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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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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질은 조조를 섬기며 조비와 조식 형제의 후계자 다툼에서 조비를 지지한 인물이다. 조비가 황제가 된 후 북중랑장, 열후에 임명되었으며, 사지절, 도독 유주·병주 제군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가절, 도독 하북 제군사, 진위장군에 이르렀다.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오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230년에 시중이 되었으나 진군을 비방하는 발언으로 다른 신하들의 반발을 샀으며, 같은 해에 사망했다. 사후 추후로 시호되었으나 아들 오응의 상소로 위후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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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질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오질
원어 이름吳質
계중(季重)
출생178년
사망230년
출생지산둥 성딩타오 현
직업관료, 장군
작위위후(威侯)
가족오응
사마사의 두 번째 부인
관직 및 경력
소속조위
원성령(元城令)재임 시기 불명
조가장(朝歌長)재임 시기 불명
북중랑장(北中郎將)220년 ~ ?
시중(侍中)230년
진위장군(振威將軍)재임 시기 불명
섬긴 군주

2. 사적

오질은 후한조조를 섬겼으며, 박학다식하여 조비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조비와 그의 동생 조식 사이의 후계자 경쟁에서 조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정이 처벌받는 사건에 연루되어 조가(朝歌長)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조비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후한 건안 22년(217년), 오질은 왕상 등과 함께 조비의 신임을 얻었다. 220년 조비가 문제로 즉위한 후, 자신의 오랜 친구인 오질을 북중랑장(北中郞將)에 임명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사지절(使持節)로서 유주병주의 군사를 감독하게 하는 등 중용하였다.

문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오질은 점차 교만해져 주변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행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위 황초 7년(226년), 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표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태화 4년(230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명제에게 진군을 참소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질은 그 해에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 처음에는 추후(醜侯)라는 부정적인 시호가 내려졌으나, 아들 오응(吳應)의 상소로 정원 연간(254년-256년)에 위후(威侯)로 변경되었다.

2. 1. 후한 말기 활동

조조를 섬겼으며, 박학다식하여 조비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의 총애를 받았다. 조비와 그의 동생 조식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할 때, 오질은 조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립하는 데 힘썼다.

214년, 조조가 출정을 떠나려 할 때, 조식은 아버지의 공덕을 칭송하는 연설로 주목받았다. 이에 당황한 조비에게 오질은 단지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라고 조언했다. 조비가 이를 따르자 많은 이들이 감동했고, 일부는 조식이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진정한 감정은 부족하다고 여기게 되었다.[9]

오질은 유정과 함께 조비의 빈객(賓客)이 되었으나, 유정이 불경죄로 처벌받자 오질 또한 조가현장(朝歌縣長)으로 좌천되었다가 이후 원성현령(元城縣令)으로 임명되었다.

오질이 조가현장으로 있을 때, 조식은 여전히 조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불안해진 조비는 오질을 몰래 만나기 위해 그를 수레 안 고리짝(바구니) 속에 숨어 들어오게 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조식을 지지하던 양수는 오질이 규정을 어기고 함부로 임지를 떠난 것을 알아채고 조조에게 고발했다. 조조는 즉시 조사하지 않았으나 조비는 크게 걱정했다. 오질은 조비를 안심시키고 다음번에는 고리짝 안에 비단을 넣어 보낼 것을 조언했다. 조비가 그의 말대로 하자 양수가 다시 이를 고발했다. 조조가 이번에는 의심하여 고리짝을 조사했으나 안에는 비단만 들어 있었다. 이 일로 조조는 오히려 양수가 조비를 모함하려 한다고 의심하게 되었다.[5][9]

후한 건안 22년(217년), 역병으로 건안칠자 등 많은 문인들이 사망하는 가운데 살아남은 오질은 왕상 등과 함께 조비의 총애를 받았다.[10] 조비가 태자(太子)로 책봉되자, 오질은 사마의, 진군, 주석과 함께 태자사우(太子四友) 중 한 명이 되었다.

2. 2. 위나라 건국 이후 활동

220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여 조위를 건국하자, 오랜 친구였던 오질이 장사(長史)라는 낮은 직위에 머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조비는 오질을 북중랑장(北中郞將)으로 임명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사지절(使持節)·독제군사(督幽幷諸軍事)의 권한을 주어 신도를 근거지로 삼게 했다. 이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승진하여 가절(假節)을 받고 하북 지역의 군사 감독을 맡았다.

문제는 오질을 총애하여 여러 차례 연회를 베푸는 등 특별히 대우했다. 그러나 오질은 이러한 총애를 등에 업고 점차 교만해져 다른 이들에게 오만하게 행동했다. 연회 자리에서 조진 등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북중랑장 시절에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능한 유주자사 최림하간군 태수로 좌천시키는 등[10]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위 황초 7년(226년), 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오질은 슬퍼하며 추모시를 지어 바쳤다.

태화 연간(227년-233년)에 오질은 낙양 조정으로 들어갔으나, 같은 고향 출신들에게 경시당한다고 느껴 분노하여 무례한 언사를 하다가 같은 군 출신인 동소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태화 4년(230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그는 명제에게 진군을 참소했고, 명제는 이를 듣고 진군을 문책했으나 다른 신하들은 오질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오질은 시중이 된 그 해 여름에 병으로 사망했다.[6]

사후 일부 신료들은 오질이 문제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부당하게 높은 지위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부정적인 의미의 시호추후(醜侯, 추한 제후)를 내릴 것을 건의했다. 명제는 처음에 이를 받아들였으나, 오질의 아들 오응(吳應)이 아비의 행적에 맞지 않는 부당한 시호라고 상소하며 반박했다. 결국 정원 연간(254년-256년)에 시호는 위후(威侯, 위엄 있는 제후)로 변경되었다.[6]

2. 3. 죽음과 평가

황초 7년(226년), 문제가 붕어하자 오질은 이를 매우 슬퍼하며 시를 지어 바쳤다.

문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오질은 점차 교만해져 주변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질별전』에 따르면 연회 자리에서 조진이나 주석과 같은 고위 관료들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기도 했으며, 북중랑장 시절에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능한 관리였던 유주자사 최림하간군 태수로 강등시키는 등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최림전에 기록되어 있다. 태화 연간에 입조했을 때는, 자신과 같은 지음군 출신들이 자신을 경시한다며 분노하여 무례한 말을 하다가 동소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태화 4년(230년), 시중에 임명되었다. 오질은 명제에게 진군을 참소하였고, 명제는 진군의 행동을 문제 삼아 문책하였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은 오히려 오질의 참소가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같은 해 여름, 오질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

한편, 오나라호종은 오질이 위나라 내부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거짓 항복 편지를 이용해 오질이 모반을 꾸미는 것처럼 조작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행될 무렵에는 오질이 이미 시중으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소환된 뒤였다.

오질이 죽자, 일부 관리들은 그가 조비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주장하며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시호인 추후(醜侯, '추악한 후작'이라는 뜻)를 내릴 것을 조예에게 건의했다. 조예는 처음에 이를 받아들였으나, 오질의 아들 오응(吳應)이 아버지의 명예에 맞지 않는다며 간곡히 상소를 올렸다. 결국 정원 연간에 시호는 위후(威侯)로 변경되었다.

3. 가계

오질

4. 일화

조조를 섬겼으며, 폭넓은 재능과 학식으로 조비를 비롯한 제후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조비와 조식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나자, 오질은 형제 사이를 중재하면서 조비의 옹립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 거짓 울음 계책: 217년경, 조조가 한중 공방전을 위해 떠나기 전, 조식은 조조를 배웅하며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아 총애를 얻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조비는 오질에게 조언을 구했다. 오질은 조비에게 아버지를 배웅할 때 울라고 조언했고, 조비는 이를 실행했다. 조비의 눈물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조식보다 감정을 더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9]

  • 바구니 잠입 사건: 오질은 조비와 너무 가까워 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비단 바구니에 숨어 조비의 거처에 몰래 드나들었다. 조식의 측근이었던 양수는 이 사실을 알고 조조에게 보고했다. 오질은 양수가 자신의 속임수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조비의 거처에 잠입하는 것을 멈추는 대신, 조비에게 빈 바구니 대신 비단을 채운 바구니를 들여오게 했다. 조조와 양수가 조사를 위해 왔을 때 바구니 안에는 비단만 들어 있었고, 이 일로 조조는 양수가 조비를 모함하려 한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오질은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오질은 조비의 총애를 믿고 다른 이들에게 오만하게 굴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 연회에서의 갈등: 224년, 조비는 오질에게 조진의 개선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도록 명했다. 연회 중에 오질은 배우들에게 뚱뚱한 조진과 마른 朱鑠|주삭중국어을 조롱하는 촌극을 시켰다. 이에 격분한 조진이 오질에게 크게 소리치자, 조홍과 왕충 등 다른 인물들까지 가세하여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조진이 칼을 뽑아 위협하자 오질 역시 칼을 뽑아 맞서며 조진을 모욕했다. 주삭이 나서서 말리려 했지만, 오질은 오히려 주삭에게 소리치며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결국 연회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주삭은 분노를 참으며 칼로 땅을 쳤다.[7]

  • 최림과의 갈등: 오질이 북중랑장으로 있을 때, 당시 유주자사였던 최림이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하간군 태수로 강등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는 오질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억누르려 했던 사례로 볼 수 있다.

  • 동소의 꾸짖음: 태화 연간에 입조했을 때, 오질은 자신과 같은 군 출신 사람들이 자신을 경시한다고 느껴 분노하며 무례한 말을 했다. 이 때문에 같은 군 출신이었던 동소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 진군 비방: 230년, 시중이 된 오질은 조예(명제)에게 진군을 비방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조예는 이를 듣고 진군을 문책했으나, 다른 신하들은 오히려 오질의 진언이 엉뚱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나라의 모반 조작 시도: 나라의 호종은 오질이 위나라 내에서 의심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짜 항복 편지를 이용해 오질의 모반을 조작하려 했다. 그러나 이 편지가 퍼지기 전에 오질은 이미 시중으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소환된 후였다.

참조

[1] 문서 Yang Huiyu's biography in Book of Jin
[2] 문서 Reply to the Cao Pi|Crown Prince of Wei
[3] 문서 The 4th year of the Taihe era of the reign of Cao Rui
[4] 문서 Sanguozhi
[5] 서적 Imperial Warlord –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6] 문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21
[7] 문서 Wu Zhi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1
[8] 문서 酉陽雜俎
[9] 문서 西晋郭颁世语
[10] 문서 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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