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주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삭은 조비가 즉위하기 전부터 신임을 받아 사마의, 진군, 오질과 함께 사우로 불린 인물이다. 황초 5년(224년) 연회에서 오질과 조진의 갈등을 중재하려다 실패하고, 격분하여 칼을 뽑아 바닥을 내리찍는 사건이 있었다. 사망 후 장례 방식과 관련하여 장제와 예법 논쟁이 있었으며, 최종 관위는 중령군으로 224년에서 249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생애는 오질별전과 통전에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건안 22년(217년), 조비가 위나라 태자로 있을 때 사마의, 진군, 오질과 함께 '사우(四友)'라 불리며 측근으로 활동했다.[3]

황초 5년(224년), 오질이 도성에 왔을 때 열린 연회에서 조진의 비만과 주삭의 마른 몸을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주삭은 "폐하께서 우리를 즐겁게 하려고 모았는데, 그 정도까지 하는가?"라며 중재했지만, 오질은 "주삭이 자리를 망쳤다"라며 맞받아쳤다. 주삭은 급한 성격 탓에 격노하여 칼로 땅을 베고 퇴장했다.[4]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나, 장제의 상소에 주삭의 장례 모습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224년에서 249년 사이에 중령군으로 재직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

2. 1. 조비의 측근

문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신임을 받아 사마의, 진군, 오질과 함께 사우(四友)라고 불렸다.[3] 건안 22년(217년) 위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태자 중서자 사마의, 진군, 오질과 함께 태자 조비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황초 5년(224년), 중령군(中領軍) 주삭은 문제의 배려로 오질, 조진 등과 함께 연회를 크게 벌여 즐겼다. 조진은 뚱뚱하고 주삭은 비쩍 말랐었는데, 오질이 조진을 놀릴 요량으로 광대를 불러 살에 대한 이야기를 풀게 하였다.

이에 조진은 오질에게 항의하였는데, 동석한 조홍·왕충은 도리어 조진에게 살을 빼라고 이야기하였다. 조진이 더욱 성을 내자 오질은 칼을 만지며 조진을 도발하였다. 주삭은 오질을 꾸짖으며 일을 수습하려 하였는데, 오질은 이번에는 주삭을 비난하였다. 본래 성미가 급했던 주삭은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칼을 뽑아 바닥을 내리찍었고, 결국 연회는 파하고 말았다.[4]

2. 2. 오질과의 갈등

황초 5년(224년), 문제의 배려로 중령군(中領軍) 주삭은 오질, 조진 등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다. 조진은 뚱뚱하고 주삭은 말랐는데, 오질이 조진을 놀리려고 광대를 불러 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했다.

이에 조진이 항의하자, 조홍, 왕충은 오히려 조진에게 살을 빼라고 하였다. 조진이 더욱 화를 내자 오질은 칼을 만지며 조진을 도발하였다. 주삭은 오질을 꾸짖으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오질은 이번에는 주삭을 비난하였다. 평소 성격이 급했던 주삭은 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바닥을 내리찍었고, 결국 연회는 파하고 말았다.[4]

2. 3. 사망과 장례 논쟁

주삭이 죽었을 때 관원들은 장례를 치르는 동안 관을 벗고 베로 이마를 가려 조상하였는데, 훗날 장제는 이를 예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5] 장제의 상소에 따르면, 주삭은 224년에서 249년 사이에 중령군으로 재직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

3. 출전

주삭의 주요 기록은 《오질별전》과 《통전》에 전해진다.[3][4][5]

건안 22년(217년), 위나라 건국 당시 조비의 측근으로 사마의, 진군, 오질과 함께 '사우(四友)'로 불렸다.[3]

황초 5년(224년), 오질은 도성 참배 중 연회에서 예인들에게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켰다. 이는 대장군 조진의 비만과 중령군 주삭의 마른 체형을 조롱한 것이었다. 분노한 조진과 오질은 칼을 든 채 말다툼을 벌였다. 주삭은 "폐하께서 우리를 즐겁게 하려 모았는데, 그 정도까지 하는가?"라며 중재에 나섰으나, 오질은 "주삭이 자리를 망쳤다"라며 맞받아쳤다. 조진은 '조자단'이라는 휘를 불렀다. 여러 장수들이 진정시킨 후 모두 자리로 돌아갔지만, 주삭은 격노하여 칼로 땅을 베고 퇴장했다.[4]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나, 장제의 상례 관련 상소에 주삭의 상례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최종 관직은 중령군이며, 224년에서 249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제의 몰년은 249년이며, 주삭이 재임 중 사망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명제 초년 중령군은 환범이었다.)[5]

참조

[1] 서적 曹丕や四友の生年は、曹丕187年、呉質177年、司馬懿179年、陳羣153年以降(『三國志』より孔融より年下、荀彧と同世代)となる。没年は下記より224年~249年の間
[2] 서적 『陶淵明集 集聖賢羣輔録』中領軍'''譙'''朱鑠字'''彦才'''。
[3] 서적 晋書 宣帝紀
[4] 서적 三國志 注 呉質別伝
[5] 서적 通典 礼41 「天子弔大臣服議」蒋済奏:「會喪不宜去冠。奏事者上言,前會故領軍朱鑠喪,自卿以下皆去冠,以布帕額。~
[6] 서적 진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