로 물려준다. xiū zúpǔ/修族譜중국어는 중국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임무이며,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세대가 지나면, 지역 씨족 혈통은 종종 이러한 족보의 총서를 출판한다. 압도적으로 많은 족보는 개인 소유로 남아 있지만, 많은 수가 베이징 대학, 상하이 도서관, 코넬 대학교 및 동양문고에서 발견될 수 있다.

7. 중국 종족 협회

광둥성 산터우에 있는 차이씨 종가 사당


후베이성 홍안현의 조상 사당에서 예배 의식을 위해 모인 사람들


'''중국 종족 협회'''는 '''친족 협회''' 또는 '''조상 협회'''라고도 불리며, 한족 사회 관계 제도의 일종이자 중국 조상 종교의 기본 단위이다.[1] 이들은 같은 중국 성씨를 공유하고, 종종 같은 지리적 기원(조상 고향)을 가지며, 따라서 동일한 후원 신을 모시는 친족들을 모은다. 이들은 중국 친족과 별개의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기업 형태이다. 이러한 제도와 그 구체적인 표현은 '''종족 교회''' 또는 '''친족 교회'''라고도 불리며, 학문적인 수준에서는 주로 '''유교 교회'''라고 불린다.

중국 친족 협회는 구성원들에게 ''관계''(사회적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그들의 집회 중심지로서 친족의 선조를 숭배하기 위한 조상 사당 또는 사원을 짓고 관리하며, 그곳에서 단결의 의례를 수행한다.[2]

종족은 구성원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고 느끼고, 그들의 집단 정체성을 매우 의식하며, 공동 소유 재산과 공유 자원으로부터 혜택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기업''이다.[3] 혜택은 조상 사당과 가문의 잉여 소득에서 나오며, 이는 관리자에 의해 재투자되거나 연간 배당금으로 분배된다.[4] 종족에 속함으로써 얻는 혜택은 보호와 후원의 측면에서도 측정될 수 있다.[4] 조상 사당은 또한 지역 학교를 지원하고 자선 활동에 참여한다.[5]

서로 다른 종족들은 융합과 분열의 반대 과정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6] 또한 "다종족 지역"으로 분산 및 분열되거나 한 곳에 집중될 수 있으며, 또는 "단일 종족 지역"이 될 수도 있다.[6]

7. 1. 기능 및 특징



'''중국 종족 협회'''는 '''친족 협회''' 또는 '''조상 협회'''라고도 불리며, 한족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사회 관계 제도이며 중국 조상 종교의 기본 단위이다.[1] 같은 중국 성씨를 공유하고, 종종 같은 지리적 기원(조상 고향)을 가지며, 동일한 후원 신을 모시는 친족들을 모은다. 이들은 중국 친족과 별개의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기업 형태이다.

중국 친족 협회는 구성원들에게 ''관계''(사회적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친족의 선조를 숭배하기 위한 조상 사당 또는 사원을 짓고 관리하며, 그곳에서 단결의 의례를 수행한다.[2]

종족은 구성원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고 느끼고, 집단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며, 공동 소유 재산과 공유 자원으로부터 혜택을 얻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업''이다.[3] 혜택은 조상 사당과 가문의 잉여 소득에서 나오며, 관리자에 의해 재투자되거나 연간 배당금으로 분배된다.[4] 종족 소속의 혜택은 보호와 후원으로도 간주된다.[4] 조상 사당은 지역 학교를 지원하고 자선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5]

서로 다른 종족들은 융합과 분열의 반대 과정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6] 또한 "다종족 지역"으로 분산 및 분열되거나 한 곳에 집중될 수 있으며, 또는 "단일 종족 지역"이 될 수도 있다.[6]

7. 2. 발전 양상

8. 조상 사당(祠堂)

산터우, 광둥 성에 있는 거(葛)씨 조상 사당


조상 사당은 종족 연합의 집회 장소로, 종족 연합이 사당을 짓고 관리한다. 이 사당은 특정 혈족의 조상 숭배에 헌신하며, 혈족 구성원들이 모여 단결의 의식을 수행하고 연회를 연다.[2]

9. 변형

9. 1. 외척(外戚)

황족 친족은 황제와의 관계 때문에 제국 시대에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중국 역사 전반에 걸쳐 황족 친족은 다양한 시기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이들에 의한 권력 찬탈(簒奪)이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한나라의 여태후/呂后중국어, 당나라의 측천무후/武則天중국어, 청나라의 서태후/慈禧太后중국어이다. 한나라의 찬탈자 왕망왕태후(王太后)의 조카였다.

9. 2. 청대(淸代)

청나라 시대에, 제국 정부는 중국 종족들이 사회 복지 및 초등 교육과 관련된 것과 같은 준정부 기능을 수행하도록 장려했다.

참조

[1] 기타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기타
[8] 문서 계도
[9] 기타
[10] 기타
[11] 논문 世家大族的沒落
[12] 논문 世家大族的沒落
[13] 논문 世家大族的沒落
[14] 논문 北宋士大夫的寄居與宗族
[15] 논문 宋代明州士人家族的形態
[16] 논문 宋代明州士人家族的形態
[17] 논문 宋代明州士人家族的形態
[18] 논문 世家大族的沒落
[19] 논문 世家大族的沒落
[20] 논문 世家大族的沒落
[21] 논문 北宋士大夫的寄居與宗族
[22] 논문 《新安大族志》與中國士紳階層的發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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