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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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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덕해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다.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인조반정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정묘호란 때 왕세자를 호위하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항쟁하려 했으나 강화가 이루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북벌론을 주장했다. 사간원 정언, 영해 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1641년에 59세로 사망하여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뇌봉집》이 있다.

2. 생애

1632년(인조 10년) 지평(持平)이 되어[3] 권신(權臣)을 탄핵하는 등 양사(兩司)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한 박동선(朴東善)·권도(權濤) 등이 처벌받자,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며 이들을 변호하다 왕의 미움을 샀다.

이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고, 강원도 경차관(江原道敬差官)·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역임하였다. 장령(掌令)으로 재직 시 인목대비 폐위 논의 참여자 처벌과 왕자(王子) 이늑(李玏)의 죄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확보했다.[4] 1637년(인조 15년) 항쟁을 계속하려 했으나, 강화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벌론을 주장했다.

1641년(인조 19년) 5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송시열이 묘비를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5]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606년(선조 39년) 24세 때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여[1] 태학(太學)에서 유학하였으나, 유생들이 인목대비 폐위(廢位)에 가담하는 것으로써 출세하려고 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명성이 나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저작(著作)으로 전직되었다.

인조반정1624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2]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호남(湖南)으로 배위(陪衛)하며 『분조일기(分朝日記)』 네 권을 편수하여 올렸다.

그 뒤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외직으로 나가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이 되어 폐단을 제거하니, 역졸(驛卒)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을 때 조정에서 문신(文臣)의 수령을 써야 한다고 의논하자,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어 백성을 교화하는 도리에 주력하여 따르는 고을 백성들이 많았다. 이후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가 예조 정랑(禮曹正郞),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전직되었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2. 2. 양사 활동과 소신

1632년(인조 10년) 지평(持平)이 되어[3] 권신(權臣)을 탄핵하는 등 양사(兩司)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권도(權濤) 등이 처벌받자,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며 이들을 변호하다 왕의 미움을 사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지난날 인목대비 폐위 논의에 참여한 자들은 인륜에 죄를 지었음에도 성상께서 너그러이 죽음을 면해주었지만, 지금 다시 유배 명단에서 삭제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왕자(王子) 이늑(李玏, 선조의 왕자)이 임금의 숙부임을 믿고 노복을 풀어 악행을 저질렀으니, 그의 죄를 다스리고 그 노복은 빨리 처형하여 조리돌려야 합니다.”라고 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였다.

2. 3. 호란과 의병 활동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었던 지덕해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간 왕을 호위하려다 체찰사(體察使) 종사관(從事官) 박서(朴遾)의 추천으로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이 되었다.[4] 그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는 데 힘썼다. 격문에는 "외로운 성이 포위되어 성상이 내린 교지가 애통하였으니,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치고 그 누가 북쪽으로 가 앞을 다투어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짧은 기간에 병사와 식량을 모집할 수 있었다.

1637년(인조 15년)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강화가 이루어져 왕세자가 인질이 되어 북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명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며 북벌론을 주장하였다.[4]

2. 4. 은거와 북벌론

1636년(인조 14년) 10월 8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4] 인조가 적병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갔다. 도중에 체찰사(體察使) 종사관(從事官) 박서(朴遾)를 만나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으로 임명되었다. 지덕해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냈는데, 그 격문에 "외로운 성이 포위되어 성상이 내린 교지가 애통하였으니,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치고 그 누가 북쪽으로 가 앞을 다투어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짧은 기간에 병사와 식량을 모집할 수 있었다. 1637년(인조 15년)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강화가 이루어져 왕세자가 인질이 되어 북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명사와 교유하고 북벌론을 주장하였다.[5]

1641년(인조 19년) 8월 13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나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어질고 깨끗한 절개를 기리고자 송시열이 묘비를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5]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지준(池浚)현감(縣監)
고조모파평 윤씨(坡平尹氏)윤필상(尹弼商)의 셋째 딸
증조부지영수(池永洙)시직
조부지난(池蘭)증 호조참의
지경청(池景淸)생원
외조부송수(宋璲)
은진 송씨(恩津宋氏)
지명해(池命海)
지수해(池壽海)
처부윤직방(尹直方)
부인파평 윤씨(坡平尹氏)
장남지여규(池汝虬)
차남지여귀(池汝龜)
장녀 사위김용석(金用錫)
차녀 사위이원배(李元培)
삼녀 사위민광섬(閔光暹)
사녀 사위권흥정(權興鼎)
성산 이씨(星山李氏)이구(李竘)의 딸


4. 저서

뇌봉집을 저술하였다. 3권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만력34년병오10월29일사마방목(萬曆三十四年丙午十月二十九日司馬榜目)
[2] 서적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3] 실록 인조실록(仁祖實錄)
[4] 실록 인조실록(仁祖實錄)
[5] 웹사이트 국조인물고 권28 명류(名流)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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